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블로그 <물질문명>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jwesp&logNo=150119471292
원문:
http://www.philomag.com/les-idees/entretiens/alain-badiou-mai-68-a-ete-mon-chemin-de-damas-4141
프랑스 철학 월간지 필로조피 매거진(Philosophie Magazine)의 웹사이트(http://www.philomag.com/index.php)에서는 여러 철학자들의 인터뷰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지금 올리는 것은 그 중 19호에 실려 있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와의 인터뷰 번역이다. 이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바디우가 젊은 시절 경험했던 개인사적-역사적 체험들이 그의 철학에 미친 영향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주된 철학적 과제 중 하나가 66-67년 프랑스 지성계를 지배하던 '구조'에 대한 과학과, 68년 혁명을 통해 돌출한 '주체'적 경험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을 건축하는 것이었음도 볼 수 있다.
Philosophie Magazine n°19 Avril 2008
<알랭 바디우: 68년 6월은 다마스쿠스(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 회심한 곳: 역자)이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르트르적 전통 속에서 사고(pensee)의 경험을 정치적 참여와 연결시키는 철학자이자, 1968년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는 철학자이다. 이 위험한 “사상의 스승”은, 수학, 정치, 사랑, 시 위에 진리들을 정초하는 플라톤의 본래적 몸짓을 부활시키고자 한다.
알랭 바디우는, 형이상학자로서의 엄격한 작업을 통해 세계 학계로부터 정당성과 명성을 얻은 이후, 대단히 급진적인 논쟁적, 정치적 글들을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던 철학자들의 계보에 속하는 인물이다. 알제리 전쟁에 맞선 투쟁을 통해 정치에 입문하고,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 의해 철학에 눈을 뜬 바디우는, “붉은 시대(annees rouges)”의 투쟁에 대한 자신의 충실성을 주장하며 오늘날에도 정치적 조직의 중심부에서 그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가 최근에 쓴 책자인 <사르코지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De quoi Sarkozy est-il le nom?)>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후, 어떤 이들에게 있어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은 민주주의적 합의에 대한 저항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다. 반면 다른 이들에게, 의회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마오주의에 대한 부인을 거부하는 바디우의 태도는 말 그대로 시대착오적일 뿐이다. 아마도 형이상학자로서의 바디우와 스캔들을 일으키는 논쟁가로서의 바디우를 분리하는 것, 체계 구축자로서의 바디우와 구루(gourou, 영적 지도자)로서의 바디우를 분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결책은 일관성을 잃게 되는데, 왜냐하면 바디우는 자신의 사상이 단일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필로조피 매거진 : 당신은 어떻게 철학자가 되었습니까? 그리고 사르트르가 당신에게 계시적인 존재였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습니까?
바디우 : 내가 16-17살이었을 때, 나는 과학자로서의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심지어 삼림-수질 감시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자연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학창시절에 거둔 주요한 성공들 –프랑스어 경연대회에서 받은 상이라던지- 은 문학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최후의 순간에 철학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 장-폴 사르트르의 <감정이론개요(L'Esquisse d'une theorie des emotions)>를 읽었기 때문이지요. 그 책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사르트르적 관념, 즉 의미의 생산은 자유와 내재적인 관계에 있으며, 진리와 실존을 건 근본적 결단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 의식의 절대적 자유에 대한 이론은 사르트르에 대한 열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그 당시의 칙칙한 학계 사상의 맥락 –단조로운 도덕주의, 지나치게 만연한 신중성, 어림짐작에 지나지 않았던 인식론 등- 속에서는 말이죠. 현대의 플라톤 혹은 파스칼이라 할 수 있는 사르트르는 그 활력, 광채와 함께 이와 같은 칙칙함 속에서 매우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또한 알제리 전쟁 초기의 정치적 참여의 시절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어두운 시절, 파리의 경찰서에서 고문이 행해지고, 18살의 나이로 전쟁에 나가던 시절- 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사상입니다.
필로조피 : 수학에 대한 당신의 애정은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비롯했고, 시에 대한 애정은 어머니로부터 비롯했습니다. 수학과 결합된 시, 이것이 철학을 낳는 것입니까?
바디우 : 물론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복합적인 가계도를 인정합니다. 만약 당신이 수학 쪽의 아버지와 시 쪽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면, 가장 자연스런 산물은 여전히 철학, 플라톤적인 철학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르트르 이후, 플라톤에 충실한 채로 남아 있으니까요. 그 이유는 첫째, 수학의 패러다임적 성격이 플라톤의 철학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하학자가 아닌 이는 들어올 수 없다”라는 말이 아테네 학당의 정면에 적혀 있었지요. 둘째로, 시와 플라톤 사이의 불화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불화에서 언제나 (플라톤의) 시에 대한 깊은 애착을 읽었습니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와 반목했지만, 그가 또한 호메로스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국가(La Republique)>에서 그는 시인을 도시 밖으로 추방하지만, 또한 그리스어로 된 산문시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장려한 신화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형식주의(formalisme)와 문학 사이, 개념적 엄격함과 유혹 사이, 지식에 대한 노동과 주관적 사로잡힘 사이에 매달려 있는, 일종의 사생아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철학적 언어가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필로조피 : 당신은 “프랑스의 플라톤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또한 프랑스어 철학, 즉 개념적인 만큼이나 문학적이기도 한 프랑스어 철학의 계승자가 아닙니까?
바디우 : 사실 내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민족적 혈연관계입니다. 프랑스의 언어적 전통이 존재하며, 나는 거기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통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철학자와 작가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운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성의 질서와 수학에 매우 친화적이었던 데카르트 역시 대단한 프랑스어 문장가였습니다. 파스칼, 루소,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형식주의와 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철학적 언어의 결정불가능한 성격은 프랑스의 전통 중 하나이며, 이 전통이 철학을 대학과 구별되는 영역에 위치시켰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철학자는 단순한 교수일 뿐 아니라 언론인, 토론자, 공공적 발언을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언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난해함과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철학자들은 어떤 명철함과 고상함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국제주의적인 애국자입니다.
필로조피 : 당신에게 68년 5월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디우 : 68년 5월은 나에게 있어 다마스쿠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일종의 회심을 경험했던 시기이지요. 나에게 68년 5월은 내 존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정치적, 개념적, 개인적 여건들을 변화시킨 일종의 사건으로 다가왔습니다. 칸트를 패러디하자면, 68년은 나를 구조주의의 잠에서 깨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67년에는 구조주의, 형식주의,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새로운 실증주의라고 할만한 것이 사회 과학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라깡(Lacan) 같은 이조차형식적 논리와 과학적 언어학에 매혹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체의 일반 대수학(algebre generale du sujet)”과 같은 것을 제안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1968-69년에는, 그들이 급진적인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치 그들의 모든 삶이 혁명적 행동 속에서 요동친다는 듯이. 여기에는 연속성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절이 있는 것일까요?
되돌아 보면, 둘 다라고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명백한 단절의 요소가 있습니다. 사회참여의 주도권이 구조의 족쇄를 끊고 실천, 토론, 저항, 자발적 행위로 넘어갔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나는 기존의 개념 중 몇 가지가 정치적 행위에 접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강렬함과 함께 말이죠. 구조주의에는 일종의 이론적 강렬성, 예컨대 반인간주의적 선언들, 기존의 사상적 질서와의 단절의 테마 등이 존재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론적 강렬함은 정치적 참여의 실존적 강렬함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필로조피 : 68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났습니다. 당신은 68년의 유산과 관련하여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바디우 : 68년 5월의 후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을 우울증적 후손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종말, 포기, 불가능성, 잃어버린 환상 등의 테마들. 내가 배교자의 태도라고 특징짓는 그러한 테마들이 사상적 공간에 침투했습니다. 우리가 급진적 정치의 종말을 경험하고 있다고 선언한 장-프랑수아 료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가장 상징적인 대표자 중 한 명입니다. 나를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구별짓는 것은, 내가 모든 역경에도 비롯하고 참여에 대한 단호한 전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를 현실원칙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and)의 “좌파연합(l’Union de la gauche)”은 그것의 정치적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 동조시키려는 시도가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또한 68년 5월의 사건에서 형식주의적 도구들이 이와 같은 다양한 형식의 저항을 사고하는데 있어 부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은 결국 1960년대의 구조주의와 68년 5월 사이의 개인사적 종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형식주의적 사고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건’은 지각되지 않은 가능성들이 돌출하는 예측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마찬가지로, 나는 철학의 고유한 야망들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종말과 반동의 수사들에 맞서서 말입니다.
필로조피 :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의 네 가지 조건은 수학, 시, 정치적 사건, 사랑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습니까? 그리고 왜 당신은 이 네 가지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까?
바디우 : 이 질문에 대해 계보적으로 대답해 보자면, 그것은 플라톤과 철학의 시작에 대한 나의 독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이 가능한 것은, 변증법의 필수불가결한 입구라 할 수 있는 수학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가능한 것은 또한 –플라톤의 산문에서 명백히 지각 가능하듯 - 시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향연(Le Banquet)>에서 볼 수 있듯, 철학은 사랑을 요청하는데 거기서 애정적 전이(transfert)는 사고(pensee)의 역학에 있어 근본적인 것으로서 나타납니다. 정치에 대해 말하자면, 분명히 정치는 플라톤의 삶과 사고에 있어 근본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플라톤의 대화들에서 발견하게 되는 순환, 즉 사랑, 수학, 정치, 시 사이에 일어나는 이와 같은 순환은 나를 플라톤에게 온전히 연결시키는 요소들입니다. 사랑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랑은 하나(l’Un :혹은 일자)가 아니라 둘(Deux)로서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탐사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해줍니다.
만약 사랑이 하나의 사고(pensee)라면, 그것은 둘과 차이 –세계의 풍요로움이자 세계의 특유한 구조이기도 한- 에 대한 사고입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의 이 네 가지 조건은 인간 존재에 흥미를 부여하는 것들, 인간 존재에 생존(노동, 사회성, 여가 등)의 지배를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부여해주는 것들로 보입니다. 존재의 필요 불가결한 구성요소로서의 행복한 동물성이 물론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동물성을 넘어서려는 경향을 가진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우리는 항상 이 네 가지 항 -모든 사람의 내밀한 경험에 부합하는- 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철학은 가장 세련된 개념적 확장과 가장 강렬한 내면적 경험 사이의 결합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로조피 : 왜 그 네 가지에 종교적인 것(le sacre)을 덧붙이지 않습니까?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성 프란시스를 원용하고,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예수를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과 당신은 성 바울과 대화를 나누지요. 오늘날의 급진적 사상가들은 이와 같은 기독교적 인물들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바디우 : 이러한 현상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종교적 요소가 쇠퇴해 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후로 우리는 이와 같은 (종교적) 우화들이 갖고 있는 지적 기능을 전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우화들은 교육의 장으로 편입됩니다. 신화들의 용법이 그러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겠지요. 수 많은 예 중에 하나만 들자면, 프로이드(Freud)가 오이디푸스를 가지고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1960-70년대를 결산해 보면 우리는 이 시대를 주체의 문제에 대한 극화(dramatisation)가 이루어진 시대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가 세계의 긍정적인 발전 혹은 혁명의 약속 등의 버팀목을 상실했을 때,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와 같은 문제지요. 나는 위와 같은 종교적 인물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해주는 지점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각각의 철학자는 자신의 성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마 철학자 각각이 선호하는 성인들로부터 출발하여 현대의 철학적 방향에 대한 지도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가장 논쟁적인 기독교적 인물인 성 바울 –일종의 기독교의 레닌이라 할 수 있을- 을 선택했음을 인정합니다.
필로조피 :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당신의 책, <사르코지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신의 책에 따르면, 사르코지는 사회적 일탈자와 외국인에 대한 “거대한 공포”로 이루어진 정치를 구현하는 존재입니다. 사르코지에 대한 작금의 비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바디우 : 그는 폭주했습니다. 그는 보란듯이 모든 영역에서 가시적인 방식으로 퇴보적인 정책 –사르코지가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르코지는 인기를 잃었죠. 아마도 사르코지는 이 어둡기 짝이 없는 정치의 일시적인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와 같은 정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역자) 영구 구류 법률이 투표되고, 방리유 지역(파리 외곽의, 소위 우범지역으로 간주되는 지역: 역자)에 대한 폭력적 공격 혹은 미디어를 통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대학을 “개혁”하고... 이런 의미에서 국무 총리인 프랑수와 피용(Francois Fillon)은 그의 주인(사르코지 :역자)의 실재적 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에 부정적인 흠으로 가득한 사르코지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 비열한 법적 조치들을 실행하는 사르코지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르코지의 추락은 프랑스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프랑스가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국면으로 뛰어들 때, 저항의 과정들이 급속도로 생성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르코지가 재미도 주고 짜증을 유발하기도 하면서 유권자들과 유희하는 동안, 정부는 권리를 해체하고 노동 협약을 파괴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필로조피 매거진 : 어떤 의미에서 ≪ 코뮤니즘이라는 가설(l’hypothese communiste, 바디우의 책 제목이기도 함 : 역자) ≫은 언제나 좋은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어떻게 구현될 수 있습니까 ?
바디우 : 코뮤니즘이라는 총칭적 관념 –부의 불평등과 노동의 불평등을 제거하게 될 조직으로서의 코뮤니즘이라는 관념- 은 독특한 역사적 시험 무대들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코뮤니즘이라는 관념은 그 이념을 향해 점차적으로 접근해가게 되는 연속적인 단계들과 변증법적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9세기에 코뮤니즘이라는 가설이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빠르게 뿌리내려갔던 모습과 함께 말이죠. (그때 우리는) 노동자 계급이 이끄는 짧은 봉기가 자본주의 체제를 쓰러뜨리고 그것을 코뮤니즘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오직 그 가설 –즉, 코뮤니즘이라는 가설이 정식화 될 수 있었다는 사실, 사회의 심장부에는 그 가설을 활성화 할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사실, 그러나 또한 봉기라는 형식은 19세기가 아직 구현하지 못했던 수단들을 요구한다는 사실- 만이 남았었습니다. 그 이후, 코뮤니즘적 조직에 대한 이와 같은 관념은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코뮤니즘적 정당들의 창설에 있어 핵심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결국, 승리는 가능하다는 관념 –왜냐하면 인류사의 봉기들은 그때까지 억압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만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국가권력이라는 현실과 부딪히면서, 약화된 것은 코뮤니즘이라는 관념이었습니다. 오늘날, 코뮤니즘의 가설을 다시 뿌리내리는 일, 즉 코뮤니즘적 가설에 부합하는 정치적 원칙들이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 –특히 외국 출신의 노동자들에 대한 평등의 문제에 있어- 이 중요합니다.
필로조피 매거진 : 당신이 문화대혁명에 충실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세기(Le Siecle)>에서 썼듯- “완전한 해방“은 “선악을 넘어“ 위치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바디우 : 중국 문화대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주의적 국가의 내부로부터 코뮤니즘의 이념 (혹은 평등주의적 해방의 이념)을 다시 작동시키려 했던 최후의 시도를 표상했습니다. 모택동은, 실제로 당이 국가를 독점하고 그 권력의 영속화를 조직했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 부르주아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 부르주아는 공산당 안에 있다.“ 그는 곧 당이 감시받아야하고, 독립적인 인민 조직들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도달했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외부의 힘에 도움을 청해야 할 필요성이 나왔습니다. 1965년부터는 젊은 학생들, 1967년부터는 노동자들의 한 분파, 인민군의 분파들 등이지요... 우리는 그 혁명의 범위, 놀라운 자유, 또한 그 폭력성, 그 운동에 대한 자료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들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혁신적 혁명들에서 그러하듯, “폭풍 “은 나라를 혼란 속에 몰아넣었고, 혁명은 수 없이 많은 파벌들로 쪼개졌으며, 결국 등소평에 의해 지휘된 당의 오래된 기구가 다시 권력을 잡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파리 코뮌이 “규율화 된 당이 없는 상황에서 승리한 봉기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은 무정부주의적 대중 운동을 통해 “국가사회주의“적 흐름을 교정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은 레닌과 모택동 시대의 종말을 신호하며, 새로운 문제들로의 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20세기를 표식했던 “실재에 대한 열정“은 극단적인 폭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에 대한 열정이자 권력에 대한 열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정치의 핵심적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워진 코뮤니즘적 전망 속에서, 정치가 권력의 문제와 분리될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 –오늘날 그 쇠퇴가 예견되고 있는- 와 거리를 둔 정치를 어떻게 정의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필로조피 매거진 : 당신의 두 주요한 철학적 저서인 < 존재와 사건 >에서 <세계의 논리(Logique des mondes)>로의 이행, 즉 ‘존재(l’etre)’에서 ‘현상(l’apparaitre)’으로의 이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바디우 : 굳건하고 불활성적인 ‘구조’(structure)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형식적 이론을 세울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사건’(evenement)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의 결과들을 해명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상황(situation) –사건이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사건이 만들어내는 결과들을 “진리(verite)“라고 부릅니다. 또한 나는 이와 같은 “진리“의 과정들의 행위주(agent)들을 “주체(sujet)“라고 부르지요. <존재와 사건>에서, 나는 이와 같은 개념들을 추상적 영역 안에서 전개했습니다.
<세계의 논리>에서, 나는 특정한 세계, 규정된 다양성 속에서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두 저작 사이에서, 나는 ‘존재’에서 ‘실존’-즉 특정한 세계 속에서의 존재의 존재양식- 으로 이동했습니다. 다양한 강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특정한 세계들 속에 (내 철학의) 구조 –다수성(multiplicite), 사건, 진리, 주체-가 놓여질 때, 그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 근본적 차이는 바로 진리가 또한 물질(corps)이라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존재론만을 다룰 수 없고, 그것의 현상학 역시 다루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라는 존재의 유적 특성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상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면 진리의 보편성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우리가 진리라는 개념을 특정한 세계 속의 물질적 구조 속에서 시험해 본다 하더라도 역시 사랑, 정치, 과학, 예술의 진리들에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필로조피 매거진 : 당신의 책 <휴대용 소(小) 만신전(pantheon)>의 끝부분에서, 당신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장 카바예스(Jean Cavailles)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고,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에 대해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들의 어떤 점을 좋아하십니까 ?
바디우 : 그들 모두 –나와 충돌, 갈등이 있었던 이들까지 포함하여- 는 사상이 강렬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비록 그들 중 몇몇은 철학의 종말을 이론화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들 모두는 철학을 아카데믹한 연구에 특화된 작은 지역으로 만드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이성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만드려고 시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우리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말하는 학문이며, 철학자는 모든 이에게 말을 건네면서 시대에 대한 증인이 되는 자입니다.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 시대의 재난, 비판지점들, 부정적인 것들 하지만 또한 긍정적이고, 새롭고, 선구적인 것들에도 말입니다.“
--------------------------------------------------------------------------
<Philosophie Magazine> n°19 Avril 2008
http://www.philomag.com/les-idees/entretiens/alain-badiou-mai-68-a-ete-mon-chemin-de-damas-4141
Alain Badiou,
l’internationaliste patriote
Alain Badiou. « Mai 68 a été mon chemin de Damas »
Alain Badiou lie l’expérience de la pensée à l’engagement dans la tradition sartrienne et revendique l’héritage de 1968. Ce « maître à penser » sulfureux veut réactiver le geste original de Platon, qui fonde les vérités sur les mathématiques, la politique, l’amour et la poétique.
Alain Badiou appartient à une lignée de philosophes qui, après avoir acquis une renommée et légitimité universitaire mondiales par une œuvre austère de métaphysicien, se font connaître du grand public par des écrits polémiques et politiques d’une grande radicalité. C’est que, entré en politique avec la lutte contre la guerre d’Algérie et éveillé à la philosophie par la figure de Jean-Paul Sartre, il revendique sa fidélité aux combats des « années rouges », qu’il prolonge aujourd’hui au sein de l’Organisation politique.
Depuis le succès retentissant de son récent pamphlet, De quoi Sarkozy est-il le nom ?, Alain Badiou incarne pour certains un pôle de résistance au consensus démocratique. Pour d’autres, son mépris de la démocratie parlementaire et son refus de renier le maoïsme ne passent tout simplement pas. Il serait commode de séparer le métaphysicien du polémiste scandaleux, le constructeur de système du gourou ; mais ce serait incohérent, puisqu’Alain Badiou revendique l’unicité de sa pensée.
Philosophie magazine : Comment êtes-vous devenu philosophe ? Et pour quelles raisons Sartre fut-il votre révélateur ?
Alain Badiou : Quand j’avais 16-17 ans, j’envisageais un avenir scientifique, je me voyais même en inspecteur des eaux et forêts, par goût profond pour la nature. Toutefois, mes principaux succès scolaires – comme le prix du Concours général de français – étaient littéraires. Et je me suis orienté in extremis vers la philosophie, notamment parce que j’ai lu en terminale L’Esquisse d’une théorie des émotions, de Jean-Paul Sartre, qui fut un choc spéculatif extraordinaire. Comme beaucoup de jeunes gens, j’ai été happé par l’idée sartrienne selon laquelle la production du sens est en liaison immanente avec la liberté, l’idée qu’il n’y a pas de contradiction entre une vérité et la décision radicale engageant l’existence. La théorie de la liberté absolue de la conscience était enthousiasmante, surtout dans le contexte de la pensée scolaire grisâtre de l’époque, avec son moralisme plat, sa prudence généralisée et son épistémologie approximative. Tel un Platon ou un Pascal des temps modernes, Sartre ressortait de cette grisaille avec force et éclat. C’est également une pensée qui nous a accompagnés dans les années d’engagements politiques des débuts de la guerre d’Algérie, une période sombre dont on peine aujourd’hui à avoir idée, une époque où l’on torturait dans les commissariats parisiens, où l’on partait à la guerre à 18 ans…
Le goût pour les mathématiques vous vient de votre père, et celui pour la poésie, de votre mère. La poésie, ajoutée aux mathématiques, cela donne-t-il de la philosophie ?
Certainement. J’assume cette généalogie composite. Si vous avez un père du côté du « mathème » et une mère du côté du poème, la production la plus naturelle reste la philosophie, en tout cas dans ce qu’elle a de plus platonicien. Car, après Sartre, je reste plus que tout fidèle à Platon, en raison du côté paradigmatique des mathématiques qui parcourt son œuvre – « Nul n’entre ici s’il n’est pas géomètre », était inscrit au fronton de l’Académie – et d’une querelle avec la poésie, que j’ai toujours lue comme un attachement profond à celle-ci. Platon cherche querelle à Homère, mais n’hésite pas à dire qu’il en est le fils. Dans La République, il chasse le poète en dehors de la cité, mais écrit des mythes magnifiques qui sont parmi les plus beaux poèmes en prose de la langue grecque. Suspendue entre formalisme et littérature, rigueur conceptuelle et séduction, travail du savoir et captation subjective, cette langue philosophique qui relève d’une certaine bâtardise me fascine.
Vous êtes un « platonicien français ». Mais n’êtes-vous pas également un héritier de la philosophie de langue française, autant littéraire que conceptuelle ?
C’est en effet une filiation nationale que je revendique. Il y a une tradition langagière française à laquelle je suis attaché, qui fait que la France est certainement le pays où l’on a le plus de mal à distinguer le philosophe de l’écrivain. Même Descartes, qui est très proche de l’ordre des raisons et des mathématiques, est un grand styliste de la langue française, comme Pascal, Rousseau ou Sartre. Le caractère indécidable de la langue philosophique, entre formalisme et littérature, est une tradition française qui a installé le philosophe dans un domaine différent de l’université. Dans notre pays, le fait que le philosophe ne soit pas seulement un professeur, mais un homme de la presse, de l’interlocution, de l’adresse publique, est sans nul doute lié à la langue. Car, en dépit de leur difficulté et technicité assumée, les philosophes français ne renoncent pas à une certaine clarté et élégance. Je suis, de ce point de vue, un internationaliste patriote.
Comment avez-vous vécu Mai 68 ?
Mai 68 a été mon chemin de Damas, une période que j’ai vécue comme une conversion. Mai 68 m’est arrivé comme un événement qui a changé les données politiques, conceptuelles et personnelles de mon existence. Pour parodier Kant, je dirais que 68 m’a arraché à mon sommeil structuraliste ! En 1967, le structuralisme, le formalisme et, à certains égards, une sorte de nouveau positivisme dominent les sciences sociales. Même des auteurs comme Lacan apparaissent fascinés par la logique formelle et la linguistique scientifique, au point de proposer une « algèbre générale du sujet ». Et puis, en 1968-1969, les mêmes se retrouvent politiquement engagés de façon radicale, comme si toute leur vie avait basculé dans l’activisme révolutionnaire. Est-ce une continuité ou une discontinuité ? Je dirais rétrospectivement qu’il y a des deux. Il y a un élément de rupture évident, dans la mesure où l’engagement met au poste de commandement la pratique, la discussion, la révolte, l’action spontanée, ce qui tranche avec le carcan des structures. Par ailleurs, je pense que quelque chose des conceptions antérieures s’est greffé dans l’action politique, et notamment une certaine violence. Il y avait dans le structuralisme une violence théorique, des proclamations antihumanistes, une thématique de la rupture avec l’ordre de pensée ancien qui préparait cette violence existentielle de l’engagement politique.
Quarante ans après, où en êtes-vous avec cet héritage ?
Il y a une descendance de Mai 68 qui m’a beaucoup frappé, mais à laquelle je n’ai pas cédé, et que j’appellerais une descendance mélancolique. Une thématique de la fin, du renoncement, de l’impossibilité, des illusions perdues, que je distingue de la posture des renégats, a envahi l’espace de la pensée. Jean-François Lyotard, qui déclarait que nous vivions la fin de la politique radicale, en a été l’un des représentants les plus emblématiques. Ce qui m’a distingué de ce courant, c’est que j’ai gardé contre vents et marées une vision affirmative de l’engagement. D’où l’impossibilité de me rallier au principe de réalité, dont l’Union de la gauche de François Mitterrand a été pour certains la traduction politique. J’ai également tiré de Mai 68 l’idée que les outils formalistes n’étaient pas inadéquats pour penser cette résistance multiforme. L’Être et l’événement (1988) est en fin de compte une synthèse biographique entre le structuralisme des années 1960 et Mai 68. L’être, c’est ce dont la pensée formelle prend la mesure ; l’évènement, c’est la capacité aléatoire que surgissent des possibilités inaperçues. Comme Gilles Deleuze, je maintiens donc les ambitions originaires de la philosophie, contre les rhétoriques de la fin ou de la réaction.
Les quatre conditions de la philosophie sont, selon vous, le mathème, le poème, l’événement politique et l’amour. Pour quelles raisons ? Et pourquoi vous en tenir à celles-là ?
La réponse généalogique à cette question provient de ma lecture de Platon, et des débuts de la philosophie. Chez Platon, la philosophie est possible parce qu’il y a les mathématiques, vestibule obligé de la dialectique. La philosophie est possible parce qu’il y a la poésie, notamment perceptible dans sa prose. Elle requiert l’amour, comme l’illustre Le Banquet, où le transfert amoureux est fondamental pour la dynamique de la pensée. Quant à la politique, indéniablement elle est constitutive de sa vie et de sa pensée. Cette circulation entre amour, mathématique, politique et poétique que l’on trouve dans les dialogues de Platon me rallie tout à fait à lui. Prenons l’exemple de l’amour : c’est ce qui va rendre raison de la nécessité d’explorer une expérience du monde qui ne soit pas celle de l’Un, mais celle du Deux. Si l’amour est une pensée, il est la pensée du Deux et de la différence comme fécondité, construction particulière du monde. Ajoutons que, d’un point de vue personnel, ces quatre conditions de la philosophie sont ce qui me semble donner un intérêt à l’existence humaine, la doter de quelque chose qui outrepasse son régime de survie (travail, socialité, loisirs, etc.). Il y a, bien sûr, une animalité heureuse qui est une composante indispensable de l’existence, mais si on cherche ce qui la tend au-delà d’elle-même, on est toujours renvoyé à ce quatuor-là, qui recoupe l’expérience intime de chacun. De ce point de vue, la philosophie est un point de jonction entre l’expansion conceptuelle la plus sophistiquée et l’expérience intime la plus intense.
Pourquoi ne pas ajouter le sacré ? Antonio Negri invoque saint François, Slavoj Žižek ressuscite Jésus, Giorgio Agamben et vous-même dialoguez avec saint Paul… Que vont chercher les penseurs radicaux d’aujourd’hui chez ces figures du christianisme ?
Il y a deux raisons à ce phénomène. D’une part, nous traversons un moment de déperdition de l’élément religieux suffisant pour que la fonction intellectuelle de ces fables nous soit désormais appropriable. Elles entrent dans un champ éducatif comparable à l’usage fait des mythologies par Freud avec Œdipe, pour ne prendre qu’un exemple entre mille. D’autre part, le bilan des années 1960-1970 s’est fait dans une dramatisation de la question du sujet : qu’en est-il de l’homme lorsqu’il ne peut plus être soutenu par un élan positif du monde ou une promesse révolutionnaire ? Je crois que ce recours aux figures religieuses sert de point d’approche à cette situation. Chaque philosophe choisi donc son saint, et l’on pourrait presque écrire une cartographie des orientations philosophiques contemporaines à partir du saint préféré des uns et des autres. Je dois bien reconnaître que j’ai choisi en Paul la figure chrétienne la plus violemment contestée, une sorte de Lénine du christianisme !
Votre livre sur l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De quoi Sarkozy est-il le nom ?, connaît un vif succès. Comment comprendre le désaveu conjoncturel de celui qui incarne, selon vous, la politique de la « grande peur », notamment du déviant et de l’étranger ?
Il a eu un emballement, une manière ostentatoire de déployer sa politique régressive de façon visible dans tous les domaines de l’action dont il était la figure, qui l’a exposé au désamour. Peut-être ne sera-t-il au final que le polichinelle provisoire de cette sombre politique. Mais, en attendant, elle avance. on vote les lois de rétention perpétuelle, on se livre à des opérations militaires et médiatiques dans des quartiers de banlieues, on « réforme » l’université… En un sens, le Premier ministre Fillon est le réel de son patron. Il y a le Sarkozy des paillettes négatives, mais aussi celui des abjectes dispositions législatives. D’un côté, la dégringolade de Sarkozy témoigne de l’ambiguïté de la France : quand le pays se lance dans des séquences réactionnaires et conservatrices, des processus de résistance s’élaborent rapidement. De l’autre, ce Président amuse et irrite la galerie électorale, pendant que le gouvernement défait le droit ou démantèle le code du travail.
En quel sens « l’hypothèse communiste » est-elle toujours la bonne ? Et comment pourrait-elle s’incarner aujourd’hui ?
Cette idée générique – le communisme comme organisation qui éliminera l’inégalité des richesses et l’inégalité du travail – est soumise à des plans d’épreuves historiques singuliers. Elle est en dialectique avec les étapes successives de son approximation. on voit aujourd’hui comment l’hypothèse a été mise à l’épreuve au XIXe siècle, avec la figure de son installation rapide. Une insurrection brève, menée par la classe ouvrière, devait mettre à bas le système capitaliste et lui substituer le communisme. Il en est resté l’hypothèse elle-même, le fait qu’elle ait été formulable, qu’il y avait dans les entrailles de la société de quoi la rendre active, mais aussi que la forme insurrectionnelle demandait des moyens que le XIXe siècle n’avait pas encore élaborés. Puis, cette idée de l’organisation est devenue centrale avec la création des partis communistes qui se sont frottés au pouvoir d’État. Il en reste l’idée qu’après tout, la victoire est possible, puisque les insurrections de l’histoire de l’humanité ont été jusqu’alors réprimées. Mais dans sa confrontation avec la réalité du pouvoir d’État, c’est l’idée communiste qui a flanché. Aujourd’hui, il convient de réinstaller l’hypothèse elle-même, c’est-à-dire de montrer que des principes politiques, conformes à l’hypothèse communiste, sont praticables, notamment sur la question de l’égalité des ouvriers d’origine étrangère.
En quel sens êtes-vous resté fidèle à la Révolution culturelle ? Et considérez-vous, comme vous l’écrivez dans Le Siècle, que « l’émancipation totale » doit être située « par-delà Bien et Mal » ?
La révolution culturelle chinoise a représenté l’ultime tentative, soldée par un échec, de remettre en mouvement l’idée communiste (ou l’idée de l’émancipation égalitaire) de l’intérieur de l’État socialiste. Mao a constaté qu’en réalité, le parti accaparait l’État et organisait la perpétuation de son pouvoir. Il a eu cette phrase étonnante : « On se demande où est aujourd’hui la bourgeoisie, eh bien, elle est dans le parti communiste. » Il est très tôt parvenu à la conviction que le parti doit être surveillé et rectifié par des organisations populaires indépendantes. D’où la nécessité de recourir à des forces extérieures : la jeunesse étudiante à partir de 1965, une fraction des ouvriers à partir de 1967, des secteurs de l’armée populaire... De l’étendue, de la liberté extraordinaire, de la violence, aussi, de ces mouvements, nous possédons des documents. Leur caractère révolutionnaire ne fait pas de doute. Mais comme dans beaucoup de révolutions novatrices, la « tempête » a plongé le pays dans le chaos, s’est effritée dans d’innombrables groupuscules et a débouché sur une sévère reprise en mains par le vieil appareil du parti, dirigé par Deng Xiaoping. De même que la Commune de Paris a montré l’impossibilité de résoudre le problème d’une insurrection victorieuse en l’absence d’un parti discipliné, de même la Révolution culturelle a montré l’impossibilité de rectifier le cours du « socialisme d’État » par des mouvements de masse anarchiques. De là qu’elle signe la fin de l’époque de Lénine et de Mao et ouvre à des questions nouvelles. Au fond, la « passion du réel », qui a marqué le XXe siècle, a été d’une extrême violence, parce qu’elle a été une passion de l’État et du pouvoir. Lénine disait que la question centrale de la politique est celle du pouvoir. Il faut penser en sens inverse : que peut-être, dans la vision communiste rénovée, une politique se sépare de la question du pouvoir ? Comment définir et pratiquer une politique « à distance » de l’État, qui, dès maintenant, en anticipe le dépérissement ?
Comment comprendre le passage de L’Être et l’événement à Logiques des mondes, vos deux maîtres ouvrages de philosophie ? Comme celui de l’être à l’apparaître ?
Il y a des structures fortes et inertes dont on peut faire une théorie formelle. Et puis il y a des événements dont on peut examiner les conséquences. J’appelle « vérité » les conséquences d’un événement dans la situation où il se produit. J’appelle « sujet » l’agent de cette production de vérité. Dans L’Être et l’événement, je dispose ces concepts dans leur ordre abstrait. Dans Logiques des mondes, j’essaie de montrer comment cela fonctionne dans un monde particulier, une multiplicité qualifiée. Entre les deux, je passe de l’être à l’existence, c’est-à-dire au mode de présence de l’être dans un monde particulier. Que devient la construction – multiplicité, événement, vérité, sujet – lorsqu’elle est immergée dans un monde conçu de manière qu’il y a des intensités différentes ? La différence fondamentale, c’est qu’on est obligé de considérer qu’une vérité, c’est un corps. on ne peut simplement faire de l’ontologie, on doit en faire une phénoménologie. Qu’est-ce que peut être l’universalité d’une vérité si l’on ne prend pas seulement en compte le caractère générique de son être, mais aussi le caractère singulier de son apparaître ? Je tente de montrer qu’il y a universalité des vérités amoureuses, politiques, scientifiques, artistiques, même lorsqu’on met le concept de vérité à l’épreuve de sa construction corporelle dans un monde particulier.
À la fin de votre Petit panthéon portatif, vous déclarez votre amour à Gilles Deleuze ou Jacques Derrida, Jean Cavaillès ou Louis Althusser, à qui vous rendez un hommage. Qu’avez-vous aimé en eux ?
Tous, y compris ceux avec qui j’ai eu des heurts, des conflits, ont contribué au maintien d’une extraordinaire intensité de pensée, même si certains théorisaient la fin de la philosophie. Aucun n’a accepté de faire de la philosophie un petit canton spécialisé des études académiques. Car le philosophe est celui qui essaie de rendre raison du contemporain. La philosophie consiste à dire ce qu’est notre temps et le philosophe est le témoin du temps dans une adresse à tous. Il est celui qui dit : intéressez-vous à votre époque, dans ce qu’elle a de sinistre, de critiquable et de négatif, mais aussi d’affirmatif, de nouveau et de prometteur.
'마리선녀 이야기 > 마리선녀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뷰] 영국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 /한국일보120313 (0) | 2012.03.14 |
---|---|
Communista Social Club /Philosophie Magazine n°31 Juillet 2009 (0) | 2012.03.12 |
보편성의 독점, ‘국가’라는 야누스 /부르디외(르몽드 디플로마티크40호) (0) | 2012.02.11 |
푸코의 권력론: 메피스토의 악마 (0) | 2011.11.27 |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변성찬 (0) | 2011.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