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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 ⓒ 연합뉴스 |
사족 먼저.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의 대선출마 선언을 이야기하려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대부분의 언론은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표기한다. 굳이 전직을 표기해주는 이유는 뭘까. 그냥 ‘의원’으로 하면 인물에 비해 너무 약소한 표기라고 알아서 판단한 건가.
암튼, 박근혜 의원의 출마선언문을 읽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복지수준과 조세부담에 대한 국민대타협을 추진하겠다는 문장이었다. 알려졌다시피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최저수준으로, 매우 낮다. 너도나도 복지 강화를 외치지만 그럼에도 증세 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이런저런 대선주자들도 부자감세 철회 정도의 언급에 그치지 않던가. 그런 마당에 복지수준과 조세부담에 대한 국민대타협을 추진하겠다는 발언은 꽤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얼마나 구체화된 사안인지는 모르겠으나, 준비 많이 했구나 싶은 맘이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마음이 오래가진 않았다. 인터뷰 기사에서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언급을 접하면서였다.
잘못이 없으니까 못한 것?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의원은 “정수장학회는 노무현 정권이 ‘바로잡아야 한다’며 5년 내내 모든 힘을 기울였던 일”이라면서 “만일 거기에 잘못이 있거나 안 되는 일이 있었다면 그 정권에서 이미 해결이 났을 것이다. 잘못이 없으니까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들이 이어진 모양이다. “잘못됐다면 지난 정부 주체들이 나서면 된다.” “난 이사직을 오래전에 그만뒀고 정수장학회는 엄연히 공익법인이다. 관계기관의 임명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가서 이사를 관두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법치국가에서 안 되는 일이다.”
노무현 정권이 5년 내내 애썼으나 결국 잘못이 없어서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바로잡기 전에 “잘못이 없으니까 못한 것”, “법치국가에서 안 되는 일”이라는 박 의원의 말을 유념해두자. 노무현 대통령은 다큐멘터리 5부작 ‘참여정부 5년의 기록’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온 길’ 편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거론했다. 노 대통령의 인터뷰는 퇴임을 앞둔 2008년 1월 진행했으며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은 다음 달인 2월 국정운영백서 e-Book과 함께 7개의 DVD로 공개됐다. 참여정부 청와대브리핑(http://16cwd.pa.go.kr/cwd/kr/government/documentary/index.html)에도 실려 있다.
노 대통령의 정수장학회 관련 발언은 장물(贓物)이라는 규정으로 시작한다. 장물. ‘강도, 절도, 사기 등 재산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에 의해 부당하게 취득한 타인 소유의 물품’이다. 노 대통령의 말이다.
나는 정수장학재단을 장물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거 돌려주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통령이 되고 그걸 어떻게 돌려줄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해봤는데 합법적인 방법이 없더라구요.
군사정권 시절엔 남의 재산을 강탈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장물을 되돌려줄 힘도 없는,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지금 정부죠.
세상이 바뀌는 과정에서 과거사 정리가 안 된 채로 권력만 민주화되고 힘이 빠져버리니까 기득권 가진 사람들, 특히 부당하게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한테 참 좋은 세상이 돼버렸죠. 그런 것이 참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장물’을 되돌려줄 수 없었던 이유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말에는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와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활동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잘못이 없으니까 못했다? 그 활동만으로도 정수장학회 출범의 불법성은 충분히 드러났다(미디어스 '창립 50주년 맞은 정수장학회, 박근혜 후보에게 다시 묻는다' 기사 참조). 참여정부 이후인 2011년 법원 판결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됐다. 강압으로 빼앗은 것은 사실이나 시효가 지났다는 요지였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자. “정수장학회는 노무현 정권이 ‘바로잡아야 한다’며 5년 내내 모든 힘을 기울였던 일”이라는 보도내용이 박 의원의 멘트 그대로라면 절반은 맞았다. 참여정부는 정수장학회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허나, 그 일에 5년 내내 힘을 기울였겠나. 이명박 정부의 불법사찰마냥 온갖 방도를 동원한 것처럼 들린다. 본질을 흐리는 부풀리기다.
그 다음. “만일 거기에 잘못이 있거나 안 되는 일이 있었다면 그 정권에서 이미 해결이 났을 것이다. 잘못이 없으니까 못한 것”이라는 결론 혹은 주장은 허위사실이고 왜곡이다. 잘못이 있고, 불법이었다는 사실은 국정원의 과거사 진실규명,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통해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노 대통령의 말처럼, 다만 민주정부에서는 과거에 불법으로 강탈한 장물을 적법하게 되돌려줄 방도가 없었다. 적어도 참여정부 5년, 민주정부 10년의 세상은 그랬다. 민주화의 역설이기도 했다. 바로잡으려면 정부의 권한이 아닌 별도 입법으로, 국회의 역할을 통해야했다. 참여정부 기간 박근혜 의원이 당 대표를 맡으며 한나라당을 이끌던 국회에서 그 길이 활짝 열려있었겠는가. 입법을 거론하면 곧바로 ‘야당 탄압’이라는 반발이 나왔을 것이다.
‘사실’과 지도자의 역사의식
사실관계가 이러한데 하는 말이란, 또 노무현 끌어들이기다. 이명박 정권이 틈만 나면 보여준, 참 닳고 단 수법이다. 게다가 노무현 정권에서 기를 쓰고 정리해보려 했는데 너무나 적법해서 손 쓸 방도가 없었다는 투 아닌가. 법 따지지 않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했다면 정수장학회가 되돌려졌을까. 그런 방식은 일찍이 새누리당이 낳은 이명박 정권에 더 어울리는 스타일이겠다. 박근혜 의원이 말하는 “법치국가”는 어느 정부, 어떤 세상에 더 가까이 있는 겐가. 일국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인사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역사의식은 어떤 수준이어야 하는지, 좋게 말해 혼란스럽다. 게다가 정수장학회 관련 발언은 명백한 사실왜곡 아닌가. 새롭게 국정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자리에서부터 그런 거짓말을 들어야하는 현실이 씁쓸할 따름이다. 앞서 소개한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발언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세상이 바뀌는 과정에서 과거사 정리가 안 된 채로 권력만 민주화되었고 힘이 빠져버리니까 기득권 가진 사람들, 특히 부당하게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한테 참 좋은 세상이 돼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