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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10905 19:2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94937.html

 

 

[기고] 곽노현과 함께 돌을 맞겠다

 

- 박 재동 -

 

실정법과 정치적 계산으로야
어떻게 저울질하든,
인간성과 양심의 법정에서라면
나는 아무 죄도 물을 수 없다

 

» 박재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지난 교육감 선거 후보 단일화와 관련해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줬다는 2억원에 대한 진실게임과 사퇴 논쟁에 이어 곽 교육감이 어제 검찰에 출두하면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도덕성을 얘기하며 교육감 사퇴를 요구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초지일관 진실로써 버텨내는 게 정의라는 소리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선거 당시의 상황으로 한번 되돌아가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의 진실 여부에 관심을 쏟는 건 당연하지만, 사건 전체의 성격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교훈을 얻는 데는 때로 사건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당시 상황을 살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누구나 알듯 그때는 공정택 교육감 퇴장 이후 진보교육이 일어서느냐 좌절하느냐 하는 매우 절박한 시점이었다. 진보교육을 열망하는 쪽에서 볼 때, 나뉘면 지고 단일화하면 이길 수 있는 상황. 가장 중요한 건 단일화였다. 곽노현 후보가 앞서고 박명기 후보가 뒤지는 상태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때의 협상은 두 후보 간의 사사로운 협상이 아니었다. 진보교육을 열망한 개혁진영이 중재한 협상이었다. 곡절 끝에 어떻든 단일화를 이루었고 승리하였다.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가! 그러나 그 승리와 기쁨 뒤켠에는 선거빚이라는 고통의 웅덩이가 있었다. 하지만 오직 약자 쪽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그런 고통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으며 관심도 없었다. 만약 그때 박명기 후보가 사채를 얻어서라도 끝까지 완주했다면 선거비용은 보전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대의를 위해 포기했다. 나뉘면 진보진영이 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진보진영은 그때 박명기 교수에게 크게 고마워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진보개혁진영의 열망을 수용한 대가로 떠안은 절박한 선거빚에도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서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 상황에 대해 알 수도 없었다. 비용 보전의 기회를 잃어버린 박명기 교수는 그 고통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단 말인가? 진보진영에? 개인의 책임?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곽 교육감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나중에 그 사정을 딱히 여겨 2억원을 주었다 한다. 미국은 지난 대선 때 경선에 진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빚을 오바마 대통령이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한데 우리는 오히려 이 기회에 직선제를 폐지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나는 본다. 아니, 지금에야 보인다. 진보교육의 여망을 따르다가 불합리한 제도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저 모습이.

 

도덕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선거 판세에 불똥이 튈지 몰라 빨리 털어버리고 싶은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적어도 진보진영이라면 내팽개쳐진 이 아픔의 웅덩이를 한번쯤은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고통의 늪에 빠져 (빚에 시달리는 고통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람을, 그런 사정조차 모르고 있던 나 대신 곽노현 교육감이 도와줬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 아닌가.

 

실정법과 정치적 계산으로야 어떻게 저울질하든, 인간성과 양심의 법정에서라면 나는 그에게 아무 죄도 물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아닐까. 객관과 공정을 앞세우는 냉정한 길보다는 이 웅덩이를 같이 끌어안고 뒹굴며, 돌을 던진다면 함께 맞는, 아프지만 따뜻한 길을 나는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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