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09년 3월호
제목 : 인문학의 희망과 우정의 공동체를 여는 사람의 서가를 찾다
부제 : 길담서원 서원지기 박성준 교수
박성준 교수는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며, 길담서원 서원지기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경제복지회’를 만들었고, 선배로부터 빌려 읽은 금서 몇 권이 화근이 되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면서 13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옥중에서 신학(神學) 공부에 집중했고, 출소 후 한백교회에서 8년간 목회했다. 1997년 릿쿄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 등에서 평화학을 공부했다. 2000년 귀국한 이후 지금까지 성공회대학 NGO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2008년 2월 25일부터는 서울 통인동에 길담서원을 열고 서원지기로도 일하고 있다.
서울 통인동 길담서원에 들어서자 서가 한켠에서 어린이 책들을 정리하는 서원지기 박성준 교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권 한 권 정성스레 보듬는 그의 손길이 정겨워 방해하지 않으려 했지만 하던 일을 툭툭 털어낸 서원지기는 반갑게 악수를 청한다. 꼭 1년 전 경복궁 인근 잡지사로 출근하던 시절, 통인동에 길담서원이 문을 열었다는 낭보(朗報)는 듣자마자 경복궁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새삼 마주잡은 손의 반가움을 더했다.
길담서원 서원지기로 보낸 지난 1년
길담서원이 통인동에 자리 잡은 것은 1년 전 이맘때다. 박성준 교수는 2008년 2월 길담서원을 시작하기 2년 전에도 똑같은 준비를 했지만 아내 한명숙 씨가 국무총리에 지명되자 마음을 접었다. 괜한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이 마뜩찮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난해 독한(?) 마음으로 길담서원을 시작했다.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69세가 되면서 절박해지더군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이런 심정이었죠. 마침 아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그래서 지체 없이 시작한 겁니다.”
지체 없는 시작이었지만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박성준 교수는 숱한 발품을 팔며 길담서원 터를 찾아다녔고, 마음에 맞는 자리가 흔치 않아 합정동에서 대학로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을 지경이다. 그때 마침 통인동 지금의 터를 발견했고, 지금까지 1년이라는 세월을 길담서원 서원지기로 보냈다.
통인동에 자리 잡고 보니 이곳이야 말로 길담서원의 제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왕산으로 통하는 길목인 통인동(通仁洞) 주변으로 의의 길목인 통의동(通義洞)이 있고, 구름처럼 운사들이 모여든다는 필운동(弼雲洞) 등이 있다. 그 언저리에서 세종대왕이 탄생했고 추사(秋史)가 기거했다. 숱한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며 벗들과 거닐었던 산책로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 그곳에 길담서원 세워진 것이다. 의미의 연상을 통해 길담서원이 통의동 지금의 자리에 생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들이 드러난 것이다.
길담서원의 구상하며 가장 크게 빚진 곳은 프랑스 파리의 영문학 전문서점인 ‘셰익스피어&컴퍼니’이다.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등 프랑스 문단의 거장은 물론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T. 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F. 스콧 피츠제럴드 등 영어권 유명 작가들이 사랑했던 셰익스피어&컴퍼니는 20세기 문학가들의 사랑방이었다. 부산의 인디고서원과 대학로의 이음아트도 길담서원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읽음직한 책이라는 뜻의 베스트셀러는 간데없고, 잘 팔린다는 의미의 베스트셀러만 난무하는 시대, 박성준 교수는 곳곳을 찾아다니며 책방을 꾸밀 책의 목록을 손수 챙겼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정으로 길을 찾아야할 때
서원지기로 살기를 1년, 박성준 교수는 수많은 책과 더불어 살면 살수록 “이 시대가 길을 잃었다”는 무참한 현실과 직면한다.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자신도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부터 갈 길도 잃어버린 시대. 그것이 우리 시대 자화상이다. 길 찾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길을 잃어버린 시대. 이것이 박 교수가 말하는 이 시대의 징후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건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라고 했다.
“길을 잃었고 다시 찾아야 하는 때인데, 그럼 길 찾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서 있는 곳에 대한 정의가 먼저 이뤄져야 하는데, 해답은 역시 인문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잃었으면 다시 책 읽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책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 그 다양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길을 잃은 사람이 또 어떤 사람의 인도로, 또 어떤 외골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때문이다. “이제는 자기를 열어놓고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박 교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젠 진정으로 길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 시작이 책이고, 그 마음이 길담서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또 한 번 덧붙인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야기”라고.
그래도 박성준 교수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 하나가 있다. 경제적 가치만을 최우선을 생각하는 시대에도 정신의 빈곤과 남루한 시대를 이겨내기 위한 치열한 지적 작업을 펼치는 우리 시대의 글쟁이와 지식인들, 출판인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박 교수는 “출판 행위는 인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작업”이라고 말했다. 1년여, 책을 만지면서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고맙게 여겨진단다.
“비유컨대 책방주인은 생선장수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거친 파도를 헤친 어부가 없으면 생선장수가 없듯이 지식의 최전선에서 책을 쓴 사람들이 없다면 책방주인도 없는 것이죠.”
길을 밝힐 수 있는 지식을 유통해야 하기 때문에 박 교수는 날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눈이 밝아지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그래서 길을 찾을 수 있는 책이 얼마나 될까”하고 말이다. 무수한 상업적 베스트셀러가 바리케이드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길 잃어버리기 쉬운 대형서점은 그 작은 가능성마저 실종시키고야 만다. 그러나 길담서원에서는 자발적인 만남이 이뤄지고, 작은 가능성이 샘솟는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키는 만남 속에서 책으로 맺은 우정이 샘솟고, 희망을 잃었던 가슴에서 새로운 인생의 미래가 태어난다. 박 교수는 길담서원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관계를 날마다 경험한다..
몸으로 읽은 <성서>, 인문학적 상상력의 보고
박성준 교수는 대화 내내 특정한 책을 말하지 않았다. 오직 <성서>와 <성서>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설명한 『희망의 인문학』만을 말했을 뿐이다. <성서>와의 인연을 묻자 그는 1968년 8월을 회상했다. 그 해 여름, 박 교수는 친구들과 책을 읽으며 “유토피아적 환상과 열정에 들떠 있었다.” 그것이 법률에 저촉된다고 생각지도 못했고, 그런 의식조차 갖지 않았던 순수한 때였다. 단지 책을 읽고 친구들과 토론했다는 이유만으로 박 교수는 서대문교도소에 “던져졌고” 13년 6개월을, 그 중 꼬박 6개월은 독방에 갇혀야 했다. 박 교수가 수감되었던 서대문교도소 9사 6방은 지금은 역사관으로 보존되어 엄혹한 세월을 증거하고 있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0.75평 되는 작은 방, 그곳에는 오로지 변기통 하나와 낡은 <성서>만 있을 뿐이었다. 박 교수는 “감옥에 던져진 것도 예사 경험이 아니었지만, 책도 한 권 없다는 현실이 더 절망적이었다”고 말했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 <성서>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더불어 그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충만케 하는 매개였다.
모든 편지가 검열로 불허되었지만 <성서>를 인용한 글만은 검열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검열하는 이들은 그 구절에 담긴 함축적 의미와 깊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 편지의 수신자만이, <성서>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발신자의 의미를 해석했고, 해석할 뿐 아니라 제 나름의 의미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앞으로도 읽는 이들의 마음에서 저마다의 불길로 일어날 것이라고 박성준 교수는 믿는다. 박 교수는 감옥에서 나와 한백교회를 개척해 8년을 목회하며 설교했다. 8년 설교의 기본기는 13년 6개월 동안 감옥에서 씨름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보고인 <성서>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관념적으로, 머리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교도소라고 하는, 간절히 자유를 갈망하는 곳에서 몸으로 읽은 <성서>가 제겐 큰 유익이 되었고 위로의 근원이었죠.”
평화, 사람들의 마음 길을 여는 통로
박성준 교수는 성공회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평화학을 가르친다. 그는 평화학을 “여성학보다 덜 알려진 학문이지만 연륜은 더 오래된, 그리고 앞으로 할 일도 많은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인류 절멸의 가능성을 예견케 했고, 그 현실적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결과적으로 평화학이 태동했다. 평화학은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평화 없음(peacelessness)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는 전쟁이 없으면 평화로운 것일까요? 요즘 우리 현실은 전쟁이 없는데 평화도 없는 상황입니다. 특별히 제3세계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환경오염이 심화되고, 교육과 의료의 기회를 박탈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전쟁이죠. 눈에 보이는 전쟁은 없지만 그 자체로 전쟁 가운데 사는 사람들, 이제 평화학의 주 관심사가 이런 방향으로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전쟁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평화학, 즉 반전 평화를 위한 대화와 타협, 화해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평화학은 구조 속에 내재한 폭력의 문제와 일상 영역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그 본령이 이동하고 있다. 평화학의 주요 관심사를 이야기하던 박성준 교수는 요즘 한국 사회를 평화 없음의 축소판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 일자리의 부족, 가부장적 사회, 성차별, 이주노동자 문제 등을 열거하던 박 교수는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 내재된 폭력의 결정판이 용산 참사”라고 일갈했다.
어디 용산 참사뿐이겠는가. 한국의 강들은 이제 연유도 모른 채 제 깊은 속살들을 드러낼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달동네를 찾아 또 다시 짐을 꾸려야 한다. 전쟁은 지금도 우리 사회를 유령처럼 떠돌지만, 누구도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평화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박성준 교수가 체감하는 우리 사회의 실상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길을 잃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평화 없음이라는 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다.
결국 길은 다시 책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길담서원을 시작했고, 언젠가는 길담서원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멍석을 깔아놓았으니, 길담서원을 만들어가는 것은 이제 드나드는 사람들의 몫이다. 욕심과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 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는 이미 자유롭다. 길담서원을 통해서 그 자신이 평화를 배워가고 있고, 드나드는 이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이들 역시 평화를 배우고 있는 게다. 이신전심의 마음, 길담서원은 인과 의로 통하는 길목에서 사람들의 마음길을 통하는 게 만드는 곳이다.
우정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담서원
사람들의 마음 길이 통하는 길목에서 박성준 교수는 요즘 우정에 대해 생각한다. 길담서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박 교수는 군 복무 시절 <성서>를 읽으며 경험한 “감전된 느낌”을 요즘 길담서원을 통해 느낀다고 한다. 그는 감전된 느낌을 “우정”이라고 표현했다. 예수께서 우리를 친구로 부르신 것처럼, 세상의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우정의 관계에서 고갱이가 된다. 특정한 목표도 없고 이념과 방향성도 없고, 박 교수의 말마따나 “그냥 열려 있을 뿐”인지만 그간의 변화를 주목해 보면 조금씩 꿈틀대는 경이로운 기운이 보인다. 길담서원은 우정의 공동체이면서, 그것에 머물지 않는 진화하는 현재진행형이다.
박성준 교수는 “8년 동안 한백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열린 교회를 생각했는데, 지금의 길담서원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결과적으로 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내가 한 어떤 목회보다 더 진정한 의미의 목회를 하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관계가 있는 곳에는 신비스러운 관계가 열리게 마련”이라고 그이가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책방 차리고 목회 하려느냐?”고 비아냥거릴 때도 있지만, 박성준 교수는 과거 목회의 연장선상에서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영성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한 10년 전 쯤에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안타까워할 때도 있지만, “막차를 타고 시작한 지금이 제일 좋을 때”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지금 길담서원은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에요. 그런 아기에게 이게 돼라, 저게 돼라, 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잘 자라도록,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보살피다보면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길을 찾을 것이고, 새로운 기운이 돋아나겠죠.”
박성준 교수는 길담서원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뒷받침만 할 생각이다. 그 나머지는 누누이 말한 것처럼 “드나드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저마다의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며 아름답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 가능성 충분히 열려있는데, 자신이 “교주”처럼 틀어쥐고 자기 생각대로 쥐락펴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길담서원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그는 이미 내다보고 있는 듯 햇다. 덧붙이는 박 교수의 한 마디가 걸작이다.
“기껏해야 책방 주인 정도 하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는 일이 필요치 않아요.”
마음길이 이어주는 다양성의 기운
박성준 교수는 끝내 『자본론』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도유망한 서울대생에서 수인(囚人)으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책마저 말하지 않았다. 조급한 나는 2시간 내내 우문(愚問)만을 집요하게 던졌다. “그래도, 선생님의 인생을 변화시킨 책이 있지 않느냐?”고, 또 “평화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이 책이라면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래도 박성준 교수는 특정한 책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우문에 대한 현답(賢答)을 박성준 교수는 2시간 가까운 대화에서 숱하게 말해주었건만,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박성준 교수는 “나도 길을 잃은 이 시대 한 사람”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책을 통해 길을 찾고 있어요. 길담서원에 3천여 권의 책이 있는데, 제가 어떻게 그 많은 책들의 내용과 함의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나도 길을 잃은 사람이고,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같이 찾아보자고 말하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 다양성을 완전히 열어 놓고 우리의 길을 제시할 양서를 함께 찾자는 겁니다. 요즘 제겐 길담서원을 찾는 사람들과 책에서 울리는 다양한 목소리가 감히 예배와도 같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예배를 경험하고 있는 거죠.”
2월 25일이면 길담서원이 꼭 1주년을 맞는다. 비록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곳에서는 희망의 기운이 돋아나고 있다. 한 사람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일률적인 기운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마음길이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다양성의 기운이 돋아나는 것이다. 옛 지기를 배웅하듯 문 앞까지 나와 손 흔드는 박성준 교수의 모습이, 만삭이 되지 못하여 난 것 같은 글을 마치는 지금도 생생하다.
글_장동석 | 사진_류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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