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의 도서관>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daum.net/anapunk/9627608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게르트 헤프너(Gerd Haeffner)
- 내 용 -
1. 들어가는 말
2. 하이데거와 정치
3. 하이데거와 종교
4.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1. 들어가는 말
1889년 9월 26일, 즉 100년 전에 마르틴 하이데거는 탄생하였다. 1976년 5월 그는 명을 달리 하였다. 탄생 백주년 기념일이 그의 작품을 되돌아보고 거기에 대해 평해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하이데거가 죽은 지도 이제 13년이 지났다. 지난 13년은 전집의 출간으로 인해 그의 저술적 현존이 오히려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십수년보다 더 두터웠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아도 조용히 떨어져서 살며 공적인 토론에 관여하지를 않았기에 그의 죽음은 철학적인 영역의 사건보다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의 사건이었다. 그의 작품은 일부분만이 - 비록 많은 부분이긴 하지만 - 출간되었다. 그 작품의 수용은 아직 많은 물음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세계관적인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도리어 그 대립이 전보다 더 첨예화된 듯 싶기까지 하다.
벌써 그의 작품의 의의를 평가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를 단적으로 철학의 고전작가들의 대열에 낄 수 있는가? 아니면 혹자가 표현하듯이 그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요란스러운 떨그럭거림임이 입증되었을 뿐인가?
이렇듯 그 논란은 한 철학에 대한 총체적인 판단의 문제가 된다. 그의 철학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그 철학의 미로를 노력하여 헤매 보지도 않고 몇 마디의 쉬운 말로써 요약해버릴 수 있을까? 달리 표현해, 철학에 사유하면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거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징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결과들은" 단순히 이야기해서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로 인도한 그 길을 가 보아야 한다. 그외에도 만일 우리가 그토록 쉽게, 무엇이 남게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갈라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참된 것과 가치있는 것의 척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척도를 내용적으로 그때마다 새롭게 규정할 뿐 아니라 그 형식적인 의미에 있어서까지 물음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곧 철학적 정신의 특징이 아닌가? 즉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무시간적으로 존립하는 것인가 아니면 역사에서부터 표현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이런 식의 정보제공은 좋은 의미로 관심을 가졌던 비전문인을 불쾌하게 만들어 버릴 소지를 다분히 갖고 있다. 그런 식의 대답은 분명 철학자를 그의 행위의 의미에 대한 절박한 물음으로부터 보호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 의미를 확신시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코 철학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은 몹시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철학에서부터 다시 통상의 인간적인 더불어 있음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숙명적인 경향을 철학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많이 관찰할 수 있긴 해도, 특히 그러한 경향을 우리는 하이데거와 그를 대단한 인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이 글의 필자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록자나 관찰자의 한 계단 높은 자리를 떠나서 위험부담을 안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야 겠다. 하이데거의 작품에 대해 흥미와 공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서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비난을 즐겨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저항해야 할 것이다. 나는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밖에서부터 내게 들려오는 비판적인 물음들을 나는 귀여겨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물음들이 대개는 나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회의의 반향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상이한 감정의 목욕을 하이데거가 내게 베풀었던가: 그의 사상적인 위력에 압도당해 느낀 환희 - 그의 언어와 사유스타일이 지니고 있는 완고함에 대한 언짢음, 그가 전개하고 있는 다른 사상가에 대한 해석의 풍요로움이 던지는 매혹 - 그의 해석의 억지와 일면성에 의한 현혹 등이 그것이다. 이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명함의 느낌의 변화무쌍한 목욕이다. 여태까지 매료당해 감추어져 있는 사태를 밝게 끄집어 내고 있는 길들을 좇아 왔는데, 금세, 상황에 따라서는 사흘 뒤에, 거기서 보았다고 여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아마도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일 것이다. 이미 얼마나 많은 나의 생애의 시간과 에너지를 하이데거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에 -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 작품의 전부가 출간된 것도 아니다 - 투자한 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가끔 나자신에게 "내가 이것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더군다나 내가 그렇게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며 신부로서는 그러한 물음이 회피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철학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페터 부스트(Peter Wust)의 나를 불안스럽게 만드는 말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의 면전에서" 최고도의 문제가 있는 사치일 진대, 그 전집이 백권이 넘는다는 그러한 사상가를 배운다는 것은 더 말할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철학적 논증의 자리에는 너무나도 유치한 "그래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깊숙히 뒷문을 통해 파고든다.
하이데거를 붙잡고 오래 씨름하면 할수록 물론 그만큼 더 많이 그를 알게 된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었던 조야한 오해들이 풀려나간다. 그러나 또한 똑같은 정도로 새로운 문제들이 자라나온다. 보다 심오한 이해의 문제와 참다운 소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띠지 않는 문제들이다. 이해하기 몹시 어려운 하이데거가 수수께끼의 하이데거가 되어버린다.
이 수수께끼를 나는 이 글에서 부분적으로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엄습해 왔는지를 기술하려고 한다. 이때 본래의 철학적인 내용이 뒤켠으로 밀리게 되는 대가를 치루는 것을 나는 감내한다. 그 철학적 내용은 어차피 기술하거나 이야기하며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함께 사유하며 뒤좇아 사유하면서만 접근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작업을 다른 곳에서 이미 여러 번 하였으니1) 여기서는 안 해도 무방하리라. 그 대신에 여기서는 한번 그렇지 않을 경우 간과되고 있는 정서적인 것, 외적인 것, 개인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을 독자들이 용인해주기를 바란다. 하이데거의 사상과의 씨름의 바로메터를 비추어주고 있는 거울에서 아마도 독자는 하이데거라는 인물의 어떤 면을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가지 관점에서 그것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제삼 제국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표명은 내개는 처음 그의 사상과는 거의(전혀) 무관한 하나의 정치적인 오류로 보였다. 오늘날 그 연관은 더욱 복잡하고 더욱 어렵게 엉켜 다루기 힘든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하이데거의 그리스도 사상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에 오히려 결실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궁극적으로는 그 노력을 동요시키는가 하는 물음은 오래동안 나의 관심을 끌어 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물음을 던져 본다: 단순하고 투명하다가도 금세 다시 어두어져 버리는 하이데거의 그 무지막지한 작품의 스타일은 어떠한 유형의 사상가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을 감추며 드러내고 있는가?
2. 하이데거와 정치
특히 지난 몇달 동안 대중을 사로잡았던 그 주제부터 다루어 보기로 하자. 즉 철학자 하이데거가 국가사회주의와 연관이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특히나 그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 재임기간 동안 말이다.(1933년 4월 21일부터 1934년 4월 23일까지의 기간) 최근의 연구조사들은 하이데거의 국가사회주의와의 연관이 지난 몇년 동안 - 하이데거 자신의 기록에 의한 것뿐만은 아니지만 - 간주되어 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 밀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했다. 새로운 자료들을 세상에 공표한 빅토르 파리아스의 책은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프랑스의 대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지만, 그 책은 동시에 그 해석에 있어서 강력한 심문자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때때로 역사학적인 신빙성에 못 미치는 점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Heidegger et le nazisme, Paris 1987. 독일어판: Heidegger und der Nationalsozialismus, Frankfurt 1989) 역사학적으로 매우 신중하고 풍부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 그러나 전체적인 평가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자이며 역사학자인 후고 오트의 책 {마르틴 하이데거. 그의 전기를 만들어 가며}(Martin Heidegger. Unterwegs zu seiner Biographie, Frankfurt 1988)가 있다.
그 자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30년대 초기에 이미 하이데거는 그 당시 국가사회주의적으로 변화되어 버린 독일 대학생 단체와 접촉을 가졌다. 국가사회주의적 전임강사들의 그룹의 하나가 하이데거를 총장으로 선출하려고 계획적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총장으로서 청년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역동성에 힘입어 전체 독일 대학교의 생활을 개혁하는 것을 주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는 다른 국가사회주의적 총장들(프랑크푸르트, 키일, 괴팅겐 대학교의)과, 나치 대학생 연합과, 프러시아 문화성의 고위직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의 선동과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을 히틀러와 동일시하는 파렴치한 언행들을 행하였다.
하이데거가 그의 개혁의 노력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을 그는 1933년 5월 27일 그의 총장취임 강연에서 묘사하였다. 이 강연을 그 당시 그의 친구인 야스퍼스와 불트만은 축하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외적인 요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열거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사적인 국가사회주의"가 당에서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동료들은 재래의 아카데미적인 생활이 그렇게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바꿀 수도 없었다. 아무튼 그들은 그 의미를 올바르게 통찰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문화성과의 대단치도 않은 갈등이 표출되자 하이데거는 총장직에서 자진 사퇴하게 된다. 비록 이 사퇴가 그 자체로 국가사회주의로부터의 탈퇴의 귀결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 하이데거의 당에서부터의 이탈의 과정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형식적으로 1945년까지 당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1934년 이후에도 때때로 정부의 관료들과 좋게 함께 일하였고 "보다 나은" 국가사회주의의 의미의 발언들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대하고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1) 그 당시 하이데거는 인간으로서 무슨 죄를 저질렀나? 2) 1945년 이후 그는 1933/34년의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3) 하이데거의 나치에의 관여와 그의 철학과는 어떤 밀접한 연관이 있는가?
첫째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는 유태교적 자유주의의 대도시문화의 지성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유태주의자는 아니었고 더더구나 종족차별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적지 않은 수의 유태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에게는 상황이 심각해지자 외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1933년 이후 그들에게, 특히나 자신의 스승인 후설에게 공적인 지지를 표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그의 비겁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그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다. 그가 학부의 신념에 찬 가톨릭 신자들을 영향력있는 자리에서 잘라 버리려고 시도했을 때, 이것은 그가 반동적인 힘이라고 여겼던 교회에 대한 그의 거부감의 귀결이었다. 오트가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듯이, 하이데거가 한 동료를, 즉 화학자 슈타우딩거(Staudinger)를 그의 평화주의 때문에 고발하였다는 것, 그를 처음에 해직하겠다고 - 실제로 해직시키지는 않았지만 - 위협하였다는 사실은 하이데거의 당시의 전기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점이다. 한편으로 그 사실과 관련지어 그가 형벌을 받아야 할 어떤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잘못은 간과한다 하더라도 - 그것을 사람들이 철학자에게서 기대하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모범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가 1945년 이전에도 그후에도, 한번도 공적으로 그가 그 당시 국가사회주의에 입당한 사실에 대해 아무런 입장표명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의 현혹스러운 사실이다. 물론 그러한 간격을 둠이 실제에 있어서는 이미 오래전에 일어났다고 전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쓰여진, 그러나 1989년에야 비로소 출간된 {철학에의 기여}라는 책은 이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예컨대 1936년 이후의 강의록들에 기재되어 있는 (물론 해설을 단) 주석들도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1945년 이전에 명확한 공적인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당이 그러한 처사에 대해 어떤 보복적 조치를 그와 그의 가족에게 취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왜 나중에도 아무런 분명한 잘못의 인정을, 아무런 공적인 - 사적으로는 인정하였다 - 수정을 하지 않았는가?
그의 침묵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시도가 제시되었다: 하이데거는 시초의 좋은 단초들이 나쁘게 변형돼 버린 것에 대해 하등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든가 또는 그는 그러한 일들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Gadamer)2) 식의 해석 말이다. 하이데거는 추가적인 국가사회주의 판결과 더불어 그 사실의 통상적인 도덕적 억압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한 일은 하등의 작업상의 사고가 아니라 단지 후기 유럽 근세 특히 현저한 증후였었을 것이겠기에 말이다. 그 증후는 오늘날 모든 자연적인 것과 전수된 것을 무한정으로 뿐 아니라 허무주의적으로 소모해 버리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고 있다.(데리다)3) 하이데거 자신은 1948년 1월 그의 제자 허버트 마르쿠제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45년 이후에 고백하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나치 추종자들은 아주 구역질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념의 변동을 고지하였는데, 나는 그들과 전혀 공통적인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4) 이 모든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자존심도 어떤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물음은 무엇보다도 이 침묵이, 도덕적인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그것이 그의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동료시민에 대한 그의 입장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기자신이나 젊은 청소년들이 그의 사상에 의해 영향받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분명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세번째 물음을 건드렸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상과 그의 일시적인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찬성 사이의 연관은 얼마나 밀접한가? 그의 사상에 반대하는 적대자들은 그 연관이 밀접하다고 보고 거기에서 사상가로서의 하이데거를 전부 불신해 버릴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수단을 발견하고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하이데거의 작품이 이해하기에 너무나 어렵다고 여기거나 그것과 씨름할 시간을 갖고 있지는 못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입장을 표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간단한 판단의 절차를 따라 이런 식으로 처리해 버린다: 나치였던 사람의 철학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는가. 이와는 반대로 그의 친구들은 오랫 동안을 그러한 연관을 부정하거나 무시해 버리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초기뿐 아니라 후기에도 하이데거의 제자이며 친구인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이러한 외면의 정책에 반대한다. 하이데거의 정치적인 실수가 그의 사상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토록 유명한(중요한) 사상가에 대한 그런 식의 변호가 얼마나 모욕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5) 그래서 이제 물음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하이데거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유럽의 문화의 혁신(쇄신)에로 이끌게 될 그러한 정치적인 힘을 국가사회주의에서 발견하게 되리라고 희망하게끔 만든 하이데거 자신의 동기는 무엇인가?
이 동기들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개인적인 태도와 연관이 있을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그의 사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골의 소도시의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는 장인(직공)과 농부의 가족 출신이다. 그는 이러한 주위환경에 결속된 채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국가사회주의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인 계기가 그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즉 정신노동자는 수공업자들을 인정해주어야 하며 그들과의 접촉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결코 사회주의적 국제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민족적으로 생각하였다. 히틀러가 "베르사이유의 치욕"을 씻어버리고 오스트리아를 독일제국에 병합시켰을 때, 이것은 하이데거를 기쁘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보다 사적인 태도가 문화비판적인 시대진단과 연결이 된다. 하이데거는 유럽문화가 오래 전부터 심각한 위기에로 치닫고 있으며, 이 위기가 19세기와 20세기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즉 철학적으로 독일 관념론의 종말 이래의 형이상학의 몰락이 그렇고, 정치적으로 제일차 세계대전과 그에 뒤이은 예전 유럽의 붕괴가 그렇다. 유럽문화의 변두리지역이 이제 세계의 흐름과 위대한 이념들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미국에서와 소련에서는 정신부재의 대중문화의 변형체 외의 어떤 다른 것도 볼 수 없었다. 예전의 이념 위에 구축되었던 유럽이 다시 한번 동일성을 발견하려면 자신의 근원에로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유럽의 두 원천을 그리스의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본다. 그리스인의 탁월함은, 그들이 놀라움 속에 경험한 현실의 압도적인 위력을 물음과 앎에의 의지로 대처했다는 데에, 그들이 인간적인 삶의 방향모색과 형성을 방법적으로 얻은, "자율적" 인식의 토대 위에 놓으려고 감행했다는 데에, 우리가 기술, 윤리학, 자연학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놓으려고 감행했다는 데에 성립한다. 그러나 물론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철학과 과학의 역사가 지금까지 거기에서 양분을 취해 온, 그리스인들이 정리해 놓은 근본개념들은 오늘날의 변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그래서 이미 우리는 1919년에 분명하게, 그리스의 시원적인 사상가들에, 즉 처음에는 플라톤에,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리고 나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에 비견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상의 시작을 찾아나선 그의 욕심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확신에 의하면 철학적인 통찰에서의 이러한 문화의 새로운 시작에는 독일인들에게 핵심적인 역할이 주어질 수 있다. 어떤 북유럽적인 특징 때문에도 아니고 지리적인 중심위치 때문에만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독일의 철학적인 전통과 그 언어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실제적으로 뿐 아니라 전적으로 의식적으로도 독일 언어의 가능성에서부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때 이러한 가능성의 한계가 흔히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다. 하이데거는 상호간의 번역가능성의 토대를, 그리고 그로써 유럽 철학언어의 국제성의 토대를, 즉 중세와 초기 근세의 라틴어 용어를 - 비록 민족주의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 사유의 민족적 특징으로 대체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의 도움으로 근원적으로 사유하였다. 이러한 근원성이 라틴어로의 번역에 의해, 그로써 로마계 언어로의 번역에 의해 덮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 언어들은 사상적인 새로운 시작에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반면에 (어느 정도 아직까지 소비되지 않은) 독일 언어의 정신에서부터 나온 철학함은 - {존재와 시간}에서 시도된 것과 같이 - 아마도 그러한 새시작에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자체 특별히 나치적인 것은 아닌) 국가시회주의적인 구호인 "피와 흙"(혈통과 대지)에서 출발할 경우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흙"(토양)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물론 그것을 지리적 생물학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역사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른 민족들과 자연을 순수 형식적으로 지배하는 데에 활용하기 위해 한 민족이 역사적으로 성장하여 온 힘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착취하는 것을 (이것이 갈수록 점점 더 제삼 제국의 구성요소가 되어 가자) 하이데거는 곧 허무주의적이라고 거부한다. 이때 니체의 예언자적인 통찰인 "힘에의 의지"와의 논쟁적 대결이 하이데거의 안목을 날카롭게 만들어 주었다.
사유가 갖는 언어의 정신과의 말접한 결속과 독일어로 사유하는 철학 - 다시 말해 우선은 자기자신의 철학 - 의 역사적인 소명에 대한 추정을 하이데거는 나중에도 확고하게 견지하였다. 민족정신과 같은 낭만적인 사상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이데아가 유럽 전체를 위한 "독일" 사상가의 지배의 의미가 아니고 봉사의 의미를 뜻한다 해도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물음을 던질 여지는 있다. 즉 다른 언어의 정신에서부터도 합당하고 포기될 수 없는 철학함의 방식들이 발원해 나왔으며 발원해 나올 수 있지 않는가? 유럽 공동체가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적인 근원 - 이것이 또한 동시에 그 공동체들을 보편적인 책임감에로 확고하게 묶어주고 있다 - 에로 소급하여 결속된다면, 그 여러 상이한 민족적인 목소리들이 여전히 화음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하이데거는 20년대 후반부터 그리스도교에게 하등의 "역사를 각인하는 힘"을 신뢰하여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이데거와 그리스도교 사상"에로 넘어가기 전에 정치의 주제를 마무리지으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음을 제기해야 겠다: 그 당시 히틀러를 위해 입장을 표명하도록 만든 그 계기가 그의 전 철학을 염두에 둘 때 하이데거의 사상에 있어서 얼마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내가 방금 한 것과 같이 접근가능한 하이데거의 발언의 전체 중에서 국가사회주의의 동기와의 가까운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는 그러한 발언들만을 뽑아내어 그것을 함께 모아 놓으면, 물론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이 오늘날까지 (계속 증가의 추세로) 거의 모든 문화권에 독자들을 - 늙거나 젊거나를 막론하고, 좌익이나 우익이나를 막론하고 - 두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며 머리를 휘두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파리아스와 오트의 책을 읽고 그러한 인상을 더욱 강하게 받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에 많은 것이 (파리아스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것이) 고의적으로(치우치게) 각본화되어 아마도 하이데거의 책임을 덜어줄만한 자료들은 많이 배제해 버렸다는 데에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책들에서는 그리고 이 글에서도 - 그 글의 성질상 부분적으로 어쩔 수 없이 - 하이데거의 철학함이 부재하거나 그저 변두리에만 나타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철학함이, 그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어떤 사람도 감동시키는 위력과 근원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러한 주제적인 집중력과 물음을 제기하는 공격의 폭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제삼 제국의 많은 표어들과 비슷한 음향을 띤 귀절들을 만나게 되기까지 오래 동안 그것과 씨름을 해야 한다. 또한 사실 그러한 귀절도 있다. 그러한 귀절들은 산재되어 있고 그 수는 전체를 감안할 때 극히, 정말로 극히 적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독자들에게 그 귀절들은 그들을 고통스럽게 넘어트리는 도상의 걸려넘어지는 돌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공정하려고 한다면, 길을 그 길 위에 놓여 있는 걸려넘어지게 하는 돌을 갖고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희망을 가능케 했던 또는 아무튼 그 희망을 재빠르게 막지 못했던 그러한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2년간의 토론을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인간 마르틴 하이데거가 어떠한 약점들을 갖고 있는지, 그의 사상이 어떤 위험 아래에 서 있었는지 등이 과거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러한 위험들은 결국에 가서 그가 제기하는 물음들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이데거에 대한 요젭 로반(Joseph Rovan)의 다음과 같은 현명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자가 밝혀낸 그 세력(힘)들은 빛의 세력들이기도 하지만 어둠의 세력들이기도 하다. 즉 천국적인 세력인가 하면 지옥의 세력이기도 하다. 그는 실존의 심연에 대한 우리의 통찰을 열어주었다. 그 자신 스스로 빠져든 심연에 대한 통찰을. 그의 사상과 작품은 국가사회주의와 내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국가사회주의는 또한 - 무엇보다도 - 악마적인 것의 현현이었다. 그렇지만 또한 그의 사상은 유럽의 근세가 세상에 내놓은 사상 중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깊히 파고든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들도 하이데거처럼 독일인들이었던 헤겔, 마르크스, 니체의 사상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는 그들처럼 애매모호함 투성이의 심오함을 열어밝혔다."6)
여기의 언급에서부터 하이데거의 작품에로의 올바른 통로가 귀결되어 나온다. 위에서 말한 위험은 독자들에게 경우에 따라선 숙명적이 될 수도 있다. 만일 독자가 아무런 자기나름의 지탱점이 없이(함부로) 전적으로 하이데거의 개인적인 사유의 운동이었던 바로 저 "근원적인 물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면. 이 지탱점은 삼중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자기나름의 물음, 비판적인 사유에 있어서의 훈련,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격성에 터한 확고함 등이 그것이다.
하이데거 자신은 자신의 뿌리를 - 그가 다른 더 본질적인 관점에서 뿌리뽑힌 자였을 때 - 더욱 더 모국어, 조국, 역사 등에서 찾았다. 하이데거는 1917년 이후 자신의 청년시절의 믿음에서부터 멀어졌다. 그는 그로써 생겨난 공백을 - 아마도 1933/34년의 시도를 제외한다면 - 거부할 수도 없었고 다른 대용품으로 채워넣을 수도 없었다.
3. 하이데거와 종교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의 작품에 감추어져 있지만 강력하게 현존하고 있는 종교적 물음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정치적 입장에서 귀결되어 나오는 문제들보다 더 일찌기 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내게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형이상학적인 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서 나는 신학과 믿음의 현재화를 위한 기회가 놓여 있지 않을까 자문하여 보았으며, 동시에 이러한 비판이 사유와 믿음의 골을 전혀 건너지를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되지는 않나 걱정을 하였다.
그 모든 비교될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이데거와 그의 독자인 나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결속의 느낌이 드는 것을 허용했다. 하이데거는 1909년 2주 남짓(9월 30일-10월 13일) 펠트키르히의 티지스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의 수련생이지 않았던가? 그 당시 수련원은 폴 드 샤스토네이(Paul de Chastonay) 신부의 관장 아래 있었다. 그 집에 속한 신부 중의 한 분으로는 루페르트 마이어(Rupert Mayer) 신부도 있었다. 하이데거와 같이 수련원에 있던 동료 수련생 중 몇몇은 내가 아직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수사들이다. 예를 들어 스콜라학자 수련생인 빌헬름(A. Wilhelm)과 푀겔레(O. V gele), 보쉬(O. Bosch), 퀴젤(J. Kuisel) 수사 등이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이름만 알고 있었다. 후에 신부가 된 카(Kah), 크론제더(Kronseder), 콘스탄틴 노펠(Constantin Noppel), 루돌프 폰 모스(Rudolf von Moos) 등이 그렇다. 아마도 하이데거는 심장병 증세 때문에 수련원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의 대주교에게 신부지망생으로 지원을 하였으며, 우선은 또다시 건강상의 이유로7) 이 길을 포기하고 수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기 전까지 2년 동안은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나중에야 하이데거는 교회와의 밀접한 결속을 스스로 끊는다. 그의 친구이며 동료인, 신부이며 강사인 엥겔베르트 크렙스(Engelbert Krebs) - 이 사람이 1917년 3월 엘프리데 페트리(Elfriede Petri)와의 하이데거의 결혼식을 주례하였다 - 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를, 하이데거는 개종의 의사를 갖고 있는 그의 개신교 처를 가톨릭 신앙에로 인도하려고 시도하면서 그 자신의 신앙이 올바른 토대가 없음을 깨달았다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정컨대 로마 교황청에서 하달된 "근대주의"에 대한 폐쇄정책을 대하고 느낀 실망스러운 답답함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아마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그리스도교 철학 교수직에 걸었던 그의 희망이 무산되자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명 다른 어떤 것이다. 신학생으로서 여전히 드러나게 통합적 보편적인 가톨릭주의를 대변하고 있었던8) 하이데거가 이제는 후설과 딜타이의 학파에서, 그리고 또한 루터,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등의 철학을 대하면서 매우 예민하고 비판적이고 거기에다가 자신의 능력을 자신하게 되는 정신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하이데거는 좁은 교의주의와 질서유지정책적인 동기에서 미리 정해져버린 경직된 형이상학의 사슬로 인한 압박을 특히 예민하게 느끼게 되었다. 1919년 1월 하이데거는 크렙스에게, 그가 그동안 얻은 인식의 본질에 대한, 특히나 인식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이 그로 하여금 "가톨릭주의의 체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이때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사상과 형이상학이 - 물론 새로운 의미로 알아들어서 -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9) 하이데거는 일생동안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제 개신교의 감정에 가깝게 서게 된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마르부르크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하이데거는 자주 개신교 신학자들과, 특히 그가 친구로서 가까이 지내고 있던 루돌프 불트만과 지속적으로 심도있게 토론을 하였다.10) 언제 왜 비교의적인 그리스도성과의 이러한 공감이 그리스도교 사상 자체에 대한 본질적으로 거리감을 둔, 아니 부분적으로 불친절하기까지한 태도로 (이 태도는 30년대 중반 경에 확인할 수 있다) 바뀌었는지는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바젤의 친구들인 오버벡(Franz Overbeck)과 니체(Friedrich Nietzsche)에 대한 하이데거의 심취가 아마도 거기에 어떤 작용을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하이데거에게는 그 두 사람에게서처럼 그리스도교 사상은 문화를 각인하는 힘을 다 쇄진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도 예수회 신부들이 하이데거의 세미나에서 함께 연구할 수 있었고 그의 주목을 받는 것이 가능하였다. 나에게 처음으로 하이데거에 대한 흥미를 심어준 나의 은사인 로츠(Johannes B. Lotz) 신부가11) 그 자리에 있었고(1934-36) 칼 라너(Karl Rahner) 신부도 있었다.12) 그 시절의 다른 세미나 참석자로는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인 페르난도 후이도브로(Fernando Huidobro)가 있다. 그는 "군단"의 제4 중대의 종군신부가 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하이데거는 1936/37년 겨울학기의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에게 후이도브로 신부가 그에게 시민전쟁 중에 써보낸 편지를 읽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신부에게 1936년 성탄절에 책자 하나와 편지를 보냈다.13) 후이도브로 신부가 1937년 4월 12일 전사하자 하이데거는 4월 21일 동료수사인 로츠에게 애도의 편지를 보냈다. 전쟁 이후 오래전에 알았었던 예수회원과의 관계들이 많이 재개되었다. 로츠 - 1953년 뮌헨에서의 기술에 대한 강연을 계기로 - 와의 관계가 그렇고 오토 팔러(Otto Faller) - 이 사람은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신학교의 기숙사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서 이제(1951-56)는 북부 독일 관구의 관구장이다 - 와의 관계가 그렇다. 새로운 접촉들이 50년대와 60년대에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 현상학을 통해 존재의 사유에로}(1963)의 저자인 미국 예수회 신부 리차드슨(William J. Richardson)이 그렇다. 하이데거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 일을 그에게 해준다. 즉 그의 책에 긴 서문을 써준다. 내가 1971년 2월 박사학위를 마치고 프라이부르크로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우리의 예수회 "철학 대학"의 연구들에 대단한 흥미를 보여주었다. 그 대학은 그때 이자탈의 풀라흐에서 뮌헨의 한 가운데에로 이사를 해온 참이었다.14)
종교철학적인 주제에로의 하이데거의 접근을 특징짓고 있는 바 그것과, 스콜라적인 풍토에서 사회화된 독자에게 하이데거의 수용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바 그것은 형이상학적 신학의 거부이다. 더 나은 말로 말한다면, 이러한 거부의 이유가 사람들이 형이상학적인 신학의 오랜 전통을 염두에 두고 기대하였을 그것만큼 그렇게 명확하고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흔히 그 논증도 제시되기보다는 오히려 암시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이렇게 말한다 할 때15), 즉 "철학에 있어서 사실에 합당한 신에 대한 이름"이 그렇게 불리우는 그 "자체 원인"(Causa sui) "앞에서 경외심으로 무릎을 꿇지도 음악을 연주하지도 춤을 추지도 않는다"고 할 때, 이 발언에 대해 아무런 근거제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의미도 열려 있다. 이 발언은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 추종자나 또는 젊은 하이데거를 높이 평가했던 헤르만 쉘(Hermann Schell)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다른 예를 든다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신학의 역사를 형이상학적 단초의 필연적인 귀결로 간주하였고 그래서 문제가 많은 근세에서의 신적인 것의 기능에서 (라이프니츠와 헤겔에게서는 은닉된 채, 니체에게서는 드러난 채) 형이상학적 신학 그 자체의 내적인 진리를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내적인 귀결이 어떠한 종류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근세 사상가들의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등등) 신학이 좀더 동정적인 해석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은 논의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하이데거는 언제나 거듭 "신" 또는 "신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직접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으레 다른 사람들, 특히나 횔더린의 표현방식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취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그러한 이야기가 어떠한 실재의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신 또는 신들에 대해 순전히 만들어진 것을 인용하는 식으로와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두 가지의 분명한 가능성 외에 어떤 제삼의 이야기 방식이 있는가?
아무튼 명백한 것은 하이데거가 철학자들의 "신"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에게서 그렇게(신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바 그것은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그렇듯이 - 신학적인 대화를 철학적인 문맥에로 옮겨서 사용한 결과이거나 또는 -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그렇듯이 - 전혀 옳지 않은 방식으로 그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때 그 이름은 전적으로 종교적인 문맥을 벗어나 특정한 천문학적인 현상의 최종원인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에서의 "신 혹은 자연"도 그렇고 헤겔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그렇지만 그 종교적인 의미가 극도로 애매한 "절대자"가 그렇다. 이러한 입장표명 뒤에는 한편으로 칸트의 그것과 유사한 이성비판적인 숙고가 감추어져 있다. 다른 편으로 그것들은 종교적인 것의 규정들로서 이 종교적인 것을 형이상학적인 것이나 또는 도대체 모든 형태의 지식에서부터 완전히 구별짓는 그러한 규정들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오버벡의 학문과 믿음의 엄격한 분리16),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적인 것의 윤리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에로부터의 날카로운 구별17), 그리고 아마도 루돌프 오토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 나오는 종교를 전율스러운 것과 황홀스러운 것으로서의 성스러움에 대한 경험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 등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방법론적인 귀결은 "신"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종교적인 경험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지 그 역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컨대 플라톤, 안셀무스, 데카르트, 피히테에서와 같이) 철학함의 행위 자체에서 귀결되어 나올 수 있는 탈자적인(무아의) 경험을 본디 그안에서 신이 나타나는 그러한 어떤 것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적인 것의 앎의 대변자로서 하이데거는 오직 불리운자만을, 역사적으로 상황지어진 가운데 성스러움의 초월적 힘에 의해 사로잡힌 증인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다.18) 그러한 사람들로서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인물은 키에르케고르, 니체 그리고 횔더린이다. 그들은 전부 특히나 근세 세계에서의 성스러움의 현존보다는 오히려 부재에 대한 증인들이다. "자기 시대의 운명에 맞갖은 유일한 사람인" "종교적 저술가"인19) 키에르케고르는 하이데거를 특히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는 해까지 동반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우리 시대의 종교적인 근본분위기를 말로 표현한 사상가이다.20) 횔더린은 "성스러운 이름이 결여"되어 있는 세기에 이 결여를 끝까지 견뎌내고 하늘과 땅의 새로운 화해의 전망을 유지해준(열어준) 시인이다.21)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애매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하이데거 자신은 아마도 20년대 말에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근대의 세계를 여전히 각인할 수 있었던 그러한 신적인 것의 가까움의 형태를 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의 {철학에의 기여}(1936-38년)의 끝의 한 장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을 거슬러 기획투사된 신에 대한 사상이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가다머가 "민족종교"22)에 대한 꿈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중에 하이데거가 그래도 다시금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한 가능한 미래를 눈 앞에 그리고 있을 때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일 뿐이다. 즉 사람들이 우선 사유하면서 철두철미 기술에 사로잡힌 사유형태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그러한 근대 세계의 본질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이때 그 사유형태는 또한 나름대로 우리의 임의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또 우리의 임의에 의해 제거해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간에 옛 것을 통합시키는, 종교적 의미의 새로운 방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 스스로 자신을 그 스스로에서부터 새롭게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야에서의 인간의 노력이란 것은 무기력할 뿐 아니라, 의미에 반하기 때문에 오히려 반생산적이다.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가난을 배우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계속해서 그의 신학적인 유래에 의해 각인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유래를 한번도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어떤 끝나버린 것이나 치워버려야 할 것처럼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래는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사상에 있어서도 아픈 면이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이 문제가 될 때, 하이데거에게는 폭력과 부드러움이 아주 가까이 같이 놓여 있는 것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그의 생애의 오랜 동안을 교회적인 의미로 신심있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충동이 없이 그의 사상은 생겨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적인 충동 없이는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분명 신앙심있는 탐구자와 탐구하는 무신앙자와의 대화를 계속 이끌어 나가는 것은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아주 오랫 동안 신학은 형이상학적으로 연구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마치 그 옷을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도 입었듯이 그렇게 해온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해석 속에서 비로소 믿음도 밝아지고 그때마다 현재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오늘날 신학은 형이상학적 소외에서부터 벗어났음을 뽑내고 있는 듯 하다. 거기에 실제로 좋은 어떤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단지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듯이, 개념에서부터의 해체 대신에 이제 일종의 역사적인 실증주의를 갖다 놓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 실증주의도 하이데거가 보여주고 있듯이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어느 다른 사상가에서가 아니라 바로 하이데거에서 배울 수 있는 과제이다. 신속한 매개, 쓸만한 것과 장애가 되는 것의 유용한 분리 등을 거기에서는 물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대화를 위해 사람들은 아주 오랜 끈기가 필요하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누구도 무인의 나라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이기에 보존되어 온 전통을 내던져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은 아직 현재가 아니다.
4.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텍스트와 씨름을 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나와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그 뒤에 서 있는 인물의 윤곽도 잡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그를 받아들인 방식에서부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체험적 증언에서부터도 내가 내게 만들어 놓은 그 그림을 보충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아니 수수께끼의 인물의 모습이었다.
첫째로 하이데거 자신의 자기자신의 사상에 대한 기이한 관계맺음을 들 수 있다. 그는 그의 사상을 자신의 소유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그 사상의 소유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편으로 그가 그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을 관리하는 방식 역시 기이하다.
게오르크 피히트(Georg Picht)의 통찰이 독자들도 감지할 수 있는 바를 기막히게 묘사하고 있다. "어떻게 인간 하이데거를 묘사할 수 있을까? 그는 번개가 치는 마을에서 살고 있다... 사유의 임무에 의해 흡사 얻어맞은 것 같은 의식, 그의 기념비적인 명확성 그리고 정신의 위대한 전략 등은 매개되지 않고, 갑자기 농부의 심원한 지략과 언제나 깨어 있는 불신에로 뒤바뀔 수도 있는 그러한 무방비 상태, 예민한 감정, 연약함 등과 나란히 놓여 있다. 삶이 그에게 끼친 상처는 끝내 아물지를 않았다."23) 1919년 하이데거는 앞에서 언급한 크렙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러한 임무를 종교적인 표현을 빌려 "내적인 소명"이라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임무와 관련지어 또한 우리는 하이데거가 1951/52년 {사유란 무엇인가?}(사유는 무엇을 명하는가?) 라고 물음을 던지며 그로써 무엇보다도 (그에게) 무엇을 사유하기를 명하는지를 (지시하다, 촉구하다의 의미로) 묻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명령(하달)은 그의 삶의 어느 특정 시기에서는 너무나 멀리 나가 사유가 하루의 특정한 정해진 시간에 그야말로 그를 덮쳐 오는 것처럼 이해될 지경이었다.24)
이러한 사상의 자기이해(자명성)에서부터 비로소 우리는 또한 하이데거가 자신이 쓰고 말한 낱말을 "관리하는" 태도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청중과 독자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개인적인 대화에서 이야기하는 방식과 그의 강의와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로 대화에서는 단순함, 용어사용에서의 자유로움이 보이고 있고, 그 중간쯤 강의 스타일이 놓인다 할 수 있고, 다른 편으로 강연과 저서에서는 극단적으로 응축된, 용어에 있어 정화주의적이고, 때로는 화려하고 갈고 다듬은 말들이, 아무튼 대단히 인위적으로 구성된 말들이 보인다. 그리고 이것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말해진 것과 침묵되고 있는 것과의 관계이다.25) 인쇄되기에 충분한 원고들을 20년 또는 30년 동안 발표하지 않고 놔두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것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원고를 이해할 만한 시간이 가까워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라니 말이다.
내가 1971년 그의 저서 중 어떤 저서에서 그가 문제삼고 있는 그것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록을 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책을 댈 것으로 기대했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강연과 논문모음집}의 가운데 실린 글들을 지적하였다. 갑자기 수줍어진 듯한 목소리의 그의 대답은 놀라웁기도 했고 전형적으로 그다운 대답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나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 그래 그것이 본래 중요한 것이지." 하이데거는 그것을 그렇게 직접 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또한 {동일성과 차이}이기도 하단다. 거기에서 그는 "고양이를 자루에서 가장 멀리 꺼내 놓았다. 그러나 그것도 전부는 아니지"!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순진함에, 수수께끼 속에 포장하는 지혜에 때때로 너무나도 인간적인 경제적 계산이 섞여들기도 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일까? 그래서 나에게는 하이데거와의 씨름이 시작된 이래 언제나 거듭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되어 왔다: 하이데거는 독자에게 개방되어 있는가? 그는 언제나 솔직한가?26)
둘째로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말해야 겠다. 하이데거의 강의는 그 당시 몹시 매혹적이었고 그의 저서들는 오늘날도 아직 그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을 느낀다. 그의 청중들에게 하이데거는 사상가적인 자연의 사건과 같이, 화산의 폭발과 같이, 강력하고 위압적으로 압도해 왔다. 그의 물음의 대단히 비상한 힘에 압도당해, 또는 다른 종류의 함께 떠내려가는 듯한 급류 속에서 제자들은 마치 쇠사슬에 묶인 듯이, 그 모든 부유해짐 속에서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때문에) 자신이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하이데거의 가까운 제자들에게서 우리는 그러한 압도적인 힘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모든 다양한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 언제나 거듭 그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물음과 존재의 자립성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많은 하이데거화되고 있는 신학자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그의 인격성에서, 그의 데몬에서 도주할 수가 없었다.
끝으로 하이데거의 사상과 참다운 관계를 갖는 데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 겠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자들에게 통용되는 것, 즉 그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는 오직 오래 지속되는 노력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열어밝혀진다는 이것은 하이데거에게도 그대로 탁월한 의미에서 적용된다. 그의 충실한 제자이며 친구인 쟝 보프레(Jean Beaufret)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랫 동안을 그는 이제 조금 더 노력하면 하이데거를 이해하게 되겠지 하는 희망 속에 살아 왔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항상 다시 예기치 않은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하이데거가 사유하고 있는 그 문제들이란 실제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배후에 남아있는 그러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텍스트만을 읽어서는 그 밑바탕에 놓여있는 문제제기를 파악하는 데 성공할 수 없다... 독자들에게 있어 주된 어려움은 처음부터 도대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것의 이해를 위한 통로를 찾아야 한다는 거기에 있다. 그 까닭은 그가 전수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전수된 언어는 청중 내지는 독자의 주목을 하이데거가 바로 그 주목을 거기에서부터 돌려놓으려는 바로 그 방향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27)
하이데거의 "사상"은 더이상 고전 "철학"처럼 가르칠 수 있는 명백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의 사상은 초기의 작품에서는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인 숙고의 형태를 - {존재와 시간}도 이것에 다름 아니다 -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형태 자체가 이미 본래적인 인식함의 한 형태여야 한다. 나중에 그 사상은 근본적으로 스스로을 하나의 물음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더 "사실"에 맞갖은 물음을 준비하는 데에만 그 의의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 사상과 가능한 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위한 결정적인 조건은 그 자신이 (넓은 의미의)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의해 압박을 받고 있는가 아닌가이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이 - 그것이 고전 형이상학의 전통이든 또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전통이든 또는 좌익 헤겔주의의 전통이든 교회의 구조의 전통이든 - 계속해서 그들에게 확고한 바탕을 의미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하이데거는 위험한 반동분자(퇴폐분자)이다. 그런가 하면 그들에게 있어 진리는 어쨌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고 철학에서도 그저 새로운 것만을 찾아서 동분서주하며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하이데거는 매우 흥미있는 현상이겠지만 결국에 가서는 미친 사람일 것이다.28) 오직 - 전통의 내부나 밖에 서 있으면서 - 우리가 오늘날 처해있는 그 심각한 위기를 느낀 그러한 사람들만이 하이데거의 추구를 규정하고 있는 그 분위기를 함께 나눌 것이다. 오직 그들만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 이 글은 헤프너(Gerd Haeffner)의 글("R tsel Heidegger", in: Stimmen der Zeit 207 [1989], 651 - 666)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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