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8호] 2011년 01월 07일 (금) 18:17:12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4
부르디외는 없다
피에르 랭베르
경제 시스템이 온갖 폐해의 주범으로 몰리며 갈수록 거센 비난을 받는 가운데, 이와 관련해 대중은 시위를 벌이고, 학자들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어떤 총체적 이론도 두 요소를 연계해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 프로젝트를 구축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들이 구성하고 활용하는 기관들은 지금도 학술적 문화와 투쟁적 실천의 조화를 이뤄낼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파리 리옹역 로비는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곳곳에 현수막이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 연사를 향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 바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철도 노동자를 상대로 연설하는 중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공공서비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세력에 저항하며 3주 전부터 투쟁해온 모든 분들께 우리의 지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프랑스 지식인이 노동자 곁에 선 모습은 1970년대 이래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1995년 12월 12일 화요일, 알랭 쥐페 총리가 주도한 사회보장 및 연금에 관한 이른바 ‘개혁’ 법안에 반대하는 200만 명이 거리시위를 벌였다. 파업이 시작되자 낯선 모습과 낯익은 모습이 오버랩됐다. 한편에는 임금노동자들이 있었다. 1980년대 산업구조조정 당시 철학자·언론인·정치인은 자신들이 이들을 골방에 꽁꽁 가둬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비판적 연구자들이 다시금 등장했다. 이들은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경제 현장에 관해서도 사상적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상반되는 어조의 탄원서 두 건이 프랑스 지성계의 분열을 드러냈다. ‘사회보장의 근본적 개혁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첫 번째 탄원서는 쥐페 총리의 법안이 “사회정의와 맥을 같이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가톨릭 좌파 평론지인 <에스프리>, 생시몽 재단,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을 위시해 시장에 동조하는 좌파가 탄원서 서명의 주축이었다. 또 다른 탄원서의 제목은 ‘파업노동자를 지지하는 지식인의 호소’로, 이때까지 뿔뿔이 저항운동을 벌이던 대학교수, 노조 및 협회 운동가들이 뜻을 함께했다.
부르디외가 철도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한 지 15년이 지난 오늘날, 저항적 사상의 생산자들과 이들이 몸담은 기관, 그리고 사회운동의 관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서점이나 각종 집회, 사회과학 세미나 등을 보면 모순된 두 가지 움직임이 공존하는 듯하다. 한편에서는 비판 사상이 예리해지는 동시에 확산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전문성을 띠며 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규범을 따르는 추세다.
1995년 시위는 독립출판의 쇄신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레종다지르(1996), 아곤(1997), 라파브리크, 에그질(1998), 막스밀로(2000), 암스테르담(2003), 레프레리오르디네르(2005), 린니으(2007) 등 출판사 30여 곳(1)이 탄생해 비판적 저작물의 보급에 힘쓰고 있다. 이들의 간행물은 여러 가지 차이와 다양성을 뛰어넘는 공통적 특성이 있다. 바로 번역물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과거 산업적 출판업계에서 거들떠보지 않던 저작물들을 프랑스어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이 출판사들이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고집을 부린 덕분이다. 오늘날 쉽게 접할 수 있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의 저서들이 대표적 사례다. 뿐만 아니라 1960~70년대 영국 신좌파가 내놓은 문화·역사·사회 분석(스튜어트 홀·레이먼드 윌리엄스·페리 앤더슨), 경제학자 조반니 아리기,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의 신마르크스주의 저서, 남성·여성, 성(性), 피지배층 정체성에 관한 연구, 지금은 이름이 잘 알려진 주디스 버틀러,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예 지젝의 글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동시에 대여섯 종의 평론지가 출판사의 지원으로 등장해(2) 이런 텍스트들을 소개하고 논하고 프랑스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텍스트의 저자 및 평론가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거의 대부분 고등교육 및 연구기관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 역사학자인 페리 앤더슨은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라틴계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략) 영국, 미국, 독일연방,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는 전후 시기에 (라틴계 국가 같은) 기대와 희망을 불러일으킬 법한 대중적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다.”(3) 1970년대 중반 많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을 때, 영국과 미국 등지의 대학교수들은 <뉴 레프트 리뷰> 등 평론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초석을 깔았다. 하지만 여전히 학계의 성채 안에 갇혀 있던 터라 이들의 저작 번역물을 이해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왼쪽으로, 다만 상업적으로
1997년 갈리마르 출판사의 <역사의 서재> 총서 총괄 담당인 피에르 노라는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아직도 ‘혁명적 대의에 멀리서나마 애착’을 표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쓴 <극단의 세대>(4)의 출간을 거부했다. 노라는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안 먹힌다. 그게 현실이고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5) 하지만 자본주의가 격변을 겪고 대안세계화운동이 국제적으로 발전하면서 1980년대 오른쪽으로 치우쳤던 이념의 추도 중심을 되찾았다.(6) 시대는 변했고, 투쟁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 결실을 장사꾼들이 거두기도 했지만 말이다. 독립출판사들의 주도로 발간된 비판적이면서 까다로운 내용의 서적들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대형 출판사들은 다시금 저항을 유망 분야로 인식했고, 투쟁가들의 시선(과 지갑)을 유인하기 위해 공들여 준비한 각종 총서를 대거 선보였다. 레종다지르 출판사가 내놓은 투쟁 총서의 초기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자 이를 무시하려 안간힘을 쓰던 <르몽드 데 리브르>(일간지 <르몽드>가 주 1회 발행하는 도서 섹션)도 2010년 11월 26일자에서 ‘저항적 글’을 비중 있게 다루며 저항적 문체를 높이 평가했다. 그동안 변방에 머물렀던 미디어, 고삐 풀린 금융, 서구 질서에 대한 비판이 이제는 상업적으로 각축을 벌이는 분야가 된 것이다.
1930년대 초, 폴 니장은 보수적인 대학에 ‘감시견들’이 우글대는 모습을 묘사했다.(7) 1960~70년대 급진적 격변기에는 인문과학, 사회비판, 혁명이 함께 발맞춰 나가는 듯했다. 두 시대를 나란히 놓고 보면 대학은 제도권에 주춧돌을 마련해주고 의지하는 동시에 맹렬한 혁명가들을 배출하는 역량을 갖춘, 한마디로 갈등이 도사리는 기관임을 알 수 있다. 비판적 출판 부문이 학계와 교수·연구자들에게 견지하는 매료와 거부의 이중적 관계도 바로 이런 모순에 힘입어 증폭된다. 인문과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거나 이미 학위를 취득했지만 지적 작업과 저항 활동을 병행할 수 있게끔 고등교육이나 연구 분야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30~40대 남성이 전형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 ‘투쟁적’ 출판자다. 물론 실제로는 종사자들의 이력이 다양하지만, 아무튼 이는 ‘학자’와 ‘정치인’이라는 두 개의 의자에 걸쳐 앉은 이들의 세계에 퍼져 있는 본질적 갈등을 명확히 보여준다.
출판자는 과학적 방식의 견고함과 명성을 지닌 저자들을 대학에서 찾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연구대상 폭이 여전히 협소하고 난해함을 즐긴다는 점에는 불만을 토로한다. 쉼표 하나만 위치를 바꿔도 당장 소송이라도 걸 기세인 까다로운 학자들의 요구 앞에서는 머리를 쥐어뜯지 않을 수 없다. 출판자는 사회비판 총서의 책임자로 교수·연구자를 내세우거나 적어도 학문과 정치(즉, 사상의 생산과 소비)에 양다리를 걸친 후보자를 기용하는 편이 안전하고 이롭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 논리로, 사회비평지 대표는 독자위원회를 기왕이면 대학 강사, 박사과정생, 권위 있는 저자로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 이 과정에서 노조·정치단체·협회 등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과 유기적 관계를 맺은 지식인은 종종 배제되곤 한다.
단체 몸담은 지식인은 찬밥
‘참여’ 전문지들의 편집위원회가 대중에게 전달할 저항적 글을 고르는 과정에서 학술지의 자문위원 같은 ‘반열’의 이름들만 찾아내려고 한다면, 과연 모든 비판 사상들이 선별의 체를 통과할 수 있을까? 물론 박사 교육을 거친 학위 취득자들이 견고한 분석 방법, 폭넓은 지식, 그리고 비판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나 박사과정에서는 이와 동시에 포기하는 방법을 배우고, 품위와 우월성을 지향하는 교육을 받으며, 책임 전가의 성향도 얻게 된다. 또한 과도한 학문적 전문화의 영향으로 사물을 좀더 복잡하게 진단하려고 한다. 아울러 이 과정은 비판은 허용하되 정치는 거부하며 진지함과 허세의 경계를 자발적으로 모호하게 만든다. 기존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의 운명을 편집 과정에서 봉인해버리는 ‘호모 아카데미쿠스’라면 이미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글을 읽으면서 빛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장과 연계된 편견을 동원하니 말이다.
저작자들에게서도 유사한 현상이 관측된다. 1960년대 독일·미국·프랑스·이탈리아·영국에서 대학은 급진 청년들의 정치적 사회화를 위한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보수주의 물결이 다시금 거세지고 각종 집단이 해체되면서 많은 혁명투사가 당시 선발 인원이 대폭 늘어난 사회과학 고등교육 및 연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의 활동이 막을 내릴 즈음, 이번에는 1995년 11∼12월 파업시위를 보며 급진화된 일련의 학생들이 학계에 발을 내디뎠다. 물론 대학 전체에서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라즈믹 쾌셰얀은 현대 비평이론들의 세계적 파노라마를 다룬 기고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오늘날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비판 사상가들이 대학에 몸담고 있다. (중략) 대학에서 생산하는 이론들은 여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대학 시스템에 온전히 편입된 이들은 결코 반(反)지성 사회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는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주의간부학교나 프랑스 공산당학교와 다른 점이다.”(8) 이들 학교는 정치 지도부, 사상 생산자, 사회참여 세력 사이를 상시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에는 노동회관(Bourse du Travail)에서 활동하는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들이 이들 세 개의 톱니바퀴를 하나의 축으로 규합하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공산당의 영향력은 고등교육의 움직임에 따라 굴절됐다. 대학에서 자리를 꿰찬 공산주의 철학자, 역사학자,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와 개념, 용어를 도입했다. 이들은 당시 상당한 지적 구심력을 행사하던 공산당에 새로운 당원들을 끌어들였다. 좌파 조직들이 취약해지고 노조 내부 교육기관들이 쇠퇴하면서 노동운동과 유기적 관계를 맺던 지식인들의 마지막 피난처도 훼손됐다. 사회적 열기가 사그라든 시기에 이를 다시 이어나가기 위해 각종 재단과 상설 조율기구, 공개토론회, 구상위원회 등 여러 해결 방안이 마련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인력의 방향은 역전됐다. 독학으로 교양을 쌓은 이들(프랑스 정치사의 중심적 인물들)마저 학자의 권위에 매료된 나머지, 심지어 자유주의적 평론지조차 경찰 탄압에 관한 특집 기사의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 대학 강사에게 해설을 의뢰할 정도였다. 이들의 지위가 논지에 정당성을 실어줬던 것이다.
비판은 허용하되 정치는 거부
1995년 11∼12월 파업시위를 계기로 결집한 지식인들은 엄격하면서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분석도구를 갈구하던 이들에게 세계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제공해줬다. 이는 비판이론과 사회운동 간 직접적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런 동력이 대안세계주의 운동의 성공과 결합하면서 2000년대 초에는 투쟁문화와 학술문화를 넘나드는 저작물이 쏟아져나왔다. ‘참여적’ 대학교수·연구원인 저자들은 새로운 저항의 흐름을 세밀히 파고들었다. 이들이 사회투쟁의 거창한 비전을 ‘따끈따끈한 상태로’ 제시하거나 이런 투쟁의 정당성을 언론인에게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덕분에 언론인은 전문가의 견해에 기대어 투쟁을 해설하고 논의를 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학자의 작업은 머지않아 학술적 비평의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들의 맹점은 바로 전략적 문제였다. 가령 독일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어느 정치·경제학 전문지의 독자위원회에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면, 그는 아마 독자층과 목표를 달리 설정해야 했을 것이다. 대중을 조직하고 기존 질서를 전복하며 ‘지금 여기서’ 권력을 잡는 등 20세기 혁명가들에게나 21세기 ‘볼리바르적’(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사상을 추종) 사회주의자들에게 똑같이 제기되는 문제를 대학 연구의 틀에서 풀 수는 없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최신 지식으로 무장했을 뿐 아니라 학술적 인정 기준과 학문 간의 벽에서 자유로운 지식인이 필요하다.
지위가 곧 논지의 정당성
경제학, 역사학, 사회학, 철학, 인구학, 정치학 등 사회비판도 학술활동의 영역 구분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배운 바를 이용해 테크노크라트들의 권위에 맞설 능력을 갖추고 저항에 참여하는 전문가들은 적잖다. 하지만 이런 전문성과 비전문성의 논리 때문에 노엄 촘스키나 에드워드 W. 사이드(9)처럼 합리성·평등·해방 등 보편적 범주를 기반으로 정치적 활동을 펼치는 지식인은 점차 공적인 무대에서 배척됐다. 이들이 거의 사라짐과 동시에 프랑스 사상의 거장들(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피에르 비달나케, 장피에르 베르낭)까지 세상을 떠나자, 결국 지성을 이용한 마케팅과 군주를 상대로 한 자문이라는 두 가지 활동에 보편성을 예속시키며 매스컴을 타는 에세이스트들이 활개를 치게 됐다.(10)
첫눈에 보기에 고등교육 및 연구기관들이 비판 사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치화된 학생들의 갈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 듯하다. 학술활동과 사회참여를 지속적으로 조화시킨다는 것은 도박이라 할 만큼 쉽지 않다. 선택의 순간을 늦추기 위해 학생 겸 투사는 사회참여를 뒷전으로 미루기보다 별도의 대상으로 부각시킨다. 즉, 각종 참여활동과 시위를 분석하는 동시에 직접 시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논문을 쓰는 시점에는 연구대상이 돼버린 신념과 거리를 둬야 한다. ‘더 객관적으로’ 보이려면 덜 참여적으로 보여야 하며, 급진성은 단순성과 일맥상통한다는 시각이 있기에 ‘더 섬세하게’ 보이려면 더 온건해 보여야 한다. 눈에 띄지 않게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 민중의 세계에서 학문의 세계로 자리를 옮긴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세계의 반쪽으로 슬그머니 넘어왔다. 여기서 나머지 반쪽 세계는 배경에 불과하다.”(11)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르노 같은 경로를 거친 이도 여럿이다.
학우들에게 사회운동에 관한 사회학 서적을 홍보하면서 자신이 인간 해방에 기여한다고 믿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어느 ‘비판적’ 잡지 편집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한다. 기왕이면 나중에 자신의 논문 심사위원이 될지 모르는 인물들이 몸담고 있는 곳이면 더 좋으리라. ‘글로벌 위기: 경제와 사회의 재조명’에 관한 고찰을 교수들이 다른 교수들 앞에서 발표하는 세미나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지인들에게 전체 전자우편으로 알리기도 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서 “각종 사회과학 학문의 식민통치 이후 (페미니즘적) 관점의 인식론적·방법론적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열리는 학술대회의 머리를 장식할 ‘식민 유산과 식민통치 이후 저항: 인문사회과학의 식민 해방’이란 주제의 발제자 모집에 응하기도 한다.(12) 이런 과정을 끝내고 투쟁가에서 투쟁 이론가로 변신한 이들은 거리로 나서기보다 원고지 채우기를 더 편하게 느낀다. 혹은 자신들의 연구법을 사물의 질서보다 말의 질서를 위협하는 정치적 명분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매진한다.
엘리트 교육기관인 소수의 그랑제콜들과 개혁으로 취약해진 다수의 교육기관들로 양분된 교육 시스템을 뒤흔드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과연 정치적 투쟁과 대학 연구활동이 결국은 하나라는 신념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다수 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의 현실이 불안정해짐과 더불어 교육 여건도 악화되고 있다. 1960∼70년대에 인기 절정을 구가한 사회과학 학문들도 지금은 가치가 급격히 하락해,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박사들이 거머쥐는 것은 빛바랜 학위증에 불과하다. 학위 취득을 위해 이들은 많은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포기했다. 수당 수혜 자격이 없는 많은 이들이 실업 상태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교통비를 냈으며, 연구실이나 지도교수를 위해 무료 봉사도 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심사위원 교수들의 ‘기고문’, ‘원론서’, ‘기본서’ 등을 인용하며 부랴부랴 논문 초고에 깨알같이 각주를 삽입했을 것이다. 비록 그 교수들이 자신의 논문 주제와 상관없는 분야 출신일지라도 말이다.
촘스키와 사이드를 배척하다
장애물 경주에서 점점 힘이 달리더니 결국에는 낙오하고 만 유수 대학 출신자들을 결승 라인에서 기다리는 것은 물거품이 된 커리어와 명성뿐이다. ‘사회학·민족학 전공으로 박사 예비과정 학위를 취득하고 뛰어난 과학적 감수성을 보유’한 학생의 미래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는 2010년 9월에 그가 받은 다음과 같은 인턴십 공고 전자우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세브그룹은 자회사 칼로르에서 근무할 인턴을 모집합니다. 임무: 머리카락의 민족학적 분석, 성별: 불문. (중략) 상세업무: 미용 본부에 배속돼 대상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머리카락, 체모, 피부의 주요 유형(지름·두께·형태 등의 특징), 근본적 차이, 관련 습관(제스처, 화장품 사용법), 기타 문제점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 스스로 에밀 뒤르켐의 후계자라고 생각한 이가 헤어드라이어 조사관 노릇이나 하게 된 것이다.
빛바랜 학위증, 포기냐 저항이냐?
대학 교육을 받으며 키워온 열망과 실제로 제공되는 직업의 기회가 불일치하면 결국 포기를 하거나, 아니면 저항을 하게 된다. 2006년 겨울, 학생들이 불안정성과 최초고용계약(CPE)법에 반발해 벌인 급진적이고 단호한 시위는 이미 노선의 변화를 예감케 했다. 대학 학부부터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고등교육의 혜택에 대한 믿음이 갑자기 요동친 것처럼 모든 상황이 전개됐다. 겨울 한철 동안 대학 캠퍼스들이 ‘정치적 사회화’라는 기능을 되찾은 듯했다. 일부 모임은 언론의 압력에도 끄떡없이 사회과학의 도구들을 이용해서 노조 운동가들과 연계해 사회 전반에 걸친 요구사항들을 마련했다. 부르디외가 그토록 추구하던 ‘집단적 지식인’의 예기치 않은 변종이 등장했다고 봐도 무방할까?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Sophie Noël, ‘도서산업의 세계화에 맞선 소규모 독립출판: ‘비판적’ 에세이 출판사들의 사례’, in Gisèle Sapiro, <출판 세계화의 모순들>, Nouveau Monde, 파리, 2009 참조.
(2) <아곤>, <콩트르탕>, <린니으>, <무브망>, <뮐티튀드>, <서적·사상 국제리뷰>(2010년에 발행 중단), <바카름므> 등이 대표적이다.
(3) Perry Anderson, <역사적 유물론의 궤적>, Verso, 런던, pp.76~77, 1983.
(4) 결국 1999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콩플렉스 출판사에서 번역·출간됐다.
(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3월호의 세르주 알리미, ‘출판의 매카시즘’을 읽을 것.
(6) François Cusset, <10년: 1980년대의 엄청난 악몽>, La Découverte, 파리, 2006.
(7) Paul Nizan, <아덴, 아라비>, Maspero, 파리, 1960(1931) 및 <감시견>, Agone, 마르세유, 1998(1932).
(8) Razmig Keucheyan, <좌반구: 새로운 비판사상의 지도>, La Découverte, ‘Zones’ 총서, pp.28~29, 2010.
(9) Edward W. Said, <지식인과 권력>, Seuil, 파리, 1994를 읽을 것.
(10) Bernard-Henry Levy, Jacques Attali, Alain Minc이 1995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한 서적은 모두 합하면 63권에 달한다.
(11) Annie Ernaux, <La Place>, Gallimard, p.96, 1983.
(12) 2010년 가을 메일링 리스트 ‘historicalmaterialism @yahoogroups.com’을 통해 발송된 전자우편 중 수집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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