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11-05-20 오후 6:01:06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520165055§ion=03
"아, 지금이야말로 녹색당이 필요한 때다!
[철학자의 서재]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
Félix Guattari (1930-1992)
신승철 동국대학교 강사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생태 순환의 지류를 바꾼 '4대강 살리기' 사업,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어간 구제역 사태, 청정에너지에서 절멸의 에너지로 정체를 드러낸 후쿠시마 사고, 이 정도 상황에서 위기라는 얘기가 안 나온다면 이상한 일이다.
육식 문명, 화석 문명, 원자력 문명 등 문명의 그늘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이런 사태의 위중함을 인식한 이상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들게 마련이다. 후배들에게 한국 사회에도 녹색당 운동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제안하고 다니면서 내게 큰 의지가 된 책이 있다. "어려워요!" 한마디의 반응으로 상황이 곧 정리되고는 했지만 그래도 계속 주변에 권해주던 주옥같은 책, 위기의 상황에서 큰 위안이 되고 지지대가 되어준 책이 바로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윤수종 옮김, 동문선 펴냄)이다.
▲ <세 가지 생태학>(펠릭스 가타리 지음, 윤수종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
"왜 하필이면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인가?" 느닷없이 후배가 질문했다. 주춤거리며 나는 주저리주저리 대답했다. 단지 세 가지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게다. 세 가지가 갖는 장점은 두 가지와 달리 n개의 지평으로 향할 수 있는 조합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나 등등. 나중에 한참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세 가지는 마음 생태, 사회 생태, 자연 생태였다. 마치 신조어증처럼 만들어지는 가타리의 특이한 개념은 약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생태적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생태적 지혜는 창의적 관계가 특이한 것을 만들어내는 '관계성 창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처음 이 책을 휴가 때 봇짐 속에 넣고 갔다. 그리고 봇짐에서 들락날락거리면서 자꾸 햇볕을 쬐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마치 딱딱하게 굳은 빵에 우유가 스미듯이 나의 두뇌 속에도 생태적 지혜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휴가 한철 동안 이 책 하나로 충분했다.
가짜 녹색을 넘어 녹색의 향연으로
사상가마다 조금씩은 정치적 색깔이 있기 마련이다. 가타리는 말년에 녹색이었다. 그것도 진한 녹색이어서 초록색이라고 불려야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녹색당 지방의회 후보 리스트의 마지막 명단에도 올랐던 인물이었다.
가타리의 생태주의와 녹색당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이 책에는 곳곳에 많은 애정이 들어가 있다. 이 책은 좌파 생태주의와 우파 생태주의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생태주의가 좌우의 공리계를 넘어서 있다는 점은 가타리의 이 책에서 드러나는 사상적 면모이다. 마음 생태, 사회 생태, 자연 생태 이 세 가지 생태의 영역은 환경관리주의, 사회생태주의, 근본생태주의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다.
'자연 생태'라고 언급되었던 환경관리주의는 환경 보전과 보존, 기업에 의한 환경오염에 대한 견제와 감시 등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태안 사태가 터졌을 때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함께 태안으로 기름 제거 작업을 위해 현장수업을 나갔다. 그곳에서 양동이를 들고 걸레를 들고 겨우 몇 리터의 기름을 훔쳤던 기억이 있다. 막강한 환경 파괴에 한국 사회는 인해전술로 응답했다. 그 역동적인 움직임의 배후에는 환경 파괴의 몫은 인간에게 특히 미래 후손에게 되돌아온다는 생각이 있었다. 더 이상 환경은 인간의 도구나 수단이나 원료가 아니다.
'사회 생태'라고 언급되었던 사회생태주의는 사회 변혁과 과학기술의 재전유를 추구하는 움직임이다. 생태를 살리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4대강 살리기 사업, 원자력 발전소 수출, 녹색 성장의 가짜 녹색들을 보면서 구체화되었다. 강물은 흘러야 한다, 원자력은 죽음의 에너지다, 성장과 녹색은 함께 하기 어렵다 등등 이 모든 생각의 배후에서 자본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마음 생태'라고 언급되었던 근본생태주의는 생명 파괴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삶의 변화를 추구하며 생태 영성에 따른 대안적 삶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다. 근본생태주의와의 만남은 지율 스님의 도롱뇽 소송 때가 처음이었다. 지율 스님이 100일간 단식을 하는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분자 혁명이 만들어낸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그때 한 사람의 마음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펠릭스 가타리는 마치 수학 시간에 그렸던 것처럼 슥슥 세 개의 다이어그램을 겹치게 한 다음 하나의 그림에 그려낸다. 복잡한 생태주의 지형은 마음 생태, 사회 생태, 자연 생태의 원 다이어그램이 된다. 아마 수학자들이라면 이 그림이 그려낸 통합적 이미지에 만족하며 "너무 좋은 걸" 하면서 그 의미를 음미할지도 모른다. 서로 분리되어 있을 것 같았던 운동은 서로 겹쳐 있기도 하고 공명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은 주체성의 문제, 사회적 관계의 문제,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문제 등을 각각 의미한다.
이 책의 곳곳에서 가타리는 '주체성 생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전에 학생회에서 회의를 할 때 여러 가지 안건들이 나온 적이 있었다. 이것 해보자 저것 해보자 그러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누가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조용히 서로 바라보기만 했던 적이 있다. 그래도 회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바로 자신을 생산하니까 말이다.
주체성 생산의 문제는 특이한 움직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모든 생명은 특이하다. 생태적 연결망은 특이한 것을 생산한다. 그러한 생태적 연결망처럼 공동체나 네트워크에서도 특이한 움직임이 형성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생명 현상과 같이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작은 변화는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에서 눈덩이처럼 뭉쳐져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작은 특이함과 다름을 만드는 것은 세상을 재창조한다.
녹색당 운동의 특이점, 펠릭스 가타리
펠릭스 가타리는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 전부다. 소르본 대학의 약학과에 입학해서 전도양양한 대학 생활을 시작했던 그였지만, 곧 아카데미가 갖고 있는 반동적인 메커니즘을 깨닫고 대학을 뛰쳐나온다. 가타리의 대학 자퇴는 고려대학교를 자퇴한 김예슬을 생각하게 만든다. 대학이 가르치는 커리큘럼은 자유로운 정신을 마비시키고 학문적 틀로 고정시킨다. 대학은 취업 준비 공간이자 스펙 쌓기의 공간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가타리의 행동은 시사점을 준다.
대학을 떠난 가타리는 자유로웠다. 특이한 노동자들을 만나러 다니고 심리 치료를 공부하고 다녔다. 가타리에게는 어떤 고정된 틀도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 늘 횡단하며 움직이는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별난 사람들을 좋아했다. 투쟁의 현장에서 좌익 공산주의 계열의 정체 모를 특이한 운동을 하는 노동자인 이스파노와 어울려서 활동했다. 이들과 함께 68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22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그는 심리 치료사로서 프랑스 최초의 사설 클리닉인 보르드 병원을 장 우리와 함께 이끌며 정신 의학의 대안을 탐색했다. 그리고 친구의 소개로 들뢰즈를 만나 <앙띠 오이디푸스>(최명관 옮김, 민음사 펴냄), <천개의 고원>(김재인 옮김, 새물결 펴냄) 등의 실험적인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가타리는 프랑스 사회 생태 운동의 두 가지 축인 '녹색당'과 '생태세대' 두 영역으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타리가 정열을 쏟아붓고 활동했던 녹색당 운동 시절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가타리가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만드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미디어나 신문 매체에 알려지고 이름이 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가타리에게는 더 중요했다. 저변에 흐르는 물길을 만들기 위해서 네트워크 활동에 주력했던 가타리의 실천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적색은 녹색과 만나야 한다. 이런 생각은 가타리의 실천에서 중요한 명제였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적색이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적색은 발전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생명·아이·소수자 등과 만나야 한다. 그랬을 때 성인-백인-자국민-인간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적색의 진보의 내용이 자본주의적 진보로부터 벗어나 색다른 대안을 제시하려면 녹색과의 만남은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 진영에서도 녹색과의 만남을 중시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고 들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지만 그것은 적색과 녹색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인 제국은 외부가 없다고 네그리가 지적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내부에 외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생명·광인과 같은 소수자들은 자본주의가 식민화하고자 하지만 자본주의의 외부이다. 그것이 녹색의 대안을 의미한다. 적색과 녹색과의 만남은 사회 발전의 움직임과 또 다른 움직임을 유통시킨다. 그것은 소수자 되기라는 색다른 부드러움이다. 또한 그것은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다. 반자본주의 투쟁과 비자본주의 간의 연대는 대안 사회를 발전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 사회의 내부에 있는 공동체 속에서 찾도록 만든다.
적색이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로부터 결별할 때 녹색과 가까워진다. 현존하는 비자본주의적 공동체 속에서 대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가타리는 네그리와 함께 <자유의 새로운 공간>(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이라는 문건에서 코뮤니즘이 재창안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후 이 기획은 적녹 연정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펠릭스 가타리의 적녹 연정의 시도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실험적인 실천은 <세 가지 생태학>의 내용이 되었다.
생태 위기 시대에 생태적 지혜를 모아야 할 때
가타리의 생태는 자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회, 더 나아가 마음까지 생태의 원리가 적용된다. 따로 떨어진 100그루 나무보다 서로 연결되어 숲 생태계를 구성한 50그루의 나무가 더 외부 조건에 맞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숲 생태계 속에서 벌레, 동물, 버섯 등의 생명들이 생성되며 창발될 수 있다. 마음도 사회도 자연도 생태를 이룬다는 생각은 어렵게 느껴지는 개념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생각해 보면 금방 그림의 구도를 그릴 수 있다. 생태계는 마치 네트워크처럼 직조되고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나 주위에서 끊임없이 특이한 것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관계망이다. 나무와 태양, 바람과 물, 나비와 꽃, 동물과 인간과 같이 연결망은 보이지 않는다. 숲에 조용히 누워있으면 미세한 변화마저도 마음을 자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숲은 조용하지만 보이지 않는 강렬한 흐름이 지나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숲은 생명을 창발한다. 이러한 '생태적 지혜'의 원리를 가타리는 '주체성 생산'이라는 개념으로 언급한다.
사회적 관계망에서는 욕망과 물질, 에너지가 순환된다. 부엌조차도 오페라의 공간이다. 물의 흐름, 불의 흐름, 음식물의 흐름, 쓰레기의 흐름이 지나가는 곳이다. 그 흐름이 자본주의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은 특이한 움직임이 만들어질 때이다. 특이한 움직임은 관계망에 색다른 에너지와 힘을 전달한다. 그러면서 이전 관계망과 완전히 다른 관계망으로 만들어버린다. 네트워크에서 별난 사람들이 만나면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그것에 전염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생명 현상 전부는 특이한 것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특이함이 공동체와 네트워크에서 나타나는 순간은 생명의 들꽃이 작렬하며 발화하는 순간처럼 혁명의 순간이다. 네트워크와 공동체의 연결망은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다. 그래서 분자 혁명과 같이 색다른 주체성의 움직임이 앞으로 공동체 전부의 행로를 결정한다. 아주 미세한 영역에서의 변화는 전체 네트워크와 공동체에서 전대미문의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
그러한 섬광과 같은 변화를 위해서 생태적 지혜를 모으자는 것이 바로 <세 가지 생태학>이 말하는 바이다. <세 가지 생태학>은 생태 위기의 시대에 생태적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책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음미할 수 있는 뜨거운 녹차처럼 울림과 감동이 긴 책이다. 울림이 떨림이 되기를.
* 참고
'마리선녀 이야기 > 마리선녀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펠릭스 가타리의 이론과 의미 /윤수종(교수신문20031113) (0) | 2013.01.15 |
---|---|
[책]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한상원(프레시안20101224) (0) | 2013.01.15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가능성과 그 전망 /이채언 (0) | 2013.01.02 |
[책] 장 미셸 지앙의 <문화는 정치다> /홍성민(프레시안20110617) (0) | 2012.11.27 |
[인터뷰] 부르디외 (0) | 2012.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