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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신영복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4) 홍명희 문학비·생가 /경향신문20111025

by 마리산인1324 2011. 11. 11.

<경향신문> 2011-10-25 19:42:4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0251942445&code=210000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4) 홍명희 문학비·생가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

 

‘벽초 홍명희문학비’는 1998년 홍명희 30주기, <임꺽정> 연재 70주기를 기념한 제3회 홍명희문학제 때 건립되었다. 그때는 글씨만 써 보내고 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이 초행이었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문학비는 주차장이 되어 있는 텅 빈 제월대 광장 가장자리에서 혼자 가을볕을 안고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붓으로 글자에 먹을 넣기 시작했다. 비문은 먹빛이 바래고 빗물에 씻기어 읽기 어려울 정도였다. 취재팀 일행 세 사람도 작업에 동참하였다. 작업이 거의 끝날 무렵에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한 도종환 시인이 당도했다.

“1998년 비를 세울 땐 도지사와 군수도 참석하고 제월리 마을 사람들이 국밥 500인분을 끓이고 그릇을 내오기도 하는 등 문학비 건립은 지역민의 성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벽초 가문은 홍 판서댁으로 불려 왔을 정도로 마을 인심을 잃지 않았고 특히 벽초가 북으로 가면서 농지 17만평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떠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를 세우고 난 다음 다음해 보훈단체 회원들이 현충일 날 태극기와 망치를 들고 와서 문학비에 표기한 해설문을 문제 삼았다.

신영복 교수(오른쪽)와 도종환 시인이 지난 3일 충북 괴산군 괴산읍 벽초 홍명희 생가 뜰을

거닐며 홍명희의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3군데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평생 민족을 위해’라는 구절에서 ‘평생’을 빼라. 그래서 ‘그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선생이란 말을 빼라. 문인들한테는 선생이지만 우리한텐 선생이 아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빼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전범(戰犯)’이란 말을 넣으라고 했는데 그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두 곳을 고치고 동판을 다시 만들어 부착했습니다.”

적잖이 속상했을 일들을 도종환 시인은 시종 절제된 언어로 조용조용 들려주었다. 문학비는 문인들이 1만원씩, 5만원씩 후원금으로 세운 것인데 보훈단체에서는 도나 군에서 자기들은 박대하면서 재정지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벽초 홍명희는 이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태어나고 3·1 만세시위를 준비했던 생가도 지금은 선친의 이름을 딴 ‘홍범식 고가’로 복원되어 있을 뿐 벽초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자결한 선친의 뜻을 명심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특히 신간회의 창립 주역으로 좌우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였던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남북협상회의 때 월북하고, 북에 남아 부총리까지 역임한 그의 이력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러나 홍명희 연구자들은 그를 진보적 민족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민족주의자로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부드러운 인품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벽초의 정치적 정체성과는 달리 소설 <임꺽정>에 이르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학비’는 그에 관한 모든 포폄(褒貶)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 한마디로 <임꺽정>을 넘어선 대하 역사소설이 아직 없다는 것이 문학계의 통설이다. 도종환 시인은 <임꺽정>은 반상(班常)의 두 세계를 넘나드는 벽초만의 스케일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풍부한 우리말의 보고라는 점을 지적한다. 비문에 새겼듯이 한마디로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이다. 등장인물의 다양함과 풍부한 어휘도 그렇지만 더욱 감동적인 것은 대하와 같은 서사양식의 도도함과 그 속에 흐르고 있는 파란만장한 삶의 실상들이 아닐까. 구술문학의 서사양식이 그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는 사실은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임꺽정>은 1928년 조선일보에 처음 연재된 이후 몇 차례 중단되었다가 미완으로 끝난 작품이다. 최초의 대하소설이면서도 궁정비사를 중심으로 하던 당시의 역사소설과는 그 판을 달리하였다. 더구나 그 주인공이 하층민이라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처음 연재되던 당시만 하더라도 동아일보에는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연재되고 있기도 했었다.

<임꺽정>은 단 한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천민(賤民)을 소설의 ‘중앙’에 앉혀놓은 작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캔버스의 중앙, 영화의 주연은 각광받는 자리이다. 이 중앙을 하층민이 차지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임꺽정>은 계급적 저항소설로 읽힌다. 근대적 문학평론의 오래된 준거 틀이다. 임꺽정이 사회적 약자이고 또 그 동무들인 일곱 두령들이 가렴주구와 포악한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무리이기는 하다. ‘명종실록’에도 ‘반적(叛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급의식은 이러저러한 충돌지점에서 짧게 돌출할 뿐 사회변혁의식으로 발전하거나 일관되고 있지는 않다. 당시의 미성숙한 민중의식의 현주소이기도 할 것이다.

<임꺽정>의 탁월함은 그러한 계급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는 일체의 사회적 문맥 자체를 시원하게 뛰어넘는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삶, 그리고 그러한 삶에 담겨 있는 자유의지와 우정이 그것이다. 우정을 음모(陰謀)라고 했던 에피쿠로스의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온몸으로 부딪치는 인간관계와 그런 인간관계가 엮어내는 삶의 진정성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임꺽정>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고전들이 이미 탈근대 독법의 프리즘을 통과하고 있다.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이 그것이다. 더구나 <임꺽정>은 새로운 독법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풍부하게 담고 있었다. 완고한 근대적 관점이 그것을 봉쇄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임꺽정>은 봉건적 관념을 뛰어넘고 있을 뿐 아니라 근대문맥 역시 시원하게 뛰어넘고 있다. 한마디로 임꺽정과 그의 동무들은 ‘추방(追放)’당한 자가 아니라 ‘탈주(脫走)’하는 자들이다. 변방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 새로운 삶의 전형이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임꺽정>에는 주의해야 할 함정이 없지 않다. 임꺽정은 결코 강자(强者)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임꺽정은 비범한 무예와 담력을 지닌 ‘강자’의 초상으로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더구나 소설 <임꺽정>이 미완으로 끝나기 때문에 임꺽정은 계속 살아 있다. 그러나 그는 실상 약자(弱者)이다. 기름진 들판에 살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백정의 자식이었을 뿐이다. 실제의 임꺽정 역시 관군의 토벌에 쫓기다 무수한 화살을 맞고 체포되고 처형당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곳이 청석골이라는 험처라고 하더라도 그곳은 어쨌든 평지가 아닌 산골짝이고, 변방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피신처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산으로 갔다”고 노래하였다.

물론 임꺽정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강자’의 면모로 읽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이미지를 입히는 주류이데올로기도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최소한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대응방식에 관해서도 무심하지 않아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결코 약하게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는 문신을 하거나 성깔 있는 눈빛을 만든다. 위악(僞惡)을 연출한다.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는 위악을 주무기로 하고 반면에 사회적 강자는 위선(僞善)을 무기로 한다. 극적 대조를 보인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법정의 정숙이 그것이기도 하다.

<임꺽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유전과 시절인연은 그것이 무용담이기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가여운 삶의 주인공인가를 눈물겹도록 보여준다. 더구나 나는 <임꺽정>에서 나의 겨울 감방을 추억한다. 일곱 두령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력을 읽으면서 춥고 긴 겨울밤 눈물겹게 해후했던 감방동료들의 기막힌 인생유전들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교도소는 ‘산’이라고 대답한다. 쫓기는 사람들이 내일을 기다리는 곳이다. 산적에서부터 화전민, 천주학쟁이, 동학꾼… 그리고 오늘날은 도시의 거대한 원심력에 밀려난 사람들이 주말마다 산을 찾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산은 변방의 전형이다. 그러나 산에는 꽃이 있다. ‘산유화(山有花)’가 그것이다. 그렇다. 산은 꽃이 있는 변방이며 변방은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창조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쓴 다음에 도종환 시인에게 e메일을 보냈다. 자상한 설명에 감사드리고, 11월5일로 예정된 제16회 벽초 문학제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도록 기원했다. 문학제 즈음에 비가 와서 혹시 비문에 넣은 먹이 번질 수 있지만 비누 묻힌 천으로 비면을 닦으면 곱게 지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바래거나 씻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전했다.

펜션 옆길 주차장 한 켠…숨긴 듯 서있는 문학비

신영복 교수와 도종환 시인이 벽초 홍명희 문학비에 붓으로 먹을 입히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제월대 앞에 서 있다. 신경림 시인과 문학평론가 구중서씨,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 등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벽초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1998년 10월17일 1차 건립식을 열었고 보훈단체의 요구로 동판에 적힌 문안을 수정한 뒤 2000년 10월7일 2차 건립식을 치렀다.

지난 3일 괴산을 방문했을 때 문학비의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면 ‘제월대 펜션’만 보였다. 길을 잘못 든 것으로 알고 차량을 여러 번 돌렸으나 내비게이션은 줄기차게 펜션을 안내했다. 알고보니 문학비는 펜션 옆으로 난 길을 내려가야 나오는 제월대 주차장 한 편에 숨어 있었다.

도종환 시인은 “제월대 앞에 펜션이 들어서니까 사람들이 제월대 앞을 주차장으로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괴산군이 문학비 앞에 주차장을 허가해 주는 것을 보고 지역의 문학적 안목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싶었다. 화가 정말 많이 나서 ‘차라리 문학비를 파내서 묻자’는 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괴산군은 홍명희의 월북 이력을 꺼려 그의 생가 앞에 ‘일완 홍범식 선생 고택’ 표지판을 세워놓았다. 그러나 홍명희 소설의 주인공인 ‘임꺽정’만큼은 지역 특산물인 고추의 브랜드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가로등 디자인이나 버스 정류장 등 괴산 시내 곳곳에서 ‘임꺽정 고추’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임꺽정 캐릭터를 볼 수 있다.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