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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불명

 

 

 

푸코의 권력론: 메피스토의 악마


1. 머리말

만일 악마를 처치해버리고자 한다면, 이것을 회피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마의 능력과 한계를 알기 위하여 미리 악마의 수단을 철저히 통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의 영혼을 노리는 악마의 존재에 대해 은근한 유혹과 함께 두려움을 아울러 품어왔다. 그리고 얼마나 집요하고 기나긴 싸움을 해왔던가? 그러나 이 싸움은 인간 외부에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내부의 알 수 없는 이질적 존재에 대한 싸움으로 귀결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새삼스런 감동 이전에, 우선 냉정해져야 할 지도 모른다.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중단될 수 없는 투쟁과 억압의 과정은 거대한 실체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소한 일상사에도 끊임없이 교차되면서 다양한 권력 형태들을 산출해왔다. 그렇게 짜여진 시공간의 구조와 억압, 그리고 자유에로의 끊임없는 열망은 역사의 궤적과 지층들 속에서, 그리고 수많은 삶과 관계들의 얽힘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푸코는 절대자유를 갈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때로는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현상들의 치밀한 분석을 통하여 그 현실을 감당해 왔다. 그는 역사에 있어 고정된 본질이나 심층적 법칙, 형이상학적 결말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의 의미가 있다는 논리를 부정한다. 그는 우리 세계가 유일하고 통일적인 그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즉 우리의 학문, 합리성, 주체성, 언어와 지배 기술을 어떤 단일한 철학적 범주에 기초해서 포섭해 내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따라서 의미, 가치, 진리, 도덕, 선 등의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 속에 감추어진 권력의 전략, 지배와 복종, 억압과 전투의 관계를 파헤친다.({감시와 처벌}, 8-9쪽)  

푸코는 '지식, 권력, 주체화'라는 세 축을 통하여 자기 저작의 각 시기에서 두드러진 특정한 접근 방식을 포착하고 있다. 이들 접근 방식은 각자 서로를 배제하는가, 아니면 상호보족적인가? 이 문제는 오랜 논란의 대상으로서, 푸코를 이해하는 갖가지 방식들을 낳았던 계기로 작용하여 왔다. 특히 하버마스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있듯이, 푸코는 냉정하고 세심한 분석을 가하는 실증주의자의 모습과 아울러 열정적이고 예민한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는, 때로는 모순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 수많은 푸코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용할 것인가?

2. 反리바이어던의 권력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처음 권력의 문제를 명확히 하면서, 규율 권력이라는 새로운 권력 형태와 그에 따른 새로운 지식 형태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 활동의 통제와 질서지움을 목표로 하는 이 규율 권력은 훈련과 규준화를 통해 개인을 형성시키고 통제하는 '개별화 과정'으로 분석된다. 푸코는 처벌과 감옥 기능의 변화를 논의하는 가운데, 권력 행사의 직접적인 표적이었던 신체에서 '영혼'으로 그 초점이 이동하고 신체는 그러한 권력 작용의 필수적인 상관자가 됨을 보여준다. 군주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던 폭력적 신체형이 감시와 교화로 바뀌고, 공개 처형은 은밀한 감금으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형벌제도의 원리는 감금을 통한 행위의 시공간적 배분과 규제로서, 일상생활의 미세한 행동들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식으로 그 유형이 바뀌었다. 이제 형벌은 더이상 화려하고 잔인한 과시의 형태가 아니라 어떤 효과를 달성하려는 일종의 규제의 형태로 바뀌어져, 죄수들을 공간적으로 격리 수용하고 감시하며 시간적으로는 일과표를 작성하여 동작 하나하나가 계산되고 이에 의거하여 행동하도록 만든다. 개인은 시험과 검사의 대상이 되고 목록화된다. 그 과정에서 개인들은 하나의 사물처럼 대상화되고 예속화되어 간다. 그것은 개개인을 의미있는 주체로 만드는 동시에, 유순한 객체들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푸코는 결국 규율 권력이 '순종적이고 유용한 신체들'을 생산해내며, 또한 우리의 '심리, 주관성, 개인성, 의식'은 훈련과 감시 방법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감시와 처벌}, 207쪽).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권력이 행사되는 축소된 정치제도적 거점으로 작용하며, 영혼 속에는 감시의 눈길이 무의식 중에 작동하는 규율 및 감시체제를 목도해야 한다. 푸코는 판옵티콘의 구조를 통해 그 메카니즘을 설명한다. 벤담이 고안한 이 장치는 원형으로 설계한 감옥으로서, 중앙에는 감시탑이 있고 원둘레에는 여러개의 작은 감방들로 나뉘어져 있다. 중앙의 감시탑은 어둠 속에 가려서 보이지 않고 원둘레의 감방들은 빛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중앙탑의 감시자는 자기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반면, 감방에 갇힌 사람들은 보지 못하면서 보여지는 입장이 된다. 이에 따라 그 구조는 수감자에게 끊임없이 시선을 의식하도록 만듦으로써, 스스로 권력관계 속에 들어가는 한편, 권력의 구체적인 행사가 없이도 권력관계를 유지하도록 한다.

이 장치는 권력을 '자동적이며 비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권력이 어떤 인격에 의해 소유되고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빛, 시선이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개개인을 포착해내는 일종의 기능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따라서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또 어디에서 권력이 나오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서 얘기되어야 하는 것이다({감시와 처벌}, 298쪽). 판옵티콘의 영역은 사회의 세밀한 단위에까지 이르며, 신체와 그것의 다양한 움직임과 힘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개개인을 가시적으로 만들고, 기록하고, 차이짓고, 평가하기 위한 도구를 이용하는 메카니즘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규율 구조는 각 개인의 의식 및 무의식을 포함하는 정신과 직접적 대상인 신체 속으로 깊숙이 확산될 수 있었다. 권력은 이렇게 하여 구체적인 개인의 삶 속에 뿌리내린다.

푸코에 대한 흔한 비판 중의 하나는, 그가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미시적 권력의 작용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사회전체가 어떻게 유지되는가하는 거시적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에 들어서 더 큰 영향력을 확보하고 사회전체 속으로 확대되고 있는 국가의 문제를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도 행해진다. 그러나 푸코는 '통치성'이란 문제틀을 통해 권력을 미시적인 개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사회적인 것'의 생산/재생산 문제라는 차원에서도 해명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국가를 단지 사법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통치 기제'라는 측면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근대적 국가이론은 국가의 통치 활동을 국가의 본질적 특성이나 경향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정치적 주권과 복종의 합법적 기초를 마련하는(예를 들면, 주권의 처소에 따라 군주제냐, 의회제냐를 나누는) 문제에만 국한되어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은 국가 형태라는 제도적 차원에 머물러 있고 국가의 구체적인 실천들, 권력이 실제 작동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푸코는 근대 국가권력을 국가의 통치, 행정, 기술, 그와 연관된 담론들 및 과학적 지식 영역의 출현이라는 역사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군주권과는 달리 통치는 통치행위 자체가 아니라, 개인과 인구의 건강, 안녕, 보호, 발전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통해서 법률의 테두리 내에서만 권력을 사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실행되는 권력 메카니즘을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인구를 둘러싼 통치의 문제는 국가 경영의 합리성 증대라는 차원뿐만 아니라, 인구의 복지와 행복, 궁극적으로는 인구 각각의 삶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을 위로부터 대면하는 통일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에 대해 새로운 형태의 사목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개인성을 형성하고 틀 지우고 통치하는 '개별화의 모체'를 구성한다([주체와 권력], 95쪽). 국가는 양떼를 하나하나 돌보고 인도하는 목자와 같은 사목권력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등장한다. 사목권력은 개개인을 생애에 걸쳐 돌보아주는 권력의 형식이며, 정신의 내면과 영혼, 내밀한 비밀을 드러내도록 한다. 즉 양심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함축한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사목권력이 사회체 전체로 확산되고 개인과 인구에 대한 지식이 발전함에 따라 근대국가로서 새롭게 조직화된다.

푸코는 결코 국가의 문제를 간과 혹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은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권력의 한 형식으로서,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고정하고 통제하는 권력으로서 행사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국가와 권력은 이전의 정치철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의 근원과 기원을 일정한 구조나 제도의 중심에서 찾으려는 환원론적 분석을 거부했다. 그가 누누히 말한 바와 같이, 권력관계는 무수한 대치점들, 불안정한 지점들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해야 한다. 이들 각각의 지점들은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각기 나름의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미시권력'이란 단지 그것이 작용하는 영역이 '작다'는 것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미시적이라는 말은 유동적이면서 어떤 장소에 고착시킬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관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력은 국가(기구) 또는 어떤 집단과 같은 특권적 장소에 집중되어 있어서, 계급 간의 대립 혹은 시민과 국가 간의 대립 속에 국부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표면에 분산되고 확산되는 무수한 권력 기술과 절차들로서 존재한다. '권력관계는 다른 형태의 관계들(경제적, 지적, 정치적 관계 등)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 권력관계는 그러한 여러 관계들에서 생겨나는 분배, 불평등, 불균형의 직접적인 효과이며, 동시에 이 관계들의 내적인 조건이다'({앎의 의지}, 108쪽).

그러므로 권력은 그것을 갖고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와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어느 한쪽에서 권력을 빼앗아 오거나, 또는 권력 행사의 수단인 국가기구를 장악하거나 파괴함으로써 권력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권력은 쉽게 제거되거나 회피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악마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은밀히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사간다.

이러한 시각은 자칫 '역사적 시간 속에서 영원한 존재가 되는' 권력이 사회 전체를 완전히 감싸서 빠져나갈 길 없는 질서를 구성한다고 보는 입장으로 비치기 쉽상이다. 물론 '감금의 군도', '생-권력의 시대', '규율사회' 같은 용어들은 사회 전체를 뒤덮는 하나의 우중충한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많은 논자들은 푸코가 '권력'의 개념을 말할 때, 그것은 자유 혹은 진리의 여지를 남기는가를 반문하며, 푸코가 권력을 벗어날 길 없는 상태로 그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프레이저는 푸코가 근대성 자체를 전체적으로 한덩어리로 보아 일면적으로 거부하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위와같은 묘사를 통하여, 근대를 합리성의 꽉 짜여진 세계로 기술하고 쇠우리에 갇혀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베버를 손쉽게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더욱이 {감시와 처벌} 이래로 푸코가 권력관계의 제도적 측면에 더욱 많은 고려를 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병영이나 병원과 흡사하고, 이러한 모든 기관이 감옥과 닮은 것이라 해서 무엇이 놀라운 일이겠는가?"({감시와 처벌}, 329쪽)라는 말에서 보듯이, 푸코는 이 '사회적 상동성'의 원리 속에서 판옵티콘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고 보편화되는 통제구조를 설정하고 있다는 혐의를 충분히 받을만 하다. 그러나 그가 근대 사회의 일반적 특성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권력 개념을 하나의 '제도'로 잘못 이해하는 데서 연유한다.

푸코의 탐구는 흔히 오해받고 있는 것처럼, 근대사회 전체가 규율잡히고 완벽하게 프로그램된, 그래서 어떠한 반대나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로 되었던 사실을 실증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의 정식으로서의 판옵틱주의가 사회에 걸쳐 받아들여지고 확장되는 방식이며, 그것은 또한 원래 의도했던 바 그대로 전개되거나 구현되지도 않는다고 지적한다.

푸코는 담론, 프로그램, 합리적 계획은 다른 사회적 제도적 실천들과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애초 의도된 바대로 결과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역사에 있어서 분산, 일탈, 우연이 작동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물들은 결코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방법의 문제], 10쪽)는 말은 '사건'으로 인한 역사의 틈새, 그리고 저항의 공간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이 프로그램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예를 찾을 수 있다. 군주의 절대권력을 과시하면서 외경심을 갖게 하는 정치의례로서 행해졌던 고문과 처형은 때로 전혀 뜻하지 않게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군중들이 그의 편에서 그를 영웅시하면서 사형 집행인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에 따라 권력의 행사방식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판옵티콘의 프로그램과 감금은 애초 의도했던 대로 범죄의 감소와 소멸을 가져오기보다는, 감금 속의 무법, 부랑을 낳았다.

그러나 실패하는 것은 특정한 프로그램이지, 전략이 아니다. 전략은 이론이나 원리로 환원될 수 없으며, 또한 개인이나 어떤 제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전략은 상이한 사회 정치적 정책과 목표들의 수행 양식들 속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실천들과 목표들을 관통하는, 효과들의 복합적 질서이다. 이러한 전략의 개념은 관계로서의 권력 개념과 연결된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명목론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이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제도도 구조도 아니며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물리적 힘도 아니다. '권력이란 주어진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붙여진 이름에 다름아니다'({앎의 의지}, 107쪽) 따라서 푸코의 작업은 개념적으로 실재하는 역사적 실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움직이고 있는 유동적인 권력관계의 그물망을 추적해내고 그러한 관계의 집합이 일정한 대상을 포착하여 지식을 형성하고 질서를 부여함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3. 주체화

여기서 푸코에게 만만치 않은 난점을 보게 된다. 우선적으로 냉철한 분석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실증주의적인 태도의 산물로 보인다. 그는 분명 자신의 분석에서 규범적 의도를 제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행하는 역사 분석이 기존의 지배적 형식을 거부하는, 하나의 정치참여 및 정치투쟁이 되기를 바란다. 이 사이에 명백한 딜레마가 존재하지 않는가? 계보학은 사회의 비판적 목표에 기여할 것인가? 심층 차원의 역사 분석이 곧 유용한 비판 형식이 될 수 있는가? 하버마스의 표현에 따르면, '실증주의와 비판적 주장의 역설적 결합'은 성공적일 수 있는가?  
그러나 '자신의 고유한 계보학은 스스로에게 계보학적일 수 있는가?'라는 하버마스의 질문에 우리는 다시 규범적 명제를 도입해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비판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진리 기준과 규범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낸시 프레이저가 인정하듯이, 푸꼬는 권력에 대해서 규범적 틀을 도입하기보다는 전략, 전투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지배, 복종'이라는 용어는 푸코에게 규범적으로는 중립적인, 즉 근대 세계에서 다양한 적대세력들 간의 전략적 배치와 활동 양식을 표현하기 위한 단순한 서술 용어인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반문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왜 순종보다 투쟁이 바람직한가? 왜 지배는 저항받아야 하는가?" 그녀는 모종의 규범적 관념을 도입할 때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할 때만이, "근대 지식-권력 체제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그것에 저항하는지를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의 제기는 다시 권력에 저항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의 지형으로 옮겨감을 암시한다. 칼리니코스는 인간 본성과 행위자의 이론을 채택함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푸코 역시 주체를 다시 도입하는 순환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푸코가 '인간' 자체 혹은 주체 일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개별 행위자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모른다거나 그들 행동의 의미와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떤 개인도 그들 행위에 의해 사회관계를 재생산할 수 있는 행위자, 역사를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주체들'로 만들지는 않는다. 푸코가 거부하는 것은 다만 인간이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는 선험적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푸코에 매우 동조적인 들뢰즈도 푸코가 '권력 너머로는 아무것도 없는가?'라는 난점에 부딪히면서, '주체화의 과정'이라는 새로운 문제제기를 시작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체를 재도입하는 과정이 아니다. '개인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고 인식하게 되는 자기와의 관계의 형태와 양태들이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는 문제설정의 변화를 의미할 뿐이다. 즉 문제가 되는 것은 주체화의 과정이지 주체라는 실체는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것은 권력의 형식이다. 권력은 배제, 처벌, 억압, 검열, 고립, 은폐하기보다는 생산적인 것으로서, 육체, 몸짓, 행동에 작용하여 개인을 유용하게 만들고, 그런 목적에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성의 역사} 2권부터는 권력관계의 어떤 배치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의 위치뿐만 아니라, 이제 개인들이 스스로를 특정한 주체로 확립해가는 속에서의 자기자신과 맺는 관계, 즉 '주체화의 양식'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는 주체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다만 도덕적 주체를 형성하는 '자기통치의 기술'을 중심된 논의로 삼고 있다.  

그런데 주체 스스로가 자기를 구성해가는 이 그럴듯해 보이는 자기형성적 실천들의 지위가 문제시된다. 이것은 권력을 벗어나는가? 권력-지식체계와는 상관없는 독자적 영역으로 구성되는가?

들뢰즈에 따르면, 주체화(subjectivity)는 다음 두 가지 방식을 통하여 '종속(subjection)'으로 전환된다. 첫째는 '통제와 종속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는 것'과, 두번째는 주체에 관한 지식을 구성하는 도덕 및 인간과학의 기술을 통해서, '양심 또는 자신에 관한 지식에 의해 자기자신만의 정체성에 묶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주체화로부터 저항의 가능성을 찾는다. 자기와의 관계 역시 어떤 사회적 제도적 체계에 대해서 독립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이 작동시키는 코드와 권력에 저항하는 자기와의 관계는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저항 지점의 한 축으로서 주체화를 거론할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 종속의 형식에 대한 투쟁, 즉 주체성의 순종에 대한 투쟁은 점점 더 중요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 투쟁들이 특징적인 것은 개인의 지위를 의문시하는 투쟁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것을 문제삼는 것은 단지 주체의 의식적, 본래적 능력에서 찾아지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천으로 파악된다. "수감자들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감옥에 대한, 형벌체계에 대한, 정의에 대한 개인적인 이론을 소유했다는 것이다."([지식인과 권력]) 따라서 현재 각 곳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투쟁들이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은 저항의 기반과 규범을 따져묻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되묻게 한다. 즉 푸코의 저항과 투쟁은 의식의 어떤 부분, 또는 도덕적 판단을 통해서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삶의 양식'의 문제로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총체적인 또는 어느 하나의 주어진 주체화 양식을 거부하고, 그리하여 주체성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는 것을 통하여 현재에 대한 부단한 싸움을 거는 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권력관계에는 통치기술이 정확하게 작동하지 않게 하는 무언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실재를 전화시키는' 주체들의 행위의 복잡한 결과로서 역사가 실현되는 것이다.

"주체성은...그 자체를 역사로 인도하고 그것에 삶의 호흡을 불어 넣는다. ...사람들은 그것들(저항)과 연대하지 않아도 된다. 그 혼란스런 목소리가 다른 것보다 더 낫게 들리고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한다고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추적해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존재하며, 그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설정된 것들에 대항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인간의 시간이 진화의 형태를 갖지 않고 정확히 역사의 형태를 갖게되는 것은 그러한 목소리들 때문이다." ([반란은 소용없는가?], 8쪽)

4. 맺음말

푸코의 역사쓰기는 현재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과거를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 역사를 형성한다. 현재라는 것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방식으로 과거에 뿌리내리고 있고, 현행의 절차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 그 다양한 사물에 관련되며, 현재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이 구성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제결과를 폭로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루어진 상황은 역사에 의해 '필연적으로' 야기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푸코의 계보학은 자명성을 전제해왔던 여러 형태의 지식들을 붕괴시키고 권력-지식 관계망에 복무해 왔던 모든 이들을 불확실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역사를 탈실재화함으로써 우리(의 사고와 실천)를 자유롭게 한다. 푸코는 이러한 계보학적 탐구를 비판의 한 형태로 생각한다. 푸코의 지적인 행보에서 감출 길 없이 드러나는 자세는 '사고의 비판적 역사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침묵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쾌락의 활용}, 24쪽)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신화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오디세이아}의 키르케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온 두가지 상이한 전략 또는 대립되는 삶의 방식들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다. 키르케의 섬에 표류한 오디세우스와 그 부하들은 그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바뀐다. 여기서 다만 오디세우스만이 몸은 돼지로 바뀌었지만 정신은 인간의 것으로 남아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고통스런 '기억'을 유지한다. 바로 이 대목이 루카치를 전율케 했다. 즉 인간은 상품이 되었으면서도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따라서 이 소외당한 자신을 회복하려는 고통스런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는 소외 없는 저편의 세계, 구원과 해방의 순간을 기다린다.

반면에 그의 부하들은 구원을 위해 기억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런 인간성 혹은 소외되지 않은 세계를 붙들고 있는 한 인간은 자유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없고, 자신의 현실을 새로운 창조적 현실로 뒤바꿀 수 없다. 그는 키르케의 마법을 인정하지 않고, 또 현실에 대한 비참감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창조하는 전략을 세운다. 이 망각의 정치가 푸코의 것이리라. 이것은 기억과의 연결이라든가 형이상학적이며 인류학적인 모델과 절연하고 反기억, 즉 역사를 전혀 다른 시간 형식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구성하는 역사학의 용도를 의미한다.  

참고한 글

M. Foucault, {감시와 처벌}, 나남
             [주체와 권력], 정일준 편역, {미셀 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통치성], 위의 책
             [자유의 실현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위의 책            
             [지식인과 권력], 이정우 편역, {구조주의를 넘어서}, 인간사
             [진실과 권력], C.Gordon, {권력과 지식}, 나남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 나남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나남
             'Questions of Method', The Foucault Effect, Harvester Wheatshaf, 1991
             'Is it useless to revolt?', Philosophy and Social Crkticism, vol 8., 1981

 

내용출처 : 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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