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2013 01/22ㅣ주간경향 10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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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차베스의 경제개혁’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수엘라는 흔히 ‘반미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대안체제’의 한 사례로 거론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차베스 대통령의 건강문제로 대통령 취임식이 연기되면서 베네수엘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연구자 임승수씨가 차베스식 개혁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봤다.
필자는 2006년 말 베네수엘라를 방문했다. 베네수엘라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대한민국의 절반밖에 안 되지만, 무료로 MRI 촬영, 암치료 서비스를 국민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이는 외국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베네수엘라는 공교육 입시를 철폐했을 뿐 아니라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생계비가 걱정인 이들에게는 국가가 장학금을 지급한다.
지난해 10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한 뒤 지지자들의 환호에 팔을 뻗어 답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1999년 집권 후 전면적 사회개혁
직업군인 출신인 차베스가 1999년 집권한 이후 베네수엘라의 경제상황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차베스 집권 이전인 1998년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50.4%에 달했다. 이 수치는 2009년 28.5%로 떨어졌다. 차베스 집권 이전 1000명당 25명 수준이었던 영아사망률도 10여년이 지난 현재 절반 정도로 낮아졌으며, 같은 기간 인구 1만명당 의사 수는 3배 이상 늘어났다. 양적인 성장세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베네수엘라의 1인당 연간 가계소비지출액은 3679달러(약 390만원)로 13년 전보다 1.5배가량 많아졌다. 또한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베네수엘라는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도 예상보다 높은 5.5%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베네수엘라식 ‘경제개혁’은 국민에게 경제권력뿐만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돌려준 상황에서 꽃필 수 있었다. 우고 차베스는 1999년 2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여러 조치들을 단행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대선 공약이었던 제헌의회 소집이다. 헌법을 개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존의 헌법을 폐기하고 새롭게 만든다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국민투표를 통해 제헌의회 소집을 승인받은 차베스는 131명을 뽑는 제헌의회 선출 선거에서 승리했고, 제헌의회는 여러 진보적 의제가 담긴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새 헌법 발효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한 체계를 세우는 의미를 가졌다. 베네수엘라 제헌의회는 이러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헌법 자체를 새로 제정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낡은 헌법과 법률들은 한꺼번에 폐기됐다. 제헌의회 의원의 대부분이 진보적 인사로 채워지면서, 현재의 베네수엘라를 만들어낸 헌법 조항들이 탄생했고, 이 헌법의 기초 위에서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률들이 제정됐다.
둘째, 새 헌법은 근본적인 권력교체가 이뤄질 수 있게 했다. 차베스 진영은 제헌의회 소집을 통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기득권을 단번에 역전시켰다. 구헌법이 폐기되고 신헌법이 발효되는 순간 구헌법을 근거로 당선된 차베스는 대통령에서 민간인으로 신분이 변경됐다. 이는 국회의원(입법부)과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국가기구가 구헌법의 폐기와 함께 해체된 것이다. 그리고 새 헌법에 근거해서 새로운 국가기구가 건설될 수 있었다. 헌법이 발효된 이후인 2000년에 한꺼번에 치러진 대통령, 국회의원, 주지사 선거에서 차베스 진영은 좋은 성과를 거뒀다.
차베스는 대선 승리의 상황을 이용해 전면적 사회개혁을 수행하는 혁명적 공간을 만들었다. 차베스는 정치권력이 바뀐 이후 소수 자본가들의 손에 있었던 경제권력이 국민들에게 넘어가는 조치들을 이어갔다.
석유산업 국유화 복지정책 확대
지난 1월 9일 베네수엘라의 야당 지도자 엔리케 카프릴레스는 수도 카라카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이 차베스 대통령의 취임식 연기를 합헌이라고 인정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경제권력은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핵심이다. 베네수엘라 부의 원천은 석유다. 차베스 정부 이전의 베네수엘라 석유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다국적 기업의 석유자본과 그들과 손잡은 베네수엘라 자본가들의 통제에 놓여 있었다. 세계 5~6위의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차베스 정권 출범 직전 베네수엘라는 유례없는 빈부격차와 빈곤층의 증가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차베스는 새 헌법을 통해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해 소수 자본가들에게 집중된 경제권력을 다수의 국민들에게 옮기는 시도를 했다. 석유산업 국유화를 통해 확보된 재원은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다수 국민을 위한 과감한 복지정책의 밑바탕이 됐다.
차베스는 주요 산업분야를 국유화했을 뿐만 아니라 협동조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이 되는 노동자 협동조합 설립을 적극 장려했다. 협동조합 기업은 투표로 회사 대표를 선출하며, 회사의 중요한 결정은 조합원 총회의 승인을 거쳤다. 차베스 집권 이전인 1998년만 해도 베네수엘라의 협동조합은 1000개가 채 못됐다. 하지만 2009년 초, 26만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공식적으로 등록했다. 협동조합 기업이 활성화되면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일터의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있다.
차베스의 개혁이 순탄한 길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다. 2002년, 석유산업 국유화에 반발한 자본가들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차베스는 살해될 뻔한 위기에 놓였다. 2004년 8월에는 차베스 반대파의 주도로 대통령 소환투표가 진행된 우여곡절도 겪었다. 하지만 2002년 쿠데타는 거대한 민중봉기로 인해 ‘3일 천하’로 끝났고, 2004년 소환투표 찬성률은 41%에 그쳤다.
차베스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차베스식 경제는 9년 만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차베스의 네 번째 대통령 취임식이 연기됐다는 소식과 함께 베네수엘라가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외신은 차베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 베네수엘라가 급격한 위기에 빠져들 수 있다고 진단한다. 19%에 달하는 급격한 물가상승률, 매년 늘어나는 국가부채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고, 차베스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식 경제는 되돌려지기 어려울 만큼 한 걸음 훌쩍 나아가 있다고 평가한다.
글|임승수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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