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6호] 2010년 11월 05일 (금) 17: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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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마치 자유로운 존재처럼
[Spécial] 나쁜 명령과 질긴 저항
슬라보예 지젝
마드리드, 아테네, 부쿠레슈티, 파리에서 사회적 격분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대중의 분노로 드러나고 있다. 아직까지는 변화를 성공시키고 변화가 가져올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 전략이 부족하다. 변화가 실현될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황을 그냥 내버려두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할까? 아니면 때로는 “불가능이 도래한다”고 장담해야 할까?
올해 그리스와 프랑스뿐 아니라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 급격히 확산된 긴축재정 반대 운동은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만들어냈다. 한쪽은 권력과 미디어가 조장한 위기의 탈정치화에 근거한 것으로, 정부의 단호한 긴축 조치는 정치적 선택이 아닌 긴급하고도 절대적인 재정적 필요에 따른 기술적 해결책이며, 경제 안정을 원한다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도리라는 것이다. 다른 쪽, 즉 파업과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긴축 조치란 자본의 지배를 받아 복지국가 최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 국제통화기금(IMF)은 질서와 규율 존중에 열렬한 관심 있는 중재자로 여겨지고, 두 번째 경우 IMF는 또 한 번 세계화된 ‘금융 보충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원문 보기>>
두 관점은 각각 어느 정도 맞는 말이면서 근본적으로는 잘못됐다. 유럽 지도층의 방어 전략은 엄청난 공적자금 적자가 대부분 은행 구제금융으로 탕진해버린 수백억 유로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리스에 지원된 대출이 일차적으로 프랑스와 독일 은행에 대한 채무 결제에 사용되리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유럽의 그리스 지원은 민간금융 분야 구조 외에 다른 기능이 없다.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지적사항은 현재 좌파가 처해 있는 정신적 빈곤 상태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거기에서는 어떤 실용적인 측면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사회적 기득권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원칙이 드러날 뿐이다. 사회운동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이제 더 이상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그 체제가 복지국가 유지에 적응해나갈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데 있다. 이런 방어적 입장은 반박하기 힘든 반론을 부른다. 즉 우리가 체제에서 가장 관심 있는 것을 유지하려면 노동자와 학생, 퇴직자에게 강요되는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정된 예산 속에서 언젠가는 모든 게 정상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으며 복지국가 체제를 유지해온 지 수십 년, 우리는 이제 영구적 경제위기 상황에 들어서고 있다. 여전히 더 엄격한 긴축정책을 펴야 하고, 건강·퇴직·교육 문제는 더 가혹해지고, 고용은 더 불안해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은 것이다. 좌파는 궁지에 몰려, 경제위기는 무엇보다 정치적 위기라고 설명하는 위험한 도전을 감행해야만 한다. 현 체제가 경제적 재앙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일종의 사이비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위기는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현 체제는 본질적으로 일련의 정치적 결정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좌파여, 이게 고작 정치 위기인가?
현재까지 계속되는 위기의 결과가 제한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럽 자본주의가 국민 대다수에게 만족스러운 생활 수준을 계속 보장해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위기가 가져올 손실이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는 ‘급진성’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물론 반자본주의자들도 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의 횡포에 대한 비난에 묻혀 있다. 환경을 훼손하는 산업가, 은행 금고는 공적 자금을 빨아들이는데 정작 자신은 엄청난 보너스로 살찌는 은행가, 아이들을 고용해 하루 12시간씩 노동시키는 유명 기성복 납품업자를 다루는 신문 기사와 텔레비전 르포, 베스트셀러 등이 매일 넘쳐난다.
▲ 말라이카 베버의 저서 <거리 노동자의 춤>(Street Workers Dance)에서 발췌한 사진(2010년 7월, www.malaika-photography.com) |
어느 때보다 오늘날, 마르크스적 분석이 신선함을 간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유의 문제, 적어도 국제기구에서 어느 한 국가를 평가할 때 참조하는 문제, 즉 선거는 자유롭게 치르는지, 사법부는 독립성을 유지하는지, 인권은 존중되는지 하는 문제는 정치계 내에서 우선적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의 핵심은 노동에서부터 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관계라는 ‘비정치적’ 망 속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생산 체제 내에서 사회관계의 변화다.
사람들은 선거인에게 누가 무엇을 소유해야 하고, 그들의 일터에서 어떤 관리규정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태도를 표명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정치계에서 멀리 떨어진 분야, 예를 들어 시민의 관리 통제를 받는 ‘민주적’ 은행을 조직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일에 정치계가 합의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런 분야에서 급진적 변화는 합법적 권리 영역을 넘어선다.
물론 민주적 절차를 통해 사회적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절차는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라는 도구의 장치고, 부르주아 국가의 역할은 최상의 자본 재생산을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민주 체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역(逆)인 폭력이라는 두 가지 숭배대상이 동시에 전복되어야 한다.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적 개념의 핵심에는, ‘평화로운’ 사회생활은 지배계급의 (일시적) 승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억압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배계급의 도구로서 국가의 존재 자체가 폭력행위가 된다. 폭력은 결코 정당하지 않지만, 때로 필요한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소신은 대단히 불충분해 보인다. 급진 해방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전제는, 억압당하는 자들의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상태 자체가 바로 폭력- 결코 필요하지 않은- 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에 대항해서 무력을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은 완전히 전략적 문제다.
먼 곳에서의 혁명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가 겪는 경제 비상상황에서, 우리는 맹목적인 재정 이동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과 금융기관이 신중하게 저울질한 전략적 개입이라는 문제를 상대해야 한다. 공권력과 금융기관은 자신의 기준과 이익에 따라 위기를 해결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반격을 시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은 급진적 지식인의 안위를 뒤흔들 수밖에 없다.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생활수준 보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재난 시나리오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들 중 상당수는, 만일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들의 경력을 장식하는 동시에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 위해, 그 혁명은 그들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 쿠바·니카라과·베네수엘라- 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진 산업경제 속에서 복지국가가 와해된다면 급진적 지식인은 그들의 진리, 즉 그들이 진정한 변화를 원해왔고 지금 그런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진리의 순간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영구적인 경제 비상상황으로 좌파가 즉각적인 ‘실질적 유용성’이 없더라도, 끈기 있는 지적 작업을 포기하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점차 사상의 진정한 기능이 사라지고 있다. 사회, 즉 국가와 자본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는 방식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주어진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1968년 이후 포스트 자본주의 기간에는 ‘경제’- 시장논리와 경쟁논리- 가 핵심 이데올로기로 부각됐다. 가령 교육 분야를 보면, 학교는 국가가 애지중지하던 자유·평등·박애 같은 계몽적 가치의 성역으로서, 시장에 예속되지 않은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라는 성스러운 경구에 근거해, 교육은 다양한 형태의 공공·민영 파트너십의 공략을 받게 됐다. 정치 분야에서는 권력을 조직하고 합법적인 것으로 만드는 선거가 갈수록 자유주의 기업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투표는 상거래와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선거인은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사회질서를 최대한 잘 유지하고 범법자들을 벌할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한다.
마찬가지 원칙에 근거해, 교도소 관리처럼 공권력에 국한돼 있던 기능이 이제는 민영화될 수도 있다. 군대는 더 이상 징병에 의존하지 않고 용병에 의존한다. 국가 관료정치는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체제가 지겨울 정도로 보여준 것처럼, 헤겔식 보편적 특성을 상실했다. 오늘날 이탈리아에서는 부르주아지들이 오직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합법적 권력을 신중하지 못하게, 공개적·직접적으로 행사한다. 이런 관계는 시장의 법칙을 등지지 않는 커플 관계에까지 나타난다. ‘스피드 데이트’, 즉 인터넷이나 결혼상담소를 통한 만남이 그것이다. 미래의 파트너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는 그들을 상품으로 간주하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자질을 자랑하고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고르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지배세력에 불가능은 없다
이런 다양한 현상의 주변에서, 사회의 급진적 변화라는 생각은 불가능한 꿈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잠시 멈춰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바로 ‘불가능’이다. 오늘날,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구분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불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의하는 데 지나친 면도 있다. 레저나 테크닉 관련 분야에서 사람들은 “불가능은 없다”고 우리를 괴롭힌다. 다양하고 방대한 섹스 서비스를 즐길 수 있고, 마치 백과사전처럼 문서 처리된 노래와 영화, TV 시리즈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심지어 우주 여행도 가능하다(물론 우리가 백만장자인 경우).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는 인간 게놈(Genom·유전체) 조작을 통해 우리의 신체적·정신적 역량을 최대화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의 신원을 하드디스크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변환함으로써, 불멸성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려는 꿈도 이제 거의 이루어지는 단계에 다다랐다.
반면 사회·경제학 분야에서, 우리 시대는 인류가 완숙기에 이르렀다는 믿음으로 특징지어진다. 1천 년도 더 된 낡은 유토피아를 포기할 줄 알고, 현실을 둘러싼 모든 불가능과 더불어 현실의 제약(여기서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말한다)을 받아들일 줄도 안다. “당신은 할 수 없다”가 지상명령이고, 첫 번째 계명이다. 당신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 테러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대규모 단체행동에 참여할 수 없다. 당신의 경쟁력을 상실하고 경제위기를 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복지국가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북한’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한, 세계경제에서 고립될 수도 없다. 생태학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런 금지목록에 자신의 금지사항, 즉 전문가들의 견해에 입각한 그 유명한 최소 가치- 2℃ 이상의 기후온난화는 안 된다- 를 추가한다.
자유로운 존재처럼 행동할 때
오늘날 지배 이데올로기는 급진적 변화의 불가능성, 자본주의 철폐의 불가능성,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대립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동시에 의회를 ‘부패게임’의 공간으로 타락하지 않게 하는 민주주의 창출은 불가능하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그래서 자크 라캉은 이런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격언을, 그보다 더 간결한 “불가능이 도래한다”는 명제로 대체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네팔의 마오주의 정부는 폭동이 아닌 ‘공정한’ 민주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절망적이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가고 있고, 그 어떤 ‘객관적 경향’에 기댈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외관상 출구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그들에게 예외적인 자유를 부여하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좌파가 마찬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 않은가?
현재 우리 상황은, 좌파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적절한 순간을 끈기 있게 기다려야 했던 20세기 초의 지배적 상황과 정반대에 놓여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즉시 행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기력이 곧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인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글•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철학자. 주요 저서로 <종말을 살다>(런던·2010) 등이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와 역서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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