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과 내면>
http://blog.aladin.co.kr/singeruk/1023108
[월간 연세대학원신문 150호, 2006.12.19.]
<학술협동조합 강좌정리②: 스피노자의『윤리학』3, 4부 읽기>
스피노자와 정치, 그리고 정념의 물리학
스피노자(Benedicus de Spinoza, 1632~1677)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잊혀져있던 철학자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꽤 의미있는 말을 남긴 철학자로, 혹은 조금 아는 사람들에게는 “신은 곧 자연”이라고 주장한 ‘범신론자’로서만 스피노자는 우리의 기억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 철학을 대신했던 이 단순화된 이미지들조차도 사실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스피노자가 했다고 알려진 사과나무 이야기는 사실은 루터의 말이었고, ‘범신론자 스피노자’는 한 해석, 그것도 그 근거가 의심스러운 해석일 뿐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르네상스
10여 년 전부터 우리는 이러한 완전한 망각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20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소위 ‘스피노자 르네상스’에 힘입은 바 크다. 그렇다면 이 스피노자 르네상스의 요체는 무엇인가? 한두 마디로 그 특징을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장 뚜렷한 특징의 하나로 스피노자의 정치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드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프랑스 철학자들, 예를 들면 알튀세르, 발리바르,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의 주요 연구는 바로 스피노자의 정치론에 정향되어 있었다. 한국의 스피노자 연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들뢰즈를 예외의 경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들뢰즈 철학의 수용이 상당히 정치적 고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스피노자 독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수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에 대한 정치 (철학)적 독해는 특별히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 개념에 대한 주목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역량의 존재론, 욕망의 인간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나아가 그것에 대한 인간학적, 정치철학적 논의들은 연구자들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들뢰즈의 경우 인간들의 긍정적 결합으로서의 정치는 기쁨이라는 역량의 표현에 의해 사유되고 있고, 네그리는 역량의 자발적 구성으로서의 대중의 역량을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하고 있다.
이번 학기 연세학술협동조합의 고전강좌의 하나로 개설된 ‘스피노자의『윤리학』독해’의 주요하고 직접적인 목표는『윤리학』3, 4부에 나타난 스피노자의 정념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정념과 정치’라는 스피노자 고유의 문제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간접적으로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위한 토대를 제공해줄 것이다.
정념과 정치라는 문제틀
스피노자에게 인간을 설명하는 일은, 감정들의 발생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 즉 감정의 물리학(physics of affects)을 확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어떤 도덕적 기준에 기초해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근대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정념론』에 서론으로 붙인 한 편지에서 “나는 정념을 웅변가나 도덕가로서가 아니라 자연학자로서 다루겠다”고 말할 때, 그리고 스피노자가『윤리학』3부의 서문에서 “나는 인간의 행위나 욕구들을 선, 면, 물체들인 것처럼 고려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두 철학자는 인간의 삶은 감정들의 발생학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동일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감정의 물리학을 통해 그려지고 있는 인간의 삶은 어떠한 것인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conatus)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의 보존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긍정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과 결합하고 유해한 것을 배제하는 노력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감정들은 이러한 노력들의 구체적인 양태들이다. 감정들은 따라서 코나투스의 구체적인 양태들이며, 따라서 인간들의 구체적인 존재양식, 관계양식, 행위양식을 설명해준다. 요컨대, 인간이 외부 사물들과 타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곧 감정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정치론은 정확하게 감정론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감정을 통해서 가치판단을 하고, 감정을 통해서 다른 인간들과 결합한다. 스피노자가『정치론』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국가의 기초가 대중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이라면, 각 개인들의 역량의 결합으로서의 이 대중의 역량의 구성은 감정을 통해서, 즉 공통의 감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공통의 정서, 결합된 역량으로부터 선악의 규범, 삶의 규칙 등이 구성된다.
이렇게 대중의 역량의 구성, 달리 말하면 국가의 발생을 감정의 물리학으로부터 설명함으로써 스피노자는 이성적 판단에 기초해서 국가의 발생을 설명하는 홉즈의 계약론과 단절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계약론적 모델의 해체는 하나의 난점을 지니고 있다.
감정의 물리학으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 해명
스피노자가『윤리학』3부에서 보여주고 있는, 감정들에 지배되고 있는 인간의 삶은 마음의 동요(fluctuatio animi)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즉 인간이 다양한 사물들 및 인간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용되는 한, 인간은 항상성(constance)을 지닐 수가 없다. 우리는 동일한 사물 및 인간에 대해 동시에 상이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고(예를 들면 질투), 동일한 것에 대해 감정들이 쉽게 변하기도 한다. 요컨대, 인간의 삶의 근원적 지평은 마음의 동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동요를 내재적 특징으로 갖고 있는 인간들의 삶으로부터 어떻게 상대적으로 항상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즉 국가의 발생을 어떤 외적인 원리의 도입 없이 내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느 두 가지 점이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스피노자가 계약론적 모델의 해체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국가는 절대로 안정적인 체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홉즈의 질문이 국가의 공고성을 위협하는 이탈의 요소들을 어떻게 배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에 있다면, 그의 전제는 국가의 본성은 그 절대적 안정성에 있다는 믿음이다. 스피노자의 질문은 정반대의 관점에서 던져지고 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일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국가는 이탈과 변이 즉 자신의 해체를 부분적으로 내부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던져져야 하는 질문은 국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재생산되고 유지되는가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계약론적 모델의 해체는 국가가 감정의 물리학에 기초해서 발생하는 한에서, 그것은 근원적으로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부분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체계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그 요체가 있다.
둘째, 국가가 본성상 불안정한 체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안정성과 항상성을 지니고 있는 체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방식을 특징짓는 ‘동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간들은 특정한 지속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가? 요컨대, 나는 너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멸시하지만, 나는 왜 너와 함께 사는가?
이 물음에 스피노자는 공통의 이해(interests), 즉 상호부조의 필요성을 통해 답한다. 한 개인의 역량은 매우 미약하기 때문에,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적다. 인간들의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협조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구체적인 형태들은 분업과 협업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국가의 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형성은 이러한 분업과 협업을 매개로 해서 나타나는 공통의 정서와 그것을 통해 일어나는 역량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요컨대,『정치론』6장, 문단 1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스피노자는 국가의 발생을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물리학으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는 공통의 감정으로부터 설명한다. 그러나 그 공통의 감정의 발생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호부조의 필요성이라는 강제에 의해서 확보된다.
자유, 혹은 독특성의 놀이
스피노자에게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들의 관계, 특별히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관계 혹은 질서의 토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설명은 철저하게 물리학적 원리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에게 운동으로서의 정치, 기존의 관계에 대한 비판과 전복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사고는 부재하는가? 물론 부재하지는 않는다.
운동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스피노자의 사유는 자유, 혹은 독특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 국가의 토대인 대중의 역량이 감정에 의해서 구성되는 한, 국가는 독특한 변이들, 이탈들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가 말하고 있듯이, 스피노자에게 오웰의 빅브라더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탈들은 이중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범죄, 사기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로 귀결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예술과 과학, 그리고 운동으로서의 정치와 같은 창조적 활동의 토대를 구성하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독특성의 이 두 표현을 각각 예속적 인간과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는 자유로운 인간을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성이 사물들의 공통의 법칙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는 한에서, 어떻게 이성이 독특성의 긍정적 발현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보편성과 독특성의 관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사유로 우리를 이끈다. 스피노자에게, 독특성은 보편성으로부터의 이탈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보편성의 생산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산은 다른 보편성들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다른 인식을 생산하는 생산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주어진 보편적 법칙, 규범에 대한 고착을 의미하지 않으며, 반대로 새로운 보편적 법칙에 대한 이해와 창조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된다. 인식은 새로운 인식을 낳는다고 스피노자는 반복해서 주장한다.
스피노자가 합리주의자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합리주의는 독특성들의 놀이(le jeu des singularités)에 근거하고 있는 합리주의라는 사실이다.
박기순/ 서울대 철학과 강사 kspcaute@gmail.com
이번 호 《연세대학원신문》을 보니, 학술협동조합 제1기를 정리하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자본론' 강의와 '스피노자' 강의에 대한 글이 실렸는데, 박기순 선생님이 직접 글을 한편 쓰셨다. 수업 때 내용이 생각나기도 하고, 선생님의 말투가 묻어나는 것 같아 반갑다. 상당히 명료하게 정리된 글이지만, 동시에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아마도 10년 간의 유학생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 번역투의 문체가 글의 이해도를 떨어뜨리고 있고, 그래서 어떤 부분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어색한 것도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태원 선배의 이전 글에서 자세히 설명된 것이기도 한데, 짧은 글로서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갈무리하는 데 있어 일독할 가치가 있다.
'마리선녀 이야기 > 마리선녀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피노자: 감정의 물리학과 정치 /박기순 (0) | 2013.07.15 |
---|---|
들뢰즈와 스피노자 : 무한의 사유 /박기순(진보평론2007 봄호) (0) | 2013.07.15 |
스피노자의 코뮨주의-자유를 향한 욕망의 아쌍블라쥬 /고병권(문학과경계2001여름호) (0) | 2013.02.17 |
유목주의 연구 - 들뢰즈와 가타리를 중심으로 /류한승(현대미술관연구2003) (0) | 2013.02.17 |
[책] 스피노자 '정치론' /한겨레20081226 (0) | 201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