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weekly>
- 변성찬(수유너머 N)
1. 들뢰즈와 정치, 들뢰즈의 정치
‘들뢰즈의 정치’에 대해서 말하려 하면, 먼저 ‘들뢰즈와 정치’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한다. 들뢰즈 사유의 정치철학적 함의를 다룬 폴 패튼의 저서 제목이 『들뢰즈와 정치』가 된 것도, 아마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들뢰즈는 아주 강한 의미에서의 ‘철학자’이고, 그의 사유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존재론이고, 그 ‘존재론과 함께 하는 윤리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 정치가에 대해, 또는 그들과 함께, 자신의 사유를 펼쳤지만, 한 번도 특정 분야에 대해 ‘반성’하는 철학(가령, 예술철학, 과학철학, 정치철학 등)을,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펼친 적이 없다. 들뢰즈의 정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정치를 접속시키는 창조적 재구성 과정이 필요하다.
들뢰즈는 늘 철학은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고, 실제로 수많은 개념을 창조했다. 조정환의 말처럼, “많은 연구자들이 그의 정치학을 다르게 특징”짓는 바, 그 특징은 바로 들뢰즈가 창조했던 어떤 ‘개념’에서 비롯된다. ‘내재성의 정치학’(마이클 하트), ‘탈영토화의 정치학’(폴 패튼), ‘노마디즘의 정치학’(이진경), ‘소수정치학’(니콜래스 소번) 등등. 여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더 많은 목록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차이의 정치학’, ‘잠재성의 정치학’, ‘욕망의 정치학’, ‘삶(une vie)의 정치학’ 등등. 하지만 들뢰즈의 어떤 개념에서 출발했건, 그로부터 이끌어낸 정치(학)적 함의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물론, 이 말은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2. 소수정치
‘소수정치’ 또한 들뢰즈의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들뢰즈의 소수정치는 먼저 “민중은 결여되어 있다(People are missing)”는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그는 『시네마II : 시간-이미지』에서 고전적 정치영화와 현대적 정치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민중은 이미 거기에 있다”는 전제와 “민중은 결여되어 있다”는 전제의 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소비에트 영화(가령,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든, 할리우드의 영화(가령, 카프라의 영화)든, ‘민중은 이미 거기에 있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한 ‘일체주의’는 결국 ‘히틀러의 영화’ 속에서 파산했다. 그 영화들의 일체주의 속에서 ‘재현/대리’된 ‘민중(people)’은 결국 ‘민족/인종(people)’이라는 ‘다수적 표상’에 포획된 대중이었다.
‘민족’은 ‘자본주의라는 공리계 실현모델’이 된 ‘근대국가’의 가장 강력한 ‘포획’의 무기다. 신자유주의가 외치는 ‘세계화’ 속에서 추방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도, ‘민족’이라는 ‘호명’ 앞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탈주’를 멈추게 된다. ‘민족-국가’, 그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양산하는 수많은 대중의 탈주선을 ‘봉쇄’하는 ‘주인-기표’이고, 또 그들을 ‘예속-주체화’하는 ‘주체화의 점’이고, 모든 ‘다수적 척도(백인, 남성, 이성애자,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 등등)’를 뒷받침하는 최후의 보루다(국가/민족의 위기 앞에 얼마나 많은 소수자들의 권리투쟁이 위축되는지를, 우리는 이미 많이 보아왔다). “민중은 결여되어 있다”는 들뢰즈의 명제는, 먼저 이렇게 “민족은 없다”는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더 이상 “민중을 단일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한편 들뢰즈는 ‘도래할 민중’에 대해서 말한다. 이때의 ‘민중(people)’은 그 어떤 다수적 척도와 동일성에 ‘몰적’으로 포획된 대중이 아니라, 그로부터 탈주하는 ‘분자적 대중’ 또는 ‘무리’로서의 대중일 것이다. 자본과 국가는 그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수많은 대중들을 ‘삶의 자리’로부터 추방(‘탈영토화’)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래할 민중’이 저절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들뢰즈의 말처럼, “만약 민중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리고 더 이상 의식(화)도, 진화도, 혁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나 단결된 혹은 통합된 민중에 의한 권력의 쟁취란 가능하지 않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들뢰즈의 말을 조금 바꿔 인용하자면, 우리는 ‘혁명을 꿈꿀 불가능성’, 그리고 ‘혁명을 꿈꾸지 않을 불가능성’이라는 카프카적 딜레마에 빠져들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자에게 들뢰즈가 던지는 전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 속에 있을 것이다. “확실히 방언 같은 소수어를 사용하거나 게토나 지역주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속(connection)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민중의 발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수적인 것들의 연합과 접속의 과정 혹은 구성의 과정이다.”(『천 개의 고원』) 분명, 다수적 척도 자체를 바꾸지 않은 채 자신 만의 ‘게토’를 만드는 것이 소수정치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남성’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운동이든, 비정규직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임금인상(가변자본으로서의 가치 상승)’만을 요구하는 노조운동이든, 그것은 결국 자신만의 ‘게토’를 만드는 것에 다름아니다(하지만 들뢰즈가 이러한 ‘공리적 투쟁(제도개선투쟁)’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탈주는 다른 누군가의 탈주와 연결접속 될 때, 비로소 진정한 탈주, 즉 ‘혁명’이 된다(가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친구와 함께 해야 한다). 자본과 국가의 ‘배제적 이접’에 맞서는 소수자들 사이의 ‘포함적 이접’, 그것은 모든 소수자들이 ‘상호-되기(이중생성)’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소수자-되기’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자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소수자들의 연결접속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개자’가 된다는 것은 ‘지도’한다거나 ‘의식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다른 소수자와 함께 ‘상호-되기(이중생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정치 영화의 위대한 시네아스트들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제 인물들이 이야기를 꾸며 내게 함으로써 타자가 되게 하고, 또 작가 자신은 자신에게 실제 인물을 증여함으로써 타자가 되는 이중 생성(인물의 작가-되기, 작가의 인물-되기)”을 이루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탈주의 진정한 목표는 소수자 자신의 ‘도망’이 아니라 ‘세상(의 다수적 척도)을 탈주시키는 것’이다. 마치 카프카가 ‘소수적 창조’를 통해서 ‘다수어를 더듬거리게’했던 것처럼 말이다. 들뢰즈가 소수자들의 연결접속을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우리끼리 평화롭게 잘 살 게’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진정으로 ‘세상을 탈주’시킬 가능성, 다수적 척도를 무력화시킬 가능성, 자본주의라는 공리계를 ‘극한’ 너머의 ‘문턱’으로 몰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사실, 얼마나 많은 봉기와 혁명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던가?).
3. 정치의 소수화
들뢰즈가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가령, 랑시에르가 ‘치안’과의 대비 속에서 자신의 ‘정치’ 개념을 정의했던 것처럼) 자신의 ‘정치’ 개념을 설명한 적은 없지만, 지젝이 오해한 것처럼 그가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들뢰즈의 사유, 그리고 그의 수많은 ‘개념 창조’는 이미 정치적 행위이고 혁명적 행위였다. 조정환의 말처럼, 들뢰즈의 철학이 현대의 좌파 정치학에 미친 가장 큰 효과는 ‘정치의 자리’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국가를 정치활동의 중심무대로 파악하는 전통적 관점”을 “삶의 미시적 영역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작은 갈등들, 언어들, 이미지들, 계략들, 발명들 등이 낳는 탈물질적 놀이와 의미의 사건을 정치의 중심 무대로 가져왔다.” ‘국가’를 향한 투쟁이 아니라, ‘국가의 외부(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라는 내부성 속의 외부)’에서 벌이는 투쟁=창조, 그런 의미에서의 ‘미시 정치학’, 이것이 들뢰즈의 정치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정치(개념)의 소수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도 정치-되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첨언 하나. 들뢰즈의 지나친 ‘낙관주의’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지만, 그는 ‘긍정주의자’이기는 해도 ‘낙관주의자’는 아니다. ‘낙관주의’란 ‘세상-문제로부터의 도피’이거나 허튼 ‘위로’이겠지만,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위험’을 알면서도 ‘실험’을 감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카프카가 ‘글을 쓸 수 없는 불가능성,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불가능성’라는 이중적 불가능성(딜레마) 속에서도 글쓰기=창조를 했듯이, ‘실험’이란 그렇게 출구를 ‘찾아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고, 그렇게 ‘삶의 잠재성’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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