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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장­뤽 낭시 /박준상(대학신문20071117)

by 마리산인1324 2011. 11. 24.

<대학신문>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0

 

 

 

무위(無爲)의 공동체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⑨ 장­뤽 낭시
2007년 11월 17일 (토) 21:47:10 대학신문 snupress@snu.ac.kr
장-뤽 낭시(Jean-Luc Nancy, 1940~)는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80년대 말 과도한 심장 이상 수축으로 심장 이식수술을 받게 되면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거쳤으나 지금까지도 계속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낭시는 개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동료 필립 라쿠-라바르트(라쿠-라바르트 역시 반드시 주목해봐야 할 사상가인데, 안타깝게도 최근 타계했다)와 함께 초기 독일낭만주의(슐레겔 형제, 노발리스)의 기관지 『아테네움』에 실렸던 중요한 논문들을 편역한 책 『문학적 절대』를 내놓음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 독일낭만주의와 더불어 하이데거, 셸링, 칸트, 니체와 같은 사상가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사유의 출발점을 마련했으며, 근대 정치 철학과 여러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을 검토함으로써 매우 독창적이고 특이한 정치 철학을 구축해냈다. 우리는 현재 아쉽게도 다만 그 정치 철학의 단면을 모리스 블랑쇼를 경유해서『마주한 공동체』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2005). 그러나 정확히 하자면 블랑쇼가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보여준 공동체에 대한 사유의 원류에는 낭시가 있다.

낭시는 동구권의 몰락과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패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알랭 바디우가 그에게 ‘최후의 공산주의자’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낭시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공동 존재와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취소될 수 없다고 본다. 낭시의 정치 철학의 독창성은 공동체가 어떠한 종류의 사회(국가를 비롯해서 크든 작든 모든 동일성의 집단)와도 일치될 수 없다는 주장 가운데에서 발견된다.

플라톤에서부터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주 이상적(理想的) 공동체는 구축해야 할 사회로서 추구됐다. 낭시가 반대하는 것은 ‘공동체’를 ‘사회’와 일치시키려는 이상주의적ㆍ전체주의적 시도이고, 그가 우리의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 내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 또는 사회 내에서 고착되지 않는 ‘관계’ 자체다. 그 ‘관계’는 단순히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진정한 조건이자 근거인 우리의 ‘자연적인’ 평등의 장소이며 소통의 장소다. 낭시는 그 장소를 ‘무위(無爲, desœuvrement)’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는 그 무위의 장소가 결코 어떤 구도, 목적, 기획, 프로그램에 따라 규정되거나 고정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는 정치적 투쟁이나 제도에 대한 개혁의 시도나 기존 사회 구조에 대한 변혁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윤리적, 총체적, 사회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개념적, 관념적 구도에도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시의 메시지는 사회가 동일성의 가치 기준에 따라 스스로 구조화되고 폐쇄적으로 될 때, 즉 사회 바깥에서의 지정될 수 없는 무위와의 관계를 망각할 때, 필연적으로 파탄의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무위의 관계가, 즉 궁극적으로 어떠한 존재 이유도 존재 목적도 어떠한 명확한 동일성의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유토피아적(또는 불가능한) 장소가 모든 사회의 중심에, 즉 현실의 모든 정치적ㆍ경제적ㆍ 이념적 관계의 중심에 보이지 않게(또는 블랑쇼의 표현을 따르면, “밝힐 수 없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낭시는 현재 프랑스에서 알랭 바디우, 앙리 말디네, 자크 랑시에르, 필립 라쿠-라바르트 등과 함께 가장 부각된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낭시의 가까운 동반자였던 자크 데리다는 2000년 『접촉, 장-뤽 낭시』를 출간해 이 점을 확인시켰다(낭시는―라쿠-라바르트도 마찬가지이지만―한국에서 흔히 데리다의 제자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해다. 낭시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소통ㆍ공동ㆍ접촉 등의 정치적 주제들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전개해 나갔다).

중요 저서로는, 바타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의 지배 바깥의 공동체, 조직ㆍ기관ㆍ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 『무위의 공동체』, 실존이 어떻게 타인과 함께 하는  공(共)실존인가를 밝힌 『복수적 단수의 존재』, 개념ㆍ명제 너머의 의미, 개념ㆍ명제의 성립조건으로서의 의미, ‘의미의 의미’에 대한 정식화인 『세계의 의미』, 현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한 『사유의 무게』 등이 있다. 그의 저서들이 널리 번역되면서 그의 사상도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최근 것들까지 포함해서 그의 저서들은 거의 영역되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저들 가운데 하나인 『무위의 공동체』(박준상 옮김)와 이안 제임스가 쓴 연구서 『장-뤽 낭시 철학 입문』(민승기 옮김)이 번역 중에 있다.

박준상 연구원
전남대ㆍ철학연구교육센터
프랑스 파리 8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바깥에서』, 역서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