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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박정희 향수,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 /평화만들기20120822

by 마리산인1324 2012. 8. 31.

<평화전문 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 522호(2012/08/22 13:18)

http://peacemaking.co.kr/news/news/view.php?papercode=PEACE&newsno=5355&pubno=

 

 

박정희 향수,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



이채언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박정희가 우리세대에게는 청소년기를 지배해온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대학시절 대부분을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며 보내야했고 걸핏하면 휴교, 휴업, 휴강으로 대학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라면 얼핏 떠오르는 것이 최루탄, 휴교령, 탱크와 장갑차, 대공분실, 긴급조치, 민청학련사건, 유신독재 등등 단어 하나하나에 우리 젊은이들과 친구들의 숱한 고통과 피눈물이 배어 있다. 그래서 우리세대는 지금이 박정희시대 때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시대라고 믿고 있다. 우선 생활수준과 소비수준이 더 나아졌고, 언론의 자유가 넓어졌으며 과거에는 금서였던 좌파서적들이 버젓이 시판되고 있다. 한류라든가 월드컵, 삼성전자, 엘지전자가 세계시장에서 일류로 인정받고 있고 한국자동차가 세계시장에서 선진국 자동차와 어깨를 나란히 경쟁하고 있다.(1)

그런데 이게 다 잘못인 것처럼 우리사회의 민초들의 뇌리 속에는 박정희의 정치가 역대 그 이후 어느 누구의 정치보다 바로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정치였다고 독재는 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경제문제에 있어서만은 더 나았다고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세대는 그것이 그릇된 인식임을 해명한답시고 온갖 종류의 글을 통해 박정희경제의 어두운 면을 열심히 부각시켰다. 당시의 고도성장은 성장의 잠재력을 키우기보다는 잠재력을 약탈하는 방식,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했으며 대외채무를 누적시켰고 사회양극화와 지역간 및 산업간 불균형을 심화시켰으며, 민족경제를 기형화 예속화했다는 등등을 지적해왔다. 그래도 서민대중들은 우리들의 주장에 대해 수긍하지 않으며 납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월혁명회에서 이번에 나더러도 한번 박정희시대의 경제문제에 대해 글을 한편 써보라고 요구했다. 내가 경제학을 전공한다고는 하지만 박정희경제에 대해서는 아직 글 한편 쓴 적이 없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선선히 답만 하고 그동안 쓴 것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내가 다시 그런 사실들을 쓴다고 해야 거기서 대체 얼마나 더 보태겠는가, 그렇게 해서 특별히 새로운 사실을 보탠들 또 얼마나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회의가 들었다.



정말 그렇다. 박정희시대의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지금은 없어졌는가? 근로자 절반이 비정규직들이고 이들의 노동이 그때의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방불케 한다. 박정희시대에 대외채무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 10배나 되지 않는가? 그것도 우리사회의 알짜기업들, 금융기관들을 외국자본에 다 팔아치워 그 돈으로 대외채무를 갚은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렇게 갚지 않았다면 대외채무는 훨씬 더 큰 규모일 것이다.

또 박정희시대의 사회양극화는 지금의 사회양극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정도라고 봐야 한다. 박정희시대의 사회불균형은 지금보다는 정도가 훨씬 미약하다. 민족경제를 기형화하고 예속화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기형화나 예속화가 오히려 표준으로 둔갑했고 기형화, 예속화를 운운하는 사람이 도리어 시대에 뒤진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지금은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면들이 오히려 더 아름답고 더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선전되고 있다! 그런데 무얼 박정희시대의 그런 어두운 면을 아무리 나열한들 그게 박정희를 오히려 찬양하는 말로 들리지 않겠는가? 군사독재? 그거야 잘못한 것이라고 누구나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운용에서는 박정희가 선구자적이라고 인정해야 않겠는가. 고질병처럼 내려온 보릿고개를 없앴고 모든 국민이 밥을 먹도록 만든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공로가 아닌가?

그래, 외채누적, 장시간 저임금 노동, 양극화, 불균형 다 많았다.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닌가? 지금은 그 때보다 대외채무가 더 나아졌느냐,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없어졌느냐, 뭐가 그때보다 더 나은가? 그러니 박정희가 지금의 이명박보다 더 낫다고 하고 김대중, 노무현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반문하면 결국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은 지금의 소비수준, 생활수준이 박정희시대보다 더 나아진 것보다 그 때의 외채누적, 장시간 저임금 노동, 양극화, 불균형, 이런 것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강도가 약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 때가 더 좋았다고 평가한다. 값싼 노동이 즐비했고 적은 돈으로도 부동산이나 사채로 쉽게 돈 벌 기회가 많았다는 점에서 그 때를 황금시대로 그리워하는 자들도 물론 있다. 그래서 등장했던 이명박은 박정희가 그의 롤 모델이었다.

큰일을 위해서는 국민다수의 반대쯤 가볍게 무시해야 하고 일본과 미국에 대해서는 노골적 추파를 던지며, 자신에게 불리한 사건이나 사실은 언론방송을 통제하여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허위로 사건을 날조하거나 사실을 만들어 반대파를 제거하며, 걸핏하면 장터로 나가 막걸리와 어묵 혹은 국밥을 즐기고, 물가는 정부가 통제하고 재벌을 동원하며 자금도 조달하고 취업률까지 할당한다. 여색을 밝히는데도 일가견을 가진 인물 그런 것까지 박정희 통치방식이었다.



우리가 지금 박정희향수와 싸우는 데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시대가 박정희 당시와 역사적으로 같은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 때보다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기 때문에, 박정희의 어두운 면을 아무리 부각시켜도 지금의 어두운 면보다는 그래도 더 낫다는 점만 부각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지금이 더 퇴보한 것이라는 서민대중의 평가를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른바 민주화운동이 이룬 성과란 게 대체 무언가? 그 때보다 더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도 있고(2) 민족경제의 기형화나 예속성이 그때보다 더 심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조차 예전보다 훨씬 무디어졌다. 사회양극화도 산업간 지역간 불균형도 그 때보다 천양지차로 더 벌어졌다. 민주화운동은 도대체 무엇을 성과로 꼽으며 무엇을 업적으로 내세우기에 박정희시대가 더 나빴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박정희 당시보다 지금이 더 나아진 면은 물론 있다. 언론의 자유야 아직 마찬가지이지만 언론인의 자유는 분명히 신장되었고, 개인의 보편적 자유는 아직 없지만 부유한 사람들의 개인적 자유, 해외여행의 자유나, 외국산 유명브랜드의 구입, 두발을 마음대로 기르는 등 소비와 향락의 자유,(3) 5년 임기의 대통령, 4년 임기의 국회의원, 지방정부의 수장, 지방의회 의원을 국민이 직접 선택할 자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대학운영이나 공기업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해서는 복수개의 노동조합과 농민단체를 결성할 자유, 아직도 최루가스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허용된 집회의 자유, 몇몇 특정서적을 제외하고는 좌파서적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학문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인해 언제 어느 때 다시 폐기되거나 과거로 역행될 수 있는 허술한 존재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런 자유는 서민대중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4) 노동조합운동과 농민운동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악화되고 있다.

그동안의 민주화운동과 진보운동은 결국 잘 사는 사람, 부유한 엘리트만을 위한 운동으로 변질되었고 그들만이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전개되었던 79년 10월의 부마항쟁이나 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분명히 그런 민주화운동과는 성격이 달랐다. 오히려 87년 6월의 민주화운동이야말로 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80년 5월의 광주항쟁의 역사적 배반이었다.



4월혁명은 그 당시의 1인 독재를 청산하고 조국의 분단된 현실을 극복한다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겨우 정치적 민주주의만 성취했다가 그 도중에 5․16 군사정변으로 두 가지 모두 좌절을 겪었다. 이 좌절은 그 후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었으니 그것은 정치적 민주화만으로는 사회전반의 민주화가 성취되지 않고서는 언제라도 퇴보할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5‧16 군사정변 같은 좌절을 미리 막을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전반의 민주화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온갖 정치적 및 사회적 부패와 비리만이 더욱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통일을 반대하는 세력까지도 양성하는 온상으로 사회가 바뀔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정경유착의 인맥으로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폐쇄적 길드조직들, 부패언론과 검찰의 결탁, 종교계의 비밀담합, 교육계, 의료계, 법조계의 전문가연하는 돌팔이들이 허위의 전문가적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담합한 길드조직이 바로 그런 세력이었다.

이러한 사회 내부의 반봉건적(半封建的) 요소들이 비리의 온상으로 살아 있는 한, 민족의 자주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커나갈 것이고 형식에 불과한 선거민주주의는 언제라도 거꾸로 돌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부마항쟁이나 5월 민중항쟁의 정신은 사회의 민주화까지 요구했다.

4월혁명은 단순한 정치적 민주화의 실현과 민족의 자주통일이 과제였다면 10월의 부마항쟁이나 5월의 광주항쟁은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통일이 과제였다. 그 반면에 “6월 항쟁”은 정말 터무니 없었다.

그건 “6월 항쟁”의 주체세력을 분석해 보아도 대번 알 수 있다. 초기에는 3김이 주체였지만 마지막에는 노태우가 주체로 나서서 피날레를 장식했다. 노태우를 비롯한 당시의 집권여당이 “6월 항쟁”을 민주화의 성공으로 자찬한 것은 형식적 절차의 민주화에 성공한 때문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을 민주화할 수 있는 길을 미연에 봉쇄하는데 성공한 때문이었다.

87년 6월의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직선제 대통령선거와 언론, 검찰, 경제를 정치로부터 독립시켜 시장경쟁에 맡긴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시한부 정치권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헌법이 보장하는 거의 항구적 권력인 경제 권력에 언론과 검찰을 전부 예속시켰다. 87년 헌법은 검찰과 언론을 견제할 힘을 어느 기관에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이 되어버렸다. 정치인들은 4년, 5년의 임기동안에만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에 늘 민의를 살펴가며 행동한다.

그러나 검찰은 임기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민의에 구애받지 않는 집단이 되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그와 무관하게 검찰은 특정 집단의 항구적 사유물이 되어 이 나라는 특정집단이 지배하는 무소불위의 검찰국가로 변화될 소지가 커지게 되었다.

이 나라의 수구보수 세력은 설사 자기들이 정치권력을 내어준다 하더라도 검찰, 언론, 경제에 관한 권력은 정치로부터 독립시켰기 때문에 자기들이 계속 장악하여 헌법상의 권력으로 온전히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일시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어도 얼마든지 사회여론을 주도하여 정권을 되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형식과 절차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관행만은 87년 헌법에 제대로 명시되어 있었으나 그 후퇴를 막을 수 있는 장치는 거기에 없었다.

그러니 서민대중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87년 6월의 형식적 절차상의 민주주의가 총체적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을 얻게 되었다. 10년의 민주정권 아래에서도 강산은 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진보세력이 등장해서 정치적 경제적 공약을 내세워도 다 헛것임을 이제는 알게 된 것이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길드조직의 혁파 없이는 형식적 절차상 민주주의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구보수 세력은 그들대로 형식적 절차상 민주주의가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것임을 뒤늦게 자각하게 되었다. 형식적 절차상 민주주의만으로도 정권은 쉽게 교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번 교체되면 그 정권이 연이어 10년을 갈 수 있다는 것, 게다가 ‘과거사 진상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제도를 만들어 자기들의 치부와 과거비리를 캐내면 얼마든지 정치에 다시 예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태여 유혈혁명이 없어도 의식화된 대중조직만으로도 검찰권력, 언론권력, 경제권력을 다시 정치에 예속시킬 수 있다는 위험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수구세력이 사회여론을 조작하는데 흔히 사용해온 대북인식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북에서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을 발진시켜도 남한의 대중은 전처럼 그렇게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자기들이 온전한 줄로만 알았던 검찰, 언론, 경제에 관한 권력이 실은 매우 취약할 수도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사회저변에 깔린 의식화된 대중이 있고 그들을 이끌어나갈 만한 깨어있는 정치세력이 있는 한 언제라도 합법적 방식에 의해 그런 것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이른 바 ‘친북좌파세력’의 청산에 먼저 착수하려고 했다. 각종 정부기구로부터 그들을 배제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저변에 깔린 의식화된 대중들을 상호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북의 핵과 미사일을 구실로 안보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언론, 출판, 결사에 이르는 민주적 제반 권리를 제한할 뿐 아니라 사회질서를 해치는 각종 선동적인 인사들은 사전에 체포하거나 구금할 준비를 다그치려 했다. 그래서 맨 처음 시작한 것이 6·15공동선언의 무효화와 10·4남북정상선언의 무효화 및 그것을 통한 남북 간의 적대적 긴장국면의 조성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첫 발걸음에서부터 장기간의 촛불시위로 좌절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번 촛불시위 때 그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또 다른 새 위협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들이 아무리 공안정국을 기획하여도 언제든지 그것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가 우리사회 내부에 버젓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6·15와 10·4선언의 당사자들인 두 전직 대통령이 계속 생존하고 있으면 자기들의 공안정국 기획도 무위로 끝날 위험이 있었다.

국가적 비상사태나 중요한 국가적 사항에 대해 전직대통령이 언제라도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차하면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여 대중과 함께 가두시위에도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한국사회는 두 가지 갈림길에 놓여 있다. 수구 보수세력이 마지막까지 권력을 행사하여 그동안 미련을 두고 있었던 신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친북좌파세력을 청산함으로써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토대를 굳건히 구축하는 길로 나아갈지, 아니면 민주 진보세력이 단합하여 87년 체제의 문제점을 자각한 토대 위에서 폐쇄적 길드조직의 혁파를 통해 한국사회의 전반적 민주화를 이루는 길로 나아갈지를 선택해야 한다.

부패언론과 검찰의 결탁, 종교계의 비밀담합, 교육계, 의료계, 법조계의 돌팔이들이 담합하여 전문가 행세하는 길드조직들을 더 이상 시장경쟁에만 내맡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두 정치에 예속시켜야 우리 사회의 전반적 민주화가 달성된다. 적어도 정치가 민의에 따라 움직이고 민의를 반영할 수 있다면 검찰과 언론 및 경제에 관한 권력은 정치에 종속된다고 해서 그리 잘못일 수가 없다.

선거에 의한 투표는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공적행위이기 때문에 만약 사회의 그 어떤 공적 기능이라도 선거와 투표로부터 독립되거나 자유로워진다면 그러한 공적 기능은 모두 사유화되어 버린다. 적어도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정치가 이루어진다면 모든 것을 정치에 예속시키고 정치가 최고 위치에서 최고의 권위로 사회를 지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찍이 남편을 여읜 어느 젊은 여인이 혹독한 가난 속에서 홀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도 팔고 도둑질도 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여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 한 사람에 국한해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어린 자식들의 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식이 결여된 시대적 조건에서는 그 여인에게 가해진 불가항력적인 삶의 무게가 고려되어야 하고 인격이나 명예, 아이들에 대한 교육적 영향 등도 고려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결국 어떻게 자라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아이들이 모친의 뜻을 이어받아 타인에게 모범적인 시민으로 성장하여 다른 어느 누구보다 사회에 헌신하는 반듯한 사람이 되어 있다면 그 여인의 전과자로서의 모든 허물은 덮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이 망나니로 자라나 그 아이들의 어미가 차라리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평판을 들을 정도라면 그 여인에 대한 평가는 더욱 가혹하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 체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시초축적 과정은 예외 없이 살인과 방화, 수탈과 탄압에 의한 피로 얼룩져 있었다. 선진국에서는 그러한 시초축적을 바탕으로 산업이 발달하여 그간 희생당해온 대중들을 보상하기 위한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데 진력함으로써 과거의 허물이 반성과 함께 덮어졌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동안의 나쁜 면만 계속 반복되고 확대될 뿐 아니라 미화되고 당연한 것으로 강변되는가 하면 일방적으로 희생당해온 서민대중에 대한 보상이 오히려 좌파적 행위로 매도되고 있다. 현재의 이 모든 암흑과 몰상식이 박정희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고 거기서 싹터왔으므로 바로 박정희가 원조로 운위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박정희 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또 다른 악행이 뿌리내릴지 모르는 것 아닌가?

이명박 정부도 걸핏하면 현 정부의 실정이 지적되면 그게 전부 노무현정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무현으로 돌아가자는 국민들의 향수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 바로 그 때부터 양극화가 특히 심해지고 있었지, 그 때부터 FTA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 하고 과거를 상기시키며 짝퉁진보, 짝퉁좌파들의 정책이 더 해로운 법이야 하고 경계심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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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나는 늘 고도성장이 박정희의 공이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에게 일제 강점기에는 매년 20%, 25%씩 고도성장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도 고도성장을 이룩했는데 경제성장만을 갖고 평가한다면 일제가 더 나았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반론으로 얘기한 것인데 이영훈 교수는 오히려 이를 적극 수용하여 그래서 일제 강점기가 경제발전에서는 박정희시대나 그 이후 어느 시대보다도 더 훌륭했다는 훼괴한 논리로 발전시켰다.

(2) 물론 정규노동자는 그 때보다 사정이 낫다. 그러나 그 때에도 대기업 사무직은 모두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오늘날의 비정규직 사무원처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아니었다.

(3)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세무공무원이 비디오 카메라로 자식들의 결혼식을 촬영하다가 문제가 되어 옷을 벗기도 했고 고위공무원 부인들이 해외여행에서 외국산 전기밥솥을 구입해 들어오다가 망신을 사기도 했다.

(4) 박정희향수라는 것도 단순히 박정희시대로의 복귀를 바라는 것이기보다는 그만큼 역사가 거꾸로 갔다고 하는 민초들의 삶의 피부로 느끼는 평가를 아전인수격으로 지배엘리트들이 그릇 해석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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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사월혁명회보』1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