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8호] 2011년 01월 07일 (금) 18: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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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공산주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
에블린 피에예
공산주의의 이상(理想)이 한물 건너간 것 같아 보이는 시대에, 공산주의 이상을 표방하는 철학자가 프랑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진정한 평등의 조건에 귀기울이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민주주의적 합의와의 근본적 결별을 주장한다.
얼마 전부터 철학은 상아탑을 빠져나와 삶을 계획해나가는 데 활기를 돋워주고 있다. 원래 윤리 영역에서 활용되던 철학이 이제는 정치의 장(場)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시장 법칙과 이데올로기의 종말로 대변되는 오늘날, 철학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는 돌파구가 되고 있다.
지젝과 어깨 나란히
장 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참여 문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반면에 짧은 풍자문과도 같은 <사르코지는 무엇의 이름인가>(1)가 보여주는 생생한 매력을 넘어서, 알랭 바디우의 최근 저서들은 예상치 못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저작들이 자본주의 비판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현재 혼돈의 시대에 이건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이 비판이 역사 속에서 실패와 독재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멋진 고어(古語)’(2), 즉 공산주의 찬양과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현재 누리는 명성과 영향력은, 이제 더 이상 체계를 설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과 포기와 체념에 대항하는 투쟁이 꿈과 무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이제, 저명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바디우의 급진적 대안의 바탕이 무엇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강령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철학을 지배적 여론을 뒤흔드는 힘으로 이용
바디우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진정한 평등의 이상을 ‘혁명적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자기들만이 지성의 보유자라고 생각하는 ‘엘리트’들의 경멸 속에 혁명적인 것을 찾아내기는 힘들다. 바디우가 ‘동물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장해물이다. 자신과 정체성에 대한 애착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선호하도록 만들고 이런 위험한 본성은 소유 안에서 활짝 피어난다. 보통선거, 자아들의 선거….
민주주의-자본주의 관계 갈파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탐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우파의 변함없는 생각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바디우는 초월의 능력,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 필연성보다 모든 사람을 위한 가치 있는 진실 원칙을 우위에 두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동물성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가련한 ‘동물 종’(7)을 구원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모든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고 상정하고, 인간은 무엇보다 교육에 의해 여론의 다른 앞잡이들과 충동을 혼동하지 않도록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자아의 동굴을 빠져나오는 일은 점진적인 것도 계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디우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과의 조우에서 느끼는 충격 속에서 가능해진다. 역사적, 예술적 또는 사랑의 행위는 보편적인 것보다 개인을 눈에 띄게 하는 최고의 가치에 대한 합의를 깨면서 돌연 눈에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생각할 수조차 없는 가능성을 출현하게 만든다. 이런 돌연한 이탈은 ‘정체성의 동물적 유한성’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결국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그리고 초월로 인도해준다.
그러나, 추상적이고 안전하다
가능성들의 이 충격적인 열림은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어떻게 돌연 잘못에서 벗어나 진리를 맞이하게 되는가? 어떤 우연으로 사람들은 ‘선택’되는가? 초월의 활성화는 기이하게도 ‘은총’과 비슷해 보이고, 다른 식으로 ‘개종’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맞이하는 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바디우의 작품에 정통한 지젝이 “종교적 계시는 그가 고백하지 않은 은밀한 패러다임”(8)이라고 강조할 때 우리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 대한 글을 쓰고, ‘가능한 보편성의 개인적 경험’을 주제로 삼아 대화 형식의 책(9)을 펴낸 이 플라톤주의 철학자에게 ‘공산주의 가설’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나아가 불법 체류자로 상징되는 궁극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우리 모두의 이름으로 인간적 삶과는 다른 생각을 표명하려 하기 때문에 그들이 영예를 안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왜 공산주의가 존재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유지하지 못함에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언제나 위협적인 ‘정체성의 지배를 조절’하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계몽 귀족·철학자이자 진리의 보유자 말고 어느 누가 이런 선택, 이런 단언에 불평등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사상이 없다면 대중의 방향 상실은 불가피하다.” 물론 1천 년 혹은 2천 년 내에 플라톤적 의미에서 사회가 교육되는 날,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에덴동산’을 기다리는 동안 공동의 선(善)을 널리 알려야 한다. 항상 ‘문화적 혁명에 대한 우리의 빚은 거대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미덕도, 공포정치도 원치 않는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생쥐스트의 질문, 달리 말하면 불평등한 민주주의만을 원한다는 생각을 인정하는 철학자 바디우는 그런 점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바디우의 ‘가설’은 전율적인 면이 있다. 반면 이런 ‘공산주의’는 당장 기존 질서를 동요시키지 않는다. ‘대중주의적’ 보통선거에 대한 공격은 좀처럼 혁명적이랄 수 없는 ‘총독 관저’ 신봉자들을 만족시켜줄 뿐이다. 정당이나 노조 범주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행동을 거부하는 일은 체제 유지자들을 기쁘게 할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대적 진리를 명백히 나타내는 영적 단언은 마르크시즘에서 벗어난 공산주의, 너무추상적이고 결코 위험하지 않은 유토피아가 가진 낭만적 매력으로 장식된 공산주의를 선사해줄 뿐이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와 역서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알랭 바디우, <조건들 4: 사르코지는 무엇의 이름인가?>, 누벨 에디시옹 리뉴(Nouvelles Editions Lignes), 파리, 2007.
(2)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공산주의 사상>, 누벨 에디시옹 리뉴, 파리, 2010.
(3) 알랭 바디우, <제2차 철학을 위한 선언>, 파야르, 파리, 2009.
(4) 알랭 바디우, 알랭 핑키엘크라우트, <해설: 오드 랑슬랭과의 대화>, 누벨 에디시옹 리뉴, 파리, 2010.
(5) 프랑스퀼튀르, 2010년 2월 27일.
(6) 알랭 바디우, <조건들 5: 공산주의 가설>, 누벨 에디시옹 리뉴, 파리, 2009.
(7) 대담, www.legrandsoir.info.(8)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Verso, 런던, 1999.(9) 알랭 바디우(니콜라 트뤼옹 공저), ‘사랑 예찬’, <카페 볼테르>(플라마리옹·파리·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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