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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왜 ‘노마드 논쟁’이 뜨거운가? /선샤인뉴스20090925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3.

<선샤인뉴스> 2009-09-25, 2:25 오전

http://www.sunshinenews.co.kr/%ec%99%9c-%e2%80%98%eb%85%b8%eb%a7%88%eb%93%9c-%eb%85%bc%ec%9f%81%e2%80%99%ec%9d%b4-%eb%9c%a8%ea%b1%b0%ec%9a%b4%ea%b0%80/

 

 

왜 ‘노마드 논쟁’이 뜨거운가?

 

[선샤인 논술사전]

 

노마드(nomad)는 고정된 장소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해 다니면서 사는 유목민(遊牧民)을 말한다.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유목(nomadism)과 유목민(nomad)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만년 전에 정착된 문명은 머지않아 유목을 중심으로 재건될 것이다. 불안정하므로 모든 것을 휴대화하려 할 것이다.…시장은 모든 노력을 총동원해서 유목민을 만족시키고자 한다.…대략 세 종류의 유목민이 존재할 것이다. 우선 하이퍼 계급의 구성원인 부유한 유목민, 생존을 위해 평생 이동해야만 하는 가난한 유목민, 마지막으로는 한 곳에서 정착해서 칩거하는 대다수 가상 유목민이다. 가상 유목민은 언젠가는 부자 유목민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가난한 유목민으로 전락하면 어쩌나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간다.”

 

새로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인지 ‘유목민’보다는 ‘노마드’라는 말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노마드족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을 떠나는 ‘원조 노마드족’, 평생 직장을 거부하는 ‘잡 노마드족’, 치밀한 사전정보 수집으로 온․오프라인의 상점들을 찾아다니며 값싸고 질좋은 상품만을 낚아채는 ‘쇼핑 노마드족’ 등등.

겉치레 문화를 거부하고 경험을 존중하는 ‘노블레스(noblesse) 노마드족’도 있다. 이들은 명품, 골동품 등 물건을 소유하는 대신 여행, 레저, 공연 관람 등 무형의 경험을 수집하는 새로운 소비자층으로 비싼 물건으로 치장하기보다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을 재산으로 삼는 ‘귀족형 유목민’이다. 이들은 더 많이 보고, 느끼는 체험적인 삶을 통해 자기계발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이들은 취미활동을 통해 삶을 즐기다가 결혼이 행복을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 결혼을 결심한다.

 

경기침체와 취업난이 만든 슬픈 신조어도 있다. 이른바 ‘강의 노마드족’으로 불리는 취업 준비생들이다. 취업경쟁에서 자격증과 영어 점수 등이 중요해지자 전공 과목 외에 ‘실용형’ 강의를 들으러 이곳저곳 유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토익, 취업강좌, 경영학 강좌 등에 가보면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한다.

 

2005년 10월 24일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 황창규는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에서 열린 ‘세계경영자회의’에서 행한 ‘유비쿼터스 시대의 삼성의 영감’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삼성은 세계경제가 어려울 때 과감히 투자를 했다”며 이같은 투자방식을 ‘디지털 유목민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2007년 10월 11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동시에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해 문국현 캠프로 간 김영춘 의원은 당분간 정주지를 만들 때까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치적 노마드(유목민)’로 지내겠다고 말했다.

 

2006년 2월 천규석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에서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 부류의 유목주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 제국주의의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은 애써 외면하는” 세력을 비판했다. 그 세력은 밖으로는 유일 초대국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자본주의 문명, 안으로는 거기에 추수하는 노무현 정권, 그리고 ‘보상금 타먹고 체제 안에 들어간 옛 민주투사들’이다. “그들은 우리 생명의 주권이고 공동체 문화의 바탕인 쌀과 우리 농업도 전체국익(공산품 수출)을 위해서라면 버리고 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2006년 4월 국내의 노마디즘 대중화를 이끈 서울산업대 교수 박태호(이진경)는 “‘유목’하면 자꾸 ‘떠난다’는, ‘이동’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 엥뤼시는 ‘잡 노마드’에서 유럽을 떠도는 한 독일인 여선생의 삶을 노마디즘이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노마디즘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 독일인 여선생이 어느 순간 연구실에 파묻혀 책만 봐도, 전공을 넘나드는 연구 등 새로운 일을 벌인다면 그것도 노마디즘이다”고 말했다.

 

2006년 4월 철학자 이정우는 천규석의 유목주의 비판에 대해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고 했다.

 

2007년 12월~2008년 1월 『한겨레』에서 노마디즘 지상 논쟁이 펼쳐졌다. 먼저 동국대 철학과 교수 홍윤기는 “노마디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의 응답부터 말하자면, 아직 ‘어떻게’ 봐야 할 ‘그 어떤’ 노마디즘 같은 것은 우리 생활 안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말을 써서 모종의 효과를 유발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은 우리 주변에 넘친다. 그리고 이 효과들은 상호 충돌한다. (중략) 노마드나 노마디즘은 거기에 대한 찬반 의견을 말하기엔 그 자체의 ‘개념’과 ‘실행’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다.”고 했다.

 

이에 이진경은 “어떤 쓸모 있는 사유도 영향력을 얻게 되면, 그래서 심지어 ‘유행’의 물결을 타게 되면, 그것에 촉발되어 생성되는 ‘친구’들과 더불어, 거기에 편승하는 유사품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자본은 돈이 된다면 게바라나 혁명마저도 상품화해서 팔아먹지 않던가! 그러나 상품화되는 사태를 들어 게바라를 비난하고 혁명을 포기할 순 없는 일 아닐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상업적 물결 속에서도 애초의 문제의식을 더욱 멀리 밀고 나가는 것일 게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광고 카피로 삼고, 자크 아탈리 같은 이가 ‘인간이란 본래 노마드였다’면서 재빨리 책을 내는 사태도, 역으로 적절한 근거 없이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비난하는 사태도 내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태를 헤쳐나갈 수 없다면, 어떤 사상도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동이 자본의 중요한 특징이 된 지금 노마디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유목’과 ‘이동’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정착민도 이동을 하며, 유목민도 멈춘다. 차이는 정착민의 이동이 어떤 목적지(멈춤)에 종속되어 있다면, 유목민에게 멈춤이란 이동의 궤적 안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란 점에서 이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휴대폰, 노트북 컴퓨터 등을 갖고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고 자동차로 비행기로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자를 유목민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여행도 잘 다니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사유로 자신이 구축한 영토마저 떠나는 사상가는 유목민이란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더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주민’과 ‘유목민’ 또한 구별한다. 이주민이란 어느 영토에 이주하여 그 영토를 이용하며 살지만 그 영토가 불모가 되면 버리고 떠나는 자들이다. 반면 유목민은 불모가 된 땅(초원이나 사막, 혹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같은…)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정착민이란 성공에 안주하는 자라면 유목민은 성공을 버릴 줄 아는 자고, 이주민이란 실패를 쉽게 떠나는 자라면 유목민이란 실패와 대결하며 새로이 길을 찾아내는 자들이라고 이해한다.”

 

이에 인하대 철학과 교수 김진석은 “한 생태주의자는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라고 고발하고 나섰다. 고발의 목소리는 비록 거칠고 일방적이었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쓴소리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노마디즘을 이론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은 그 비판을 쉽게 무시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서, 이들이 ‘유목민’(nomad)·이주민·정착민을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했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이론적 권위를 앞세운 이런 주장이야말로 왜곡에 가까운 오독을 낳는다.…이진경씨는 개념적 구분에만 매달리면서 ‘노마디즘’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숙성한 사상이고 나쁜 자본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노마디즘이 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말한다.… 세상에 대해 말할 때는 순수한 개념이나 의미만이 아니라,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을 아는 게 중요하다.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으며, 나쁜 자본주의 국가의 착한 외부에만 존재한다는 말은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다. 그건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를 지적으로 배반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공허하기 십상이다. 이들은 노마드에 창조성을 부여했지만, 그것이 언제나 착한 정의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노마드의 폭력성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 폭력성이 인정된 노마드 이야기는 문명 분석의 좋은 도구일 수 있다. 강자가 먹이를 다 삼키는 폭력적 시스템만 쫓는 노마디즘은 위악적이지만, 모든 폭력에서 벗어난 공동체를 꿈꾸기만 하는 노마디즘도 위선적이지 않을까. 이 사이에서, 기우뚱, 균형을 잡자.”

 

이에 이진경은 “나는 ‘노마디즘을 모르고도 노마드로 사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많이 읽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처럼 누군가를, 그것도 저리 강하게 비판하려면, 비판하는 대상을,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읽거나 알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경우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의식이 있다고 해도, 쉽게 무시되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교수 말처럼 ‘유목주의적 기업’이나 ‘침략적 노마드’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치가 생태주의자였다는 게 생태주의를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 것처럼. ‘노마디즘에 침략적 성격이 있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나는 이렇게 쓰지 않았지만)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였음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려웠을까? 김 교수는 내가 노마디즘은 ‘더러운 현실과 무관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정말 믿고 있을까?…김 교수는 ‘착한 것’과 ‘폭력적인 것’, ‘선과 악’이 결코 단순하게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말한다. 맞다. 데리다 이후, 선과 악이 뒤섞이고 선과 악이 서로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건 일종의 철학적 상투구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좋은 노마드’를 ‘나쁜 노마드’ 와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철학적 순진성으로 비난받기 딱 좋은 처지를 자초하는 것이다. 확실히 노마디즘이 작동하는 세계를 그 초월적 외부에서 바라보면서, ‘거기서 선악은 구별 불가능해’라고 해체하는 철학자들이라면, 그것의 복합성이나 결정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적 삶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지, 아니 어떠한 삶의 방식을 구성할 것인지, 지금 이 길로 가는 게 옳은 것인지를 고심하고 판단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그럴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하려는 것이 쉽게 말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가리는 것이고,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포착하는 것이다. 유목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게 유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유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지, 애써 얻은 하나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다시 정착민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구별불가능하고 서로 기대어 있는 ‘좋음/나쁨’을 떠나 초월적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체해대는 데리다 같은 철학자보다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자, 다시 한 번!’ 하면서 지금 조건에서 어떤 게 좋은 것인지를 그때그때 판단하며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려 애쓰는 나의 친구들을 더 믿는다.”

 

끝으로 강원대 철학과 교수 이광래는 “철학적 유목민이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유목적 생활인이 된 지 오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유목을 체득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새롭지 않다. 새로운 리좀인 가상의 다리들(cyber-bridges)이 연결하는 동시편재적 융합현실에서 인터페이스를 만끽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데자뷔(기시감)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목민으로서의 한국인은 들뢰즈가 말하는 ‘탈코드화’나 ‘기관 없는 신체’, ‘국가장치’나 ‘전쟁기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노마드적 사고란 외부의 다양한 힘과 격투하는 사고’라고 정의한들 이미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게 무슨 의미일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듯이 ‘지금 여기에’ 가상현실로 열려 있는 우리의 유목현실도 들뢰즈의 노마디즘대로는 전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융합현실(융합사회체)에서는 이미 자본보다 정보가 들뢰즈가 말하는 ‘충실신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노마디즘이 우리를 더욱 데자뷔적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들뢰즈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어느 나라보다 유목적 삶에 익숙한 우리의 기술환경과 생활문화 때문일 것이다.”

 

2008년 8월 박민영은 “애초 들뢰즈와 가타리가 노마디즘을 주장한 것은 근대성의 대안으로서였다. 그들은 보다 열린 사회, 역동적인 사회, 창조성이 꽃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으로 노마디즘을 제시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적 사유가 근대성의 산물인 이분법 즉, 문명/야만․남성/여성․백인/유색인․서양/동양의 경계를 해체하고, 정착․위계질서․고정된 아이덴티티를 거부하고, 차이․다양성․생성․산호의존성 등의 가치를 고양시킨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목적 사유의 탈중심화, 탈영토화, 탈서열화이다. 이러한 근대성 비판은 매우 건강한 측면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리는 묘한 결과를 낳았다. 근대성 비판이 가진 건강한 측면은 진보주의자․주변부 주식인들에 의해 지지되고, 욕망의 해방성․창조성․생산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본가․신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다. (중략)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한 노마디즘의 의도는 유효하지만, 현실적으로 노마디즘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한 광범위한 ‘이동’에 의해 지지되는 한, 그것은 사회적 비판의식을 상쇄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노마디즘은 반주변부 내지 주변부 지식인이 현대사회의 주류적 현상을 ‘제 논에 물대는’ 식으로 해석하게 하는 모호한 이데올로기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배적인 가치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전쟁기계’를 언급하지만, 노마디즘의 설득력이 현실적인 거대한 ‘이동’ 현상에 기반하는 한, 세계화와 정보화가 낳는 지배적인 가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자크 아탈리, 『21세기 사전: 자크 아탈리의 미래 읽기』(중앙M&B, 1999), 230-231쪽.
유지혜, <노마드족도 가지가지>, 『서울신문』, 2005년 4월 27일, 25면; 유지혜․이재훈, <“우리는 21세기 노마드”>, 『서울신문』, 2005년 4월 27일, 25면.
김창우, <“어려울 때 과감한 투자 디지털 유목민 정신이 삼성전자의 경영 비결”>, 『중앙일보』, 2005년 10월 26일, E4면.
최성진, <김영춘 ‘너머’엔 무엇이 있나>, 『한겨레 21』, 2007년 10월 18일자.
한승동, <‘유목’ 떠받들기는 신자유주의 합리화용!(서평)>, 『한겨레』, 2006년 2월 24일, 책․지성섹션 10면
조태성, <노마디즘이 침략주의라는 비판 있는데…No! 참뜻은 기존틀 벗는 것>, 『서울신문』, 2006년 4월 6일, 22면.
이정우,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 유목주의는 어떻게 왜곡되는가>, 『교수신문 비평』, 2006년 4월 3일, 2면.
홍윤기, <실체 없는 ‘유목주의’ 이미지만 떠돈다: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2007년 12월 29일자.
이진경, <다른 삶을 위한 ‘차이 철학’이자 ‘혁명 정치학’: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2008년 1월 5일자.
김진석, <‘착한’ 노마드? 현실엔 ‘나쁜’ 노마드도 있다: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2008년 1월 12일자.
이진경, <‘나쁜 노마드’ 구별해야 ‘진정한 노마드’ 찾아: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2008년 1월 19일자.
이광래, <우리는 이미 실제-가상 오가는 ‘유목적 생활인’: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2008년 1월 26일자.
박민영, <노마디즘, 사회적 비판의식을 무력화하는 이데올로기>, 『인물과 사상』, 2008년 9월, 102-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