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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자전거>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naver.com/jsk1350/80016339906

 

* 원문

Le Magazine Littéraire  2001/6   pp. 20-22

 

* 번역본

[문학과사회] 57호 (2002년 봄)에 게재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을 소개하는 군말

68년 혁명 당시의 과격한 선동과 이후의 점진적인 고립과 권총 자살, 헤겔적 마르크스의 개념들과 예레미야의 예언투의 기묘한 합성처럼 보이는 잠언적 독백들, 그리고 현대 문화의 다면적이고 중층적인 양태들을 응축하고 있는 ‘스펙터클’이라는 하나의 단어. 이것들이 기 드보르에 대해 우리가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는 몇 개의 상징적 혹은 아이콘적 정보들이다.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의, 상투적인 비유 그대로 불꽃과도 같았던, 짧지만 농밀한 역사를 축지법적으로 주파해간 얀 시레의 글을 ‘기획 21세기’에 끼워넣는 것은, 기 드보르가 보여준 극단적 생체험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하나의 사유, 즉 정치적 혁명과 미학적 전위를 하나로 휘몰아 그것을 단순히 예술적 실험 혹은 정치적 구호의 층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나날의 삶, 즉 일상적 사건 그 자체로서 만들고자 했던 의지와 그 의지 속에서 생성되어 그 의지를 조직하고 후견한 기획들, 그리고 그것을 통째로 끝까지 밀고 나간 드보르라는 육체의 단단한 탄력이, 여전히 답파해야 할 역사의 거친 들판으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미답의 들판은 안전(眼前)에 전개된 장소라기보다 차라리 드보르적 삶의 근본 원리로서의 역동적 운동 공간이라고 말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학을 혁명에 봉사케 할 것이 아니라 혁명을 창조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그의 명제는 단순히 예술지상주의의 표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어떠한 완성도 언제나 파괴되고 갱신되어야 할 변화 도중의 한 계기로서만 존재할 것을 명령하는 허공의 화살표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공허한 충만으로서의 미적 활동이 모든 혁명에 최종적으로 던지는 치명적인 내기이다. 이 집중적이고 동시에 전면적인 내기를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하려 해도 빈번히 핵심을 놓치고 마는 것은 그 원리 자체의 내재적 운동성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그 운동의 궤적을 통째로 베끼는 순환적 글읽기의 방식으로 되짚어보는 게 오히려 그것을 체감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서양 지식인 역사의 맥락 안에서 상황주의자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된 것들에 한해서 문헌들을 참조하고 간혹 사견을 붙여 주를 달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상식에 속하는 것들 (평균적 대학생이 알고 있는, 아니 차라리 알아야 할 것들)은 지나쳤다. [원주]로 표시된 것들은 글쓴이의 주가 아니라, 『마가진 리테레르』 편집자의 것이다.


 

 

기 드보르Guy Debord, 세기의 책략가 1)

Guy Debord, un stratège dans son siècle


얀 시레 Yan Ciret2)
번역: 정과리

 


작가이고 정치 이론가이며, 선동가이자 자유인인 기 드보르는 1994년 11월 30일 자살한다. 그는 한 방의 총알로 그의 시대에 있었던 가장 충격적인 인생의 하나를 마감한다.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불렸던 세계와 타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별은 열정들과 생생한 시심을 부추기는 혁명의 하늘 속에서 더욱 광채를 발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가장 역설적인 선회를 통해 그가 그토록 공격했던 미디어 세계는 그를 본받아야 할 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광고장이건(베네통과 손잡은 토스카니Toscani3)), 꽤 이름을 얻은 신산업의 ‘기수’(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4))이건 그를 최고급 영감의 원천으로서 인용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또한 그 자신 카날 플뤼스 Canal+5))의 요청으로 중편 영화, 「기 드보르, 그의 예술, 그의 시대 Guy Debord, son art, son temps」를 찍었고, 그것은 그가 죽은 직후에 방영되었다.

 

그의 자살엔 그저 만회의 원칙이 작용한 것인가, 아니면, ‘역사’가 가장 빛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남겨주는 이율배반의 작용인가? 대답은 그의 작품들 속에 있다. 영화이건, 문학 텍스트건.「사드를 위한 절규 Hurlements en faveur de Sade」 같은 실험 영화가 아무 텔레비전 채널에서 아무 시간대나 방영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들에 대한 제대로 된 독서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의 시간대는 아직 미래에 있다. 사전에 계획되었으며 그 자신에 의해 무덤덤하게 예고된 이 사라짐 이래, 그의 운명은 끊임없이 칭송되었고 글자 하나하나 주석되었다. 모든 방향에서 그랬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재적인 투시자의 운명으로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세기’6)의 고전적 품격을 낡았을 뿐만 아니라 반동적이기까지 한 수사적 담론에 뒤섞어버리는 스타일리스트의 운명으로서. 물론 그가 ‘나쁜 평판’이라고 불렀던것도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Internationale Situationiste’의 창시자7)가 만장일치를 구한 적은 없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그의 반역의 의지는 시대와 무관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전쟁(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보여준 비타협성을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내가 썩 뛰어난 프로라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프로란 말인가? 비난받아 마땅한 세계의 눈으로는 바로 그것이 나의 신비가 되리라.”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의 항거의 욕망을 최고도로 유지하였다. 진실의 추구에 대한 이러한 단호하고 화끈한 태도는 그를 모든 제도들 혹은 권력들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로 이끌고 가게 된다. 그의 작품은 급격히 라 로슈푸코 La Rochefoucault,8) 로트레아몽,9) 아르튀르 크라방 Arthur Cravan10)으로 이어지는 직선의 길 속에 놓인 모럴리스트의 그것이 되어간다.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의지 속에서 극히 제한된 혁명 공동체들과만 손을 잡는 불복종의 모럴 말이다. 가령, 이지도르 이주 Isidore Isou11)의 「게거품과 영원에 대한 논고」의 요란한 상영이 있었던 제4회 칸 영화제에서 그가 만난 ‘문자주의자들 Lettristes’의 모임이 그런 공동체였다.

 

그가 이 전위적 운동 조직과 동맹한 것은 단순히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로부터 내려오는 스캔들에 대한 흥미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주 Isou가 초기 드보르에게 끼친 영향 때문이었다. 그 영향은 문자당 두목이 끈덕지게도 과격한 적의를 표했는데도 불구하고 강력하였다. 특히 그것은 ‘비틀기’라는 행동 강령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문자주의자’들에게 이미 존재하였던 ‘비틀기’는 장래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상황주의자들의 정신 속에서 ‘비틀기’의 실천은 모든 범주의 작업들을 하나로 모아 그것들을 다양하게 조합해서, 비틀린 차용과 비틀린 인용의 형식으로 전복적 담론을 일구어냄으써, 의미의 완전히 새로운 폭발을 일으킨다는 목표를 가졌다.

 

이주는 역사 속에서 작품들이 구축되는 팽창 국면 phases ampliques과 예술이 이울면서 창조적 소피스티케이션의 폭발 속에서 흩어져버리는 분쇄 국면 phases ciselantes을 구별한다. 드보르는 후자의 범주를 제 나름으로 취해(화려한 세공형 사진 ― 초상을 보라) 그것을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의 비전 속에 집어넣는다. 문명들은 이 고급 문화의 위대한 시대들을 거치면서 진전한다. 그것들은 또한 니체가 말하는 데카당스와 동의어이다; 이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들고 일군의 젊은 ‘부족 tribu’이 찢어져나가 오베르빌리에 Aubervilliers의 한 주점에서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 l'nternationale Lettriste을 설립하였다. 그렇게 하나의 실험실이 차려진 게 1952년이었으며, 그것은 20세기 후반기의 대부분의 문화적 혁신들을 예고한다.  그들의 반항은 당시 무대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던 정치 조직들(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혹은 사상 운동(실존주의)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그것은〕지나치게 예술에 집착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지진아라고 판단된 〔원래의〕 문자주의자들로부터 한 줌 가량의 주변인들이 빠져나와 은밀히 낡은 세계12)를 해체해나간 것이었다. 그들은 파리의 구시가에서 혹은 이민자들이 거주한 교외에서 그들의 선택지를 발견하였으니, 그곳들은 빈번히 술과 마약과 범죄에 연관된 일종의 ‘심리지리’13)였다. 그들은 도시적 편력을 발견하고, 그것은 곧바로 ‘편류’라는 용어 아래 받아들여진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의 창간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게 된다: “도시 사회의 조건과 결부된 하나의 실험적 행동 양식. 다양한 주위 환경들을 재빨리 뚫고 지나가는 것.”사람들은 여기에서 초현실주의의 흔적, 즉 브르통 Breton의 『나자 Nadja』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전후 초현실주의와 맺고 있던 오이디푸스적 증오 관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문자주의자들〕은 우상 파괴적 회보인 『포틀래치』14)를 발간하는데, 그것은 당시에는 맞수가 없을 정도로 재능으로 넘쳐났다. 그것은 등사기로 밀어서 인쇄되었으며 겨우 500부가 발행되었다. 이미 프롤레타리아 봉기와 깊숙이 연루된 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출판물은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이 탐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준다. 이것은 금융 사회의 교환 체계를 원시 사회의 제의적이고 아무에게나 마구 주는 식의 증여로 대체하면서 무상으로 배포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몽땅 ― 특히 파리(에서의 삶)는 더욱더 ― 영원한 축제 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으며, 이 축제 속에서는 되풀이되지 않는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지며 흘러가는 시간의 절대적인 덧없음이 감각적으로 느껴져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영화인-이론가는 그들이 거기에서 “시간의 정점”을 발견했으며, “이 장소에서 시간은 어떤 다른 곳에서보다 더 활활 타올라 거듭 모자라기만 했다”고 말하게 된다.

 

드보르는 이 위험한 비밀 결사의 추억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게 되는데, 이 조직의 많은 사람이 격렬한 죽음 혹은 광기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가령 기 드보르의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노트르담 스캔들 scandale de Notre-Dame’15)의 공동 작성자 중의 한 사람인 길렝 데누와이에 드 마르브레 Ghislain Desnoyers de Marbraix는 의문의 살해를 당했다. 또한 훗날 상황주의자들의 건축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질 이벵 Gilles Ivain이라고 불린 이반 츠체글로브 Ivan Chtcheglov는 정신 착란을 일으켜 병원에 감금되었다. 드보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한 해 동안에 한 세기가 요청할 주제들을 발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보르는 이 “부정적 패거리”를 전투, 패주, 헛된 명성, 랭보적 섬광 등을 통해서 하나의 영웅적 신화로 변모시킨다. 센 가(街)에 그 유명한 “결코 일하지 말라”는 낙서를 새겨놓은 때가 1953년이었다. 정치적 급진화 과정 속에서 “장식주의적”이라고 판단되어 쫓겨난 장미셀 망시옹 Jean-Michel Mension 혹은 질 올만 Gil J. Wolman 등등에 대한 제명 사건이 있었지만, 지난 다음에 보면 이들 모두에게는 공통된 불변의 것이 무언가 있었다. 「심야에 원무를 추고 추다가 우리는 불에 타 없어지리라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 같은 영화는 드보르의 2권짜리 회상기 『예찬』 I, II와 같은 방식으로 이 격동기의 심야의 화염을 줄기차게 되풀이한다. 덴마크의 화가이자 이론가인 아스게르 요른 Asger Jorn이 곧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에 합류한다. 그룹 코브라 COBRA16)의 공동 창립자인 그는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상상주의 바우하우스 Bauhaus Imaginiste’를 세웠다.17) 피노갈리치오 Pinot-Gallizio와 같은 화가들과 함께 그는 비기능적 건축과 산업 회화 peinture industrielle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두 그룹(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과 상상주의 바우하우스)의 결합이 진행된 것은 드보르가 25세가 채 안 되었을 때였다. 1956년이 되자 공동의 명의로 작성된 전단이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의 “빛의 단지”18)에서 개최된 전위 예술 페스티벌을 비난한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1957년 7월 27일 이탈리아의 소도시 코지오 다로스치아 Cosio d'Arroscia에서 ‘총괄적 창조성’을 통해 예술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활동적인 전위 운동이 되겠다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탄생한다. 기 드보르와 그의 첫 상황주의자 동료들, 가령 영국의 심리지리 화가 랠프 룸메이 Ralf Rumney 혹은 건축 설계사 콘스탄트 Constant의 입장에서는 예술이란 삶과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정반대로 예술은 모든 다른 활동들을 그 자신의 역사적 내기, 즉 ‘상황들 situations’의 구축에 종속시켜야 한다. 모든 행동들은 그들이 “전일적 도시주의 urbanisme unitaire”19)라고 부른 것 속에서 이상적으로 영위되고, 인간의 경험은 “구축된 상황”의 역동성 속으로 들어간다. 1958년 6월 출간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창간호는 ‘구축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통일된 환경과 다양한 사건들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구성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구축된 삶의 계기.”

 

상황주의자들은 미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의 분리를 비판하고, 두 영역의 결합을 통해 모순들의 극복과 마르크스에 의해 고안된 계급 없는 사회에 도달해야 한다는 혁명적 이론을 구상한다. 그때 개인은 ‘자발적 노예 상태’와 마침내 절연하게 될 것이고, 자본주의 세계, 생산과 자본 축적으로부터 벗어나서 위대한 바로크 시대 혹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상기시키는 자신의 운명과의 자유로운 유희를 되찾게 될 것이다. 기 드보르의 입장에서는 혁명을 창조에 봉사케 해야 하는 것이지 그 거꾸로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정치의 범주 자체를 갱신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분간 그는 아스게르 요른과 함께 덴마크에서 작업한다.  요른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그의 친구로 남아 있게 된다. 그들은 공동 작업을 통해 두 권의 이례적인 저서를 낸다. 1957년에 출판한 『코펜하겐의 종국 Fin de Copenhague』, 1958년 5월에 완성된 『회상록』이 그것들이다. 이 두 저작은 요른의 그림들의 바탕색, 즉 그의 “내구적 구조”를 활용하여, 아주 정교한 비틀기의 기술로 소설, 사진 그리고 만화, 고대의 부조화, 광고들을 혼합한다. 여기에 이미 기 드보르가 특별히 선호하는 저자들의 수가 발견된다. 특히, 프롱드난 20)의 지도자인 레츠 추기경 Cardinal de Retz이 그렇다. 이때는 극도로 풍요로운 시기로서 드보르는 1959년과 1961년 사이에 두 편의 단편 영화를 찍는다. 「꽤 짧은 시간대를 지나가는 몇몇 인물들의 거동에 대하여」와 「분리비판」이 그것들이다. 그는 이 영화들에서 고다르 Godard나 알렝 레네 Alain Resnais21)(그는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찬양했다)의 근대적 방식의 영화에 대항하여, 완벽히 독창적인 영화인이 되는 방식에 집중한다.

 

드보르는 기트리 Guitry를 따라 ‘에세이로서의 영화 film-essai’를 재조명하는데, 그러나 아주 다른 방식으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거짓과 진실」22)의 오손 웰스보다 앞선 시도였다. 그는 『자본론』을 필름 속에 기록해놓으려는 계획을 가졌던 러시아 영화인인 에이젠슈테인 Eisenstein의 꿈, 즉 이론을 통째로 영화로 옮겨놓고자 했던 꿈을 다시 취한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예찬』의 저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토대(고전 영화, 시사 영화)에서 유래하는 비틀린 이미지들만을 활용하며, 단지 한두 번의 ‘화면 밖 음성 voix off’을 첨가할 뿐이다. 중성의 소리라고 불린 이 코멘트들은 고전에서 발췌한 현학적인 인용문들, 혁명 이론, 전쟁술 그리고 솔직한 서정성을 띤 전기의 단편들을 번갈아 보낸다. 알제리 전쟁과 식민지들의 독립이라는 급변하는 역사는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작업 방향에 대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 드보르와 미셸르 베른스타인은 「제2차 121인 선언23)에 서명한다. 경찰의 심문을 받았지만 드보르는 굴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제5호에 「선언」의 결론을 게재하기까지 한다.

 

그가 초현실주의자들, 장 폴 사르트르, 블랑쇼 그리고 디오니스 마스콜로 Dionys Mascolo24)와 아주 예외적인 방식으로 만났다는 것은 지적해둘 만한 일이다. 이들에 대해 상황주의자들은 결코 쓴 소리를 하지 않게 될것이다. 당시의 지적, 정치적 환경에 대한 신랄한 태도, 격렬한 비판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두드러진 표지 중의 하나였다. 이 태도는 이 그룹으로 하여금 탄생할 당시부터, 좌익 집단들, 모택동주의자, 스탈린적이라고 판단된 공산당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공격성으로 비난하게 한다. 상황주의자들은 모택동주의 혹은 드보르가 곧바로 ‘집중된 스펙터클 체제’로 부르게 될 것, 즉 스탈린주의 뒤에 어떤 전체주의적 관료 체제가 숨어 있는지 즉각적으로 이해한다.

 

상황주의자들은 한때, 잡지를 통해 소련을 자본주의 국가들과 똑같이 고발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과 태도를 같이한다. 클로드 르포르 Claude Lefort25)와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Cornelius Castoriadis26)가 주도한 이 세력은 트로츠키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레닌적 공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길에 아주 깊숙이 나아가고 있었다. 드보르는 1960년 가을부터 이 그룹의 활동에 참여하며, 벨기에 탄광 대파업 때 가장 극렬한 참여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흔적을 뚜렷이 새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별이 행해지는데, 분명 상황주의자들을 “무정부주의적 부랑아들”로 여긴 카스토리아디스와의 불화 때문이었으며, 카스토리아디스의 오만 불손함은 드보르로 하여금 결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글을 쓰지 않도록 결심하게 만든다.

 

분명 더 결정적인 또 다른 만남은 앙리 르페브르 Henri Lefebvre27)와의 그것이었다. 20년대에 초현실주의자였다가 그후 1958년까지 공산당의 맹원이었던 이 지식인은 다시 기 드보르와 우정을 맺게 된다. 『일상 생활 비판』(1947)의 저자의 다채로운 생각들은 상황주의자들의 명제들과 결합할 수 있었다. 특히 소외에 대항할 책무, 부르주아가 일상 생활에 부여하는 비현실성, 과학과 기술이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그렇다. 르페브르는 “전인 homme total”의 실현이라는 개념 위에 상황주의자들을 겹쳐놓는다. 〔전인 개념을 통한〕 특정한 방식으로 철학자는 『포틀래치』 제7호에서 이미 정식화된 것과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유럽에서의 새로운 사상」이라는 제하의 글 ― 이 제목은 생쥐스트 Saint-Just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구적(前驅的)인 생각을 읽을 수 있다:“진정한 혁명적 문제는 여가의 문제이다. 경제적 금기들과 그에 수반하는 도덕적 금기들은 어쨌든 조만간 파괴되고 극복될 것이다.” 〔그러나〕 상황주의자들과 르페브르는 똑같이 젊은 마르크스의 『1844년 수고』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연장자 쪽이 도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는 망가지게 된다. 상황주의자들이 르페브르를 ‘파리 코뮌’에 관한 한 텍스트에 대해 표절이라고 비난한 후 그들은 결별한다.

 

1968년 5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자신들의 진영을 명확히 드러낸다. 독일 혹은 네덜란드 쪽 좌파의 “예술가들”은 혁명적 급진성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앙베르 Anvers에서 열린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제5차 회의에서 사람들은 이미 몇 년 앞서서 “강고한” 경향이 인터내셔널 전체의 주도권을 휘어잡았다는 것을 보았었다. 총괄적 자주 관리, 자발적 파업,28) 노동자 평의회 등의 강령들은 더욱 구체적인 윤곽을 그려나간다. 1966년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에서 파견된 무스타파 카야티 Mustapha Khayati의 『학생 환경의 비참함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이 대학 제도를 맹렬히 공격한 ‘스트라스부르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이미 5월 혁명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글이 영국, 스페인, 독일 그리고 미국에 신속히 번역되어 퍼져나갔다는 것은 상황주의자 개념들의 국제적 확산력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를 증명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일격은 기 드보르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1967년 11월 훗날 숭배의 대상이 된 『스펙터클의 사회』를 출간한 것이다. 그후 ‘스펙터클 체제 spectaculaire’라는 개념은 상황주의자들의 저술에서 점점 더 빈번히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드보르가 그것에 때마다 부여한 철학적이고 비판적인 뜻풀이는 균일하지가 않았다. 『스펙터클의사회』는 간단히 매스 미디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품과 그것의 생산 및 교환 법칙에 근거하여 스펙터클 체제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책의 첫 문장을 보자: “생산의 근대적 조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삶은 통째로 스펙터클의 거대한 집적으로서 고시된다.” 이것은 『자본론』의 서문을 다시 취하면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드보르는 221개의 명제 속에서, “스펙터클은 인간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품들과 상품들에 대한 정념을 노래한다”는 것을, 그리고, “경제가 세계를 변화시켰는데, 그 의미는 세계를 경제 세계로 변화시켰다는 뜻”이라는 인식을 획득함으로써 금융 축적은 이제 “이미지들”로 변모하였다는 것을 논증한다.

 

『스펙터클의 사회』가 출간 당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혁명적 비판으로부터 68년 5월 봉기의 행동으로의 이행을 선도할 첨병이 된다. 봉기의 건수는 당시 발표된 상황주의자 텍스트들의 수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그 중 첫번째의 텍스트는 『스펙터클의 사회』와 같은 해에 출간된 『젊은 세대를 위한 처세론』이다. 그 글의 저자인 라울 바네겜 Raoul Vaneigem29)은 앙리 르페브르가 기 드보르에게 소개했던 사람이다. 초현실주의의 태도와 근사한 반역의 정신에 해방의 영감을 뒤섞은 이 걸작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상황주의자의 틀을 넘어 전복에 관한 고전 중의 하나가 된다. 낮에는 시가지를 가득 메운 소요가 일어나고 밤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는 가운데, 1968년 5월 14일 르네 리젤30)의 ‘격노한 사람들’과 상황주의자들 사이의 만남이 진행된다. 이들의 동맹은 ‘격노한 사람들 ―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협의체’를 구성케 하며, 이 협의체는 소르본 대학 점거 농성을 지휘한다. 그들은 ‘자발적 파업’의 전면화, “프랑스 내의 모든 공장들의 즉각적 점거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 구성’을 요구한다. 6월 15일, 그들이 구성했던 점거의 지속을 위한 평의회(CMDO)가 몇 주간의 격렬한 행동 후에 해체된다.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드보르, 리젤, 카야티, 그리고 알리스 베커 호 Alice Becker Ho는 벨기에에 있는 라울 바네겜의 집으로 피신한다.

 

1968년 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르네 비에네를 저자로 밝힌 『점거 운동 속에서의 격노한 사람들과 상황주의자들』이 출간된다. 외면적으로 보면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영향력의 범위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소요들과 이에 상황주의자들이 개입한 일은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상황주의자를 지지하는 pro-situ” 신봉자들을 만들어내었다. 베니스에서 개최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제8차 회의에서 최초의 위기가 촉발된다. 1970년부터 제명과 탈퇴가 줄을 이었으며 그 중 리젤, 바네겜, 비에네가 포함되어 있었다. 드보르는 1972년 이탈리아인 지안프랑코 산구이네티 GianFranco Sanguinetti와 함께 『인터내셔널 내의 진정한 분열,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주기적 공적 행위』를 작성한다. 상황주의자 운동은 같은 해, 그 목표가 달성되었으며 이제 그 길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판단과 함께 자동 해체된다. 드보르는 인터내셔널을 제멋대로 부리다가 폐업했다는 비난을 듣게 되며, 드보르는 이에 대해 여러 차례 반박한다. ‘어둠 속의 인간’이라는 그의 신화가 이제 시작된다. 그는 1973년『스펙터클의 사회』를 영화로 개작한다. 촬영 이후 쏟아진 언론의 적대감에 맞서 드보르는 단편 영화, 「영화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에 지금까지 쏟아진 적대적이고도 유창한 모든 선고들에 대한 반박」으로 역공한다. 31)그의 작품에 대한 저널의 반응에 대한 이러한 주석 방식은 이 전략적인 작가의 두드러진 표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1993년에 출간된 『이 나쁜 평판』 같은 책들은 그가 경멸적으로 “미디어꾼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오려진 신문 조각들을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의 후견인이 될 영화 제작자 제라르 르보비시와의 만남은 그의 생애에 새로운 전환점을 이룬다. 그는 그에게서 자신의 ‘이력’의 또 다른 측면에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줄 분신을 발견한다. 우선, ‘자유 지대’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 그는 전복의 고전들 혹은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전쟁의 고전들, 발타자르 그라시안 Baltasar Gracian과 같은 바로크 사상가, 오마르 카이얌이나 요르게 만리크 Jorge Manrique ― 드보르는 이 시인의 카스티야어32)로 씌어진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노래한 시절(詩節)들』을 번역한다 ― 와 같은 고대 시인들, 또한 독일 다다이스트들의 저작들과 자기 자신의 책들을 출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빈번한 여행들은 그에게 ‘유배’를 체험케 한다. 그는 자신이 스펙터클 체제에 대항하여 싸울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특히 지안프랑코 산구이네티와의 연대를 지속적으로 맺는다. 드보르는 안달루시아, 베니스 그리고 그가 추방되게 되는 플로렌스에 체류한다. 1978년에는 그의 핵심적 작품 중의 하나인 『심야에 원무를 추고 추다가 우리는 불에 타 없어지리라』를 완성한다. 이 거대한 명상은 저자의 전 궤적을 자전적인 방식으로 되짚은 것이다. 비틀린 영화 숏들(「저녁의 방문객들 Les visiteurs du soir」33) 「소분대의 책무」34))이 파리의 이미지, 문자주의자 혹은 상황주의자 투쟁 동료들에 대한 회상 그리고 시간의 덧없는 흐름에 대한 장려한 반추를 번갈아 드러낸다. 드보르는 승리와 패주를 결산하며 회고록 기술자의 방식으로 역사를 세계의 허망함을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것으로서 제시한다. 베니스에서 찍은 시퀀스들은 『심야에 원무를~』에 폐허와 축제 사이에서 유동하는 시간 감각을 부여한다.1984년 3월 5일 파리의 한 주차장에서 그의 친구 제라르 르보비시가 암살당한다. 그것은 드보르적 사유의 음산함을 강화한다. 미제로 남은 이 범죄를 두고 언론의 모든 데스크들은 작가 - 영화인들에게 혐의를 씌운다. 그가 영화 제작자의 제거를 배후에서 조종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사는 중상으로 돌변하고, 드보르는 일련의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다.

 

그는 1985년에 『제라르 르보비시의 암살에 대한 고찰』을 출간한다. 이 책은 단순히 몇몇 언론인들과의 분쟁 결산서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전우를 통해 비추어본 자화상이자 그의 후견인을 위한 ‘비문’이다. 이탈리아에서의 체류는 그에게 스펙터클의 ‘흉책’에 대한 갱신된 인식과 관점을 제공한다. 1988년 출간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한 주석』은 기 드보르의 예전의 정치 분석을 다시 취하면서 심화시킨다. 그는 특히 전반적인 불신 풍조, 동구 공산주의의 고갈, ‘붉은 여단’이나 여타의 테러리즘 운동을 포함한 비밀 조직에 의한 조작을 꿰뚫어본다. 드보르는 소비에트 전체주의 사회의 ‘집중된 스펙터클 체제’와 민주 국가의 ‘산포된 스펙터클 체제’의 융합을 예견하고, 이로부터 ‘통합적 스펙터클 체제’란 개념을 끌어낸다. 그에 의하면 이 체제는 ‘스펙터클’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만큼 더욱 현전하는 독재 체제를 세운다. 이러한 전망 안에서 세계는 거대한 몽매주의와 비밀, 허위 그리고 전반화된 노예 상태의 시대로 접어든다.

 

다음해 그는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편에서의 회상』과 같은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될 혹은 어쨌든 생시몽이나 레츠 추기경의 회상록에 비견할 만한 전생애를 다룬 회상록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예찬』 첫 권의 출판은 기 드보르의 해박한 지식이 그의 시대에 대해 얼마나 독한 비판적 무기였는가를 상기시킨다. 고전주의적 검소함이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이 짧은 책은 전 생애를 통틀어 전개된 불복종의 경험을 압축하고 있다. 비용(“세상은 그저 낭비 abusion일뿐이다”),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토마스 드 퀸시, 이태백으로부터의 인용들이 저자의 산문과 함께 조화롭게 겹쳐 놓인다. 『예찬』에서는 기 드보르의 작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긴장, 즉 혁명에의 열망과 시대로부터 달아나려는 격렬한 감정 사이의 긴장 ― 그래서 모든 행동은 저마다 자신의 절멸을 품고 있어서 찰나 간에 사라지는 것 같다 ― 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자연 발생적 모순은 보쉬에 Bossuet의 추도문 혹은 오마르 카이얌의 시에서 말고는 거의 볼 수 없는 멜랑콜리를 야기한다.

 

드보르의 글쓰기는 역사를 통한 항거가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시간적인 것으로 화한다. 『예찬』의 제2권이 출간되었을 때 그는 이미 알코올 과잉으로 이어지는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질질 끌지 않기 위해 그의 삶에 결별을 고한 후였다. 최후의 유서가 된 작품은 오직 “증거들”로만, 즉 장소와 친구와 여인과 혁명적 계기들에 대한 사진으로만 이루어졌다. 거기에서도 가득한 인용들은 전통과 전위의 최후의 상속인인 전략가 기 드보르의 생이 유별난 방식으로 그의 시대에 방사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전생애를 통틀어 나는 혼란으로 가득 찬 시간들, 사회의 극단적인 찢어짐, 그리고 어마어마한 파괴들만을 보았다. 나는 이 혼란들에 협력하였다. 이런 정황들은 분명 나의 가장 투명한 행위 혹은 추론마저도 결코 보편적으로 동의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연보】

1914년: 덴마크 화가 아스게르 요른의 탄생.
1925년 1월 21일: 루마니아에서 이지도르 골드스타인 탄생(망명객이자 트리스탕 차라의 측근인 이 사람은 1945년 이지도르 이주 Isidore Isou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정착한다).
1931년 12월 28일: 파리에서 기 에른스트 드보르 탄생.
1946년: 예술 운동 COBRA 창립. 이 그룹은 특히 아스게르 요른과 네덜란드 건축가 콘스탄트에 의해서 활기를 띠게 된다. 그는 일종의 표현주의 형식의 예술을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초현실주의의 혁명 정신을 재발견하려고 한다.
1950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의 도발 행위. 수도사로 변장한 4명의 문자주의 그룹의 젊은이가 4월 9일 부활절 미사 도중에 성당으로 침입한다. 그들 중 하나가(미셸 무르Michel Mourre: 장래의 저명한 역사학자) 연단에 올라가, 신도들에게 “신은 죽었다”고 고시한다. 체포와 스캔들.
1951년 4월 20일: 이지도르 이주가 칸 영화제 한구석에서 그의 영화 「게거품과 영원에 관한 논고」를 상연한다. 또 하나의 문자주의자들에 의한 스캔들. 상영에 참석하여(장 콕토와함께), 기 드보르는 이주를 만난다.
1952년: 네 사람(드보르, 질 올만, 장 루이 브로 Jean-Louis Brau 그리고 세르주 베르나 Serge Berna)이 11월에 오베르빌리에에서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1952년에서 1954년까지, 잡지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이 4호까지 간행된다. 이지도르 이주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다(그는 끊임없이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정당하게 자신이 문자주의의 창설자임을 공언하였다. 그리고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을 문자주의 운동에서 “이탈한 분파로서 줄기차게 비판하게 된다).
1952년: 기 드보르가 미셸르 베른스타인을 만난다. 그의 동반자가 된 그녀는(1954년 8월 17일 결혼하고 1972년 이혼한다) 이후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 그리고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된다.
1954년: 잡지 『포틀래치』 창간. 1957년 종간할 때까지 29호를 발간한다. 기 드보르는 이해에 화가 아스게르 요른을 만난다.
1956년: 『포틀래치』 제25호(1956년 1월 26일)에 처음으로 “상황주의자”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이 용어는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창간호(1958년 6월)에서 명백히 정의된다. 이것은 ‘상황주의 situationnisme’35)라는 용어와 구별되고, 후자의 용어는 원칙적으로 배제된다.
1957년 7월: 이탈리아(코지오 다로치아)에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첫 회의가 열린다. 기 드보르는 여기에서 「상황들의 구축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아주 중요한 텍스트인이 보고서는 상황주의자 운동의 함축적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I. S.(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가 문자주의자 인터내셔널(이탈리아에서는 드보르와 미셸르 베른스타인에 의해 대표된), 상상주의 바우하우스를 위한 국제 운동(특히 아스게르 요른: 이 사람은 1961년I. S.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런던의 심리지리위원회(같은 이름의 창간호가 1958년 6월에 나온다)의 결속체로서 태어난다.
1958년: 기 드보르와 미셸르 베른스타인은 막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강의에 자주 참석한다. 장 보드리야르(그는 훗날 르페브르의 조교가 된다)와 다니엘 콘벤디트 Daniel Cohn-Bendit36)가 또한 이어지는 그의 강의를 듣는다(드보르는 1963년 1월에 앙리 르페브르와 결별한다).
1959년: 기 드보르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에 접근한다.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클로드 르포르 Claude Lefort 그리고 장 프랑수아 료타르 Jean-Francois Lyotard가 이끈 이 그룹은 국제 트로츠키주의의 극좌 분파였다. 그는 1960년 이 그룹의 공식 멤버가 되는데, 1961년 5월에 탈퇴한다.
1960년: 기 드보르가 제2차 121인 선언에 서명한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던 와츠 Watts 시가의 흑인 소요(8월 13일~16일)는 I. S.를 흥분시킨다. 그 흥분의 정도가 어떠하였는지는 중요한 문건, 「스펙터클 ― 상품 경제의 몰락과 파산」(『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제10호, 1966년 5월)이 증명한다.
1966년 11월: 상황주의자 한 조직에 의해 「학생 환경의 비참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뿌려진다. 그로 인해 세상이 떠들썩해진다. 이 문서는 1968년 5월 이전에 나온 가장 중요한 문건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의 조직은 금세 I. S.로부터 제명당한다.
1967년 11월: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출간. 그리고 12월에 라울 바네겜의 『젊은 세대를 위한 처세술』 출간.
1968년 1월: 상황주의자 운동에서 진화해나갔으며, 그 중 몇몇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과 재결합하게 될 ‘격노한 사람들’이 낭테 대학에서 선동 행위를 확산시켜나간다. 이러한 과열된 분위기 아래 3월 22일의 ‘소요’가 일어나고, 결국 68년 5월의 ‘사태’를 유발한다. 곧바로 I. S.는 소르본 점거위원회의 핵심에서 아주 활동적인 역할을 한다. 이 시기에 I. S가 빈번히 사용했던 두 개의 구호는 다음과 같다: “결코 일하지 말라.” 그리고, “죽을 여유도 없도록 살아라. 그리고 어디에도 구애받지 말고 향유하라.”1969년: 문예 후원자이며 영화 제작자인 제라르 르보비시가 출판사 ‘자유 지대’를 설립한다. 기 드보르는 그를 1971년에 만나 그의 친구이자, ‘자유 지대’의 가장 근면한 편집자가 된다. 이제 그의 책들은, 1971년 같은 제목으로 재출판된 『스펙터클의 사회』를 필두로 해서, 이 출판사에서 출판된다.
1972년: 1968년 이래, “상황주의자가 되는 것”이 유행이자 “풍조”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당시의 멤버는 겨우 3명이었다) 1972년 4월에 해체된다. 그때 ‘자유 지대’ 출판사에서 『인터내셔널의 진정한 분열.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주기적 공적 행위』가 출간된다(이 텍스트를 작성한 것은 드보르와 지안프랑코 산구이네티였다).
1973년 5월: 아스게르 요른 사망.1978년: 1968년 5월에 바쳐진 한 책에서 레지스 드브레이 Regis Debray ― 그러나 그는 정작 68세대가 아니다 ― 는 이렇게 쓴다. “5월의 ― 진정한 ― 정신과 그것을 ― 입에 올리는 ― 자들, 타이틀의 옹호자이자 횡령가들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곤 전자에 주저 없이 드보르를 넣는다: “바네겜과 드보르만이 5월의 진짜 천재이다.” 일종의 공적 인정이 이뤄진 것이다.
1981년: 1977년에 찍은 드보르의 영화 「원무를 추며~」가 상영된다.
1984년: 제라르 르보비시가 암살된다. 소문은 미제로 남은 이 죽음에 드보르가 책임이 있다고 몰고 간다. 드보르는 1985년 『제라르 르보비시의 살해에 대한 고찰』을 출간하여, 격렬히 자기를 방어한다. 곧 이어서, ‘자유 지대’ 출판사는 망자를 기념하여, ‘제라르 르보비시’ 출판사로 개명한다.
1988년: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주석』이 출간된다.
1989년 2월: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에 대한 전시회가 열린다(이어서, 런던과 보스턴에서도 열린다). 기 드보르는 『예찬』을 출간한다.
1993년: 기 드보르의 『이 나쁜 평판』이 출간된다.
1994년 11월 30일: 가슴에 총을 쏴서 기 드보르가 자살한다.
1995년 1월 9일: 카날 플뤼스에서, 「기 드보르, 그의 예술 그리고 그의 시대」가 방영된다. 요컨대, “스펙터클 체제”에 속하는 텔레비전 채널이 ‘스펙터클의 사회’라는 드보르 개념을 가로챈다.

 

기 드보르의 주요 저작
                                                    (발표 연대순)37)

1967년: 『스펙터클의 사회』(‘현실문화연구’에서 1996년 한국어로 번역됨)
1972년: 『인터내셔널의 진정한 분열』
1978년: 『영화 작업 전집: 1952~1958』
1985년: 『제라르 르보비시에 대한 고찰』
1988년: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주석』
1989년: 『예찬』 제1권
1990년: 『심야에 원무를 추고 추다가 우리는 불에 타 없어지리라』
1993년: 『이 나쁜 평판』
1997년: 『예찬』 제2권
1999년: 『서한집』 제1권
2001년: 『서한집』 제2권

▶‘스펙터클’이라는 개념

‘스펙터클’이라는 개념은 상황주의자들 일반에 있어서나, 기 드보르에게 있어서나 정의하기가 꽤 까다로운 개념이다. 그것은 이 용어가 빈번히 “스펙터클의 사회”와 연결되어서 다양한 함의를 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동적인 개념이다. 제한적으로는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을 ‘문화’ 혹은 ‘스펙터클의 문화’ ‘문화 산업’ ‘매스 미디어’ 혹은 ‘이미지들의 지배’와 동의어로서 스펙터클을 말한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흔히 텔레비전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축소되곤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의 서두에서부터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의 총체가 아니라, 이미지들의 매개에 의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중간적인 의미에서, 스펙터클은 간단히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상부 구조’가 될 것이다. 이때 개인들은 스펙터클에 의해 하부 구조적 조건으로 환원된다. 스펙터클은 헤게모니를 쥔 것으로 나타나고, ‘문화’와 마찬가지로, “의미없는 사회의 의미의 중심”(‘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이 된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스펙터클의 개념은 이데올로기를 포함한다(드보르는 스펙터클을 “물질화된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뜻한다. 이때 이 개념은 서양 자본주의와 동의어가 된다. 스펙터클의 사회는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가 삶을 장악하는 최종적 단계로서 나타난다: 인간들의 ‘존재’를 그들의 ‘소유’로 변형시킴으로써 인간들을 소외시키고 난 후에(사적 소유의 국면 그리고 산업화의 국면), 스펙터클은 ‘소유’를 ‘외양’〔소유한 것처럼 보이는〕으로 최종적으로 타락시키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이때 스펙터클은 가장 뿌리 깊은 소외를 실현한 상품 경제 사회의 전제적 지배에 다름아니다. 스펙터클은 소외와 동의어가 된다. 어떤 경우든, 이 개념은 ‘삶’이 아닌 어떤 것, 어쨌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을 참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정의로 귀착한다. 후기-실존주의자로서 기 드보르는 세상을 응시하는 사고의 피동성과 생체험의 빈약화를 줄기차게 고발한다. 따라서 스펙터클은 “사회적 원자들”이 듣는 동안에 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실재, “일상 생활”의 정반대다(르페브르가 사용한 의미에서). 스펙터클은 따라서 “체험되지” 않은 모든 것이다.

_ 번역: 정과리

 

각주내용

1) 이 글의 원문은, 『마가진 리테레르』 2001년 6월호의 특집,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의 첫 글로 실린 것이다.

2) 〔원주〕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저서로 『세계라는 무대의 연대기』가 있음.

3) Oliviero Toscani. 이탈리아의 사진가. 1982년부터 \‘베네통’과 손잡았다. 소위 베네통의 ‘총체 컬러united color’가 그의 사진에서 나온다.

4) 인터넷을 통한 신경제의 선두 주자 중 한 사람. 가상 공간 은행인 ZE Bank를 설립.

5) 프랑스의 TV 채널.

6) 절대 왕정 하에서 고전 미학을 완성하였던 17세기.

7) 상황주의자는 간단히 말해 ‘상황의 구축’에 참여하는 자를 가리킨다. 상황은 ‘상황의 구축’이라는 용어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즉, 상황은 ‘이미 있는’ 상황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상황이다(바로 이 점에서 상황주의자는 있으나, 상황주의는 없다). 이때 상황은 예술과 정치와 기술이 하나로 어우러져 일상 속에서 실현되는 사태, 혹은 차라리 그렇게 실현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일상 그 자체를 가리킨다.

8) 17세기의 모럴리스트. 당대의 인물과 사회에 대한 재치 있는 풍자가 돋보이는 『금언 Maximes』의 저자. 당대에는 무명이었으나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발굴된 19세기의 비의적 시인. 국역된 『말도로르의 노래』의 저자.

10)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의 조카인 시인이자 복서. 본명은 Fabian Lloyd임. 다다이스트 운동에 참여했고, 기행과 기벽으로 유명했음.

11) 〔원주〕 루마니아 태생(1925)의 시인. 종전 직후 프랑스에 정착했으며 『새로운 시와 새로운 음악에 대한 입문』(1946)과 영화 「게거품과 영원에 대한 논고」로 두각을 나타냄. 혁명적이고도 예술적인 그의 시도는 ‘문자주의 lettrisme’라는 용어로 요약되는데, 그에 의하면 문자주의란, 시의 근본적 ‘축약’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함. 즉, 보들레르의 ‘시심,’ 베를렌느의 ‘문장 phrase’(그리고 이것의 랭보적 파괴), 말라르메의 ‘단어’(그리고 트리스탕 차라에 의한 이것의 훼손)로부터 시작해 그것을 원초적 핵자로서의 ‘문자 lettre’로 압축하는 것이 문자주의의 목표이다. 그는 상황주의자들에게 이념의 모태를 제공했으나, 상황주의자들의 운동에 시종 비판적이었다. 그 비판적 글들의 모음이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에 반대한다』로 출간되었다.

12) ‘낡은 세계’란 예술에 집착하는 문자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예술을 정치에 복무시키는 각종 정치 이념들이 함께 공모하여 이루고 있는 세계이다.

13) 심리지리란 인간의 정신적 상태와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리적 환경에 대한 탐구로서, “심리의 지도 mental mapping로서 작성된
도시 환경 비판을 통해 사회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

14) 포틀래치 Potlatch는 잘 알다시피, 받은 선물의 가치에 상응하는, 혹은 훨씬 초과하는 제의적 반대 증여 혹은 제의적 파괴를 보여주는 북아메리카 북서부 태평양 해안 인디언들의 풍습이다. 서양 사회의 철저한 계산-교환 관계와 대비된 이 풍습은 서양 지식인들 대부분의 저서에 적어도 한두 번 이상 등장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5) 연보 참조.

16) 아스게르 요른, 벨기에의 작가들 크리스티앙 도트르몽 Christian Dotremont과 조셉 느와레 Joseph Noiret, 그리고 네덜란드인 카렐 아펠 Karel
Appel, 콘스탄트 니외벤후이스 Constant Nieuwenhuis, 코르넬리스 반 베베를루 Cornelis Van Beverloo 등이 제도화된 아카데미 미학에 반대하며 세운 미학 집단으로 1948년에서 51년까지가 가장 활동적인 시기이다. 그룹 명칭 COBRA는 설립자들의 나라 수도(코펜하겐의 CO, 브뤼셀의 BR, 암스테르담의 A)에서 따왔으며, 이것은 창조의 중심지가 파리, 런던,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유럽의 주변으로 이동하였음을 상징한다.

17) 아스게르 요른은 막스 빌 Max Bill이 주도하고 있던 울름의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에 대항하고자 1953년 국제 운동 조직으로서의 ‘상상주의
바우하우스’를 창설한다.

18) 르 코르뷔지에가 1947년에서 1952년 사이에 마르세유 Marseille에 건축한 거대 주택 건물. 근대 건축의 상징인 르 코르뷔지에는 기능성을 최대 한도로 높인 ‘빛의 단지’ 개념을 줄곧 주장했는데, 마침내 마르세유에서 그의 구상을 실현할 기회를 맞는다. 그러나 이 건물은 건축되자마자, 건축가, 의사, 기자 들의 격렬한 반발을 산다. “정신 의학자들은 이 거주지가 주민들을 치유될 수 없는 정신병자로 만들고 말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19) 실험적 행동들에 역동적으로 연결된 환경의 통합적(통합적이란 ‘정치, 예술, 일상이 한꺼번에 어우러진’이란 뜻을 갖는다) 구축을 주도하는 예술과 기술의 결합과 그 활용에 관한 이론.

20) 17세기 귀족들의 반란.

21) 잘 알다시피, 고다르와 레네는 누벨 바그의 대표적 영화 감독들이다. 이들의 영화를 ‘근대적’ 영화로 지칭한 것은 그들의 초기작에 근거한 것이라 할지라도 드보르의 미적 극단성을 엿볼 수 있다.

22) 1975년 작품.

23) 1960년 8월 알제리 전쟁에서의 고문에 항의하고, ‘불복종’의 권리를 요구한 지식인 121인의 선언.

24) 출판 편집자. 비판적 공산주의자. 「121인 선언」의 주 작성자 중의 하나.

25) 1924년생. 프랑스 정치 철학에 르네상스를 가져온 주역이자, 특히 전체주의에 대한 단호하고도 강도 높은 비판을 최초로 제안한 지식인 중 하나. 그 연장선상에서 ‘관료제’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를 내놓음. 사르트르와의 논쟁 이후 묵묵히 일에 전념했으나, 전체주의 비판과 ‘민주주의’를 정치, 법률 제도로서가 아니라 ‘아직 출현하지 않은 사회의 한 형태’로 정의한 그의 깊은 이해 덕분에 70년대 중반 이후 재조명되고 있음. 마키아벨리의 전문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깊은 이해자로서도 명성이 있음.

 

26) 그리스 태생(1922~1997)의, 다방면에 능통한 철학자. 레지스탕스에 참가한 적 있는, 트로츠키주의자.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분석하길 제안함. 당시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에 집착함으로써 결여하고 있던 ‘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촉구했으며, 그에 상응하여, 사회와 개인 모두의 차원에서의 ‘자율성의 이상’을 제기함. 75년 출간된 『사회의 상상적 제도』1권이 국역되어 있다. 말년의 3부작, 『미로의 십자로 Les carresfours du labyrinthe』은 세계의 음울한 전망에 맞서 그의 철학을 종합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27) 프랑스의 실존주의 마르크시스트(1901~1991). 20년대부터 일찍 지식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마르크시즘과 공산당에 대한 신뢰를 평생 버리지 않았다. 당대에 유행한 다른 사상들에 비해 항상주변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그 덕분에 당대의 지배적 비판 사상들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가령, 사르트르, 『구조주의 비판』). 다수의 저서가 국역되어 있다.

28) 자발적 파업은 지도부의 지시 없이 현장의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파업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29) 1934년생. 에세이스트며 종교사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행동가.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에 있었으며, 본문에 소개된『젊은 세대를 위한 처세론』은 68혁명에 불을 당긴 세 가지 저작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1995년 출간한 『초중고등학생들에게 알림』은 같은 해 일어난 ‘고등학생 파업’ 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최근의 저서는 『인간적인 것의 권리 선언』(Le cherche Midi, 2001)이다. 현재 벨기에 거주.

30) 행동가. 그는 최근에도 조셉 보베와 함께, ‘유전자 식물 반대 운동’에 격렬히 참여하고 있다.

31) 이러한 비판 방식을 17세기의 몰리에르에게서 이미 발견할 수 있다. 몰리에르는 자신의 희극 「아내들의 학교」에 쏟아진 비판과 비난에 대해,「아내들의 학교 비판」이란 극으로 대응한다.

32) 카스티야어는 현재의 표준 스페인어이다.

33) 마르셀 카르네 1942년 작품.

34) 미카엘 퀴르티즈 Michael Curtiz의 1936년 작품.

35)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창간호에 의하면, ‘상황주의’는 의미없는 용어이다. 그런 게 만일 있다면, “존재하는 사실들에 대한 해석 이론”이될 텐데, 그런 상황주의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반-상황주의자들이 만든 용어이다.

36) 68년 5월 학생 세력의 주역 중 한 사람. 당시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였음. 현재 프랑스 녹색당 당수.

37) 이 저작의 대부분은 Gallimard, Fayard 그리고 Mille et une nuits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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