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32589
2016년 1월 15일 오후 9시 30분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서울 목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타계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성공회대학교 후배 동료인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지난 2006년 신 교수의 정년퇴임을 맞아 그의 삶을 회고하며 쓴 글을 '추모의 글'로 싣습니다.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치스러운 장식물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독재 정권이 앞을 내다보고 역할분담을 시켜놓은 것이라고나 해둘까? 밖에서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동안 바깥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차분한 사색과 깊은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분이 있다. 1988년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평화신문>에 그의 사색의 편린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는 말을 위로로 건네기에는 너무 긴 20년 세월을 뒤로하고서. 20대의 청년 시절인 1968년 생일에 잡혀간 그는 꼭 20년 세월을 보내고 1988년 생일날 석방됐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신영복 교수가 2006년 정년을 맞는다.
장래 희망은 조선인 총독?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몇 년 지난 뒤에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주더란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신영복은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의 사택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유열, 이극로 등 저명한 한글학자들- 모두 월북했다- 도 드나드셨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친구들은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다. 처음에야 이럴 때 아이들은 자기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른들이 바라는 '정답'을 말하게 되는 법.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총독이 뭐냐고?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해직교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조기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신영복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다섯 살 꼬마 신영복의 머리에도 해방의 그날은 기억이 또렷하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청년들이 다섯 살 난 어린 신영복에게 왜 일본인 교장의 텅 빈 사택을 지키게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적산의 접수와 보호라는 중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전쟁은 그가 열 살 때 터졌다. 그러나 밀양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 '인공' 치하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의 기억은 끔찍했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20여 개의 머리가 걸려 있다 보니,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못 건너고 우는데, 어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신영복은 무서움 속에서도 머리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실제로 자세히 바라보니, 피가 다 빠져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은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
신영복이 베어진 머리를 유심히 살핀 까닭은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신영복 집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 그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토박이는 아니고, 떠돌이로 다니다 동네로 흘러들어와 궂은일 해주고 밥 얻어먹던 청년이었다. 토끼도 잘 잡고 팽이도 잘 만들어주던 청년, 그러나 늘 천대받던 그가 기세등등해진 모습을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고 사라졌던 친일파들이 다시 나타난 뒤로, 신영복은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고,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 어린 마음에 사라졌던 그가 꼭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 해방과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만큼은 또렷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돼버렸다.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한 것이 1959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정도에 약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미된 정도였지만,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16이 왔다. 처음에는 지주 아들 윤보선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혁명재판소 만들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을 사형시키는 등 사태 진전을 보니 박정희는 영락없이 "권총 찬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이 4·19를 누르고 있었다. 4·19의 감동 속에 총알은 우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고 진보적 청년들은 생각했지만, 5·16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깨달았다. 총알은 모자만 뚫고 지나갔다고!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1·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학교 공부만 따라가기 바빴던 신영복은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통혁당 간부들은 만난 적도 없었는데…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예닐곱 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는 150명이나 되었지만, 대학원에는 지금과 달라서 3명만이 진학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 1명은 ROTC로, 다른 1명은 해군장교로 입대해버려 대학원에는 혼자만 남았다. 경제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보다는 67년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이다 보니 잡지의 필자 풀(Pool) 성격인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런데 나도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지만, 신영복은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자술서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산하단체라 발표된 경제복지회나 경우회, 동학혁명회 등은 각각 역사가 오랜 자생적인 단체로서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고, 김질락 등과의 모임에서 학생운동 동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해했다. 중앙정보부가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 관료집단의 성과주의와 자기 활동을 과장해서 보고한 통혁당 지도부의 합작으로 사건이 확대됐다고나 할까?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리려는 공안당국이나, 통혁당을 북의 지도성이 관철된 조직으로 그리려는 진보 진영 일각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이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 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라고 발표된 김질락, 이진영과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남과 북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일국일당주의를 취해 북이 중앙이 되고 남에 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쪽에 자생적인 운동의 구심이 서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질락이 김종태나 이문규 등과는, 또는 북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족해방전선 모임에서는 북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도 없으며, 북과의 관계는 대등한 혁명의 구심 정도로 이야기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원숭이 똥구멍'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신영복이 수사를 받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도 친구들과 많이 외우며 놀았던 노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빨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수사기관의 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흑백논리도 삼단논법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갖다붙이면 척 붙어버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여!
사형 구형하면서도 "걱정 하지 말라"
당시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의 암호를 해독해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는 등 이 사건의 크기를 부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북에 내왕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격으로 위치지은 신영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당시에는 주로 불고지죄, 즉 김질락이 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중심이었던 것이 기소 단계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가 중심이 되었고, 1심과 2심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 기소 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에 대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기환송. 군 법무사들이 사형을 구형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사형을 구형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놀라운 인도주의와 여유!-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에서 군검찰은 죄목을 구성죄로 바꾸는 공소장 변경 조치를 취했고. 재판부는 정상을 참작해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학생 동아리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나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상고는 포기했다.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됐다-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인식되는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고포기를 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무기징역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만 되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무기징역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보다 더 암담했다.
사형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죽여버리겠다는 법적 결정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의연해질 수 있을까? 뒤에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울상대생이던 김병곤이 사형을 선고받고 "영광입니다"라고 되받아 전설을 남겼지만, 그 받아침은 진짜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도 선고의 순간에 최대한 의연한 척하려 했지만, 눈은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입으로 가더란다.
무기징역이라 하려면 입이 삐죽 앞으로 나오고, 사형이라 말하려면 입이 옆으로 찢어지는데, 그 짧은 순간에 입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길 간절히 바라게 되더라는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잊혀지지 않는 명대사 "나 떨고 있니?"처럼, 아무리 사상범이라 한들 죽음 앞에선 떨리기 마련이 아닐까?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구형과 선고, 그리고 군법회의의 형 확정 절차인 관할관 확인을 거치며 모두 여섯 번이나 자신의 이름에 사형이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국민학생 친구들을 위해 글을 쓰다
처음에는 사형이 근거 없다고 생각했지만, 곧 '아, 이 정권은 충분히 사형을 집행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심각하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실제로 그가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는 1년 반 동안 일상을 같이 보내던 여섯 명이 차례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의 죄목은 대개 상관 살인인데, 신영복은 1960년대의 억압적인 병영문화가 낳은 가슴 시린 비극을 연속적으로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사형이 확정되는 순간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너무 짧은 삶으로 끝나고 만다는 애석함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당시의 젊은 언어로는 죽음은 삶의 완성이기에 논리적으로 사형이 삶의 단절로 귀결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당시 혁명적 의식에 투철했던 청년들의 낭만적인 정서는 척박한 식민지 땅에 태어나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식민지 청년들 앞에 놓인 삶의 당연한 한 형태라고 합리화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접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노부모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영복은 자신의 죽음이 자신에게야 삶의 완성일 수 있지만, 부모님께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상실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죽음이란 것도 결코 한 개인의 죽음일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들까? 신영복은 지금 생각하면 의외지만, 혹시 돈 빌리고 안 갚은 것은 없는지, 약속해놓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아직 사형수였던 시절에 쓴 글에 '청구회 추억'이란 것이 있다. 감옥에서 휴지에 적어서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헌병의 도움으로 집으로 전해진 이 글은, 신영복이 우연한 기회에 사귀어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당시 국민학생이던 꼬마 친구들을 위해서 쓴 것이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장충체육관 앞에서 2년 넘게 만나던 꼬마 친구들은 왜 신영복이 갑자기 자기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지 모를 것이 아닌가?
신영복은 사건 당시 현역 육군 중위였기 때문에 그의 사형집행 형식은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었다.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란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거리였다. 프랑스혁명의 선봉에 섰다가 옥사한 대수학자 콩도르세는 '찬란한 햇빛 아래 죽는 것'을 그렇게 바랐다지 않는가. 모든 사형수가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와닿는 신영복의 사색은 총살형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처연한 낭만과 갈라진 현대사의 처절한 아픔이 안겨준 젊은 날의 임사체험(臨死體驗)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법원에서 상고 포기로 형이 확정된 뒤 신영복은 1970년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서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 신영복은 당시에는 전향 문제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육군교도소에서는 전향 문제에 대한 권유도 없었고, 그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당시 안양에는 사상범이라고는 신영복 한 사람뿐이었다. 전향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선배도 없었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란을 메우는 것으로 전향서를 작성했다.
<엽서>에는 왜 고친 자국이 없는가
신영복이 전향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게 되고, 특히 박정희 정권의 강제전향 공작이 본격화될 무렵이었다. 그는 한 사람이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으면서, 반성도 하고, 고민도 하고, 자기 합리화도 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쉽고 편의적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은 결국 전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조직성원이었다면 좀더 심각하게 고민했을지 모르나, 그는 조선노동당원도 아니고, 통혁당원도 아니었다. 빈농 출신으로 정치 일꾼이 되어 온몸으로 사회주의 세상의 짜릿함을 맛본 적이 있는 남파 공작원들, 게다가 그들은 북에 가족을 두고 있었다.
신영복이 20년 감옥 생활에서 꼬박 15년을 보낸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것은 1971년 2월이었다. 안양과는 달리 대전은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좌익 사상범이 많았다. 그는 이미 전향서를 쓴 상태에서 대전으로 이감왔기 때문에 특별사동에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도소 당국은 전향했지만 통혁당 사건 무기수인 신영복을 바로 공장에 출역시키지 않았다. 한 1년 정도 독방과 혼거를 거듭하면서 관찰한 뒤에야 교도소 당국은 출역을 허락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쇄본으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렵지만,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그대로 영인한 <엽서>를 보다 보면 고친 자국이 거의 없다는 점에 문뜩 깜짝 놀라게 된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도 다 사연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지식청년 신영복은 감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냥 두면 다 잊어버릴 것 같은 이 경험을 어딘가 기록해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분단된 조국의 감옥에서 그런 생각을 담아둘 수 있게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은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엽서였다. 밖으로 보낸 엽서가 모여 있으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읽어보리라 하는 생각에서 감옥 시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엽서 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주제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감방 안에서 면벽 명상을 통해 생각을 거듭하고 미리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다 봐두었다가 엽서를 쓰는 날, 머릿속에 완성된 문장 형태로 갖고 있던 것을 토해냈다고 한다.
면벽 명상이나 독서를 하기에는 독방이 좋을 것 같지만, 20년 감옥 생활 중 5년여를 독방에서 보낸 신영복에 따르면 독방의 징역살이가 더 힘들고 때로 정신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혼자 있으면 언어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방을 왔다갔다 하며 혼잣말을 하는데, 그러면 교도관은 통방하는 줄 알고 앉으라고 야단을 친다. 혼자서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이상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서 후딱 그쳤다가, 다시 혼자서 말을 하기를 반복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란 역시 같이 대화하고 부대끼며 사는 존재였던 것이다.
장기수들의 역사와 만나다
신영복이 파기환송 후 다시 재심을 받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친구나 후배들 중에 이미 대전에 와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징역살이가 인생에 있어서 조금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밤잠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공장에 출역하는 것보다는 오로지 독서에 열중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교도소 재소자란 물론 우리 사회의 하층민이긴 하지만, 룸펜적 성격을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과 접촉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영복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영복이 보기에도 재소자의 대부분이 룸펜적 성격이 강해서 사회 변혁 의지라든가, 노동계급으로서의 건강한 자부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도 역시 민중이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억압구조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영복은 그들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들과 맨살을 맞대는 접촉을 하면서 지식청년이었던 자신이 가졌던 관념성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하게 된다.
교도소에서 사람을 만나고 같이 지낸다는 것은 바깥의 도시에서 잠깐 악수하고 헤어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온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징역 생활에서 도덕적 가식을 부리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감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정직한 알몸 그대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방에서 대개 몇 년을 같이 보내며 서로의 삶과 살아온 내력을 공유하면서 개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또 다른 사회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하, 목수가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순서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은 책이나 교실에서 인식했던 것과는 다른 펄펄 뛰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했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쭉 자라고, 책을 통해 정서를 키워온 사람으로서, 그런 자신의 인식의 틀이 깨어지는 것은 감옥 초년에 그가 겪은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영복이 육군교도소 시절이나 독방에서만 있은 안양 시절에는 잘 몰랐다가 대전에 와서 새삼 발견한 사실은 교도소에 노인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공장에서건 사방에서건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신영복은 개인의 성격과 범죄를 연결시켜왔던 그때까지의 단순한 논리를 반성했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관해서 이야기 듣노라면 그 혹독한 상황에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범죄가 개인의 성향보다는 사회나 시대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영복은 밑바닥 인생들과 맨몸으로 부대낀 오랜 감옥 생활을 통해 지식청년으로서의 관념성을 깨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감옥은 청년 신영복에게 여기에 더해 어떤 새로운 역사의식을 일깨워주었다. 1970년대 초반은 아직 해방으로부터 채 3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조국이 찢어진 상황에서 전쟁의 격동에 몸을 내던졌던 사람들, 또는 그 격랑에 휘말린 사람들 중에 아직 감옥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물론 50대 60대를 넘긴 노년이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빨치산 출신도 있었다. 빨치산에도 한국전쟁 중에 입산한 '신빨치'만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전에 입산했던 '구빨치'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또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 안내원들도 있었다. 신영복은 해방 전후의 분단 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분들과 일상을 같이했다. 막연하게 책에서 보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사람들을 만나 이들에게서 생생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로서는 20대의 명석한 신영복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신영복은 마치 체험하듯 역사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생환된 역사'였다.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한 그 느낌!
서구 근대를 뛰어넘는 관계론 구상
신영복은 그 시절 한학의 대가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과 4년간 한방에서 지내는 행운을 얻게 된다. 박치음이 <소쩍새>란 노래를 헌정한 노촌 선생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명문 연안 이씨 집안의 종손으로 조선 봉건사회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 사회를 거쳐 전쟁을 겪으며 월북해, 사회주의 사회를 몸소 겪고 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파되고, 일제 때 그를 체포했던 형사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시 체포돼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8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튕겨져나온 분이 이구영 선생이시다.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기 쉽지만 노촌 선생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대동의 꿈을 간직한 채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하셨고, 또 고전에 대해 진보적 해석을 내리셨다.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노촌선생을 만나기 이전부터였다. 60년대 대학 시절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이 깊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 사회는 근대화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해방 이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뒤의 부패와 가난을 겪는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서구적 문화, 서구적 가치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그쪽에 몰두했지, 우리 것에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자존심이 없는 개인, 자부심이 없는 민족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성 속에서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 동양 고전을 깊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 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문제의식 말고도 옥중의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징역 초년의 왕성한 지식욕에 하루 한두 권씩 책을 읽을 나이였으니 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연히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중국 고전이 딱이었다. <노자 도덕경> 같은 책은 5200자에 불과하지만 몇 달을 두고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통해 얻은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내용을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간다. 서구 사회는 개별적 존재성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사회인 반면, 동양이나 근대를 뛰어넘는 사회는 관계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년 말에 출간한 <강의>의 핵심적 내용이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곳곳에 들어서는 건물,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은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어디 기념물뿐이랴. 최근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다. 얼마 전 어느 서예학회에서 '서예의 실용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는 기사를 보고 신영복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혼자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된 것은 아마 '동상예방 주의사항'이나 '재소자 준수사항' 같은 소내 게시물들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감옥에 서도반이 생기면서 만당 성주표(晩堂 成柱杓),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특히 풍양 조씨 노론 대가집 후예인 정향 선생은 추사의 서법을 이은 민형식(閔衡植) 선생이나 한말의 서화 대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에게 배운 분이었다. 교도소장이 글씨 한 점 얻을 욕심에 서도반이 생긴 뒤 한 번 모신 것인데,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오시어 글씨를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민체, 우리 서예의 중요한 경지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의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궁체는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썩 잘 어울리지만, 신경림, 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투쟁 현장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 사이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어머니께서 보내는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어,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말이 글씨를 생각하면서 한문 서도에서 익힌 필법을 도입해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連帶體),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해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신영복은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키우고, 생생한 역사의식을 길렀으며, 게다가 양화공·봉제공·목공·영선·페인트 등 여러 가지 기술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88년 8월14일 잡혀간 지 꼭 20년 20일만(그러나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음력으로 꼭 20년 만이다. 생일날 잡혀가서 생일날 풀려났다고 한다)에 출옥했다.
그는 20년의 징역살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위를 넘어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 부분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레닌을 포함해 수많은 실천가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기 개조를 이뤄냈다는 것!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야,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며 칭찬하더란다. 신영복은 그렇게 세상과 다시 만났다. 하나의 나무가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뤄가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던 그가 지난 (2006년) 6월8일 아쉬운 정년 고별 강연을 했다. 20여 년의 청년기, 꼭 20년의 귀양 생활, 그리고 귀양이 풀린 뒤의 해배(解配) 기간이 20년가량이었다. 해배 2기라고 할 수 있는 앞으로의 20년, 더불어 숲의 중심에서 신영복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
(이 글은 2006년 발행된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펴냄) 44-66쪽에 실린 글(원제 :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인데,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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