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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책]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 /한수영

by 마리산인1324 2013. 2. 1.

<마르크스21> 8호(2010년 겨울)

http://marx21.or.kr/article/pageView.marx?articleNo=113&pageNo=1

 

 

서평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 - 신화에서 걸어나온 인간 게바라

 

- 한수영 -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 존 리 앤더슨, 플래닛, 2010 

 

 

존 리 앤더슨이 게바라 평전을 쓰게 된 동기는 단순하다. 십 년 넘게 라틴아메리카를 취재했지만 무수히 언급되는 이 인물의 삶이 의외로 의문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방랑하던 순진한 의사가 과테말라로 간 뒤에는 쿠바 독재 정부를 함락하고 콩고를 거쳐 결국에는 볼리비아에서 전사한다는 이 신화 같은 이야기를 충실히 풀어 쓴 책은 없었다. 기존의 평가들은 도식적이고 설명에 공백이 많았고 내용도 의심스러웠다. 앤더슨이 보기에 게바라를 다룬 설명들은 대부분 편의적으로 가공돼 있었다. 게바라는 쿠바 관변 역사 서술에서는 성인으로 묘사되지만, 서구 주류 사회에서는 악마 취급을 받았다. 양극단을 오가는 평가들은 사실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 물론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에게 게바라는 악마라기보다는 성인이었다. 어쨌든 게바라는 신화 속의 인물이었다.

 

앤더슨의 목표는 게바라를 현실 세계의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앤더슨은 목표를 잘 잡았다. 게바라에 관한 실증적 연구는 현대사의 공백이었다. 결과적으로 앤더슨은 방대한 사료를 충실히 담은 1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내놓으면서 탁월하게 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는 이 책을 “신화에서 인간을 분리해낸 거장다운 작업”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그저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내기는 힘들다. 앤더슨은 여러 사실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지만 사실들 사이의 인과관계나 사실들이 내포한 역사적 의미 등을 명료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를 배움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이 책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분주히 사고해야 한다. 이러저러한 물음들을 던지면서 말이다.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게바라가 어릴 때부터 정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혁명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유랑을 즐기고 얽매이기를 끔찍이 싫어하던 이 청년은 불과 5년 뒤에 철의 규율을 중시하는 게릴라 혁명가가 된다. 앤더슨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보여 준다. 게바라를 역사 속 인물로 다루는 방식으로 말이다. 게바라에게 덧씌워진 신화적인 이미지 탓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종종 그를 역사적·사회적 상황과 분리해 이해했다. 그래서 게바라는 우여곡절을 겪지 않고 흔들림 없이 본래 주어진 길을 걸어간 성인(때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되기도 한다)으로 각인됐다. 반대로 앤더슨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들이(심지어 스페인 내전까지) 게바라의 중간계급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하고, 게바라의 개성적 면모가 그것을 어떻게 흡수했는지도 보여 준다.

전환점

앤더슨은 게바라 인생의 정치적 전환점을 게바라가 과테말라에 가기 전 시기에서 찾는다. 앤더슨은 그 근거를 게바라가 여행 일기에 남긴 “여백의 메모”에서 찾는다.(238쪽. 이하 쪽수만 표기) 이 메모는 익명의 나이든 혁명가와 나눈 대화를 묘사하고 있는데, 앤더슨은 게바라가 자신의 행선지를 정치적 격변이 진행되던 과테말라로 바꾼 이유를 이 메모가 설명해 준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앤더슨이 찾아낸 다른 자료들과 모순된다. 사실, 게바라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딜레마”에 빠져 있었고 과테말라 행은 친구의 “무심한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223) 게다가 여행의 동반자였던 그라나도의 말을 옮기면 그 “여백의 메모”는 추후에 게바라가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1117) 그가 여행 내내 마주친 빈곤한 광경들이 분노를 자극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게바라 인생의 전환점은 과테말라에 도착한 후에야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게바라는 과테말라 소요 사태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역사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간 느낌을 받았고 난생 처음으로 저항세력의 일부가 됐다.

 

물론 앤더슨도 게바라의 과테말라 경험을 중요하게 본다. 당시 과테말라의 대중운동이 강력한 바람에 개혁주의자 대통령 아르벤스는 미국 자본인 유나이티드프루트의 농지를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미국 지배계급의 분노를 자아냈고 마침내 CIA가 개입했다. 폭격이 퍼부어지고 난 며칠 뒤 게바라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최근 사태는 역사의 한 장이다. 내 노트에 처음으로 중요한 일이 기록되는 것 같다. 며칠 전 온두라스에서 온 비행기들이 과테말라의 국경을 지나 과테말라시티 상공을 통과하며 백주에 군사적 목표물은 물론 사람들에게도 기관총을 쏘아댔다 … 도시를 순찰하는 공산주의민주동맹청년단에 가입 신청을 했다.”(275) 앤더슨은 이 폭격과 함께 게바라의 미래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쿠바의 공식 역사 서술은 게바라가 과테말라에서 이미 투쟁에 개입했다고 과장하지만, 앤더슨이 밝힌 사실을 보면 게바라는 겨우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과테말라와 멕시코에서 맺은 쿠바 저항세력들과의 인연은 게바라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가담하는 계기가 됐다. 앤더슨은 게바라가 지난 시기의 정체성을 완전히 벗어던지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그란마 호가 쿠바 해안에 상륙한 지 며칠 만에 게바라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게바라에게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정부군의 기습으로 혼란스럽게 도주하는 상황에서 구급상자와 탄약통 중 단 한 가지만 선택해야 했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363) 나환자 촌에서 따뜻한 감성을 드러내던 의사라는 정체성은 게릴라 전사에 밀려났다. 특히 배신자를 총살한 첫 경험에 대한 게바라 자신의 묘사는 섬뜩하기까지 한데, 그가 종래의 자유분방함을 떨쳐버리고 게릴라의 삶에 완전히 적응했음을 드러낸다.

 

   그 상황은 대원들은 물론 에우티미오에게도 불편했다. 그래서 내가 32구경 권총으로 그의 머리 오른쪽을 한 방을 쏘아 문제를 종결지었다. 오른쪽 머리로 총알이

   빠져나오면서 구멍이 생겼다. 에우티미오는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죽었다. 그의 소지품을 회수하려 했을 때 나는 그의 허리띠에 묶여 있던 시계를 떼어낼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차분한 목소리로 ‘야, 확 당겨서 끊어버려, 무슨 상관이야 …’ 하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했고, 그의

   소지품은 내 것이 되었다. 우리는 젖은 채 잠을 설쳤고, 나는 천식기가 있었다.(400)

 

자기 문제에 푹 빠져 사소한 내면의 이야기를 편지로 교환하기를 즐기던 소년은 엄마의 살가운 편지조차 시큰둥해 하는 인물로 변해 있었다.(528)

게릴라

당시 게바라가 가담한 게릴라 그룹은 ‘7·26운동’으로[1] 불리는 단체의 양대 그룹 중 하나였다. 이 그룹은 피델 카스트로가 지휘했다. 다른 하나는 프랑크 파이스라는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이 이끄는 도시 저항세력이었다. 앤더슨은 이 양대 세력이 잦은 세력 다툼을 벌였고 특정 시점까지는 두 세력의 영향력이 비슷했음을 보여 준다.(452-454) 이는 쿠바의 운동이 게릴라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대중 파업을 동반한 도시의 저항이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과 암살로 위축된 상황에서 지도자인 파이스마저 살해되자 양대 세력간 균형은 기울었다. 카스트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척하며 자신의 측근들을 파이스의 빈자리로 밀어넣는 데 성공했다. 그 뒤 도시 운동은 산 속의 게릴라 투쟁을 지원하는 구실로 제한됐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게바라는 《게릴라 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는 게바라의 혁명적 주의주의主意主義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혁명을 시작하기 전에 적절한 조건을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며 반란 게릴라 그룹foco이 그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다.”(725) 이런 생각은 혁명가들에게는 규율과 성품을 강조하지만, 대중은 수동적 구실에 그치게 한다. 혁명 뒤 게바라는 이런 생각을 쿠바 사회 운영에 적용한다. 정말 선량한 생각으로 그리 했지만, 역설이게도 게바라가 주창한 “새로운 인간”이나 “자발적 노동” 같은 개념은 쿠바 민중에게 대가 없는 노동을 강요했다. 1990년 전후로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고 나서 불어닥친 이데올로기 위기를 극복하고자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부활시켰고 쿠바 공산당 일당 독재에 헌신할 것을 강요하는 데 게바라의 혁명적 주의주의를 이용했다.

 

게바라 자신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긴 듯하고 앤더슨도 게바라를 그리 규정하지만, 게바라의 주의주의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게바라식 주의주의는 관념이 사회적 토대보다 우선한다고 보는 관념론의 일종인데, 마르크스는 당대의 관념론자들과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앤더슨이 제시하는 자료들을 보면 게바라는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을 꽤 열심히 탐독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선배’ 게릴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를 자기 식대로 원용했듯이, 그 ‘선배’를 존경한 게바라도 마르크스주의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했다. 게바라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사상을 평생 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개인 생활에서도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그의 실체와 행동을 구별한다. 하물며 역사적 투쟁에서는 더욱더 각 정당의 말과 생각을 그들의 진정한 조직 및 이해관계와 구별해야 하고, 자신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그들의 실체를 구별해야 한다.”[2]

 

그렇다면 게바라의 주의주의는 어디서 비롯했는가? 앤더슨은 이를 게바라가 정글에서 단련되던 과정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진실의 한 측면을 보여 주긴 하지만 전체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앤더슨은 게바라를 신화에서 떼어내 역사적 현실 속으로 끌고 들어왔으면서도 시시때때로 게바라 개인의 내면에 집착하는 바람에 애초의 목적을 자주 흐린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게바라의 삶이 도달한 비극을 이해하는 데 불충분하다. 게바라의 내면으로 흐르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 봐야 한다. 주의주의는 게바라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중국의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같은 좌파 민족주의자들부터 쑨원과 간디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주의주의를 강조했다. 북한의 주체주의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주의주의는 노동계급 주도로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잇달아 성취하는 혁명(연속혁명)이 일어나지 않거나 빗나간 제3세계 나라에서 민족주의 운동과 신생 민족국가를 이끈 세력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이다.

 

존 몰리뉴는 제3세계 저항 운동에서 나타나는 이런 류의 관념론의 사회적 토대를 중간계급 지식인으로 본다. 노동계급 혁명을 거부하는 지식인들은 주로 농민의 지지를 지렛대 삼아 국가 권력 장악을 꾀한다. 반대로 농민들은 국가 운영에는 관심이 없고, 주로 토지 소유를 원한다. 목표가 상이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농민의 지지를 얻으려면 “실제로는 끊임없이 다른 식으로 행동하고 싶었던 유혹”을 의지와 도덕적 훈령으로 어느 정도 통제해야 했다. 게바라가 강조한 “자발적 노동”이나 육체-정신노동을 기계적이고 우스꽝스럽게 결합하려 한 마오시대 공산당 관료의 “하방” 개념 등은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농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고자 자신들도 ‘천한’ 사회구성원인 것처럼 위장하는 데서 사용한 것이었다. 이런 억지스러운 동의가 통하지 않을 때는 철퇴가 필요하다.

 

이런 실천은 지식인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서 비롯한다. “민족해방을 달성하고 나면, (국제 혁명 속에서 그 한계가 극복되지 않는 한) 민족 해방 운동가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치열한 각축장 안에서 그것을 공고히 하고 유지해야 한다. … 즉, 노동자·농민을 착취해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루려고 기를 쓰게 되고, 그것은 곧 게릴라 엘리트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굳혀야 함을 뜻한다.”[3] 이들이 건설한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민족 국가가 생산력을 장악한 체제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형태가 어떻든 근대 국가는 본질이 자본주의 장치, 즉 자본가들의 국가로, 일국 총자본의 관념적 의인화다. 근대 국가가 생산력 장악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실제로 그것은 그만큼 더 국가자본가가 되며, 그만큼 더 많은 주민들을 착취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노동자 — 프롤레타리아 — 인 채로 남아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냥 내버려둘 수 없을 만큼 악화된다.[4]

국제주의

게바라의 주의주의는 다른 제3세계 민족해방 지도자들의 주의주의와 구별되는 독특함도 있었다. 그의 주의주의는 지배계급의 폭정뿐 아니라 저항 세력을 자처하는 이들의 안일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했다. 게바라가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부,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정당, 쿠바 공산당에게 느낀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게바라는 혁명이 성공한 뒤 단순한 주의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쿠바라는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는 설탕 수출, 그것도 대미 수출로 연명해야 하는 혁명 쿠바의 비참한 현실에 직면했다. 게바라는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산시켜 이를 극복하려 했다. 그것은 게바라식 국제주의의 발현이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제3세계 저항 지도자들과 게바라를 구별해 주는 지표이자 오늘날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이 된 이유다.

 

물론 게바라도 쿠바 국가의 경계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쿠바 국가의 절박한 현실과 공식 국가 지도자라는 처지가 그를 압박했다. 앤더슨은 이 책에서 당시 백악관 비서관이던 리처드 굿윈이 케네디에게 제출한 한 보고서를 소개하는데 무척 흥미롭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쿠바와 미국의 세력관계가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게바라는 굿윈에게 협상을 제안하는데 미국의 경제 봉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게바라는 미국이 “잠정 협정”에 동의해주면 그 대가로 “동구와 어떤 정치적 동맹도” 맺지 않고, 몰수된 미국 회사를 무역 형태로 보상하고, 관타나모의 미 해군기지를 공격하지 않고, 심지어 “쿠바 혁명세력이 다른 나라에서 벌이는 활동에 대해 논의”할 생각까지 있다고 암시했다. 모든 타협이 정치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때의 타협은 쓸데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굿윈은 게바라의 태도에서 궁지에 몰린 쿠바의 처지를 간파했고, 미국은 더 강력한 봉쇄 정책을 취한다.(790-793) 이 사건은 세계를 핵전쟁 직전까지 몰고 가며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전초전이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케네디와 협상한 뒤, 미국의 공격에서 지켜주겠다며 쿠바에 핵미사일을 제공하기로 한 계획을 백지화했다. 소련이 뱃머리를 돌리는 것을 보고 게바라는 격노했다.

 

게바라도 처음에는 일국적 해결책을 모색하거나 소련에 의지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에서 얻는 쓰라린 교훈, 미사일 위기 때 소련에게 당한 배신 등을 통해 게바라는 일국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서 벗어나 국제 혁명을 꾀하기 시작한다. 게바라는 소련의 경제 운영 방식이 미국식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음에 실망하고, 특히 소련이 국제 혁명을 지원할 생각이 없다는 데 분노하면서, 날이 갈수록 국제 혁명이 필요하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됐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한 뒤 게바라는 한 연설에서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킬 필요성을 간결하고 명료한 구호로 표현했다. “하나, 둘, 셋, 수많은 베트남을.” 이 구호는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미사일 위기 이후부터 쿠바를 떠나기 전까지 게바라가 겪은 심리적 번민을 앤더슨은 뛰어나게 묘사한다. 1965년 3월, 게바라는 모든 관직을 버린 채 세계사에서 종적을 감췄다가 몇 년 뒤 순교자 같은 최후의 사진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의 이야기를 완성해 낸 것은 특별히 앤더슨의 집요한 취재 덕분이다.[5] 그는 심지어 게바라 유해가 매장된 곳을 아는 볼리비아 퇴역 장성을 설득해 그 위치를 실토하게 만들었다.

비극

게바라는 확실히 자신이 겪은 정치적 사건들을 잘못 일반화했다. 게바라는 쿠바에서는 준비된 군사집단의 의지가 혁명이 성공할 조건을 마련했지만 과테말라에서는 그러지 못해 패배했고, 따라서 오로지 중요한 것은 군사적 준비라고 판단했다. 게바라는 그런 결론을 자신의 삶으로 묵묵히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는 콩고에서 패배의 쓴 맛을 봤지만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고자 볼리비아로 향했다. 그는 비극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한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뒤 십여 년 동안 게바라를 동경하며 그의 방식을 좇은 수많은 이들의 실패가 잇따랐다.

 

게바라가 내린 결론과는 달리 쿠바 혁명에서 군사적 행동만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게바라가 이끈 부대가 산타클라라를 함락시킨 것이 쿠바 혁명의 최종 승리에서 핵심 고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정부군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게릴라 부대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미국이 바티스타에게 무기 공급을 중단한 것, 부패하고 무능한 바티스타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분노, 이런 상황들 때문에 정부군 내에서 불만이 생겨나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이 게릴라 부대가 군사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앤더슨은 이 세 가지 조건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않지만 빼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정하다.(547~550) 요컨대 당시 모든 상황이 바티스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고, ‘7·26운동’의 게릴라들은 용케도 그 상황의 선두에 올라탔던 것이다.

 

원칙주의자인 게바라와는 정반대로 카스트로는 상황 변화에 늘 민감했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데 달인이었다(게다가 자신이 대의를 지키고자 사려 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교활하게 포장하는 데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미국의 화를 돋울까 봐 조심스러워했고 ‘7·26운동’이 공산주의적이지 않음을 보여 주려고 항상 애썼다. 앤더슨은 카스트로 전기 작가인 테드 슐츠가 밝힌, 카스트로와 CIA의 거래 사실을 적시한다. 쿠바 공식 혁명사에는 미국과 비밀 접촉했다는 기록이 모두 제외됐지만, 카스트로 측은 적어도 5천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450) 그러나 앤더슨은 이런 사실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6] 아마도 앤더슨은 당시 카스트로의 처지를 이해할 만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위험한 줄타기에서 결국 미끄러졌고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경제 봉쇄 조처의 피해자는 쿠바 민중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갔을 때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앤더슨의 설명은 매우 세부적이지만, 진짜 중요한 정치적 교훈을 놓치고 있다. 게바라가 머무르던 그 해 4월부터 7월까지 광원 노동자들이 “볼리비아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정부의 학살과 이에 맞선 파업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게바라가 이끄는 스무 명도 안 되는 게릴라 그룹이 발표한 글을 보면, 그들이 노동계급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노동계급 일부의 거듭된 전술적 오류에서 비롯한 패배에서 회복되고 있다. 우리는 이 체제를 위에서 아래로 변혁할 심층적인 사회혁명을 위해 이 나라를 참을성 있게 준비시키고 있다.”[7] 게바라는 옆에 오아시스를 놔 두고 우물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게바라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적들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8] 오늘날 그는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상징한다. 사심 없이 대의에 헌신한 그의 삶은 혁명적 이상주의의 원천이다. 그는 말로만 혁명을 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별로 배울 것이 없지만 그가 보여 준 숭고한 정신은 우리를 모두 숙연하게 하고 혁명에 대한 영감을 준다. 앤더슨은 이런 게바라의 정신을 잘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신이 무엇 때문에 좌절됐는지도 알아야 한다.

 

 

참고문헌

 

곤잘레스, 마이크 2005,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 책갈피.
몰리뉴, 존 2005,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책갈피.
Gonzalez, Mike 1997, ‘The lost generation – the life and politics of Che Guevara’, Socialist Review 212(October 1997).

 

[1] 1953년 7월 26일 쿠바 동부 산티아고 시에 있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날을 기념하고자 붙인 이름. 일시적으로 바티스타 군대를 함락시켰으나 그 뒤 반란자 69명이 체포돼 즉결 처형되거나 고문 끝에 죽었다.
[2] 마르크스, 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몰리뉴 2005, p17에서 재인용.
[3] 몰리뉴 2005, p108.
[4] 몰리뉴 2005, p110에서 재인용.
[5] Gonzalez 1997.
[6] 곤잘레스 2005, pp215-216, 후주 49.
[7] 곤잘레스 2005, p205.
[8] 게바라의 유해가 발견된 볼리비아 바예그란데에 있는 한 전화국 벽의 낙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