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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권력종교'로부터의 해방 - 퀘이커교

by 마리산인1324 2013. 2. 18.

<daum 아고라> 09.09.05

http://m.agora.media.daum.net/story/show?bbsId=K161&articleId=123815

 

 

'권력종교'로부터의 해방 - '퀘이커(Quaker) 敎'

 

 

“성직자들과 모든 인간들에게 가졌던 나의 희망이 사라졌을 때.... 나는 ”너의 형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음성을 들었고, 내가 그 음성을 들었을 때 나의 가슴이 기쁨에 벅차올랐다.” 1)

                                                         -George Fox-


        에큐메니칼하고 교파주의적인 신학의 그늘 아래에서 기독교인이 된 이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익힌바 신앙 고백에 어긋나는 주장에 대하여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일방적인 진리 주장과 이해에 익숙하여 신앙인 간의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더딘 까닭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자신들의 전통을 절대화하는 오류다. 깊은 신앙체험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 전통에 대한 절대화의 경향이 강하다. 배타적이고 심지어는 동료인간들을 향하여 저주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자기 절대화의 오류가 얼마나 복음에서 먼 것인지 인식하려면 복음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는 절대화의 오류로 인해 스스로를 닫힌 세계관 안에서 가두는 오류다. 이 경우 생명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기보다 반생명적이며 파괴적이고 억압적이다. 이런 가치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을 넘어서 집단을 이루고, 집단의 권위와 위력을 통하여 전승된 종교적 가르침은 인간성의 취약함을 틈타 이 두 가지 오류를 전승시켜오며 복음을 거슬러 인간의 존엄함과 자유를 훼손하기도 했다.

 

        이런 이중의 윤리적 오류를 넘어서려면 지난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 담긴 신앙 고백의 전통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의 정신세계는 그리도 흔히 서로를 배타하고 약자를 괴롭히던 논리, 즉 정통과 이단, 혹은 주류와 비주류의 종교 정치적 갈등의 시대가 어느 정도 지나갔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종교와 정치의 일치를 기하는 종교적 전통을 벗어난 세계에서 종교 권력이 오늘날 보편적인 인권사상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권법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난 것이어야지 인권법보다 저급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을 일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사상의 유산 속에서 형성되었던 다양한 신앙 전통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이런 이해를 통하여 보다 나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전통 가운데 가장 평화스럽고 평등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온 퀘이커 신앙 공동체의 평화 해방신학을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퀘이커 운동의 연원

 

        퀘이커(Quakers)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 앞에서 전율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퀘이커 공동체의 창시자인 폭스(George Fox)는 1650년 재판에 임하는 판사 베넷(Bennet)에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전율하는 태도를 가지기를 권했다. 하지만 판사는 폭스와 그의 동료들을 조롱하면서 퀘이커들이라고 불렀다. 폭스는 그의 신앙의 동지들에게 별명처럼 명칭을 “퀘이커들” 이라는 이름을 받아 들였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처럼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한 열정에 감동하여 전율하는 이들 이었기 때문이다.”2)

 

        퀘이커들은 동료 인간들을 향하여 “벗”(friend)이라 부른다. 그들에게서 신앙 안에서 가지는 교제는 벗으로서의 교제일 뿐이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개입하지 않는다. 나이, 지위, 신분, 권력, 소유 -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서 서로에게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그들은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라고 믿는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이르고 있는 바와 같이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3) 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퀘이커들은 서로에게 벗이다. 이 언표 안에는 모든 주종관계, 상하관계, 억압관계, 그리고 지배관계로부터의 자유와 해체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벗들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든 권력과 폭력, 소유와 탐욕과 사치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다. 평화롭고 평등한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단순함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단순한 삶 그것이 내가 2004년 기독교 평화사상을 연구하기 위하여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수도원에서 그들과 더불어 지낸 9개월 동안 보고 배운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먹는 것이나 입는 것, 치장하는 것이나 가진 것에서 사치함이나 호화스러움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지 폭스(George Fox)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영국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 독립시킨 후 국왕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교회의 틀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영국교회는 감독교회의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국교와 같은 성격을 가짐으로써 영국 교회는 귀족중심의 영국 사회의 틀을 닮아가는 귀족 교회(high church)의 성격을  더욱 가지게 되었다.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확대되었다면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셈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교회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강화되었고, 많은 성직자들이 투옥되었다. 가톨릭교회의 교권이 일단 부정된 영국 사회 속에서 교회 안에 형성되고 있는 불평등한 신분적 질서에 이상을 느낀 사람들이 간혹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성서적 삶의 원리와 당시 현존하는 영국교회 현실에 대하여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왕권과 결탁하고, 성직자들은 귀족화되었으며, 교리는 타락한 교회를 남루하게 치장하고 있는 과거의 유산에 지나지 않았다.

 

        17세기 중엽 남다른 신앙의 열정을 가진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는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만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에게 답변을 구했지만 오히려 거의 절망에 가까운 현실을 느꼈다. 성직자들이 깊이 타락해 있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폭스는 영적으로 깊이 좌절했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깊이 좌절하고 있었던 그에게 불현듯 "예수만이 나의 상황에 답을 주실 분"4)이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그 순간 그는 캄캄함 한 밤중에 빛을 보는 것과 같은 기쁨을 얻었다.  며칠 후 그는 인근에 있는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높은 언덕에 올라 묵상하는 중에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 몰려드는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을 본 직후 폭스는 확신을 가진 거리의 설교자가 되어 교회제도와 성직자의 매개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요지의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교회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류 가능성을 부정하는 성직자들의 권위 이면에 무수한 도덕적 오류들을 지니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 신학자들의 성서적 근거 없는 논리, 억압적인 신적인 질서, 탐욕적인 성직자들의 담합과 착취, 권력과의 결탁과 권력에 대한 집착, 그리고 감격과 기쁨과 비전이 사라진 구태 의연한 형식적 예배, 신앙과는 상관없는 비본질적인 전례와 의식들, 무수한 헌금 강요와 의무로 인해 신자들은 지쳐있었다. 비교적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제일 먼저 이런 현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서서히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국가의 권위와 교회의 제도적 타락에서 벗어난 신앙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영국 북부 일각에서는 성직자들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인 모임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성직자들의 역할 없이 모여 앉아 기도와 묵상을 하고, 성령 체험이나 영감을 받은 이들이 말씀을 증언하는 모임을 만들어 그들의 갈급한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었다. 폭스는 이런 모임을 찾아가 그들의 신앙과 삶에 깊은 위로를 주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성직자 없는 신앙 공동체인 친구들의 모임(society of friends)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서로를 하나님을 두려워 떠는 이들이라는 의미에서 퀘이커(quakers),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는 차별과 위계질서가 없는 벗들(friends)이라고 불렀다. 이런 명칭들은 성서에서 가져 온 것들 이었다.5) 하나님의 현존 없는 부실한 교회 안에서 인간의 주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하고 있었던 교회의 가르침은 신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경건한 체험을 가로 막고 있었다. 하나님 현존과 임재의 경험이 없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메마르고 건조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의 영성은 점점 텅 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폭스의 뒤를 이어 퀘이커들의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한 사람은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 1648-1690)다. 바클레이는 자신의 영혼의 눈으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매우 단순한, 그러나 쉽지 않은 신학적 견해를 표명하였다. 결국 너무나 인간적인 계산과 타협의 논리를 받아들여 온 과거의 기독교 전통에 대하여 격별을 선언하는 신학적 견해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영국 교회의 전통주의를 버린 것은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신앙체험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리에 앞선 살아있는 신앙체험

 

        이런 까닭에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영적인 존재라는 깊은 자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귀 기울임, 그리고 진실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채워 나갔다. 만일 직접적인 신앙체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누군가 매개자를 필요로 하거나 매개물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주요 교단에서는 신자들의 직접적인 영적 체험에 근거한 신앙을 다소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영적 분별의 과제는 매우 신중하고 깊은 신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 담당해야 할 과제라고 보아온 까닭이다. 교직제도와 교의학적 체계는 바로 이렇게 훈련받은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에 의하여 구성되거나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교권 주의적 견해는 하나님 앞에서 직접적인 계시적 관계를 부정하고 신자와 성직자간에 평등한 영적 권위를 부인하는 이론으로 간주되어 퀘이커들에 의하여 매우 급진적으로 거부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퀘이커 운동은 기존의 교단적 교회들에 비하여 매우 독특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우선 계시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성경은 과거에 기록된 계시적 증거로서 받아들여진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서 거룩한 영감에 고무되어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경전은 우선적인 중요성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하여 유일회적인 것은 아니다. 즉 새로운 계시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있으므로 사도신경과 같이 지난 사건을 굳혀버리려는 의도를 가진 신앙고백은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기존의 사건에 더하여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그 계시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열어두게 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귀를 가진 이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신다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서 경전이 교회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을 때 완성되었다는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다.”6)

   

        이들은 인간은 타락했지만 원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주어진 영적인 씨앗, 곧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더욱 타락하거나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임을 당하신후 부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위한 진리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귀히 여기고 그 분의 가지가 되어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를 얻고, 그와 동시에 성화의 길에 들어선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힘입어 빛과 사랑을 증언하고 봉사하는 삶으로 나간다. 물에 의한 세례는 그 본질상 원형의 것이지만 참된 세례는 성령에 의한 감화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시는 제의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7)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영에 닿는(reached) 체험을 중시하였는데 조지 폭스는 이런 체험의 계시적 의미를 일러 씨앗(seeds)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경험을 '직접적인 개인적 체험'(an immediate personal experience), '충만한 하나님 의식'(an overwhelming consciousness of God), '경험의 극치'(peak experience)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이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복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초기 퀘이커들은 이런 체험을 내적 빛(Inner Light)에로의 복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거친 이들은 한결같이 깊은 기쁨과 더불어 무한한 용기와 능력을 얻게 되었다.

 

        조지 폭스에게 있어서 이 체험은 그의 일상을 변혁시킨 능력의 원천이었다.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부터 이러한 변혁의 능력에 사로잡힌다고 믿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경험은 배타적인 구원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해되었고, 근원적으로 주어진 말씀의 씨앗, 혹은 내면적 빛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이렇듯 성령에 의한 내적 증거와 보편적인 계시론은 퀘이커들로 하여금 배타적 교리주의를 허물고 보편적인 계시의 수납가능성을 긍정하는 신앙을 키웠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살아있는 증거와 내면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는 빛을 판단할 수 있는 거룩한 영을 판단할 기준을 주셨다”8)고 고백한다.


탈위계적 신앙 공동체

 

        1691년 죠지 폭스가 세상을 떠나게 될 즈음에 퀘어커들은 영국에서 근 6만 명에 달했다. 퀘이커 신앙 운동 초기에는 성직주의를 거절하면서 일어난 평신도 운동과 같은 성격을 가지면서 그 중심에는 여전히 복음주의적인 핵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핵심은 인간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통한 은총의 수납을 통한 의인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성직주의(anti clericalism)는 곧 성직자들이 인식론적 우위를 주장하던 신학적 테마들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기존의 복음주의적인 신앙내용에서 이성적 합리성을 소외시키는 미신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과 제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비판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 배경으로서 당시 이신론(theism)적 영향도 지대했지만 영국의 경험론적 사유의 영향도 매우 컸다. 하지만 이러한 회의를 불러일으킨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요인은 미신적 요소를 주장하던 성직자들의 도덕적 부패와 타락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도 믿지 않는 내용을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었고, 경건을 가르치는 이들에게서 경건의 능력은커녕 도덕적 타락이 현저하여 그들이 가르치는 하나님 신앙에 대한 회의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신론적 영향보다는 성직자들이 보여주는 무신론적 삶의 태도가 오히려 평신도들을 중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신앙 운동을 하게 만들었고, 여기서 자연스럽게 퀘이커 신앙운동이 활기 있는 신앙세계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이론적이고 고답적인 교리체계를 넘어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 신앙운동은 신비주의적 체험에 바탕을 두는 대신 문자와 권위와 제도를 뛰어넘게 되었다.

 

        대부분의 소종파적 신앙운동은 성서적 공동성과 평등성의 이상을 찾아 위계적 사회질서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상적 신앙 공동체들은 그 지나친 “이상주의”로 인하여 그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역사 속에서 실험하다가 지리멸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2만 여명의 추종자들을 두었던 바, 앤 리(Ann Lee)가 이끌던 쉐이커(Shakers), 그리고 진첸도르프(Count Nicholas Ludwig Zinzendorf)가 이끌던 모라비안 형제단(Moravian Brethren), �스의 조화공동체(George Rapp's Harmony Community),원시 공산주의적 사회 형성을 시도했던 신도덕 세계 건설자 오웬(Robert Owen)을 비롯하여 이카리아(Icaria) 공동체, 평화선교 공동체를 형성했던 디바인(Father Divine), 자유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오네이다 공동체(Oneida) 등이 그러한 경우다.

 

        이들 중 대부분은 그 사회적 원리의 불충분함과 인간의 죄성에 대한 통제와 억압 혹은 지나친 낙관적 이해로 말미암아 사회적 기여는커녕 그 공동체의 존속 그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9) 하지만 17세기에 형성된 퀘이커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크고 작은 모임들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평화주의적 실천능력은 오늘의 세계에서 크게 인정을 받아 왔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이나 개신교적 특성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점에서 매우 탈위계적이지만, 그들의 평화주의적인 삶의 자세로 인하여 오늘의 세계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퀘이커 신앙은 일고 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평등주의적 신앙 공동체

 

        사회 윤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퀘이커리즘은 무엇보다도 매우 강한 평등주의를 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평등주의를 가르친 조지 폭스는 세속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영적 혹은 지적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종교개혁적인 만인 사제론을 성과 제도와 신분을 넘어선 차원에서 긍정했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리즘은 급진적으로 평등주의적인 인간론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삶을 단순 검소하게 살아가는 원칙을 가짐으로써 소유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평등한 삶을 살아가려 했고, 권력과 소유로 인하여 평등주의적 관계가 훼손되지 않는 "친구들"의 관계를 중시했다.

 

        따라서 수직적인 상하위계질서를 주장하는 일이 퀘이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평등주의적 경향은 기독교 평화운동으로 연계되어 20세기에는 생명평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평등주의는 깊이 있는 연대와 동정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개인주의적인 고립주의나 가학적인 집단의 공격성을 극복하게 했을 뿐 아니라 불의한 힘에 의하여 고난을 겪는 이들과 연대하는 강한 유대감을 불러 왔다. 따라서 퀘이커 공동체 안에서는 평등하게 피조된 생명 간에 혹은 인간과 인간관계를 심원하게 훼손하는 여하간의 폭력도 거부하는 절대 평화주의적 입장이 형성되었다. 결국 퀘이커들이 지닌 평등주의적 신념은 권위적 위계질서의 해체와 폭력의 거절이라는 실천적인 과제로 이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퀘이커 평화운동은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 하나의 성서적이며 사회윤리적인 실천 모델로 여겨졌다.10)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신앙 공동체가 끊임없이 유혹받아 왔던 것은 바로 자기 안전에 대한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욕망의 충족을 긍정하려는 것이었다. 힘이 없고 미약할 때 기독교 공동체는 고난과 고통을 수납했을 뿐 아니라 소유와 권력에 대한 의지조차 경원시했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점차 힘을 부여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독교 공동체는 부여된 힘을 오용하기 시작했다. 섬김의 공동체를 지향했지만,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향한 배타와 정죄와 심지어는 전쟁까지도 불사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4세기 어거스틴 시대를 지나면서 강화되었고, 결국 기독교 신앙에 내면화되어 기독교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 사상으로 진화되어 나갔다. 

 

        기독교 승리주의는 겉으로는 도덕주의적 우월성이나 영적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현실적으로 권력화 된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권력은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으로 양분 되지만 이 두 가지는 친화성이 있어서 언제나 서로 보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국교화된 영국 성공회는 이런 속성을 매우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영국 국교가 주장한 내용을 살펴볼 때 종교적으로 본다면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며 영적 승리주의를 외쳤지만, 이런 영적인 승리주의가 대영 제국의 힘과 동행하게 될 때 힘에 의한 약자들의 억압과 착취와 수탈을 당연시 했다. 대영제국 하에서 전 세계적인 식민지주의가 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기독교 승리주의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초기 퀘이커들은 권력의 악마적 속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이 얼마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인 일도 서슴지 않고 시행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관료적 질서의 냉혹함이 어떻게 비기독교적인 삶을 지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퀘이커들은 모든 현실주의적 기득권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대부분은 성직도, 공직도, 나아가서 모든 권력구조가 주는 지배력의 효용성을 포기한다. 성서의 평화주의적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다른 이를 지배하고 판단하며 심판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평등주의적인 기도교적 삶의 방식을 공동체적 혹은 개인의 퀘이커적 삶의 기본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1640년대부터 16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내린 시기이다.  이 시기에 퀘이커리즘이 일어났고, 정치적 민주주의 개념, 토지의 공개념, 신분적 차별에 대한 비판, 초기 원시적인 공산주의 사상, 국가권력과 교회권위에 대한 의문 등은 인간간의 평등이라는 급진적 개념에서 나온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표현이었다. 이런 평등주의 사상은 신학적으로 모든 사람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직접성의 원리에 기초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매개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상은 결국 매개적 권위인 교회 성직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불러 일으켰고, 성직자들에 의하여 권위를 부여받아 온 국가권력과 권위의 근거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던 것이다.

 

        여기서 소종파적 신앙인(the Separatists, the Brownists, Independents, Baptists, Milenaries, Familists, Diggers, Ranters, and Seekers)들은 성직자들의 목회나 십일조 봉헌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교회출석도 거부하고, 침묵 중에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때에 평범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교육의 본질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여성들도 성경 해석의 자유를 가지게 했으며 때에 따라 강단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성중심의 권위아래 해석되던 성경이 여성적 가치를 담은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서 해석은 교권에 의하여 길러진 학자들이나 성직자들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은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령에 감동을 받은 이면 남성이든 여성이든지 막론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존의 교회들과 정치가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퀘이커들의 평화주의를 탄압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이와 같이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보적인 태도를 열어 나가게 되었다. 사실 개신교 운동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종파들 중의 하나가 바로 퀘이커였다. 이들은 1660년을 전후해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살아남았던 많은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이 가졌던 신학적 사고는 "지속적으로 내리는 계시"(a continuing revel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적인 "지속적 혁명"(a continuing revolution)이다. 여기서 여성의 평등권 문제는 매우 중요한 새로운 삶의 혁명적 원리로 받아들여졌다. 1656년 여성들에게 설교하기를 허락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조지 폭스는 지난 16세기 동안 여성들을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던 바울의 주장을 넘어서서 새로운 영의 빛에서 여성의 영적 지위를 긍정하는 입장을 가졌다. 즉 성서의 진술을 넘어선 계시적 진술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페미니즘 운동의 씨앗이 바로 퀘이커리즘 안에서 태동되었다는 사실11)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퀘이커들은 성서주의적인 입장에서 2000년 전에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다거나 닫혀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지속적인 계시를 통해 지속적인 혁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신앙운동은 정부와 기존 교회로부터 다양한 이유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주요한 이유는 십일조 거부와 지방 장관들을 향해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와 목사의 주례를 받지 않는 결혼을 한다는 등의 이유였다.12)

 

        초기 퀘이커 지도자들은 많은 고난을 겪었다. 조지 폭스도 수차례 옥에 갇혔고, 그의 아내인 마가렛도 랑카스타 감옥에 4년 동안 갇혔다. 그러나 온갖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퀘이커들은 1660년 경 신앙 양심상 전쟁행위에 가담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군복무 거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관용법(the Toleration Act of 1689)이 제정되기 까지 무려 15,000명 정도의 퀘이커들이 감옥에 갔고 450명 정도가 죽임을 당했다.13) 퀘이커 신앙을 신학화 했던 윌리암 펜(William Penn)도 신성모독 죄로 런던 타워에 8개월간 감금된 적도 있었다. 그는 후에 영국 국왕으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았는데 국왕은 이 땅을 펜실바니아라고 불렀다.14) 펜은 감옥에 있는 중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No Cross, No Crown)라는 소책자를 써서 퀘이커들의 삶에 영광이라는 삶의 목표보다 고난을 수납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밝혔다.


제의적 구속력을 벗어난 비언어적 영성

 

        현재 퀘이커들은 전 세계적으로 약 36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예배 형식을 전혀 프로그램화하지 않는 모임(Unprogrammed meeting)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우리는 퀘이커들의 독특한 예배 관을 이해할 수 있다. 성직자의 영적 우월성을 전제하지 않는 퀘이커들에게는 목사라든지, 신부, 혹은 이에 상응하는 직제를 가지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직제에 따른 지위고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의 예배는 주로 예배처소(meeting house)라 불리는 곳에서 일정한 시간에 모여 침묵과 명상으로 이루어진 예배를 드린다. 어느 누가 선도하거나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내용은 없다.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언어적 세계를 넘어서서 비언어적 영적인 교제와 영성적 체험과 치유가 일어나는 신앙 체험을 매우 중시한다. 예배의 주체는 인간들이 아니라 그 들 속에서 역사하는 빛과 거룩한 영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퀘이커들은 “치유를 위한 모임을 언어적으로 표명된 요구들이나 기도 없이 전적으로 침묵 가운데 가질 수 있다. 많은 경우 기독교적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구화적 문화 속에서 살고 의미를 나누기 위하여 우리는 언어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퀘이커 치유모임에서 간혹 그들은 비언어적인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 할 수 있다”15)고 믿는다. 침묵은 간혹 사실상 언어를 넘어선 교감과 영적인 공감의 능력을 불러오기 때문에 언어가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라면 침묵은 언어를 초월한 영적인 교제를 가능케 한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들의 예배와 모임에서 참여자들은 언제나 침묵 속에서 자기 정화와 절제, 그리고 영적인 교제를 위한 준비와 수용의 길을 열어 나간다.

 

        시편 46장 10절에 기록된바 “너희는 고요 중에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라.”라는 영성적 요구를 퀘이커들은 진지하게 수용했다. 내면적인 침묵은 나의 언어와 주장을 철회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기 증거가 일어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침묵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자유를 거쳐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향한 자유로운 경청의 자리에 서게 된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존이 여실히 드러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16) 

 

        퀘이커 공동체는 철저한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이며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영적인 자율과 독립을 인정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신성 혹은 거룩한 영에 접촉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가장 급진적인 퀘이커들은 조직 자체를 완전히 해체시켜 월별, 혹은 연례적 모임(annual meeting)에조차 가입하지 않는 독립적인 모임을 가지고 있다. 비록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신앙을 목표로 하지만, 서로 연계하고 집합적으로 모이게 되면 권력이 형성되고, 권력을 통한 지배와 조작이 일어나는 것을 경원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간혹 아주 큰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경우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은 이들이 목회적이며 공동체적 책임을 전임으로 맡아 수고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임을 programmed meeting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배의 근본 원칙과 내용에서 이들은 교조주의적인 권위를 넘어서 다양성을 수용하며 영적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나는 2005년 필라델피아의 스왓츠모어(Swathmore College) 대학의 평화 도서관에서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을 연구하며 퀘이커 공동체에서 9개월을 그들과 더불어 지냈다. 내가 경험한 퀘이커들의 영성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늘 접촉된다고 믿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준비되고 예비된 의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예배를 중시한다. 인위적인 제의, 위계적 질서, 테크닉을 동반한 음악, 성직자에 의한 인도, 인도자와 예배자가 구별되는 예배 -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서 모두가 서로 서로 평등한 위치에서 예배를 드린다.

 

        예배 장소도 성직자가 주도하는 강단과 강단을 향한 청자들의 좌석이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방향이 서로 마주보면서 둘러앉는 형식을 취한다. 예배 시간이 되면 모두 편안한 자세로 침묵과 묵상의 시간을 가진다. 영혼의 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마음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간혹 침묵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때로 거룩한 영에 인도함을 받아 공동체를 향한 자기 체험과 신앙을 고백한다. 간혹 참여자 중에서 조용히 일어나 찬송시를 읊기도 하고,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바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순서는 예배에 앞서서 미리 정해지는 일이 없다.

 

        침묵에는 수도사들의 침묵이 있고, 신비주의자들의 침묵이 있다. 수도사들의 침묵은 수도원의 침묵과 명상적 훈련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라면 신비주의자들의 침묵은 신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침묵이라고 할 수 있다. 퀘이커들의 침묵은 수도사들의 것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자들의 침묵에 가깝다. 퀘이커들은 인위적인 질서와 화려한 수사학적인 언술을 버리려는 깊은 절제가 몸에 배어있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공격적인 언어도 자기 과장의 언어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가지는 고백의 언어이다. 퀘이커들의 예배에는 이런 까닭에 화려한 교회음악의 전통도 이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청빈하고 단순한 예배실에는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소리도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수성을 일정한 범주 안에 제한하여 자유로운 초월의 차원을 제거하기도 하고, 문화적 관습 속에 우리를 매어두기도 하는 까닭이다.

      

합의 공동체를 지향한 해명 위원회

 

        성직과 교리 체계를 중시하지 않는 퀘이커들의 삶에는 매우 독특한 모임이 있다. 그것을 일러 해명위원회(Committees for Clearness)라고 부르는 데 이 위원회는 원래 퀘이커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의사를 확인하거나 퀘이커들이 다른 퀘이커와 결혼하려 할 때 새롭게 형성되는 부부에 대한 퀘이커 공동체의 인준절차를 위하여 형성된 것이었다.17) 그러나 오늘날 이 모임은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퀘이커 공동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기구로 발전하고 있다.

 

        퀘이커 공동체는 교파 주의적 교회들과는 달리 아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명 위원회는 퀘이커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만나 당사자의 의지와 결단의 성실함을 검증한다. 뿐 아니라 퀘이커들은 자신이 결혼을 할 경우에도 공동체의 동의와 이해를 구하기 위하여 이 해명위원회가 열리기를 요구한다. 또한 누군가가 삶에 있어서 커다란 계기나 위기를 만났을 때 이 위원회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인지를 공동체의 합의를 거쳐 해명 받을 수도 있다.

 

        누가 직업을 바꾸려 할 때도 이 위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어려움과 고뇌에 휩싸이지 않도록 배려하는 위원회이기도 하지만, 개인이 결단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 이 위위원회를 통하여 합의에 이를 수 있기도 하고 또한 지원이나 후원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퀘이커 평화 팀(friends peace team)에 들어가 일하고 싶은 데 자신의 개인적 결단만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없을 때 당사자는 해명위원회를 열고 왜 자기가 평화 팀에 들어가 일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밝히면 위원회는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고 그 동기와 목적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하고, 마침내 결정에 이르면 퀘이커 공동체가 그의 사역을 위하여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 위원회의 운영에는 몇 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우선 만장일치제로 의제를 합의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휴회하고 다음 모임에서 왜 우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지를 검증한다. 특별한 의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반대 이유를 명료하게 밝혀야 하고, 찬성하는 이들은 찬성의 이유를 입증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들은 성령의 조명아래 종국에 가서는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해명위원회에서의 진술방법 또한 매우 독특하다. 이들은 자신의 발언을 극도로 자제하며 내용을 매우 간략하고도 명료하게 밝힌다. 누군가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반박하듯이 발언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 앞에서 그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으며 발언하고,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공동적 합의를 매우 의식적으로 존중한다.   

 

        따라서 누군가의 발언이 있을 경우 조용히 경청하고 제아무리 이견과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즉시 반대 견해를 표명하지 않는다. 즉 앞 다투는 일이 없고,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반박과 논박을 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발언들은 해명위원회에서 대부분 걸러지게 되므로 그런 발언들은 거의 돌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이 모임에서 신성에 인도함을 받는다는 보이지 않는 합의가 깨어질 경우 대부분 그 자리에서 휴회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툼을 연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발언을 독차지 하지도 않는다. 모든 퀘이커 모임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신앙고백이 전제되어 있다. 이들은 개인이나 공동체나 거룩한 빛에 의하여 인도 받음으로써 어둠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을 일상화하며 살아가는 삶을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방법으로 위원회를 운영하는 퀘이커 공동체 안에는 여러 가지 위원회들이 있는 데 “돌봄과 후원 위원회” (Meeting for Care and Supports Groups), 화해 위원회 (Committees for Reconciliation), 그리고 목회적 관심을 나누는 위원회(Committee for Concern in Ministry) 등이 있다. 이 위원회에서는 새로운 목회적 혹은 영성적 문제가 대두될 경우 공개 서신을 내기도 하고, 공동체의 영적 및 사회적 인식의 확장을 위하여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다양한 웍삽 프로그램을 열기도 한다. 우리는 대부분 민주적 합의를 중시하는 문화적 풍토에 있지만, 퀘이커들은 민주적 다수결의 원칙을 넘어서서 구성원 만장일치의 방법으로 합의를 도출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를 받는다면 다양성을 넘어선 일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온 까닭이다.

        

퀘이커 평화주의

 

        종교적 전통 안에서 본다면 성서적인 평화주의적인 원칙은 몇 가지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세계 현실의 갈등구조와 떨어져 개인의 영성적 평화를 추구하는 소극적인 평화주의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평화를 깨는 요인들을 제거해 나가는 적극적 평화주의가 있다. 이 경우 평화를 깨는 적은 폭력들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하는 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는 본래 폭력집단을 형성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법에 동의하는 경우 종교와 정치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해 진다. 심지어 지난 역사에서 대량 살상을 피할 수 없는 전쟁행위도 평화의 방법으로 이용되어 왔던 사례를 우리는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전쟁은 사실 평화를 위한 방법이기보다 자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원되어 왔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 전통은 이런 길을 함께 가면서 정당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을 만들어 국가권력을 지원해 왔다. 미셜 왈쩌의 주장을 따른다면 정당전쟁 이론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정당 전쟁 이론은 권력들을 섬기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최소한 이것이 내가 어거스틴이 이루어 놓은 것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 군병들의 적극적인 직무로 채웠다.”18) 그리하여 주류 기독교 공동체는 평화의 종이 되겠다고 하면서 많은 경우 전쟁의 종이 되어 전쟁을 지지하는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평화주의와 관련해서 본다면 퀘이커들은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평화적인 신앙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들은 소극적인 평화주의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평화주의 정책을 가지고 있다. 내적인 평화를 중시하면서도 이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외면 세계의 평화를 위한 참여와 실천에 어느 기독교 공동체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비폭력 평화주의를 현실주의적 평화주의보다 더욱 우월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퀘이커들은 모든 폭력적인 기획을 포기하고 거부한다. 그와 동시에 갈등을 야기하는 폭력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 즉 폭력적 기획에 대한 대안(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원칙은 퀘이커 운동 초기에 확정되었다. 예컨대 1660년 퀘이커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퀘이커들은 찰스 2세에게 보낸 문서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비폭력 평화주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혔다.


“우리는 그 목적이 무엇이든, 어떤 전제가 있는지와 상관없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징벌 그리고 다툼을 철저히 부정 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를 향한 우리의 증언입니다. 우리가 인도함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은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것이 악이라고 가르쳐진 이상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서라든지 혹은 이 세상 나라들을 위해서 어느 누구와도 적대하여 다투거나 무기를 들고 전쟁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이를 세상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19) 


        폭스는 전쟁과 다툼에 대한 정당화의 논리는 타락한 아담의 부패한 인성에서 나온 것이지 우리의 모범인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의 평화 서신에서 명확히 밝혔다. 그는 이 서신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전사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사람들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나라와 더불어 있는 이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평화와 의속에 세워지지만 전사들은 육욕을 쫓는 이들인 까닭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이들은 생명을 구원하려 오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평화로운 나라이고; 투쟁 한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그의 나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하여 싸우는 체 하는 자들은 기만을 당하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것은 악마와 타락한 인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즉 복음은 다툼이 있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싸우고 언쟁하는 체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시온을 위하여 싸운다고 말하는 소리는 어둠에 사로잡힌 것이다: 시온은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20)


        어떤 유형의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보는 퀘이커 평화주의적 원칙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적용되어 이들은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섰고,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한 거래 문화를 촉진시켜왔으며, 여성의 권리 확장에 크게 기여해 왔다. 이와 더불어 갈등이 야기되었을 때 이를 폭력 없이 해결하기 위한 관계론을 발전시켜 왔고, 고난을 당하는 이들 편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돕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모해 왔다.21) 이들은 1810년 노예폐지운동과 정의를 위한 평화적 노력을 위하여 기독교 공동체 중에서 최초의 평화 운동기관을 형성했다.22) 이들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특히 세계 1, 2차 대전 중에 두드러졌고, 적대감에서 비롯되지 않은 그들의 평화를 위한 기여와 노력을 인정하여 세계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퀘이커들에게 수여했다. 기독교 세계 2000년의 역사에서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신념을 가지고 내적인 평화의 힘을 권력이나 무기의 힘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믿고 평화를 위하여 살아온 종교인들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경우는 아마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들에게 있어 정부, 정책, 교리와 신조 모든 것은 변경 가능할지라도 평화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불변의 원리로 남는다.  


퀘이커적 삶의 원칙들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기독교 내 어느 집단보다도 생명권 지향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이 가치를 연장하고 확대하여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적대자들을 향해서도 생명존엄의 가치를 적용한다. 이런 생명윤리의 내적 근거는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내재적 동행, 참여, 그리고 인도하심을 이들의 일상에서 체험으로 만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대한 퀘이커들의 체험은 계시에 대한 폐쇄적 이해를 넘어서 지속적인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신앙원리를 화석화시키고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이들과 매우 다르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화된 배타적 교조주의나 교리적 승리주의나 정치와 종교의 시너지 효과를 통하여 길들여진 호전적인 종교적 적대성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퀘이커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 윤리적 합의는 그들의 삶을 단순함(simplicity)과 정직함(integrity), 공동성(community) 그리고 다양성(diversity)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성직주의의 계층성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허위의식에서 깊이 절망하며 퀘이커 신앙을 발전시켜온 전통으로 인하여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보편성(universality) 이해는 그들의 사상을 개방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교조화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고, 깊은 동정과 공감을 나누는 평화 공동체의 실현이 가능하고 믿는다. 이들은 생명과 평화의 그리스도는 죽음과 폭력의 문화를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러한 생명과 평화의 사역에서 전통적인 견해들을 수정하고, 현대 세계가 불러오는 새로운 삶의 영역에서도 평화와 생명적 사역을 확장한다. 이 연장 선상에서 이들이 추구하는 환경윤리와 환경운동은 그들의 근검절약하는 단순한 삶의 구조를 타고 매우 실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필라델피아에 소재를 두고 있는 퀘이커 수도원 펜들 힐에서는 몇 가지 원칙을 공동체 내부에 적용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그 공동체의 스텝들은 그 역할에 따라 높은 임금을 받는 이들이 없고 대부분 거의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교수가 되어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이나 주방에서 일하는 이, 정원을 관리하는 이 사이에 임금의 격차가 거의 없다.  둘째, 이들은 내면의 가치의 소중함을 중시하면서 사치한 옷차림이나 불필요한 치장을 하지 않고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셋째, 이들은 공동적 식사를 하며 모든 이들이 분담하여 노동에 참여한다. 넷째, 이들은 “공정한 거래“(fare trade) 원칙을 적용하여 센터 소재에서 300Km 이내에서 생산된 물품을 구입하도록 힘쓰고, 노동의 착취를 통해 값싸게 공급되는 물건들은 구입하지 않는다.

 

        하나의 예로 펜들힐에서는 커피를 구입할 때 시중에 값싸게 유통되는 것에 비하여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비싼 커피를 사서 끓인다. 근 8-90명이 마시는 커피를 이렇게 공급하기 위하여 이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큰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면서도 노동과 환경의 착취 없이 생산된 것들을 구입하는 것도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이 며 이는 정의 실현을 위한 매우 중요한 실천적 증언적 행위라고 믿는다. 이들은 단순하고 청빈한 삶을 산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먹거리와 관련하여 사회적 정의, 환경적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권력으로부터의 해방

 

        퀘이커 평화주의 전통에 근접한 쉐이커(Shakers) 신앙 공동체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의 영적 경험을 중시하면서 가부장적인 가족주의적 이기성도 극복하려는 의지까지 신앙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면모를 보였다. 이들은 매우 강력한 완전 주의적 윤리를 적용하여 세상과의 분리, 평등주의, 소유의 포기, 성결의 원칙, 그리고 절대 평화주의와 신생(New Birth)의 원리를 적용하면서 종말론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23) 그러나 퀘이커들은 쉐이커들이 지향한 격리된 완전한 사회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의 원리를 평화주의에서 찾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을 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적용했기 때문이다.

 

        퀘이커들의 평화적 삶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멈추지 않는 성실성에 그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한국 기독교가 교회 성장주의와 영적 승리주의를 옷 입고 세속적인 가치들을 통합하면서 매우 폭력화되어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퀘이커적 영성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혹은 우리가 슬며시 버리고 만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퀘이커 운동은 앞 다투어 크기를 자랑하고 장자교단이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 오만한 교회가 보기에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소종파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거스틴 이후 콘스탄틴 제국의 종교가 되어 기독교 스스로의 정체성을 제국성과 결합해온 기독교 신학 전통에 대한 비판이론이 적지 않은 오늘날 제국주의적 종교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평화 주의적 원칙을 지키고 있는 퀘이커들의 신앙 유산은 우리가 가진 신앙 속에 내제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러내어 되돌아보게 하는 기독교 평화 윤리적 유산을 담고 있다.

 

        일찍이 에른스트 트뢸치가 언급한 바 있듯이 교회유형은 세속의 권력을 이용하여 선교적 도구로 삼는 데 비하여 소종파 신앙은 현실주의적인 이해, 양적인 성장, 확장, 성공의 논리를 초월하여 내적인 가치를 중시하고 성서적 원칙을 찾아 그 원칙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독교적인 삶을 규명해 왔다. 과연 오늘의 한국 교회들이 “진정한 기독교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사회적 비판과 질문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이 때, 성장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성공적이지 않은 퀘이커 신앙은 우리 교회들이 성장과 확장을 서두르면서 소홀히 해온 평화주의적인 가치와 내면적 신앙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영성의 샘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퀘이커 영성의 샘은 모든 굳어진 종교적 규범과 가치, 제도적 경직성에서 그리스도적인 신앙을 해방시킨 하나의 모델이다. 이 퀘이커 신앙은 그 흔한 권력과 탐욕의 유혹에 대응하여 국가주의나, 제국주의, 자본주의나 집단주의의 유혹을 자유롭고 내적인 평화의 영성으로 극복해 온 양심적 전통을 형성해 왔다. 기독교 신앙이 지난 역사 속에서 간혹 억압자 편에 서서 민중을 억압해 온 측면이 적지 않으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폐쇄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아니라면 지금도 여전히 내외적인 억압으로부터 쉬지 않고 인간을 해방시켜온 전통을 열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 개혁적 가르침(ecclesia semper reformanda)에 우리가 충실하다면 퀘이커 운동은 소종파적 신앙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해 온 하나의 사례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지나치리만큼 세속화되어 있고, 자본주의화 되어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권력, 사소한 이해관계에 천작하며 하나님 나라 사상을 세속화시키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이런 비판을 극복하려면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부패하게 만드는 요소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자유를 버리고 속된 가치들과 야합하고 타협했던 그릇된 종교성의 자기 우상화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이런 해방의 지평은 예수의 평화주의적 삶의 방식, 참된 영성적 의미에서 비폭력적인 평화 섬김의 길, 즉 양들의 전쟁(The Lamb's war)24)을 몸으로 살아가며 열어 나가는 데에서 열려질 것이다.  





 

 


 

1) George Fox, The Journal of George Fox, ed. John L. Nickalls (London: London Yearly Meeting, 1975), 11.

 

2) George T. Peck, What is Quakerism?  Pendle Hill Pamphlet 277 (Philadelphia: Pendle Hill Publications, 1988), 6.


3) 요한복음  15장 14-15절.


4) Mattew Fox, The Journal of George Fox, 1647.

 

5) 요 15: 12-1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너희가 나의 명한 바를 지키면 너희는 나의 친구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하였음이라. 


6) Samuel D. Caldwell, The Inward Light: How Quakerism Unites Universalism and Christianity (Philadelphia Yearly Meeting, 1997), 6-7.

 

7) Robert Barcley, Apology for the True Christian Divinity, summarized by William Bacon Evans(1961; Philadelphia: Penna, 1993) 참조.

 

8) Samuel D. Caldwell, The Inward Light, 2.

 

9) 참조, 17세기부터 시작된 아메리카에서의 종교적 실험 공동체들에 대한 종합 연구서 Donald E. Pitzer, ed., America's Communal Utopias (Chapel Hill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7).

 

10) 참조, W. 후버 & H. R. 로이터, 평화윤리, 김윤옥 손규태 역 (대한 기독교 서회, 1997) 246이하.

 

11) Margaret Hope Bacon, Mothers of Feminism (San Francisco: Harper & Row Publishers, 1986), 24.

 

12) Margaret Hope Bacon, 16.

 

13) Margaret Hope Bacon, 17.

 

14) Anna Cox Brinton et. al, Quaker Classics in Brief: William Penn, Robert Barclay and Isaac Penington (Wallingford, PA: Pendle Hill, 1978), ix.


15) Marcelle Martin, Holding one Another in the Light (Philadelphia: Pendle Hill Publications, 2006), 17.

 

16) 참조, 고후 5: 17; 갈 6: 15.

 

17) Jan Greene and Marty Walton, Fostering Vital Friends Meetings: A Handbook for Working with Quaker Meetings (Philadelphia: Friends General Conference, 1999), 49.


18) Michael Waltzer, Arguing About War (New Haven: Yale UP, 2004), 3.

 

19) Quaker Declaration of Pacifism (1660).

 

20) George Fox, "You are called to peace," The Works of George Fox, 1990 reprint of 1831 edition, Vol. 1 (Journal I), 387-389.

 

21) 참조, 미국 Philadelphia yearly meeting website: http://www.pym.org.

 

22) 참조. The Nobel Peace Prize 1947 - Presentation Speech; http://nobelprize.org.

 

23) 참조, Donald E. Pitzer, America's Communal Utopias (Chapel Hill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7), 37-56.

 

24) James Nayler, "The Lamb's War," Early Quaker Writings 1650-1700,  eds. Hugh Barbour and Arthur O. Roberts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