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33호(201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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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과 커뮤니티의 주체1)
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 조정환 옮김
현대 국가의 이러한 필요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제 우리의 이론적 주장의 노선과 자유주의적 이론의 영역으로 되돌아가서 그것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해보도록 하자. 1980년대 동안 국가에 부과된 실제적 압력을 살펴본 후인 지금, 우리는 롤스와 그의 비평가들의 저작 속에서 하나의 이론적 프로젝트로서의 강한 사회적 주체의 출현을 추적해 보고 싶다. 탈근대적 법 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사법적 체계의 발전과정 전체에서 우리는 롤스의 주장에 들어 있는 긴장의 평면화와 그의 정의(正義)의 이론의 도구화를 알 수 있었다. 어떤 측면에서, 이 해석은 자유의 원리로부터 사회적 내용을 박탈했고, 평등의 원리를 무관심의 원리로 번역했으며 이 원리들의 기초 위에, 사회적 깊이와 운동을 부정함과 동시에 질서를 보증하는 하나의 형식적인 절차적 틀을 정초했다. 탈근대적 법의 이 특수한 발전은 분명히 롤스의 전망의 전체적 경향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롤스는 『정의의 이론』에서 줄곧 평등, 우애, 그리고 공동선에 대한 호소를 통해 사회적 존재에 현실적 결정과 내용을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향의 정점은, 아마, 차이의 원리를 사회적 평등의 발전을 위한 메커니즘으로 제안한 것일 것이다. 롤스는, 차이(difference)의 원리는 우애를 향한 우리의 욕구를 표현하는 정의(正義)의 원리이며 또 현실적 결정들을 가지고서 인간적 커뮤니티를 가장 명확히 정초하고 사회적 존재를 구성하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향한 롤스의 열정을 가장 명확히 본다: “더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사람들이, 사회의 가장 불리한 구성원들의 기대를 증진시키는 기획의 일부로서 움직일 때에만, 그리고 오직 그럴 때에만 그들의 더 높은 기대는 공정할 수 있다”(p.75) 혹자는, 롤스가 말하는 차이의 원리가 칸트의 『도덕의 형이상학(Metaphisics of Morals)』 보다는 예수의 산상설교에 더 가깝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차이의 원리는 정의(正義)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사회적 현실 속에, 즉 가장 불리한 사람들의 입장 속에 정초시킨다. 사실상, 최소 극대화(maximin; 어떤 한 조의 극소치 중의 최대치 혹은 게임이론에서 최소의 득점을 최대로 하는 수법-역자) 기준―우리는 이 기준에 따라, 가장 낮은 사회적 위치의 사람들이 각각의 상대적 배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기초를 둔 여러 대안적인 사회적 배치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곤 한다―은, 비록 그것이 합리적 행위자의 계산에 기초하여 주장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기독교적 맛을 갖고 있다. (A Theory of Justice, pp.153 이하 그리고 “Some Reasons for the Maximin Criterion”을 보라.) 함축적인 것이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의 헌법을 선택하여, 부유한 사람들에게 때로는 이익이 되나 때로는 불이익이 되는 정책들을 세우면서, 가장 덜 부유한 사람들의 상황을 증신시키려는 일차적 의도를 가지고 계속해서 정책적 결정들을 내린다면,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향한 경향을 가동시키는 것이며 그리하여 통합되고 강력한 사회적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롤스는 사회적 평등을 향한 경향을 하나의 원리로 제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제도적 배치 속에 확립하기 위해 애쓴다. 차이 원리는 무엇보다도 “기회의 공정한 평등”에 귀속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절된 시장이라는 이념은, 자유로운 시장이 장점이나 재능의 불평등 위에 정초되어 있는 것과 똑같이, 평등한 기회의 관념에 기초한다. 평등한 기회는, 기존의 어떤 체계적인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사회적 상호작용들에 대한 적극적인 제도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롤스는, “학교 체제는, 그것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계급 장벽들을 평평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A Theory of Justice, p.73)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조절된 시장 경쟁의 제도 내에서, 차이의 원리는 현저한 불평등들을―그것들이 “자연의 제비뽑기”의 결과이든 특정의 사회적 배치의 결과이든, 즉 그것들이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인”(p.73) 일체의 불평등인 한에서―시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사실상,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이 아닌 불평등들이란 오직 가장 불리한 입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불평등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正義)의 두 번째 원리의 최종적 수정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들은, (a)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b)기회의 공정한 평등의 조건 이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자리들에 귀속되는 방향으로 배치될 수 있다”(p.83). 롤스는, 개혁주의적 국가의 사회적 제도들과 기구들이 사회를 보다 큰 평등의 방향으로 이끌고, 그것을 우애 속에서 통합하는 데에서 중심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다. 이처럼 차이의 원리는, 이론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이론적 논점들과 주창(主唱)의 지지의 논점들 사이의 격차를 메꾸는 데 복무한다.
차이 원리의 이러한 제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롤스의 정의(正義)의 이론에 대한 탈근대적 해석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하여, 롤스는 우연성(contingency)의 자유를 찬양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개혁주의적인 사회적 역학을 통해 임의성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려 애쓴다. 여기서 롤스는, 우애의 개념을 통해 (그리고 우애의 개념 속에는 공동선의 관념이 함축되어 있어야만 한다), 일정한 깊이와 권능을 가진 집단적인 사회적 주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의적 차이의 제거는 필연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구성으로, 정의(正義)의 당위(Sollen) 내부에 내재하는 사회적 존재로 이끈다.
그렇지만 일단 이 민주주의적인 사회적 경향이 제시되고 나면 롤스는 자신의 이론 속에서 그것을 주변화할 것을 주장한다. 이미 『정의의 이론』에서, 실제로, 차이 원리는 두 번 종속된다: 첫 번째로는 자유의 우선성에(p.250) 그리고 두 번째로는 권리 혹은 공정한 기회의 우선성에(pp.392~393). 이 각각의 경우에 차이 원리의 실질적 권능은 침식되며, 그 결과 비록 그 원리가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것의 적용은 더욱더 어렵게 된다.2) 롤스의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비록 차이 원리와 그에 상응하는 “최소 극대화 기준”이 정의(正義)의 이론에 관한 토론의 중요 항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최근년에 들어 그 체계의 이러한 측면은 롤스 자신의 저술들과 그에 대한 비평가들의 저작 속에서 점차 주변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회적 개혁가의 민주주의적 정신과 더불어 텍스트 속에 나타났던 차이의 원리는 점차 침식되었고, 그리하여 그것이 약속하는 것으로 보였던 사회적 평등을 향한 실질적 경향은 그 체계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다.
비록 그것[차이의 원리-역자]이 출현하여 결국 롤스의 자유주의적 정의의 이론의 사산(死産)의 자손으로 되고 말았고 할지라도, 그 원리 및 그 원리가 포함하는 우애적 커뮤니티를 향한 열망은 롤스에 대한 커뮤니테어리언적 비평가들의 명백한 출발점을 제공한다.3) 실제로 롤스는 우리를 초대하여, 자신의 사상 속에서 이 경향을 부활시키며 그것을 완성시킨다. 사회적 존재에 대한 자유주의적 생각을 살찌우고, 우애, 시민적 덕, 공동선 등의 이념들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강한 주체를 제안하면서 말이다. 롤스의 프로젝트에 대한 아마도 가장 철저하고 또 광범하게 토론된 커뮤니테어리언적 비판은 마이클 샌들(Michael Sandel)의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일 것이다.4) 우리가 보기에, 샌들의 프로젝트의 뛰어남은, 지난 25년간에 있어서 정치이론에 대한 가장 실질적이고 영향력 있는 영미의 기여들 중의 두 가지―『정의의 이론』(1971)과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헤겔』(Hegel, 1975)―를 대면시킴으로써 이 논쟁을 명확한 초점 속으로 가져온 것이 다. 물론 샌들의 연구의 명시적인 대상은 롤스의 저작이지만 테일러 역시―비록 거의 언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그에 못지않게 전체 논의를 위한 견고한 비판적 입각점으로서 나타난다. 사실상 샌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철학사 속으로 다시 던져지는 인상을 받는다: 테일러의 관점에서의 롤스 독해는 헤겔의 유명한 칸트 독해의 반복처럼 전개된다. 어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만약 현금의 자유주의자들이 칸트를 재발견하는 데로 이끌렸다면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가들은 헤겔을 재발견하도록 강제되었다”(Steven Smith, Hegel’s Critique of Liberalism, p.4). 샌들의 헤겔주의적 관점은 비판을 위한 토양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일련의 신비한(hidden) 결론들을 수반한다. 바꾸어 말해, 샌들은 테일러의 술어들을 채택하여 그 분석의 틀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게 되듯이, 헤겔주의적 관점을 전제함에 있어 자신의 주장에 뒤따르는 이율배반들이 필연적으로 이미 사전에 결정된 해결책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문맥을 만들어 낸다: 그 해결책이란 보편적 커뮤니티라는 형식 속에서의 헤겔주의적 종합이다. 이렇게 자유주의의 약한 주체는 주체로서의 국가에 대한 강한 개념규정 속에서 살이 찐다.
샌들이 롤스에게 제기한 핵심적 질문은 자유주의의 탈존재론적 주체의 성격과 역량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일차로 롤스의 담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주체 혹은 자아의 이론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도덕성의 과제들에 대한 그 이론의 적합성을 평가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롤스의 주장들을 새로운 빛 속에 던져 넣으며 정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론이 갑자기 연약하고 위험한 것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자유주의적 주체의 허약한 상태는 샌들의 연구의 주요 관심사이자 주요 동기이다: “자아는 그 주장의 여러 지점들에서 급진적으로 해체된 주체로 용해되거나 혹은 급진적으로 정위(定位)된 주체로 붕괴될 위험에 처한다”(p.138). 우리가 롤스적 주체에 대한 이러한 성격묘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샌들이 이 비판을 제기한 관점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 잠깐 동안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샌들은 주체에 대한 근대적 이론을, 쌍둥이 위험들에 의해 위협당하는 믿을 수 없는 장(場)으로 생각한다: 도덕 철학은 스킬라(카리브디스와 마주 대하는 이탈리아 해안의 위험한 바위-역자)와 카리브디스(시실리섬 앞바다의 큰 소용돌이-역자) 사이를 통과해 가는 일종의 여정으로 제시된다. 한편에서 주체의 이론은 자아를 주로 지적인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잘못을 범할 수 있다(“급진적으로 해체된” 그리고 급진적으로 자유로운 주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지나치게 물질적인 관점을 가지고 길을 떠날 수 있다(“급진적으로 정위된”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주체). 그렇지만 도덕 이론의 이 중심적 딜레마-―자아에 대한 대립하는 개념들―가 샌들의 연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결코 완전히 발전되지 못한다.
실제로, 이러한 주체 이론의 일관된 발전을 위해서, 우리는 찰스 테일러의 저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헤겔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테일러는 그 문제틀을 매우 웅장하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제기한다: (1)주체의 이론은 근대 사유의 근본적 영역이다; (2)근대 철학과 근대 문명 자체를 특징짓는 사유와 감수성의 주요한 두 개의 대립하는 경향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3)헤겔은 자신의 육화된 정신으로서의 주체 이론에서 이 두 가지 경향의 종합을 제시한다.5) 첫 번째 경향은, 테일러가 헤르더(Herder)에게서 가장 일관되게 표현되는 것으로 보는데, 우주적인 표현적 통일성이라는 낭만적 이념 속에 집중된다: “표현주의적 시각의 중심적 열망들 중의 하나는, 인간이 자연과의 친교 속에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 그의 자아감정(self-feeling)이 모든 생명에 대한, 그리고 살아있는 것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공감과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Hegel, p.25). 인간은 객관적 세계에 대립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인 우주적 주체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근대 사유의 또 다른 경향은, 칸트에게서 가장 완전한 정식화를 발견하는데, 인간의 도덕적 자유에 대한 계몽 개념에 초점을 맞추며 이로부터 지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를 제의한다. “단순히 합리적인 의지의 자격으로 나에게 묶여 있으면서 순수히 형식적인 법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 속에서, 나는, 말하자면, 모든 자연적 고려와 동기들로부터의, 그리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자연적 인과관계들로부터의 나의 독립을 선언한다”(Hegel, p.31). 인간적 자유에 대한 급진적 개념규정은 인간들을 스스로-결정하는(self- determining) 존재로 제시한다. 그들이 물질적 존재인 한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합리적, 도덕적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 지적 존재인 한에서는 말이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 두 경향들, 주체에 대한 이 두 개념들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근대 사유와 문명의 결정적 변수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헤겔의 철학은 핵심적으로 중요하며 “항구적인 관심사”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더 잘, “칸트적 주체의 합리적이고 자기-입법적인 자유를, 인간 내부에서의 표현적 통일성과, 그리고 시대가 갈망했던 자연과” 결합시키고 있는 대립들을 극복해 냈기 때문이다(Hegel, p.539). 이제 테일러의 저작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주체의 이론의 중심성에 대한 그의 초점맞춤이다. 근대 사유의 역사를 두 개의 부분적 주체들 사이의 포괄적 모순으로서 읽은 그의 전략은 “급진적 자유와 통합적 표현 사이의 통일” 속에서의 헤겔적 지양을 위한 지반을 마련하거나 혹은 그 필요성을 창출한다(Hegel, p.43). 이 출발점을 고려해 보면, 어떤 다른 해결책도 단지 부분적일 뿐이다.
우리의 연구에서 중요한 사실은, 롤스를 독해함에 있어 샌들이 헤겔적 관점뿐만 아니라 헤겔에 대한 테일러의 해석에 특유한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그는 테일러의 술어학을 채용할 뿐만 아니라 근대 사유의 중심 문제를 합리적 사유의 자유에 의해 정의된 주체와 물질적 현실의 결정 속에 근거한 주체 사이의 모순으로 독해하는 그의 전략까지도 채용한다. 이러한 작업틀을 고려할 때 사람들은, 샌들이 롤스의 자유주의적 프로젝트의 칸트적 이상주의를 비판하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샌들은 보다 교묘하다. 그래서 그는 롤스가 몇 가지의 매우 중요한 측면들에서 칸트적인 도덕적 틀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롤스는 칸트의 탈존재론적 가르침을 보존하는 것을 자신의 프로젝트로 삼는다. 이를 위해 그는, 임의성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상처를 덜 입으며 영미(英美)적인 기질에 더 알맞은, 자국화된(domesticated) 형이상학을 가지고서 독일적인 모호성들을 대체한다”(pp.13~14). 샌들에 의하면, 롤스는 초험적 기반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이성적 경험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칸트적 도덕성을 개혁한다. 샌들의 논쟁적인 전략은, 그러므로, 단순히 롤스의 칸트주의에 대한 헤겔적 비판을 취하는 것일 수 없었고 오히려 보다 미묘한 색채를 띠어야만 했다. 롤스가 이상적 도덕 이론의 발전과정 속에서 칸트를 따르는 한, 샌들은 “육체에서 분리된 주체”의 “급진적 자유”의 비판을 채택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롤스가 경험적이고 절차적인 사회적 체제를 위해 칸트적인 초험적 기반을 거부하는 한 샌들은 “급진적으로 정위된” 혹은 결정된 주체의 비판을 채택할 것이다.
샌들의 분석은 롤스의 주장들의 근저에 깔려 있는 “소유의 주체”, 즉 근대의 도덕이론의 쌍둥이 위험들을 피하려 하는 주체의 재건으로 돌아온다.6) 실제로 샌들은 롤스적 주체를 두 가지 근대적 주체들의 약한 결합으로 제시하며 이로써 강한 헤겔적 종합을 위한 지반을 마련한다. 샌들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주체의 복잡성은 자아와 그것의 목표들 사이의 관계 속에, 권리와 선 사이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원초적 입장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표로부터 분리되었거나 혹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그리하여 칸트적 방식 속에서 정의(正義)의 합리적인 도덕적 선택을 행할 수 있는 주체와 마주친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적 주체는 단순히 본체적(noumenal) 자아 혹은 무제약적 자아가 아니며 또 현대 사회의 보편적 지식에 의해 정의되는 보편적 주체도 아니다. 무지의 베일이 걷어 올려질 때 우리는 재산, 특성들(attributes), 그리고 이해관계들을 가진 경험적 자아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롤스적 자아는, 샌들에 따르면, 특성들을 지니지만 그것들에 의해 구성되거나 결정되지는 않는다: “자아의 소유적 측면이란, 내가 나의 특성들에 의해 결코 완전히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내가 그것인(am) 어떤 특성들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have) 몇몇 특성들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p.20). 샌들은, 롤스가 칸트의 본체적 기반의 빈곤함을, 그리고 테일러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헤겔적 해결책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는 이유에서 그를 신뢰한다. “롤스가 보기에, 자아와 목적들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우리에게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의 것을 말해 주어야만 한다: 자아가 자신의 목표들로부터 어떻게 구별되는가 그리고 또 자아가 자신의 목표들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첫 번째 것이 없다면 우리는 급진적으로 정위된 주체를 갖게 된다; 두 번째 것이 없다면 우리는 급진적으로 해체된 주체를 갖게 된다”(p.54). 샌들에 따르면 소유의 주체는, 그 자아에게 상대적 자율성이 주어져 있고 그 자아가 자신의 목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하나의 해답을 제공한다: 즉 그 주체는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결정되어지는 것일 것이다.
샌들이 『정의의 이론』을 헤겔적 프로젝트로 제시하는 데에 일단 성공했다면, 그의 비판은, 큰 장애들 없이, 쉽게 전개될 수 있다. 왜냐하면 롤스의 설명들은 헤겔적 기준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는 결코 나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롤스는 이 빛 속에서 언제나 헤겔주의의 약한 수정판으로 나타날 것이다.7) 예를 들어, 샌들은 처음에는 소유의 주체를 상벌의 개념과 관련하여 문제화했었다. 개혁주의적인 사회적 제도들은 재화의 분배를 평등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차이 원리에 의해 암시된 바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상벌의 관념의 정당화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롤스의 개념 위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어떤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최소한, 상벌의 관념에 필요한 소유의 강한 구성적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정확하게 어떤 것을 소유한다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pp.85~86). “소유의 주체” 속에서 달성된 자율성과 육화의 조합은 종합이 되기에는 너무 약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롤스적 주체가 자신의 자율성을 역설할 때, 그것은 사실상 자신의 특성들 및 목적들에 관한 일체의 주장을 해체한다.
이러한 술어들로 제기된 문제들과 더불어 샌들은 자유주의적 주체를 확립된 기준들에 더 적합하게 만들 두 가지의 수정을 인식한다. 첫째로, 그 주체는 집단적 차원을, 공동의 자산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 상벌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관념을 지지할 수 있는 공동사회적(communal) 정체성을 발견해야만 한다(p.103). 둘째로, 그리고 아마도 더욱 중요하게는, 그 주체의 목적들과 특성들은 주체 그 자체 내부에 내면화되어야 하고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 주체를 구성하고 있어야만 한다. 비록 롤스가 주체에 대한 이러한 특징부여에 명시적으로 반대할지라도, 샌들은, 이것이 롤스 자신의 프로젝트를 이해하고 또 완성하는 가장 일관된 방식이라고 장황하게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를 들어, 무지의 베일 뒤에 어떻게 복수의 인격들이 아니라―선택이나 교섭을 통해서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한 인식과 동의에 의해 계약을 맺는―유일한 주체가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원초적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은 결코 계약이 아니며 상호주관적인 존재의 자기의식(self-awareness)에의 접근이다”(p.132). 여기에서 우리는, 『정의의 이론』이 실질적으로 자기인식(self-recognition)을 목표로 하는 헤겔적 현상학의 프로젝트라는 것을, 그러나 단지 [그것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커뮤니티에 대한 강하고 “제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샌들은 주체의 종합을 보다 실질적인 방식으로 제기하게 된다. 특성들 혹은 질들의 소유는 존재론적 관념이 된다.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커뮤니티는 그들이 동료 시민으로서 소유하고 있는(have) 바로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are)를, 그들이 (자유의지적 연합 속에서처럼) 선택한 관계가 아니라 그들이 발견하는 귀속(attatchment)을, 단순히 어떤 특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의 구성요소를 서술한다”(p.150).8) 커뮤니티의 헌법, 그리고 정의의 원리의 선택(혹은 수용)은 “깊은 반성”과 자기인식의 변증법에 의해 정의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미한 수행자(agency)는 자유의지적이지 않고 인식적[이다]; 자아는, (자기-)이해의 대상에 대해 아는 (혹은 탐구하는) 주체로서,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성에 의해 자신의 목적들을 달성한다”(p.152). 샌 들은 롤스의 칸트주의를 청년 헤겔의 정치적 시각의 방향으로, 『정신현상학』의 문턱을 향해 발전시킨다. 그는 공동선과 우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의의 이론 속에서 조산적(早産的) 경향을 낳는 추력(推力)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보다 견고한 기반과 더 강한 구조를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성격”과 “우정”(p.180)은 커뮤니티를 하나의 강한 사회적 주체로 구성할 것이다.
1) 이 글은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공저, 『 디오니소스의 노동』(조정환 옮김, 갈무리, 1997) 6장 「탈근대적 법과 시민사회의 소멸」의 일부(114~126)이다.
2) 차이 원리의 가능한 실행들의 소수의 사례들을 간단히 주목해 보기만 해도, 지지의 술어로 제기되었을 때 그것이 실질적으로 비효율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이클 샌들(Michael Sandel) 은 차이 원리를 긍정적-행동 정책들의 맥락 속에서 평가해서, 그것이 평등에 대한 이론적 시각을 제공할 때조차도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한 제도적 메커니즘의 부적합한 실천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차이 원리는 사회적 자산의 공동 소유의 개념을 불러 내오지만, 그것은 커뮤니티에 대한 어떠한 개념에도 뿌리박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사회적 공과(功過)의 실천적 정책 결정들에 대한 논쟁에서 실천적 무게를 실어 나르지 못한다(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pp.135~147 그리고 보다 개괄적으로는 제2장). 더욱 더 의미심장한 것은, 아마도, 롤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사례가, 그것의 이론적 창백함에 빛을 비추어 주는 케인즈의 사상 속에서 차이 원리를 전략적으로 발동시키는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자본의 신속한 증강과 만인의 보편적 생활수준에 있어서의 다소간의 안정된 개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부의 분배의 불평등이었다. 케인즈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한 정당화를 제공해 준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 여기에서 핵심적인 요점은, 케인즈의 정당화가, 그것의 전제가 건전하건 아니건 간에, 다만 노동자계급의 상황의 향상에 대해 공격할 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A Theory of Justice, p.299). 우선성에 대한 일련의 논의들이 정의의 체제에 있어서 사회적 평등의 문제를 무시해 온 이래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보편화된 체제가 정당화되고 합리화된다. 그리고 상처에 모욕까지 더해서, 그것은 최소혜택층의 이름으로 지지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련의 종속 관계들을 통해 롤스가 그 체제의 긴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경향을 단순한 껍데기로 변형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커뮤니테어리어니즘(communitarianism) 은 너무나 다양한 현상이라서 하나의 운동 혹은 하나의 학파로 부를 수는 없지만, 그것은, 롤스와 자유주의적 사회 이론의 특수한 수정판에 대한 비판으로 위치지워질 때에는 일정한 정합성을 내포한다. 권리의 형식주의적 개념화, 도덕의 개인주의적 기초,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약한 사회적 주체성 등과는 대조적으로, 커뮤니테어리언적 관심사들은 하나의 강력하고 견고한 이론적 입장으로서 분명히 두드러진다. 만약 롤스가 글을 썼던 시점인,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이었다면, 도덕 이론 내에서의 논쟁은 복지 국가 자유주의와 보수적인 자유의지론(libertarianism) 사이의 논쟁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초점이, 자유주의적 권리 이론들과 덕 및 공동선에 대한 커뮤니테어리언적 관점들 사이의 논쟁으로 급속하게 이동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커뮤니테어리언들이 반자유주의적인 사람들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커뮤니테어리언적 입장은 자신을 하나의 비판으로서 제시하는 바, 그것은 커뮤니테어리언적 입장이 자유주의를 논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마치 칸트에 대한 헤겔주의적 비판이 관념론 체계를 완성했던 것과 똑같이, 자유주의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이다.
4) 우리는 마이클 샌들, 차알즈 테일러, 그리고 특히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커뮤니테어리니즘의 헤겔주의적 수정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 까닭은, 이 노선이 대표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토록 다양한 학자 집단들 속에서 어떤 입장을 대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롤스와 자유주의 이론에 대한 가장 일관되고 충분히 명료한 도전이라고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커뮤니테어리언들의 장(場) 을 그들의 철학적 유산에 따라 설명하려고 한 많은 시도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테일러가 고무시킨 헤겔주의적 학파,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ㅤㅋㅞㄴ틴 스키너가 이끄는 시민적 공화주의 노선. 이것이 편리한 속기이기는 하지만, 자칫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그 경계들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매킨타이어는 그 자신 뛰어난 한 사람의 헤겔 학자로서, 『덕 이후: 도덕 이론에 대한 한 연구(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에서의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독해는 분명 헤겔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다. 테일러는, 그 나름대로, 종종 시민적 공화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이다. (예컨대, “Cross-Purposes: The Liberal-Communitarian Debate”, pp.165 이하를 참조하라.) 그래서 우리는 커뮤니테어리어니즘의 헤겔주의적 수정판에 대한 우리의 독해가, 설령 그것이 대표적이라고 주장될 수 없다 할지라도, 최소한 커뮤니테어리언적 사상의 다른 노선들을 명백히 밝혀주기를 바란다. 종종 커뮤니테어리언들로 인용되고 있는 또 다른 학자들로는, 그들이 그러한 딱지를 반드시 그들 스스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로베르토 운거(Roberto Unger),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 윌리엄 설리반(William Sullivan), 그리고 마이클 ㅤㅂㅘㄹ쩌(Michael Walzer) 등이 있다. 그 문헌에 대한, 우리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비판적 논평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Chantal Mouffe, “Le libéralisme américain et ses critiques”; Amy Gutmann, “Communitarian Critics of Liberalism”; Michael Walzer, “The Communitarian Critique of Liberalism”; Michael Sandel, Liberalism and its Critics에 붙이는 서문; Charles Taylor, “Cross-Purposes”, 그리고 Nancy Rosenblum, Liberalism and the Moral Life에 붙이는 서문.
5) 테일러는 자신의 『자아의 원천들: 근대적 정체성의 형성(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Modern Identity)』 에서 이러한 문제틀을 적잖이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훨씬 광범한 역사적 시기를 고찰하고, 더욱더 많은 저자들을 다루며, 자신이 제안한 역사적 추세에 상당한 뉘앙스를 부여한다. 특히, 헤겔은 근대적 지평에서 더 이상 지배적 인물로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의 논의는 표현적 통일성의 주체와 근대성의 중심적 기획으로서의 해방된(disengaged) 이성의 주체 사이의 종합에 여전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6) 이러한 특징화가 롤스의 생각과 부합하는지 여부는 분명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소유 주체에 대한 샌들의 독해는 Thomas Pogge, Realizing Rawls, 제2장에서 자세히 비판되고 있다.
7) 쿠카타스와 펫팃 역시 롤스의 저작 속에서 들어 있는 헤겔주의적 경향에 대해 강조하는데, 그들은 그것의 전형적으로 보수적인 측면들에 주목한다. “롤스의 철학의 헤겔주의적 성격은, 그의 기획을, 자신의 사회를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이상의 이미지 속에서 재설계하려는 시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공공적 정치문화의 (이성적) 제도들 속에 잠재해 있는 원리들을 도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적 미국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보는 것 속에 놓여 있다”(Rawls, p.145).
8) 차알스 테일러는, 롤스주의적 도덕성이 존재론에 대한 주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이러한 비판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것을 도덕 철학 일반의 현대적 장(場)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이 도덕 철학은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선한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 왔다”(Sources of the Self, p.3; 또한 pp.88~89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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