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2013 01/15ㅣ주간경향 10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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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친노 바로보기]“혁신하라, 친노!”
ㆍ전면퇴진보다 정치스타일 변화 목소리… “진영논리 탈피 이념 정체성 재정립해야”
“깨시민의 문제는 상스러움에 있는 게 아니라 정치의 종교화에 있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고종석씨의 트위터 멘션이다. 대선을 전후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깨시민’이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깨시민’은 ‘깨어 있는 시민’의 줄임말이다. ‘깨어 있는 시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조했던 말이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는 노 전 대통령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SNS 상에서 ‘깨시민’은 문재인 전 후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쓰인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친노진영에서 얘기해 왔던 ‘깨어 있는 시민’의 프레임은 일종의 계급 민주주의다. 자신들만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우월주의가 반영된 것”이라며 “내가 항상 옳으니까 내가 끌고 가겠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고종석씨의 ‘정치의 종교화’도 이와 같은 맥락의 비판으로 풀이된다.
2010년 5월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 추모문화제.
“노무현프레임 아닌 제 3의길 찾아야”
친노의 대표주자인 문재인 후보가 18대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친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형준 교수는 “지난 총선·대선 모두 친노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가 실패했다. 친노는 한 번 정권을 잡고 정권을 뺏겼는데, 이번에 또 뺏긴 셈이다”라며 “친노 책임론만 제기할 수는 없지만 연속 3진 아웃인 셈이니 친노는 일단 뒤로 물러난 후, 노무현 프레임을 벗어난 제3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친노를 향한 비판에는 친노의 전면퇴진보다는 친노 정치스타일의 전면적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친노가 이미 거대 정치세력이 되었고, 야권 내에 친노를 대체할 세력 또한 없기 때문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친노는 이미 역사적 과정을 거쳐 정치적 이념이 되었다. 정치적 이념을 인위적으로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친노를 없애야 한다는 정치권 일각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면서 “친노에는 혁신이 필요하고 그 혁신을 통해 친노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친노를 향해서는 가장 먼저 진영논리 탈피가 요구되고 있다. SNS에서 진행되는 ‘깨시민’ 논란은 선거과정에서 친노를 비판하는 주요 대목이었던 ‘진영논리’와 맥을 같이한다. 선악을 분명히 나눠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진영논리’는 정치적 대결구도를 부각시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는 지난 대선 내내 문재인 전 후보에게 따라붙었던 ‘확장성’의 한계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문 전 후보도 대선 패배 이후 “우리 진영의 논리에 갇혀 중간층의 지지를 더 받아내고 확장해나가는 데 부족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러한 진영논리가 이번 대선에서 주요 패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영논리가 동굴 속의 메아리 같은 효과를 냈다”며 “같은 식구끼리 서로 메아리를 주고 받았을 뿐 세력 확장을 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진영논리는 비판 없는 ‘묻지마 지지’로 이어져 야권 지지층의 균열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측은 참여정부가 한·미 FTA를 찬성해놓고 뒤늦게 말을 바꿨다고 공격했다. 친노진영 일각에서는 ‘참여정부의 한·미 FTA는 이익 균형인 반면, 이명박 정부의 한·미 FTA는 이익 불균형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참여정부 때 한·미 FTA를 반대한 진보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선거 전후로 불거진 ‘깨시민’ 논란도 친노의 진영논리가 만든 야권의 균열점을 보여주고 있다.
친노가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정체성이나 이념이 없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친노의 혁신은 대중과 소통하는 정체성과 이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택광 교수는 “2002년만 해도 친노는 이념과 정체성을 대중 속에 뿌리박고 있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만들며 상식이 정립되는 사회가 그들이 갖고 있는 내용이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이 옳다는 태도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친노의 이념은 대중과는 고립된 이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민주통합당 당사의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흉상. | 김영민 기자
지난 2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대국민 여론조사는 유권자들 또한 이러한 인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경향신문과 현대리서치연구소가 2012년 12월 28~2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41.7%가 민주당 쇄신을 위해 ‘정책 노선 재정립’이 가장 필요하다고 답했다.(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이는 선거 기간 중 민주당이 내세운 이념과 정체성이 유권자들과 교감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는 지난 1년간 총선과 대선의 중심에 서 있었던 친노진영이 실패한 지점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정책 노선이 불분명한 것은 대선 이후에도 명백한 가닥을 잡지 못하는 민주당의 행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 연말 제주 해군기지 예산안에 대해서는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뒤늦게 반발해 논란을 빚었다. 민주당은 유통법 절충안 또한 기존의 원안에서 후퇴한 안을 통과시켜 야권연대의 한 축이었던 진보정의당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친노에는 이념이나 정체성이 없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친노’가 다른 이름이 아닌 계보를 드러내는 명칭인 ‘친노’로 호명되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친노라는 이름은 친박·친이처럼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사적 집단적 성격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며 “사람 이름을 빼고 나서 집단의 성격이 규명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가 이념적 차이로 분화되지 않고 일차적 사적 집단들의 차이로밖에 정의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서적 요인 더 이상 대중 공감 못 얻어”
만약 친노가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이념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친노’가 아닌 ‘개혁파’ ‘진보파’ ‘복지파’ 등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노는 민주당 내에서 비교적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보여 왔지만 친노를 개혁파·진보파·복지파라는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은 노동문제에 대한 전략이 없는 정당”이라며 “친노의 핵심에 있는 사람도 노조 조직률이 낮기 때문에 민주당이 노동을 주요 의제로 삼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친노가 선거 때마다 진보진영의 지지를 받았지만, 진보진영의 분열과 야권연대에 따른 결과였을 뿐, 진보적 전략이나 의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친노가 이념과 정체성이 아니라 정권을 빼앗긴 경험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같은 정서적 요인으로만 결집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서적 요인은 더 이상 대중과 공감하지 못하고 유권자들의 피로감을 불러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지난 선거 기간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상기시키는 문구를 사용한 것도 패착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더 이상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를 계승하자는 것은 선거에서 그만 활용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야권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친노의 혁신이 필요하지만 친노가 혁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앞섰다. 당장 친노 일각에서도 혁신보다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고 의원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운 문 전 후보가 다시 나서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이택광 교수는 통합진보당의 예를 들며 대중들에게 뿌리내리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이념을 지키는 방식으로 친노가 고립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친노가 다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이념 안에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내용이 갖춰져야 하는데 지금으로 봐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면서 “그러다보면 지난 통합진보당 사태처럼 민주당 또한 쪼개지고 친노는 고립되면서 그 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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