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프레시안> 2013-01-18 오후 6:50:0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16154958§ion=02

 

자본주의보다 '고객님' 권한 커지는 계획 경제, 진짜?

[장석준의 '적록 서재']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이 과연 하루하루의 삶을 원기 있게, 그리고 짜임새 있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무위도식하기 십상이리라. 집단 역시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애초에 뭔가 현재 존재하는 것들을 바꾸는 것을 취지로 삼아 모인 집단이라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운동에는 궁극 목표가 중요하다. 궁극 목표가 없는 사회 운동은 혼이 빠진 복제 생명체와 같다. 물론 단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지금 무엇을 가장 주되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확신이 서려면, 궁극 목표에 대한 이상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최종 목적지를 모르고서 중간 경유지들을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우리 운동에 가장 부족했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이유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핑계거리 삼아서 궁극 목표에 대한 고민 없이 다음 번 임금 단체 협상, 다음 번 선거 준비로 운동을 끌어왔다. 대안 사회에 대한 고민 자체가 현학적인 것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는 단지 특정 정파, 간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구 자본주의의 동요가 시작된 지금은 더 이상 이런 나태와 자기만족이 통하지 않는다. 이런 시점에 우리에게 풍부한 영감과 토론거리를 던져주는 책으로는 우선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김익희 옮김, 북로드 펴냄, 2003년)이 떠오른다. '파레콘'이라는 상당히 낯선 이름을 달고 나왔지만, 부제를 보면 이 책의 지향이 무엇인지, 야망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자본주의 이후, 인류의 삶'.

참여 계획 경제 : 파레콘

▲ <파레콘 : 자본주의 이후, 인류의 삶>(마이클 앨버트 지음, 김익희 옮김, 북로드 펴냄). ⓒ북로드
btn
저자는 미국의 사회 운동가이자 경제 이론가인 마이클 앨버트다. 놈 촘스키의 막역한 동료이며 그와 함께 Znet(www.zmag.org)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 난 좌파 웹사이트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마이클 앨버트는 그의 또 다른 동료 로빈 하넬과 함께 10여 년 전부터 '참여 경제(Participatory Economics)'라는 탈자본주의 대안을 주장해왔다. '파레콘(Parecon)'은 저자들 자신이 참여 경제의 영어 원명을 줄여 만든 약칭이다. 보통 특정 사상의 창안자 자신이 자기 주장의 약칭까지 만들어 놓고 홍보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 고도 미디어의 시대에 무릇 자신의 신념을 전도하려면 이 정도 태세는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참여 경제론의 전모를 소상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 핵심만을 요약하자면 이는 한 마디로 새로운 계획 경제다. 그럼에도 저자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저자가 촘스키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 성향인 탓에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에 별로 애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사회주의'는 주로 소련식 중앙 집권적 계획 경제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의 시장 사회주의를 가리키는 말로만 쓰인다. 그러나 탈자본주의 대안을 흔히 '사회주의'로 통칭하는 역사적, 상식적 용어법에 따른다면, 앨버트의 모델 역시 사회주의 대안의 한 종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참여 경제는 계획 경제다. 생산 단위와 소비 단위가 생산 계획과 소비 계획을 제출하면 계획 기구가 수차례 이를 서로 조정하여 경제 계획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계획 기구는 계획서상의 가격 지표, 생산 단위의 노동 조건 그리고 각 경제 주체들이 제공하는 질적 정보들을 적극 활용한다. 고도로 발전된 정보통신기술은 이러한 복잡한 정보 수집과 조정 과정을 충분히 가능케 만든다.

이런 점에서 참여 경제 모델은 계획을 중심으로 시장을 결합하려 한 오스카 랑게(헝가리의 사회주의 경제학자)의 고전적 시장 사회주의와 유사하다. 랑게의 시장 사회주의에서 시장은 단순히 계획 수립자에게 적절한 가격 지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1차 수립된 계획의 가격 지표들이 시장의 검증을 통해 수정되고 나면 계획 수립자는 이에 바탕을 두고 수정된 가격을 공표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는 참여 경제의 경우 '가격'은 존재하되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은 없다. 다만 생산 단위와 소비 단위가 제출하는 계획서들과 이 계획서들이 짜이고 서로 조정되는 과정에서 계속되는 토론과 결정, 합의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회가 생산자 평의회와 소비자 평의회로 조직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 관료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식 소유자와 전문 경영인이 전횡하는 기업 사회도 없다. 모든 생산 단위는 생산자 평의회 형태로 존재하고, 모든 주민은 소비자 평의회의 성원이 된다. 참여 경제에서는 각각의 평의회 내부에서 정보가 소통되고 결정이 이뤄지는 과정이 시장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평의회, 특히 생산자 평의회 내에서 생산자들 사이의 평등한 의견 교류와 의사 결정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참여 경제의 또 다른 특징이다. 앨버트는 소위 '균형적 직군(Balanced Job Complex)'이라는 것을 제안한다. 말이 어렵고 앨버트의 설명도 불명료한 데가 있긴 하지만, 쉽게 말해 이는 분업이 야기하는 고통과 차별을 최대한 완화하거나 제거하려는 제도다.

참여 경제에서는 일단 직장의 모든 직무를 몇 개의 등급으로 나눈다. 보다 인간적인 만족을 보장하는 상위의 직무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하위의 직무가 있을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분업이 존재하여 특정인은 고급한 직무를 전담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리 생산자 평의회가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곧바로 새로운 위계제가 다시 등장하리라는 것은 직접 살아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균형적' 직군이란, 한 사람이 상위의 직무와 하위의 직무를 동시에 수행하여 다른 사람들이 수행하는 노동의 평균적 수준과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하철 작업장이 있고 내가 거기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라면 일주일에 몇 시간은 경영자로 일하고 또 다른 시간에는 지하철 역사의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이야기다. 또 기관사이면서 몇 시간은 인사 관리자로 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한 직장을 넘어 균형적 직군 개념이 확장될 수도 있다. 새벽에 아침운동을 하다가 쓰레기 수거 작업을 벌이는 생산자 평의회 의장과 마주치는 것은 참여 경제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혹자는 이쯤 되면 사회주의라기보다도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한 코뮌주의(communism)에 더 가까운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시장과 국가가 모두 사라진 코뮌주의 사회.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참여 경제는 마르크스의 코뮌주의 규정과 어긋난다. 마르크스의 코뮌주의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인 데 반해 참여 경제에서는 '노력'에 따라 분배가 이뤄진다.

물론 노동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자본주의 내에도 존재하는 복지 국가와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른 분배가 보장되겠지만, 노동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노력의 정도에 따라 업적을 평가받고 보상을 받는다. 다만 그 노력의 정도란 것은 단순히 생산 목표의 완수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각 평의회는 개인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노력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 평의회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계획 경제론 : 팻 데바인의 참여 계획

앨버트의 참여 경제는 확실히 매력적인 대안 사회다. 다른 것보다도 균형적 직군 개념이 가장 독특하다. 계획과 시장에 대한 논의야 다른 논자들도 많이 이야기한 것이지만, 분업을 폐지할 수단으로 이런 적극적 대안을 내놓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전체로서 참여 경제 모델은 재론의 여지가 많다. 우선 가장 큰 약점은 그것과 현존 자본주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다. 이는 이상의 고결함을 말해주는 미덕일 수도 있지만, 실천성을 약화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소위 '공상적'이라는 흔해빠진 비판은 논외로 한다 할지라도, 시장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연결시키는 고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고리를 찾을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어떤 실천을 벌여야 하는지, 혹은 좌파가 지방자치단체나 중앙 정부의 권력을 획득했을 때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특히 고민해야 할 것은 시장의 활용 문제다. 참여 경제는 그 주된 성격이 계획 경제이면서 동시에 거의 '완전한' 계획 경제다. 모든 상품의 수요와 공급이 생산자 평의회와 소비자 평의회, 계획촉진위원회 사이의 정보 교환과 조정에 의하여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과연 다양한 소비재의 경우에까지 개별 소비자의 구매 행위가 사전 계획되는 것이 가능할까? 시장 교환이 아니라 1년 단위의 생산 계획서들과 소비 계획서들 사이의 조정으로 가격 지표가 형성될 수 있을까?

앨버트는 현금 카드 구매를 통해서 개인의 소비 이력(履歷)이 데이터화된다면 이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품 진열대 앞에 선 인간의 변덕이 그 정도로 무시되어도 좋은 걸까? 소비의 천국 미국에서 이런 주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물론 백화점과 쇼핑몰의 사이비 쾌락에 익숙지 않은 인간을 전제로 한다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아쉽게도 그런 쾌락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인간들이다.

만약 미래의 어느 순간에 커다란 환경적·경제적·사회적 재앙이 닥쳐서 일대 각성이 일어난다면(나는 이것이 결코 더 이상 과학 소설 작가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의 생존 기간 안에도 참여 경제가 전제하는 소비 행위로의 대변화를 목격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상당한 세월의 이행 기간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중증의 소비 중독증이 완치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앨버트의 참여 경제론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방식의 계획 경제를 주장하지만 중요한 대목에서 앨버트와 견해를 달리 하는 영국의 사회주의 경제학자 팻 데바인의 참여 계획(Participatory Planning) 구상에 더 주목한다.

최근 미국의 좌파 학술 잡지 <과학과 사회(Science & Society)>(Vol. 76, Issue. 2)는 '사회주의의 설계(Designing Socialism)'라는 제목의 전권 특집을 냈다. 여기에 앨버트의 '파레콘'과 함께 실린 중요한 다른 구상들 중 하나가 데바인의 '참여 계획'론이다.

안타깝게도 데바인이 자신의 구상을 정리한 주저 <민주주의와 경제 계획 : 자치 사회의 정치경제학(Democracy and Economic Planning: The Political Economy of a Self-governing Society)>(Westview Press 펴냄, 1988)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다만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책이나 리처드 스위프트의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서복경 옮김, 이후 펴냄, 2007년)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대안 경제 체제는 행위 양식의 진화를 요구한다

데바인의 참여 계획 모델에는 시장이 존재한다. 최종 소비재의 거래는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이뤄진다. 데바인은 이를 '시장 교환'이라 부른다. 계획 경제라 하더라도 시장 교환은 존재해야 한다. 이는 다수의 서로 경쟁하는 기업들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장 교환과 구분되는 '시장 지배(혹은 시장 강제)'는 인정되지 않는다. 시장 지배란, 최종 소비재가 생산되기까지 과정에서 벌어지는 교환과 기존의 생산 활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투자 등속까지 시장에 의해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즉 참여 계획에서 이 영역은 계획의 몫이다. 다만 그 계획은 소련식 중앙 집권적 계획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연관 업체, 지역·국가·세계 차원의 계획 기구 등 다양한 주체들의 참여, 협상, 조정을 통해 이뤄진다. 그래서 '참여' 계획이다.

참여 계획에서 주된 소유 형태는 사회적 소유다. 여기서 사회적 소유는 '해당 재산의 사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의한 소유'로 규정된다. 비록 서로 경쟁하는 기업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 기업의 소유권은 자본주의와 달리 노동자, 지역 주민, 연관 업체, 공공 금융 기관, 지방자치단체, 국가 등의 공동 소유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계획 과정에 참여하고 협상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 계획의 대강을 수립하는 것은 각급 계획위원회의 몫이다. 중앙 계획위원회는 일국 차원의 자원 배분의 총계획을 짠다. 여기에는 주요 신규 투자의 결정이 포함된다.

가격 지표가 사용되지만, 이것은 더 이상 시장 가격이 아니다. 중앙 계획위원회가 비용에 기반을 두고 1차재의 가격을 결정하면 여기에 중간재들의 가격을 더한 게 최종재의 가격이 된다. 중앙 계획위원회의 계획 수립은 권역별·지역별 계획위원회의 참여와 각급 계획위원회들 사이의 조정을 통해 보다 세밀하게 보완된다.

하지만 이 모델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협상 조정 기구'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참여 계획 모델에서는 시장 교환이 존재한다. 소비재 시장이 작동하며 소비자의 선택권이 존재한다. 생산 단위 간의 경쟁도 존재한다.

따라서 소비재 시장의 수요 변화나 생산 단위 사이의 효율성 차이에 따른 생산 조정이 필요하다. 생산 단위들의 대표자와 각급 계획위원회의 대표자, 지역 이해 당사자 및 노동자·소비자의 대표자 등이 협상 조정 기구를 구성해서 서로 간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바로 이 조정 기능을 수행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시장 지배로 해결되던 것이 이제는 협상 조정 기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또 협상 조정 기구는 명령형 계획 경제에서 불가능하던, 경제 활동의 역동적 조절을 가능하게 만든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중앙 관료들의 계획 목표 설정이 대중의 실제 필요들(needs)을 반영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공급 측면의 독재였다.

그러나 참여형 계획 경제는 그렇지 않다. 시장 경제만큼이나 역동적으로 수요에 따른 조정이 이뤄진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비해 소비자의 권한이 확대된다. 소비재 시장에서 선택권을 행사해 양적 정보를 제공하는 외에도 각종 경제 결정 단위의 참여를 통해 질적 정보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바인의 참여 계획 모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 정치학이다. 대안적 경제 체제는 그에 걸 맞는 새로운 행위 양식의 확산과 정착, 즉 그 진화를 요구한다.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사회적 능력들이 형성돼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대안 체제 모델은 대안적인 행위 양식이 민중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만들 계기를 모델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명령형 계획 경제는 이것을 결여하고 있었다.

반면 참여 계획 모델에서는 민중들이 협상 조정을 비롯한 분권적인 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행위 양식을 발전시킨다. 제도의 이행과 주체의 변화, 사회관계의 변화와 사회적 능력들의 형성이 함께 이뤄지는 것이다. 많은 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데바인은 "사회적 위기조차 학습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시장 중심의 행위 양식은 결국 새로운 민주주의의 행위 양식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데바인의 참여 계획 모델은 전반적으로 앨버트, 하넬의 참여 경제 모델보다 이행에 대한 고민을 더 풍부하게 담고 있다. 데바인이 강조하는 주요 생산재와 투자 활동에 대한 계획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속에서 지금도 충분히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등장한 이해 당사자(stakeholder) 개념을 참여 계획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해 당사자 경제'론에 따르면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연관 업체, 금융 기관 등 그 기업에 이해를 갖고 있는 모든 경제 주체가 소유와 경영의 권리를 공유해야 한다.

이는 데바인류의 사회적 소유 개념으로 나아가는 관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지금 당장 참여 계획을 실현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참여 계획으로 나아가는 이행의 실천은 곧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앨버트도 참여 경제의 소중한 싹으로 언급하고 있는 참여 예산제 같은 시도가 바로 이러한 이행의 실천일 수 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지방자치단체의 공공 투자 예산만을 참여·협상·조정을 통해 결정하는 수준이지만, 이것이 전체 경제 활동으로 확산된다면 이는 곧 참여 계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행의 현실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하지만 이러한 세부적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앨버트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던 바로 그 때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참여 경제론은 대안 사회에 대한 고민이 다시 현안으로 등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바로 지금부터 이행의 현실성에 바탕을 두고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현실적이라는 바탕 위에서 현실을 바라볼 때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나날의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에서 새 사회의 단초를 발견할 수도 있고, 실천거리를 건져낼 수도 있다.

이럴 때에만 우리의 실천은 더 이상 무슨 '반대' 투쟁이 아닐 수 있다.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야심찬 것인지를 깨닫는 자만이 그에 부합하는 미래를 열 수 있다. 그러니, 자 이제, 대안 사회에 대한 상상을, 그 열띤 토론과 설계를 시작하자!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