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블로그 <물질문명>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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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 대 사회학, 피에르 부르디외 인터뷰
부르디외 (Pierre Bourdieu)가 쓴 ≪ 예술의 규칙(Les regles de l’art) ≫는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게 해주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문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문학주의자라면 이 책을 읽고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고(전 학기 방법론 수업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경우가 그랬다. 이 선생님은 역사적 중요성이 있는 비평서 중 한 권을 읽고 요약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부여했는데, 내가 ≪ 예술의 규칙 ≫을 선택하겠다고 하자 그 책은 문학연구자들을 ≪ 짜증나게 하는 ≫ 책인데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다), 문학숭배자들에게 치를 떠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은밀한 쾌감을 느낄 것이다(이건 내 경우). 물론 두 경우 모두 의심의 여지 없이 ≪ 정념적 ≫이며, 둘 다 정상이 아니다.
책이 출간되었을 때, 문학연구자 피에르 마르크 드 비아지(Pierre Marc de Biasi)는 마가진 리테레르(Magazine Litteraire)의 지면을 통해 부르디외를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는 (후일 드 비아지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정도 수정과 교정이 가해진 것이었다. 드 비아지는 부르디외가 죽고 난 몇 년 후, ≪ 부르디외와 문학(Bourdieu et la Litterature) ≫이라는 책에 수정되지 않은 인터뷰 전문을 수록한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인터뷰의 일부분 –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부분- 을 번역한 것이다. 어째서 가장 흥미로운가 하면, 거장과의 인터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례적인 상찬들이 이어지고 난후 진짜로 두 대담자 간에 논쟁이 일어나는 부분이기 떄문이다.
부르디외는 이 책에서 문학작품을 물신화하는 신앙인들이자, “과학”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이들인 문학비평가들에게 말 그대로 “기관총 사격(드 비아지의 표현)”을 가하고 있다. 놀랍게도 드 비아지는 대부분의 비평가들과 달리 부르디외의 저작에 매우 우호적인 편이었고, 그 이후로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자와 문학비평가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존재했다. 드 비아지는 지속적으로 문학과 문학연구가 갖는 고유성과 특수성을 내세우고, 부르디외는 그러한 태도는 문학물신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몰아붙인다.
나보고 입장을 정하라고 하면 나는 부르디외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전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드 비아지가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대표하고 있는 생성기원비평(Critique genetique)이 근본적으로 시대착오적 문학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흐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생성기원비평은 최종적으로 출판된 텍스트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작품 생산의 전 과정 –구상부터 원고 단계를 거쳐 편집과 출판에 이르는- 을 문학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주장하는 흐름이다. 실천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대 작가(플로베르, 졸라, 프루스트 등)가 남긴 작품원고를 낱낱이 검토하는 작업이다. 나는 이 연구들의 밑에 깔려 있는 암묵적인 전제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그 전제란, “작가는 위대한 존재이며, 문학작품은 다른 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기에 작가가 남긴 작품의 초고는 모두 검토될 가치가 있다”는 관념이다. 왜 문학작품만이 그 생성과정을 낱낱이 파헤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 글의 “생성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문학 작품”의 생성과정만이 중요하다는 것인가? 그 실제적 실천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다.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오직 정전으로 간주되는 작품들을 남긴 소위 대 작가들의 원고들 뿐인 것이다. 일개 신문기자가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준비한 여러 단계의 원고들은 그들의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직 문학적 거장들의 원고만이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방법론은 매우 섬세하며 세련되어 있다. 10여년간 생성비평의 방법론을 가다듬으며, 그들은 어떤 비평학파 못지 않은 원고 연구 방법론을 정립시켜 왔다. 그러나 문제는 “방법”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다루는 “대상”이다. 그들은 문학 작품과 특정 작가들을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배타적으로 특권화하며 그 대상을 물신화 한다. 바로 거기에 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에밀 시오랑은 다음과 같은 잠언을 남긴 바 있다. “과학에 대한 반박 : 세계는 알려고 노력할 가치가 없다”. 우리 시대는 저 말을 이렇게 패러디 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문학비평에 대한 반박 : 문학은 알려고 노력할 가치가 없다”. 문학이라는 대상이, 알아야만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 내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사회적 조건 하에서 문학이 가질 수 있었던 기능과 역할 때문에. 예를 들어, 19세기 이후 각 국가가 “민족”을 발명해야 할 필요 앞에 있었을 때 문학은 민족 제작의 특권적 도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때 문학비평이란 단순한 문학애호가들의 내부담론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거대한 의미를 부여받은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작업이었다. 현재, 이전에 문학이 수행했던 여러 기능들은 영화와 TV를 비롯한 수많은 분야들로 분해-이전되었으며 더 이상 문학은 이전과 같은 독점적 영광을 누릴 수 없는 처지에 있다. 판매량 감소를 비롯한 모든 객관적 수치들이 그와 같은 몰락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는 전세계적 현상이다. 이 상황에서 “문학작품과 작가는 낱낱이 연구될 가치가 있는 신성한 대상이다”라는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비평이 어떻게 시대착오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출판된 텍스트 만이 아니라, 작가가 남긴 원고의 한 글자, 한 글자, 수정의 흔적 등등이 모두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비평이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방법론이 아니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생성기원비평의 방법론은 대단히 정교하다- 대상이고, 그러한 대상을 특권화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이다. 나는 지금 일본식 안주용 과자를 먹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나는 이 과자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완전히 과학적이고 세련된 방법론을 동원해서 이 과자를 면밀히 분석한다 해도 내 과자비평을 읽어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는 소수 일본과자 매니아들이 있을 뿐일 터이다. 그것이 ≪ 예술의 규칙 ≫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이다. 문학장은 문학작품에 신성한 가치가 있다는 환상을 투여하고 있는 신앙인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장이라는 것. 같은 신앙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장 외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의미가 없다는 것. 기독교의 신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의미가 없듯이.
오늘날, 문학에 대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의 수효는 이전과 비교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비평이 목표로 하는 것이, 이 얼마 남지 않은 신앙인들 사이에서 신앙을 강화시켜나가고자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렇게 하면 된다. 작가들을 숭앙하면서, 그들이 남긴 글을 한 자, 한 자 경건하게 탐구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신앙인이 아니다.
피에르 마르크 드 비아지 (Pierre Marc de Biasi, 이하 드 비아지): 당신의 책(≪ 예술의 규칙 ≫)이 플로베르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새로이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당신은 당신의 저작이 어떤 점에서 플로베르의 글쓰기와 그의 작업의 의미에 대해 -아니면 더 일반적으로 문학사회학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이하 부르디외) : 당신의 질문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답해 보겠습니다. 나를 (나의 작업을) 정당화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웠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당신도 알 것입니다 : 왕위 찬탈자지요. 정당성은 그것이 먼 곳으로부터 올 수록 더욱 신뢰할 만한 것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스위스에서 온 어떤 논문을 받았는데, 이 논문은 우리가 ≪ 예술의 규칙 ≫과 같은 책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논문의 저자는 문학을 연구하는 다양한 분야(문학 이론, 언어학, 화용론, 시학 등등, 그는 모든 것을 거론하고 있습니다)들을 열거하곤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 ≪ 장(champ)의 이론은 이 모든 학문들에 하나의 작업 방향, 연구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전체주의 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나 역시 이 점을 분명히 한 바 있습니다! ), 나는 언젠가 이 학문들이 문학 생산에 대한 일반 이론(une theorie generale de la production litterair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속으로 통합되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 바로 이겁니다 ! 내가 ≪ 예술의 규칙 ≫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의도는 결코 문학을 연구하는 다른 방법들을 사회학으로 대체하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학문들이 서로 통합될 수 있는, 적어도 서로 연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드 비아지 : 나 역시 당신의 본래 의도가 평화주의적이고 연방주의적인 것이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 예술의 규칙 ≫의 상당한 양을 문학 비평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해 기관총 공격을 퍼붓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부르디외 : 아닙니다, 아니에요 ! 나는 단지 그 모든 비평 담론들은 부분적인 관점만을 제공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나는 내가 제안한 분석방법이 실제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접근방식들을 통합하도록 -절충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에 대한 ≪ 내적이고 형식적인 분석 ≫과, ≪ 외적 분석 ≫ -소위 컨텍스트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라고 불리는- 이라는 불모의 양자택일을 폭파시키면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방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던 이들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 텍스트들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 ≫과 이 ≪ 텍스트들의 생산자들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 ≫을 명확히 구분짓지도, 그 둘을 연결짓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곤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나는 ≪ 통합적(integratrice) ≫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전혀 분파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들은 항상 나의 연방주의적 작업이 실제로는 합병주의라고들 말하지요 !
드 비아지 : 나 역시 비평적 담론들 사이에 상호연대와 효율적인 공조를 재건설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나는 심지어 사회학적, 사회-역사적 관점이 이 영역에 있어 분명히 일차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 서로 다른 이 모든 방법론들을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될 광범위한 문학 생산의 일반 이론으로 통합할 수 있는 연합적 원리가 과연 존재할런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부르디외 : 사회학이 제안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회학은 바로 그 연합의 원리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드 비아지 : 나는 반-사회학적 편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반대에 가까울 것입니다. 내 연구들 중 상당수는 사회비평에 매우 가까운 것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정식화한 바 있는 ≪ 장(champ) ≫의 문제를 중심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학 작품에 대한 연구가 갖는 특수한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들 속에서는 사회학의 도구들만으로는 연구를 시작할 수도 작업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문학 “생산”의 이론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면 말입니다. 작가의 친필원고(manuscrits)에 대한 연구 –내가 잘 알고 있는 작업, 특히 플로베르의 친필원고 연구에 있어서- 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 분야에서의 연구는 작가의 작업을 재구성하고, 집필 과정 중에 일어나는 변화들 –최초의 구상 단계에서 출판된 텍스트에까지 이르는, 열 혹은 열 한 단계로 이어지는 초고들을 거쳐 텍스트를 생산하기까지 이르는- 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연구 방법론에는 장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연결 될 수 있는 수 많은 접점들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문학장의 논리가 글쓰기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친필원고 연구의 방법론은 또한 다른 종류의 논리들 역시 드러나게 합니다 : 플로베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 구성과 관련한 요구, 장르적 요구에 따라 점차적으로 구조화 해나갑니다. 플로베르는 운율적이고 음악적인 원리들에 따라서 자신의 표현을 계속 수정하고,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텍스트가 갖는 상징적 의미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며, 무의식적 결정요인들 –예를 들면 원고에서 드러나는 언어적 실수들- 에 반응하고, 극단적으로 복잡한 방식으로 자료들을 다루고, 작품의 자료가 되는 요소들과 끝없이 유희하는 지적인 글쓰기 체계를 건축하고, 등등. 친필원고를 통해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 역시 이처럼 현재 동원 가능한 모든 연구 방법론들 –시학, 서사학, 문체론, 상호텍스트성, 정신분석학 등등- 을 불러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학도 물론 거기에 포함되겠지요. 이처럼 전(前)-텍스트(avant-texte)와 글쓰기의 과정에 대한 연구 방법론은, 여러 방법론들 사이에서 연합원리의 지위를 요구함에 있어 결코 사회학에 비해 떨어지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탄생 상태에 있는 글쓰기에 대한 분석에 있어, 사회학적 접근방식은 물론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텍스트 생산의 다양한 논리를 재구성함에 있어 필요한 여러 방법론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실제로, 친필원고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어떠한 글쓰기의 몸짓도 일원적인 방법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텍스트에 일어나는 가장 작은 변화들도 문제가 됩니다. (소설의 동일한 대목에 대해 : 역자) 대개는 두, 세가지 버전의 때로는 더 많은 수의 변이(variable)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체와 관련한 수정(낱말의 반복이나 특정 음소의 반복을 제거하는 일 등)을 관찰해보면, 우리는 이 수정이 작품의 상징체계와 관련된 요구와 (새롭게 수정된 표현이 소설의 이차적 의미 망들과 연관 관계를 가져야 하니까) 사회-역사적 함의(대체된 표현은 장에 대한 명시적 혹은 암묵적 지시를 포함하게 되기에)로 이중화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플로베르의 경우에는, 여기에 개인적 용법을 갖는 심리-전기적 변형들도 덧붙여집니다 (예를 들면 개인적 경험에 대한 유희적인 암시라던가..).
<모든 것은 사회적이다(Tout est social)>
(계속) 드 비아지 : 결국,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초고들의 논리에 있어 가장 놀라운 지점은 그 변이들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이 변모의 현상들이 다층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다양성, 다층적 결정성은 항구적으로 서로를 재구성하고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 변이들 중 하나에 헤게모니적 지위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다른 차원들을 제쳐놓고 사회적 차원에 그러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요.
부르디외 : 결국 같은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군요 : 모든 것은 사회적입니다! 문체는 사회적입니다. 형식도 사회적입니다. 사적인 삶도 사회적입니다. 당신이 “글쓰기의 사회학적 차원이 존재합니다”라고 말할 때,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글쓰기에 존재하는 사회적인 것(le social)을 다른 여러 차원 중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하고 있는 당신이야 말로 환원주의자입니다! 글쓰기에 예외적인 지위를 부여하면서, 글쓰기에 사회적 세계에 대한 일종의 외부성을 부여하는 당신의 관점이야말로 환원주의적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태도를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제라르 주네트(Gerard Genette)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화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나는 고등사범학교(Ecole Narmale)시절부터 그와 알고 지냈습니다). 나는 잡지 포에티크(Poetique)에 기고하기 위해 주네트에게 플로베르에 대한 한 논문을 써 보낸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논문을 다시 돌려 보냈지요. “우리는 이런 종류의 텍스트를 출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학술지는 이제 형식주의적(formalistes)으로 되었거든요”.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주네트의 머리 속에, 그리고 당신의 머리 속에도 역시 형식적인 단절, 즉 ≪ 문체 ≫와 ≪ 사회적인 것 ≫을 분리하는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전에, 하이데거의 경우에 그렇듯, 철학적 형식에 대한 가장 “순수한” 연구들 역시도 타협적 해결책들 –철학장(Champ philosophique)에 고유한 검열들과 유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사회학에 대한 비판자들은 종종 사회학에 대한 훼손된 정의 -사회학주의적인- 를 받아들이는 사회학자들과 의견이 일치하곤 합니다. 모든 것이 사회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초월적인 것(transcendance)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글쓰기 역시, 글쓰기가 갖는 모든 특수성과 함께, 역시 사회적인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사회적 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모든 것은 사회적입니다. 문체, 형식 역시 사회적입니다. 저작권이나 출판사와의 관계 혹은 다른 작가들과의 관계 등등이 사회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냥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것은 없습니다. 글쓰기 역시, 그것의 모든 특수성과 함께, 사회적인 것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사회적 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회학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드 비아지 : “모든 것은 사회적이다! 우리는 사회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논거에 대해서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말에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요? 당신의 말을 그냥 인정할 수밖에요. 내가 느끼기에 당신은 방금 나의 이런 조심성도 사회적인 것이라고 말하려던 것 같은데요…
<방법론의 문제>
(계속) 드 비아지 : 나는 초월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는 초월성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사고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초월성의 반대항으로서의 :역자) 내재성에 대한 사회학적 전유가 정말로 학문적 연구의 방법론들을 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것인지는 증명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것은 사회적이다”이라는 말이, 동일한 연구 대상 주위에 다양한 전문가들을 불러모으는 데 있어 정말 좋은 출발점일까요? 또 사회학은 왜 이 연합의 원리가 되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인지요? 왜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사회학이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무의식은 사회적인 것만큼이나 우리를 사로잡고 있지 않습니까? 무의식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 않나요? 마찬가지로 왜 언어학이 아니라 사회학이어야 한단 말입니까? 언어는 우리의 환경 -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자 우리로부터 돌출되어 있는 것- 이 아닙니까?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학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떠한 이면도, 어떠한 외부도 없는 담론, 우리가 빠져나갈 수도 없고, 모든 문제제기로부터 스스로를 면제하는 그러한 담론을 의심하라고. 당신은 “우리는 사회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더 어렸을 때, 모든 것은 정치적이었습니다. 대서양 저편에서는 모든 것은 젠더의 문제였지요…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말하자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이 제기한 내재성의 문제가 오늘날 문학 영역에서의 연구들의 발전을 위해 핵심적인 것이며, 그 문제를 삭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일 모든 것이 사회적이라 해도, 당신은 문학이 특수성들을 가진 높은 자율성을 지닌 장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당신의 책의 한 부분에 담겨 있는 내용이지요. 어째서 그러한 사실로부터 특수한 접근방법들이 갖는 정당성을 이끌어내지 않는 것입니까?
부르디외 : 하지만 나는 특수한 접근방법들을 전혀 폄하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는 문학장은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모든 종류의 변이들이 서로 결합되는, 매우 복잡한 종류의 일종의 합의를 보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의식(儀式, rituel)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상징적 의식은 언제나 다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회적인 것이 맨 윗층에 자리잡으며, 그것이 심리학적, 형식적 등등의 변이들을 덮게 됩니다.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는 반대입니다. 사회적인 것은 다른 변이들의 뒤에서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으로 남게 되지요. 하지만 의식에서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가 이 모든 층위들을 동시에, 그리고 매 순간 끌고 다니게 된다고 생각하며, 또 다양한 층위로 나뉘어 있는 이 총체는 오직 사회적인 것으로서만 광범위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내가 연구하는 층위(사회학) –나는 그것이 필수적인 통합적 층위라고 확신합니다만- 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특수한 연구들 –내가 그들에 대해 (통합적) 프로그램을 제안하고자 하는-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드 비아지 : 나는 당신의 말에서 작은 개방성을 본 것 같습니다. 이 개방성은 내가 지난 여름에 읽었던 버전과 방금 출간된 출판본 사이에 당신의 책에 가해진 수정들에서 이미 보이고 있는데요. (드 비아지는 책이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에 ≪ 예술의 규칙 ≫의 원고를 읽었고, 이 버전에서 부르디외는 드 비아지가 대표하고 있는 생성기원비평(혹은 생성비평, Critique genetique)을 격렬히 공격하고 있다. 초기 원고에서 보다 격렬했던 공격의 어조는 최종출간본에서 상당히 누그러져 있는데 드 비아지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Critique genetique는 생성비평, 기원 비평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단순한 작품의 기원이나 발생과정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작품의 생성, 변천과정 전체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생성비평이 적합한 역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후 genetique라는 낱말에서 출발하여 genese(발생 혹은 기원)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성기원비평으로 번역하였다. : 역자). 왜냐하면, 생성기원비평가로서, 나는 주의 깊게 두 버전을 비교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생성기원비평에 대한 공격, 그리고 플로베르에 대한 나의 연구에 대한 공격은 물론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남아 있지만- 보다 덜 격렬하게 변하였습니다... 심지어 거기에는 상호간에 협력을 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덧붙여져 있습니다. 아닙니까?
부르디외 :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나는 그런 수정을 가했는데, 왜냐하면 내 텍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거기에 나의 흥미를 끌만한 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결코 타협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만나러 올 것이라는 것도 전혀 몰랐고,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수정을 가한 것은 진심으로 작가의 친필원고들에 대한 연구가 우리에게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이 인터뷰를 회상하면서, 드 비아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 비아지는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르디외에게 두 버전 사이에 공격의 강도가 약화된 이유를 물었다. 부르디외는 대강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 ≪ 내가 당신들을 공격했을 때 나는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했고, 당신이 나를 인터뷰하러 올거라는 사실도 몰랐다. 하지만 당신은 Magazine Litteraire라는 권위있는 잡지를 통해 나를 정식으로 인터뷰하러 오게 되었고, 당신의 그러한 지위 변경에 맞추어 책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왜냐면 모든 것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사회학자로서 나는 그러한 필요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을 인터뷰에 넣지는 말라. 왜냐면 그것도 사회적인 것이니까!≫. 십여년 후 부르디외는 사망했고, 드 비아지는 Magazine Litteraire에 실렸던 인터뷰의 원문 전체를 이 책에 실으면서 위의 일화를 공개했다. “나으 좌파 사회학자 부르디외짱은 그럴리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다.) 텍스트의 집필이나, 집필에 있어서의 연속적인 단계들에 대한 그 문제의식이 말이죠. 물론 이 연구가 텍스트의 생산에 있어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의미들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죠.
<사회적 기원과 문학적 기원>
드 비아지 : 당신은 어째서 “생성기원비평”이라는 명명에 대해서, 혹은 생성기원비평가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기원(genese)” –즉, 전-텍스트(avant-texte)의 논리, 원고들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텍스트의 발전과정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원”- 이라는 명명에 대해서 그토록 적대적인 것입니까?
부르디외 : 아닙니다. 나는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지적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용어를 올바르게 결정하는 일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기원”이라는 낱말을 독점하는 방식에 일종의 권력 남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 비아지 :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기원이라는 용어는 아주 오래된 문헌학적 전통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용어를 사회학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근대의 친필원고들에 대한 최초의 연구들에서 사용된 용법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거기에 새롭고 체계적인 방법론적 내용 –“글쓰기의 과정(processus de l’ecriture)”이라는 의미에서- 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말입니다.
부르디외 : 물론 기원이라는 용어는 문헌학적 전통에 속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지금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기원이라는 낱말을 통해, 그리고 사회학적 연구에서 이 낱말이 뜻하고 있는 의미를 이용해, 당신들 생성기원비평가들은 당신들이 형식주의와 발생적(genetique) 사고라는 양자택일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신들의 연구들은 여전히 형식주의의 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위험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작업을 다른 식으로 부를 수 있고, 그러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원”이라니! 당신이 하고 있는 연구와 같은 흐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원입니다! “기원”은 정확히 내가 발전시키고자 하는 개념입니다. 즉, “가능성의 사회적 조건의 총체(l’ensemble des conditions sociales de possibilite)”가 바로 기원이지요. 가능성의 사회적 조건들은 심리학적 성격의 것일수도, 역사적 성격의 것일수도, 문체적 성격의 것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의 사회적 조건을 전-텍스트로 축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텍스트는 결코 발생(기원)의 근원이 아닙니다. 텍스트가 갖고있는 가능성의 조건들을 오직 전-텍스트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텍스트의 원고들을 연구하는데만 그친다면, 어떻게 그 텍스트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결정요인들을 재구성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텍스트들에 대한 세심한 독서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이 텍스트가 생산된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것뿐입니다 : 사회적 문제틀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원고나 집필 자료들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작가가 그의 작업이나 원고 수정 과정들 속에서 그의 아비투스와 그의 인식 –그가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장의 상태에 대한 인식-을 굴절시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지어” 원고들에서조차 사회적인 것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드 비아지 : 잠깐 당신의 말을 이 “심지어 원고들에서조차”에서 끊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견해, 즉 그 안에서 텍스트가 생산되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합니다. 하지만 원고들과 전-텍스트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당신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해 개진하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즉, 아비투스의 흔적이나 장의 굴절 등은, 문학 작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결국 글쓰기의 현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막 쓰여지고 있는 상태의 텍스트에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현실과 텍스트 사이의 관계는 기껏해야 추측일 뿐입니다. 심지어 이것은 아직 관계에 대한 가설조차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작품의 집필 자료라는, 거대한 정보가 담긴 풍부한 원천을 애써 축소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전-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위해서는 아비투스나 문학장의 상태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정보들(전기적, 역사적, 사회적 등등)이 필요하다는 것, 나 역시 거기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최종적 텍스트와 그 발전과정의 사회적 조건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 원고들 속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그 사회적 조건들을 읽어낼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볼 때는, “원고들에서조차”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원고들 속에서”인 것입니다. 작품과의 관계에서 볼 때, 전-텍스트 외부의 정보들은 기껏해야 개연적일 뿐이며, 추측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플로베르가 그의 편지 속에서 샹플뢰리(Champfleury)에 대해 말한 것들이 그의 글쓰기에 있어 아주 작은 역할밖에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당신에게 증명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작가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쓴 편지에 나타나는 증언들은 언제나 매우 의심스러운 것들입니다. 사회적 현실과의 관련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반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 결정요인들과 그것의 의미, 함의들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탄생 상태에 있는(in statu nascendi)” 글쓰기인 것입니다. 어째서 작업 원고들이라는 이 거대한 자료를 포기하는 것입니까? 작업 원고는 작가가 발명하고, 혁신하고, 선택하고, 반응하는 방식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 당신의 눈 앞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방어와 공격 전략들이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텍스트의 가능성의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연구에 있어, 이건 하나의 광산 입니다. 논증에 있어 그 무엇보다도 유리한,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증거들을 제공해주는 광산 말입니다.
부르디외 : 나는 그와 같은 접근방식의 유용성을 전혀 부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고들에서 조차”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 다양한 언어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내 연구를 통해서 사회적 현실과 그 구조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그것은 담화(discour) 속에서 주어질수도, 텍스트들 속에서 주어질수도, 실천(pratique)들 속에서 주어질 수도 있지요. 반면에 텍스트를 페티쉬화하는 비평가들에게는 일종의 마조히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것들을 오직 텍스트 속에서만 읽어내려고 하지요. 텍스트라는 장소는 그러한 것들을 읽어내기에 가장 어려운 장소인데도 말입니다. 동일한 것을 다른 장소에서, 예를 들어 실천의 영역 속에서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는데도 말이지요. 뭐 아무튼! 내가 68년 5월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을 때, 나는 텍스트들 –책들, 팜플렛듯, 전단들- 을 자료로 삼을 수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텍스트적 전략들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또한 공간 속에서 행위자들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들에 대한 명백한 증언들 역시 가지고 있었고, 이 공간 속에서 위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대적 위치들을 통해 텍스트적인 여러 특징들을 어렵지 않게 해석해 낼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나는 나를 놀라게 했던 문체상의 특수성들로부터 출발하여 여러 대학들의 기능에 대해 질문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요. 아무튼 내 첫번째 논거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 어째서, 사회적 공간으로부터 비롯하는 명백한 정보들이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보들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내 두번째 논거는, 더 강력한 것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 즉, 심지어 문체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도, 사회적 공간의 구조를 머리 속에 넣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원고들에 대한 당신의 분석들, 전-텍스트들에 대한 당신의 모든 연구들이 실제로는 글쓰기의 사회적 전략을 파악하기에 아주 훌륭한 수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내가 그러한 작업의 실례를 보여주는 일은 내게 있어 아주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연구들을 읽으면서 그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전-텍스트들에 대한 연구가 너무 자주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 즉 사회적인 것과 장의 구조를 망각하면서 말이지요.
<프로그램적 차원>
드 비아지 : 문제가 되는 그 장, 즉 1850-1900년 사이의 문학장의 구조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당신이 제공하고 있는 당시 문학장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으로 보아 과거의 연구들 (1910-1925년대의 연구들) 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당신은 그 시기 즈음의 “문학사”들이 묘사하고 있는 문학운동들, 유파들, 경향들, 앞선 세대와의 적대들을 연구의 보증물로 삼고 있는데 사실상 그와 같은 방식은 매우 유행이 지난 방식입니다. 당신은 플로베르와 보들레르가 글을 쓰던 시기에, 그들이 그와 같은 용어들을 통해서 문제들을 정식화 했으리라고 확신하십니까?
부르디외 :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당시의 문학장에 대한 묘사를 위해 많은 연구들을 읽었습니다. 정말 많은 연구들을 말이지요! 나는 나의 연구가 ‘좋은’ 연구라기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연구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지금 그 연구를 다시하게 된다면, 나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세련된 방식으로요. 사실, 나는 나의 연구가 지금까지 이 문제를 다루어온 그 어떤 연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사회학적 경향의 문학비평가들에 의해 쓰여진 연구들, 특히 “사회비평(sociocritique)”라고 불리는 연구물들을 모조리 읽었지만… 그들은 사회적 조건 –그 안에서 플로베르가 글을 쓴-에 대한 묘사에 있어 충분히 멀리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점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플로베르 당대의 파리 문학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더 밀착해서 바라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당시 문학장에 대한 연구에 내가 마침표를 찍었다고도,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의 연구는 하나의 “프로그램”이지요. 하지만 나는 나의 방향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 즉 내가 참조하고 있는 유파들이나 문학운동들의 이름이 일정 부분 시대착오적이며, 유파들간의 관계가 약간 단순화 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자생적인 이름표(label)들이며, 분명히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이름표들이 실제로 포괄하고 있는 것과 그 이름표들이 플로베르나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 지각되었을 방식을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작가가 장과 맺는 특별한 관계가 이 이름표들 각각에 대해 특정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식을 그려내는 등등의 일도 필요하겠지요. 나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고, 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를 비판하려면 진심으로 반성해보아야하며, 모든 질문들을 더욱 밀고 나가야만 합니다. 내가 내 책의 유용성을 정의한다면 아마 그것이 내 책의 유용성일 것입니다. 내 책은 일종의 도발이며, 연구 프로그램입니다. 사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종종 절망했습니다. 나는 (기존의) 자료들 속에서 정보들을 얻고 싶었습니다. 내가 참조할 수 있는 연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무척 행복했겠지요,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 제자들 -이름을 거론하자면 크리스토프 샤를(Christophe Charle)과 르네 퐁통(Rene Ponton)이지요- 이 수행한 연구들을 제외하면, 내 흥미를 끌만한 견고한 연구는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20세기 초의 대학문학연구를 참조해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박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방법론의 문제입니다. 문학연구영역에서는 연구자들이 방법론적 빈약함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예술연구분야와는 달리 말이지요. 문학 연구를 제외한 어떤 인문학, 어떤 사회학 분야에서도 그와 같은 방법론적 빈약함은 용인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소수의 예외들 –게다가 이 예외적 연구들은 오해되고 박한 평가를 받지요- 을 제외하면 문학연구는 신성성의 전통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 신성성은 문학 연구자들에게 자기 마음대로하는 것을, 방법론적 “내 맘대로주의”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전기주의(biographisme), 심리학주의 등등. 나는 그것을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와 같은 상태의 이유들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을 이해하려고 시도한 첫번째 사람일 것입니다. 철학이나 법학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맙시다. 그것들은 훨씬 더 심하게 보호받고 있으니까요! 거기는 더 최악이지요! 철학과 법학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절대적 독점을 지키고 있는 분과들이고, 극단적으로 사회과학과 거리를 두고 있는 분과들입니다. 문학 영역에서, 보호는 물론 강력하지만, 거기에는 틈들이 있습니다. 그 틈을 통해서 나는 침입했던 것이지요.
드 비아지 : 문학 사회학 연구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부르디외 : 나는 내 책에 문학 연구들 간의 통합 –절충주의적이지 않은- 에 대한 호소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문학 연구들은 사회적 이유들 –인식해야만 하고 또 극복해야만 하는- 로 인해 서로 분리되어 있지요. 각각의 연구는 엄청나게 작은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작은 독점을 방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식영역을 다루는 사회학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법칙입니다. 즉, 지식의 한 작은 시골에서 일인자가 되는 것이 더 거대한 제국의 이인자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논리는 각 연구분야들을 전문화하면서 진보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그로 인해 각 분야는 원자화 되고, 무한한 미시-전공들을 생산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지금은 협동적인 방식으로 연구를 시작해야 할 때 입니다. 문학 생산에 대한 진정한 이론을 세우기 위해, 당파적 정신을 버리고 말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통합된 과학 –형식적 문제들, 장르들, 텍스트와 전-텍스트에 대한 분석, 문체, 문학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을 모두 다루는- 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통합된 과학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건 저 유명한 문학학부(Facultes de lettres)에 있어 중심적인 문제입니다. 문학학부는, 예컨대 과학학부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그 안에서 미래의 연구자들이 먼저 방법론에 대한 지식들을 획득할 수 있는 공통적 근간을 창조하지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친필원고들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당신의 방법론과 같은 것 말이지요. 물론 장의 구조와 사회적인 것 -그 안에서 글을 쓴다는 행위가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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