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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맑스를 다시 죽이는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자본> 연재를 비판하며 /박찬식(참세상20120909)

by 마리산인1324 2012. 9. 13.

<참세상>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67517

 

맑스와 <자본>에서 사회주의와 혁명을 거세하려는 악의적 시도

[기고] 맑스를 다시 죽이는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자본> 연재를 비판하며

박찬식(정치학박사)

 

한국에서의 맑스와 <자본>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 반공체제에서 맑스와 <자본>은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금기였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계급과 혁명의 담론이 운동권에 자리 잡으면서 맑스주의가 복권되고 학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대 말 <자본>이 번역, 출판된 것은 그러한 변화의 한 징표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또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제3세계의 정권 또는 세력조차 대부분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속절없이 포섭되어 나가면서 이 뒤늦은 맑스와 <자본>의 복권은 빛이 바랬다. 탈계급화된 시민운동이 민중운동을 밀어내고 노동운동에서조차 개혁이나 진보가 변혁을 대체하였으며, 진보적 학자들은 “맑스주의는 끝났다”며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조용히 이론적 전향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맑스와 <자본>은 복권되자마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 동안 맑스가 그렇게 천대받은 것은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2008년 이후 세계공황이 깊어지면서 전세계적으로 맑스와 <자본>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근 몇 년 새 <자본> 관련 책도 여럿 출판되고 <자본> 강의가 인문학 강좌의 단골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어떻게 읽느냐를 떠나 <자본>이 널리 읽힌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다. 여기에 경향신문이 매주 토요일 한 면을 할애하여 <자본>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내기로 한 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요동치고 있는 지금, 전국적인 일간지에서 맑스의 <자본>을 통해 문제의 근원에 있는 자본주의의 변혁이 화두로 던져질 수 있다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출처: 경향신문 캡쳐]


그러나 두 번의 연재는 그러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단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만 한다면 굳이 애써 비판의 글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글이 의구심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면, 두 번째 기사는 심한 당혹감을 넘어 분노가 일게 했다. 이게 정말 강신준 교수의 글이 맞나 싶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자본론 전문 연구자다. 김수행 교수와 나란히 우리나라에 <자본>을 번역, 소개했을 뿐 아니라 지난 20여 년 넘게 <자본>을 붙들고 연구하면서 대중적인 해설서도 여러 권 냈고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상대로 <자본>을 강의해 왔다. 이런 ‘전문성’의 측면에서 경향신문이 그를 필자로 선택한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다.

 

논쟁의 가치도 없을 만큼 황당한 이 글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보지를 자처하며 노동자들도 적지 않게 읽는 전국 일간지의 지면에 <자본> 연구의 권위자가 쓰는 해설이라면 그것이 갖는 영향력을 그냥 무시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 번째 연재는 <자본>을 끝까지 읽으려면 안내판이 있어야 하는데 맑스가 <자본>을 쓰게 된 현실적인 동기야말로 가장 훌륭한 안내판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맞는 말이다. <자본>은 단순한 경제이론서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그것이 <자본>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강 교수에 따르면, 맑스가 <자본>을 쓰게 된 주된 동기에 대하여 강 교수는 1848년 혁명이 실패한 후에 그 혁명의 동력은 어디서 나왔으며 왜 실패했는가를 규명하는 데 있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이나 이것도 사실에 일치하지 않는다. 맑스는 1848년 혁명이 있기 훨씬 전에 <헤겔법철학 비판 서문>(1843)을 쓰면서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되는 경제적 현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경제학 철학 수고>(1844), <독일 이데올로기>(1845) 등의 연구를 통해 <자본>의 기초를 이루는 역사유물론을 발전시켰고, 이는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직전에 발표된 <공산당 선언>을 봐도 알 수 있다. 1848년 혁명의 실패가 정치경제학 연구에 좀 더 매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자본>에 이르는 연구를 시작한 동기는 아니었다. 그 외에도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848 유럽혁명을 비교하는 부분 등을 포함하여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은 내용이 많지만, 일일이 따지는 의미가 별로 없으니 이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자.

 

앞에 언급한 대로 그는 맑스가 <자본>을 집필한 동기를 두 가지, 즉 혁명의 동력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혁명은 왜 실패했는가를 규명하는 데 있다고 전제하고 각각을 설명하면서 <자본>의 서문을 인용한다. 다시 말해, 이 두 번째 글은 <자본> 서문 부분에 대한 해설이기도 한 셈이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설명과 인용을 대비해 보면 그가 얼마나 의도적으로 <자본>을 왜곡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그 ‘의도’가 무엇인지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혁명을 야기한 자본주의의 모순은 교환관계?

 

혁명의 동력은 어디서 왔는가? 강신준 교수의 답은 이렇다. 자본주의 이전 자급자족 경제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여 열심히 일한 사람은 소비도 풍족하게 할 수 있었는데, 교환이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키게 되면서 열심히 일해도 소비를 풍족하게 할 수 없는 가능성이 생기고 노동하는 사람이 가난한 노동빈곤이 나타났다. 부를 생산하는 사람이 가난해지는,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현상 때문에 혁명이 다수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노동하는 빈민’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교환관계’에서 생겼다? 이것은 <자본>의 핵심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명백한 왜곡이다. 맑스에게 자본주의의 본질은 생산관계 즉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착취관계이다. 생산수단을 강탈함으로써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노동자로부터 등가교환의 ‘형식’으로 노동력을 구매하여 실제로는 노동력의 가치(임금)를 넘어서는 잉여노동을 수취하는 것이 자본이다. 자본주의에서 부의 형태이자 사회적 권력인 자본은 축적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며, 축적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적 과잉인구(실업자)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과 사회적 부의 엄청난 축적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노동자가 예속과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요컨대 자본주의에서 교환관계는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고 그 실체는 자본-노동의 계급관계, 즉 생산관계에 있다.

 

이 부분에서 강 교수는 “내가 이 책에서 연구해야 하는 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 양식에 상응하는 생산관계 및 교환관계이다”는 맑스의 글을 인용하고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교환관계’라는 단어”라고 하면서 핵심인 생산관계를 빼버린다. 그리고는 오직 ‘교환’에서 비롯되는 생산과 소비의 분리를 가지고 혁명을 야기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한다. 이는 맑스의 <자본>을 부르주아 시장 이론으로 만들어 버리는 중대한 왜곡이다. 신자유주의 이론조차도 시장에서의 교환관계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계급적 착취와는 무관한, 능력과 노력과 운이 작용하는 경쟁의 산물이라고 볼 뿐이다.

 

사실 <자본>을 연구해온 강신준 교수가 <자본>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왜곡을 감행하는가? 두 번째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보면 그 의도를 더욱 선명히 알 수 있다.

 

변증법과 사회변화에 대한 궤변

 

두 번째 질문은 부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시정하려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 혁명은 왜 실패했는가 이다. 강 교수가 찾아냈다는 답은 우선 맑스가 혁명은 오랜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가 어디서 어떤 식으로 그런 이야기했는지는 없다. 그 대신 이 대목에서 그는 “학문을 하는 데는 평탄한 길이 없으며 가파른 험한 길을 힘들여 기어 올라가는 노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정상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는 프랑스 어판 서문의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서 맑스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본> 앞부분이 어렵다고 읽기를 포기할까 우려하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으면 좋겠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 강 교수는 이 인용으로부터 “혁명의 목표는 이처럼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상으로 가기 위한 지속적인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는 결론을 끄집어낸다. 혁명이 오랜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1848년 혁명의 실패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도 알 수 없지만, 도대체 맥락이 닿지 않는 이 엉뚱한 인용 앞에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사실 굳이 그런 인용이 아니더라도 혁명이 단번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가능하고 또 일리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맑스의 이야기를 엉뚱하게 갖다 붙여서 자신의 생각을 마치 맑스의 주장인 양 눙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기다.

 

[출처: 경향신문 캡쳐]


이렇게 혁명이 오랜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진짜 의도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이어지는 변증법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은 사물의 운동법칙을 알려주고 유물론은 혁명이 이 운동법칙에 따라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사물의 운동법칙으로서의 변증법은 무엇인가? 요약하면 이렇다. 사람들은 변화가 “기존의 것을 없애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물의 운동법칙(=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변화는 사물의 성숙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을 채워나갈 때에만 이루어진다. 1은 성숙해 지면서 2가 되는데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2가 되지 못한다. 첫 번째 계단을 허물어버리면 두 번째 계단을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변증법을 모르더라도 자연에서든 인간사회에서든 ‘변화’에는 양적인 변화와 질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어떤 원숭이 종이 진화해서 인간 종이 되었다면 그것은 질적 변화이고, 강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기존의 것이 없어지고 다른 것이 생겨난(혹은 다른 것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질적 변화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1+1=2라는 산수를 내세워 기존의 것을 부정하면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여기서도 그는 맑스를 인용하면서도 그것을 거꾸로 뒤집고 있다는 점이다. 인용문에서 맑스는 “하나의 발전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행하고 나면 곧바로 다시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질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당연하지 않은가? 예컨대 봉건제 안에서 양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더라도 기본적으로 봉건제에 머무르는 한은 봉건제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로 바뀌면 봉건제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를 파악하고 그것을 변혁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운동법칙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여기서 맑스가 이야기하는 바다. 그런데 강 교수는 이 인용문 뒤에 혁명이란 어린아이가 성장하면 옷도, 음식도, 교육내용도 달려져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를 들면서 변화는 ‘사물의 성숙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을 채워나갈 때 이루어진다’고 강변한다. 1+1=2라는 산수와 이 비유를 그대로 이용하자면, 그는 여기서 어렸을 때 입던 옷을 그냥 입은 채로 큰 옷을 껴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질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부정하다 보니 그는 “자본주의는 봉건제가 더욱 성숙해진 체제”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에 이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본주의는 봉건제를 타도하고 등장한 체제가 아닌가? 봉건제의 태내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성숙해서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 냈다면 말이 된다. 그러나 그 이행은 질적인 변화였고 그래서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자본>을 해설하는 글을 놓고 ‘지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런 ‘상식’을 되새겨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맑스에 대한 왜곡을 넘어 독자에 대한 모독이다. 도대체 독자들을 어떻게 보고 이렇게 상식 이하의 궤변을 가지고 독자들을 속여 넘기려 한단 말인가.

 

개혁 외에는 길이 없다?

 

이런 궤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그가 ‘자본주의의 개혁’을 말하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지금까지 묻고 대답하던 질문은 ‘혁명’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제 ‘혁명’이라는 단어도 사라지고 자본주의 ‘개혁’으로 바뀌어 버렸다. 독자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개혁이 문제였던가? 실은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혁명’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이미 혁명의 원인을 이야기하는 곳에서 그가 자본주의 모순이 교환관계에서 생겼다는 주장에 이어 곧바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개혁하는 것이 혁명의 목표”라고, 맑스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슬쩍 끼워 넣은 바 있다. 그런데 이제 끝부분에 와서 자신의 의도와 주장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좋게 해석하자면,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꾸준히 개혁하다 보면 자본주의도 더 발전된 체제(사회주의?)로 성숙해 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봉건제가 성숙해진 체제가 자본주의라고 비상식적인 역사해석을 제시했던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본주의를 보다 성숙시키는 일뿐이다!

 

처음에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라는 이 기사의 제목을 봤을 땐 편집자가 어떻게 제목을 이렇게 뽑았을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제목은 기사의 내용을 아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맑스를 인용해 놓고 거꾸로 뒤집어 버린다.

 

인용문은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언제나 일시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현존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라는 구절이 자신의 주장하는 변증법과 자본주의 개혁에 대한 궤변(변화는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더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자본주의 개혁도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면서 이루어져야 한다)을 맑스가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처럼 써먹고 있다. 그러면서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 즉,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이하는 애써 무시해 버린다. 사실 여기서 맑스가 말한 ‘현존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라는 구절을 ‘현존하는 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왜곡이다. 그 말의 의미는 현존하는 것은 필연적인(논리적이든 역사적이든) 근거가 있어서 존재하게 된 것이고 그에 따른 고유한 모순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관념적으로 이상적인 그림을 그린다고 현실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모순과 운동)에 대한 탐구를 통해 혁명의 목표와 경로를 과학적으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강신준 교수의 <자본> 해설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 사기

 

이번 두 번째 연재를 통해 강신준 교수가 <자본> 강의를 통해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그가 앞부분에서 강력한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이룬 유럽을 이상으로 설정하고 유럽 노동운동을 맑스의 계승자인 듯 언급할 때 이미 시사된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그것을 개량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설파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렇게 자본주의를 개혁하면 충분히 인간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또 학자들뿐 아니라 노동운동가들도 많이 그렇게 믿으니까. 그들에게는 자본주의에서 그것이 지속 불가능한 환상임을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논쟁해 가면서 함께 갈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맑스와 <자본>을 악의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에 있다. 아니,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맑스와 <자본>을 이용하는 것까지도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예컨대, 맑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끌어낸 것은 틀렸거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타당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해서 맑스와 <자본>이 제시한 자본주의 분석에서 여전히 도움 받을 게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전에 전향한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강신준 교수의 <자본> 연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서두에 언급했듯이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본> 연구의 전문가다. 더욱이 그는 <자본>에서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넘어 그것을 넘어설 ‘대안’을 읽어내야 한다며, “한국 진보운동에 대안이 부족한 것은 자본을 읽지 않았거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한겨레> 9월 3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위자가 ‘맑스와 <자본>이 정말로 말하고자 한 바는 이거다’라고 한다면 누가 가볍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이 맑스가 이야기한 대안, <자본>이 함축하는 대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대안(개량적인 사회민주주의)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맑스와 <자본>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의 말을 교묘하게 인용해 가면서 마치 맑스와 <자본>이 자신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 말해, 맑스와 <자본>이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아닌 점진적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부도덕한 지적 사기다. 나아가 지금도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것은 단순한 지적 사기를 넘어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예전의 전향자들은 맑스를 관 속에 묻어 놓고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동토에 묻었던 맑스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하고 마침내 세계대공황으로 그 모순이 폭발하면서 다시 살아오고 있다. 맑스의 부활은 ‘사회주의’와 ‘혁명’이 다시 현실의 의제로 되살아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강신준 교수는 <자본> 연구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빌어 맑스와 <자본>으로부터 혁명과 사회주의를 거세해 버리려 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맑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관에서 꺼내 부관참시하고 있는 꼴이다. 언론사상 초유임을 자랑하며 강 교수의 <자본> 해설을 연재하고 있는 경향신문도 이 곡학아세의 공범 역할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 돌이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