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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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의 본의 왜곡 아닌가…체계 넘어서려는 노력 실종 | ||||
해외동향: 기 드보르의 영화전집 DVD 세트와 저작집 발간의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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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보르의 ‘영화 전집’ DVD 세트와 ‘저작집Œuvres’이 잇따라 발간됨에 따라, 대중들 사이에 40년 전의 아방가르드 유령들이 또 다시 출몰하고 있다. ‘영화 전집’은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이 기 드보르가 연출한 여섯 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복원하고, 서한집에서 영화 관련 구절들을 발췌한 책자를 끼워 넣음으로써 전집으로서의 구색을 갖추었다.
‘저작집’은 기 드보르에 대한 연구서를 출판한 바 있는 뱅상 카우프만의 책임 하에 간행되었으며, 1천9백 쪽에 이르는 이 책에는 연대기 순으로 정렬된 기 드보르의 저작, 발표문, 기사, 편지, 사진 등이 담겨 있다.
이 두 도구 덕분에 기 드보르 및 상황주의자들에 대한 연구는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싸야스와 카우프만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야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이 작업들은 기 드보르의 전략의 아포리아를 제기한다.
기 드보르가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1952)에서 시도했던 실험들―백색 화면 위를 표류하는 화면 바깥의 목소리(voix off)와 검은 화면의 침묵의 교체, 그리고 영화 시작 3분 뒤에 들려오는 "영화는 없고, 시네마는 죽었다. 더 이상 영화는 있을 수 없다. 원한다면 토론으로 넘어가자"라는 도발적 선언―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영화 클럽'에서 그 영화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 쏟아졌던 관객들의 반발과 상영 중단 해프닝은 오히려 기 드보르의 反-영화, 영화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도구로서의 영화가 성공을 거둔 사례다. 화면 밖으로 나와 목소리를 키우고(voix on)―극장, 그리고 스펙터클 안에서는 떠들면 안 된다― 삶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상황을 구축"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씨릴 네이라가 지적하듯이, 드보르에게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 스펙터클의 작동에 참여하므로, 영화는 스펙터클의 전복의 도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DVD에 담긴 매끈한 영상들은 이제 하나의 영화 '텍스트'이자, 이미지-표상으로서 분석 대상이 될 것이다.
1984년에 친구, 편집자, 영화 제작자였던 제라르 레보비시가 암살된 이후, 기 드보르는 자기 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금지했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만에 다시 개봉된, 소문만 무성했던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에 씨네필들은 열광했고, 그들은 그 서정주의적 이야기 속에서 '모던 영화(cin?ma moderne)'의 기운을 찾아내고자 했다.
이 현상은 드보르의 영화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미학을 발견하려는 시도이긴 하지만, 예술로서의 삶이나 삶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종말과 폐지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했던 드보르의 전망을 흐리게 만든다.
이것은 학계에서 드보르를 연구 대상으로 '전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저작집’은 드보르의 아포리즘들 사이의 공백을 메움으로써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반면, 독자들의 전용(d?tournement) 가능성을 줄인다.
‘르 피가로’의 서평은 "‘저작집’이 드보르의 저작들을 하나의 '고전'으로 만든다"라면서, 이 상황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한 편으로, 이제 드보르가 학계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드보르는 이제 아카데미에 포획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상황주의자들이 체계 바깥에 위치한 삶과 상황을 구축하려는 "관념적인 (그러나 이미 통속적인 것이 되어버린) 유토피아"를 추종한다고 비판하며 스펙터클 개념을 지양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말년의 기 드보르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은, 보드리야르의 평가와는 정반대로 드보르가 스펙터클 체계 내에서 그 체계 자체를 이용, 보다 정확히는 "전용"함으로써 그 체계를 해체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기 드보르의 마지막 내기에도 불구하고, 스펙터클이라는 "이미지가 되어버린 자본"은 (정치적) 급진성마저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소비해버렸다. ‘영화 전집’과 ‘저작집’을 보면서, 우리가 한번쯤 아니 여러 번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전략적' 질문들이다. 체계 안에서 체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양창렬 / 프랑스 통신원·파리 1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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