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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3-03-20 21:49: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202149215&code=990100

 

 

[김종철의 수하한화]차베스와 근원적 민주주의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차베스 대통령 사거 이후 열흘 남짓 시간이 흘렀다. 왜소한 기술관료 정치가 대세인 오늘의 상황에서 이 예외적인 거인 혹은 ‘풍운아’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서 꽤 열심히 세계의 주요 미디어 온라인판을 읽었다. 예상보다 인색하거나 가혹한 평가가 주류였지만, 그럼에도 몇몇 매체는 ‘균형’을 고려해서인지 차베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글도 게재했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는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의 글을 실었고, 영국신문 가디언에는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타릭 알리의 ‘차베스와 나’라는 글이 실렸다.

타릭 알리의 글은 차베스와의 인연과 개인적인 일화가 소개돼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차베스와 쿠바의 카스트로 사이의 관계가 이념적·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얼마나 친밀한 것이었던가를 설명하는 대목 같은 게 특히 그랬다. 즉, 카스트로와 차베스는 밤늦도록 독서에 몰입하는 공통한 습관이 있고, 오랫동안 매일 한 번 이상 통화를 해왔다. 어떤 때는 새벽 3시에 통화하면서 각자 읽고 있는 게 같은 책임을 확인하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면 잠도 자지 않고, 전화로 한 시간 이상이나 그 책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는 것이다

 

차베스가 어렸을 적부터 독서광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설을 시작하면 때로는 9시간 이상, 짧아도 3시간을 원고 없이 동서고금의 사상가, 작가, 혁명가를 쉴 새 없이 인용하며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차베스의 강인한 체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양친 모두 교사였던 가정에서 자라서인지 차베스는 교육과 독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바로 시작한 첫 사업의 하나가 문맹퇴치였다. 그 덕분으로, 유네스코의 자료에 의하면, 현재 베네수엘라는 문맹률 제로 국가이다. 차베스는 글자를 깨친 사람들을 위하여 정부비용으로 스페인어로 쓰인 대표적 소설 <돈키호테>를 100만부 넘게 발간하여 무료로 배포했다. 문맹퇴치의 목적이 절대로 국가 행정의 편의를 위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든 차별 없이 존엄한 생활을 누리고, 문화적인 삶을 향수할 권리가 있다는 게 차베스의 신념이었다.

차베스를 독재자라고 부르며 가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한 가지 엄연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차베스 집권 14년을 통해서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빈민, 원주민,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는 사실이다. 절대빈곤 인구는 거의 사라졌고, 가난한 사람들의 평균소득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게다가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종래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빈민촌 자제들의 대학 진학도 가능해졌다. 통계를 보면, 현재 베네수엘라의 대학 진학률은 80% 가까이 이르고 있다. 차베스 집권 이전에 비해서 갑절이 된 셈이다. 차베스는 국립대학의 분교를 지방 곳곳에 설치하고, 대학등록금과 입시제도를 철폐함으로써, 원한다면 젊은이들 누구든지 고등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통계가 보여주는 물량적 조건의 개선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책의 근저에 있는 확고한 인간적 원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빵만이 아니라는 사상과 신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차베스는 인간다운 존엄성이 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겪어온 수난은 본질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땅에서 소외와 배제를 강요당하며” 인간적인 모욕을 끊임없이 겪어왔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차베스 집권 이전, 수도 카라카스의 주변 언덕배기를 꽉 채우고 있는 수많은 바리오(빈민촌)는 지도상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녹지대’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전체 국민 중 절대다수를 점하는데도 빈민들은 베네수엘라 권력층과 중산층의 눈에는 ‘불가시적’ 존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인 멸시와 모욕 속에서 긴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의 좌절된 심리와 욕구를 차베스는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에서 가장 중시된 것이 공동체 평의회(communal councils)라는 이름의 주민자치시스템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스템은 국가의 관료적 행정체계와는 별도로, 일정한 가구수를 단위로 지역 주민들이 자신이 속한 동네나 마을의 문제를 자유롭게 토의·결정하며, 필요하면 중앙정부에 예산을 요청·집행하는 명실상부한 주민의회로서, 차베스 집권 후반기에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물론 이 풀뿌리 의회의 원초적 형태는 안데스 민족들의 전통사회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근원적 민주주의 전통은 외세와 엘리트에 의한 과두지배 체제 밑에서 오랫동안 숨통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차베스가 원한 것은 이 근원적 민주주의의 전통을 되살려 놓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차베스는 ‘21세기적 사회주의’ 건설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했지만, 그 사회주의란 결국 옛 소련이나 중국의 국가중심 관료제 사회주의가 아닌 민중의 자발적인 자결권이 충분히 보장되는 ‘깊은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공동체 평의회 이외에 다양한 협동조합 조직, 생필품 가격통제, 토지개혁, 식량자급을 위한 농정혁신, 민영화 및 시장개방 억제 등등, 수많은 개혁조치의 근간에 있는 일관된 원칙이었던 것이다. 차베스의 개인적 권력욕만으로는, 국내외 기득권 세력으로부터의 엄청난 저항을 무릅쓰고 단행된 이러한 개혁조치를 설명할 수가 없다. ‘볼리바르 혁명’은 어디까지나 민중사회의 잠복된, 그러나 끓어오르는 인간다운 삶에의 갈구와 거기에 예민하게 감응한 탁월한 정치지도자의 결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풍부한 석유자원 때문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석유가 있다고 해서 모든 정치지도자가 차베스식 개혁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석유 때문에 형성된 기득권 세력과 차베스가 피나는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5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떠난 차베스는 국민을 통치의 객체로 간주한 적이 없었다.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라는 껍데기 민주주의밖에 모르는 자들의 정신적 빈곤과 지적 태만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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