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현대미술관연구> 제14집(2003년) /국립현대미술관 간행

http://www.moca.go.kr/study/study14/study14_j1.html

 

 

유목주의 연구 - 들뢰즈와 가타리를 중심으로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I. 서론

 

최근 언론과 문화계에서는 우리시대를 해석하는 하나의 문화코드로 ‘유목주의’를 말하고 있다. 작년 대선 과정에서의 ‘노사모’, 월드컵 때의 ‘붉은악마’,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 등을 하나의 ‘노마드’ 운동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더불어 휴대폰과 노트북 등 디지털 통신장비에 힘입어 이동하면서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신 인류를 ‘디지털 노마드족’이라 칭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뜻에 따라 직업을 자유롭게 바꾸고 개척하는 사람을 ‘잡노마드족’이라 부르고 있다.

유목을 언급할 때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 군둘라 엥리슈(Gundula Englisch)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프랑스의 질 들뢰즈(1925-1995, 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1930-1992, Felix Guattari)가 실질적으로 유목주의를 철학적·사회학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의 현상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는 유목주의와 동일한 맥락으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따르지만, 노마드족이 기존의 체계와 제도를 탈피하여 새로운 가치와 영역을 찾아다닌다는 것과 컴퓨터 네트워크를 이용한 리좀적인 망상조직의 형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유목주의 맥락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보인다.1)

우리나라 미술계에 있어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이 비로소 대중성을 갖게 되었던 주요한 계기는 ‘지구의 여백’이란 주제를 가졌던 제2회 광주 비엔날레와 로댕갤러리에서 개최된 ≪나의 집은 너의 집, 너의 집은 나의 집≫전 등을 통해서이다. 이후 여러 이론가들과 작가들이 이들의 이론을 활용하여 직·간접적으로 새로운 비평과 창작에 착수하였고, 우리는 미술잡지, 전시서평, 작가론에서 노마드, 유목, 탈영토화, 소수자, 되기, 리좀, 탈주, 욕망하는 회화 등과 같은 이들 고유의 용어와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최근 유목주의로 대표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사회사상이 미술을 비롯한 문화전반에 많이 응용되는 추세이다. 오늘날 이들의 이론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체계화, 표준화, 제도화를 추구하는 주류에 대한 공격성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격은 파괴 혹은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의 제시가 이들의 궁극적 목표이다.2)

또한 욕망, 무의식 등 미시적 흐름을 주목함으로써 코드화되지 않는 인간 본연의 내재된 힘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사회에 있어 억압받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던 소수적인 것을 재발견함으로써 중심이 분산된 다원주의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을 이해하고 하나로 정리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작업일 수도 있다. 더욱이 비전공자가 이들 사상을 다룬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지만, 본고는 이들 논의의 가장 기초적이고 특징적인 것만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거론되는 유목주의와 그와 관련된 논쟁들을 재점검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II. 본론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은 크게 보아 196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포스트구조주의라는 테두리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소위 포스트구조주의는 로고스에 기초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반대하며 이성, 주체, 합리성, 진보 등의 개념을 비판하는데, 특히 탈중심, 탈주체, 비이성, 미시적인 것에 주목하면서 동일자 철학을 해체하고 차이의 철학을 정립시킨다.

하지만 끊임없는 생성, 변이, 탈주를 추구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은 일반적인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이 지니는 비판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대안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 큰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논의가 왜 생산적인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들뢰즈의 경우 초창기 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 등 선배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비판철학을 형성하는데 다음의 언급에서 그의 관심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들뢰즈의 기획이 갖는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공격을 하나의 정치적 과제로서 지적하고 있는 것과 철학의 중심적인 생산적 목적을 순수하게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사회의 건설로서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3)

“니체의 주요 목표는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것이며, 힘의 물리학에 기반한 생성의 철학을 개발하는 것, 긍정의 철학을 통해서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파기하는 것 ··· 이러한 시도는 들뢰즈 자신에게도 발견되는 시도이다.”4)

들뢰즈는 사물들과 사건들의 환원불가능한 차이와 복수성을 인정하고, 이를 총체성이나 보편성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일종의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즉 그는 이데아와 같은 보편적인 일자와 그것의 그림자인 현실 세계로 양분하고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서구철학의 초월적 형이상학을 공격한다. 플라톤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동일자 철학에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차이를 설명할 수 없고, 결국 그러한 차이는 동일성으로 환원되고 만다.5)

들뢰즈의 초기 저작들은 넓은 의미에서 플라톤에 맞서고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모순에 의해 발전하는 부정의 철학, 즉 헤겔의 변증법과 대립한다고 볼 수 있다. 헤겔과의 단절 또는 헤겔에 대한 타자는 언제든지 다시 헤겔의 변증법 테두리 안에서 다시 타자로 포함되기 때문에 그의 변증법적 틀을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것과 그 지반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실상 헤겔 비판의 핵심과제이다.

그것을 위해 들뢰즈는 아무런 부정 없이 서로에 대한 긍정만을 사고하는 니체의 철학을 선택하며, 나아가 전통철학의 외부 또는 그것을 넘어선 사상가들을 주목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을 지니고 있던 들뢰즈는 프랑스 ‘68년 5월 사건’을 경험하고, 1969년 참여지식인이자 정신의학자인 가타리6)를 만나면서 그의 철학적 관심이 자연스럽게 사회·정치적으로 변환되었다. 이후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인 』안티-외디푸스』(1972), 』카프카』(1975), 』천의 고원』(1980),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 등을 통해, 소위 ‘유목주의’ 혹은 ‘탈주의 철학’이라 불리는 독특한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 저작은 언어학, 정치학, 지질학,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학문들을 넘나들고, 또한 새롭게 창안한 여러 철학적 개념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거칠게 이들 사상을 요약하자면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욕망하는 기계’, ‘기관 없는 신체', ‘유목민적 주체’가 그것이다.7)

따라서 본고에서는 위의 세 요소를 중심으로 이들 사유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욕망하는 기계

‘욕망하는 기계(machine desirante)’라는 개념에 있어 중요한 특징은 욕망을 ‘결여’가 아닌 ‘생산’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이들 사상이 근본적으로 생산적인 성격을 가지는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기계’8)의 개념을 통해 고정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운동, 변화, 흐름 등 생동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사유한다.

이 개념들은 이들의 첫 번째 공동저작인 "안티-외디푸스"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르게 욕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데,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제 그 자체”9)에 대한 공격이라 말하듯, 책 전체를 통해 정신분석학과 프로이트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는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표상 전체의 원리로서 양적 리비도를 발견함으로써 욕망하는 경제학의 기초를 세웠다”10)라고 지적하며, 욕망과 그 밑바닥에서 작동하고 있는 리비도에 접근한 프로이트의 성과를 인정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욕망이라 범주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데는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욕망을 단순히 가족 안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진정한 생산력을 단순한 표상적 징표로 대체함으로써 연극적으로 연출해 놓았습니다. ···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프로이트는 리비도로서의 욕망, 즉 생산하는 욕망을 발견하였지만, 그것을 외디푸스라는 가족적 표상 속에 가두어 놓았다는 것입니다.”11)

프로이트는 욕망 혹은 무의식의 근저를 거칠게 말해 성욕으로 여기며, 모든 욕망을 남근으로 귀착시킨다. 따라서 그의 도식 속에서 욕망의 문제는 ‘아버지-어머니-아이’의 삼각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있으며, 그는 문제가 발생하는 시점으로 유아기를 지목하고, 문제의 내용을 환자와 아버지/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찾는다.

또한 프로이트는 욕망을 자기에게서 없는 것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대상을 완전히 획득할 수 없으며, 결국에는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따라 소위 정신분석학에서 결여로서의 무의식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되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 자체를 생산으로, 즉 실재를 생산하는 현실적 생산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처음부터 결여를 모르며, 오히려 결여는 억압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내가 말하는 욕망은 어떤 결핍도 내포하지 않는다."12)
“인간에게 있어 욕망한다는 것은 생산한다는 것이며, 현실의 영역 내에서 생산한다는 것이다.”13)

따라서 이들은 욕망과 생산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으며, 나아가 욕망은 구조적인 것도 인물에 관한 것도 아니며, 더불어 상징적이지 않으며 표상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과 다른 것이 아니다”14)라고 말하듯이, 욕망이 상징계 속에서 언어처럼 구조화된다는 라캉의 이론에 강하게 반대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욕망이 단순히 가족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 외적인 것, 즉 사회전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15) 이러한 시도는 프로이트가 발견하고 라캉이 발전시킨 무의식과 욕망이라는 탈근대적 개념을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시키고자 함이며, 그 안에서 능동적인 전복의 힘으로써 욕망 개념을 위치 지우고자 함이다.

가타리는 “욕망은 반드시 교란자,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17)라고 지적하듯이, 욕망이 곧바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무절제한 방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무책임한 욕망의 발산은 사회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암적인 존재가 되겠지만, 반대로 사회를 탈주시켜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적 힘도 될 수 있다는 점을 주시한다.

욕망은 이들 철학을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로서 작동하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홀대 받아온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면서 그 욕망을 어떤 부정적인 것, 개인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욕망이 가지는 순수한 생성적 힘과 사회성에 주목한다. 바로 이것이 이들의 이론과 기타 현대 이론이 차별성을 보이는 지점이다.

2. 기관 없는 신체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잔혹극의 창시자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를 나타내며, 『천의 고원』에서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champ d'immanence)’, ‘욕망의 일관성의 구도(plan de consistence)’, ‘지구’ 등과 동일한 의미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이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알(卵)’에 비유하는데, 알은 말 그대로 아직 세포 분열이 일정 단계를 넘지 않아서 어떤 기관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를 지시한다. 기관은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조직된 신체이며, 그것은 제도화, 관습화, 안정화되어 있다. 알에 담겨 있는 에너지가 상이한 ‘강렬도(intensite)’18)에 따라 신체의 분화가 이루어지며 기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힘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 혹은 무언가를 생성시키는 것을 뜻하고, 의지란 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미한다고 그의 니체 연구에서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강렬도가 힘에 해당된다면, 욕망은 의지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으며, 욕망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성분이 강렬도라면, 욕망은 그러한 강렬도의 힘에 속성과 양태를 부여하는 성분이다.19) 그러므로 욕망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강렬도를 조정하는 요소이며, 강렬도의 분포에 따라 기관이 새롭게 생기고 또는 사라지기도 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강렬도=0’의 상태를 말하는데 강렬도의 숫자가 올라간다는 것은 기관화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과 강렬도에 따라 앞으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하나의 잠재적 장이다.

“한마디로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의 부재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결정되지 않은 기관의 존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결국은 결정된 기관들이 잠정적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20)

기관 없는 신체의 적이 단지 기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의 흐름이 고착화되고 통일되어 한 기관이 고정된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며, 나아가 “유기체라 불리는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21)하는 것이다. 즉 유기체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중심으로 통합시키고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하여 하나의 역할만 강요하는 것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첫 번째 우려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욕망의 억압과 통제를 통한 표준화, 체계화, 조직화 등에 대한 경계심이다. 결국 흐름이 자유로운 기관 없는 신체와 흐름이 고정된 유기체의 대립이 중요하며, 이 둘의 성질을 분석하여 그 장단점을 찾고자 함이 이들의 기본적 목표이다.

다음으로 기관 없는 신체는 유기체뿐만 아니라 실존하는 모든 것들보다도 먼저 실존한다. 왜냐하면 기관 없는 신체가 없다면 욕망의 흐름이 존재할 수 있는 토대가 없는 셈이고, 그에 따라 기관도 분화되지 않을뿐더러 유기체도 형성될 수 없다.

이러한 기관 없는 신체의 우선성은 탈주선(linge de fuite)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사실과 동일한 맥락이며, 이에 대해선 다음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또한 기관 없는 신체 위에는 욕망의 흐름만이 있을 뿐 아직 구체적인 기관이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에, 탈영토화된 상태와 비교될 수도 있다.22)

하지만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과정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그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점이다. 바로 이것이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해 우리가 경계해야할 고유의 위험성이며, 저자들이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해 두 번째로 우려하는 점이다.

“기관 없는 신체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경우, 또는 어떻게든 그것을 생산해내더라도 이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아무 것도 생산되지 못해 강렬함들이 지나가지 못하거나 봉쇄된 경우. ··· 기관 없는 신체를 너무 격렬한 동작으로 해방하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지층들을 건너뛰면 판을 그려내기는커녕 당신 자신을 죽이게 되고, 검은 구멍에 빠지고, 심지어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23)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기관 없는 신체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자는 것도 아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새로운 기관의 형성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이유는 고정된 기관화에서 벗어나, 강렬도가 자유롭게 순환하고 통과하게 만들어 무언가가 새롭게 생성되고 변이할 수 있는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 탈영토화, 탈주 등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획일화, 고착화에 대한 거부를 뜻하며, 이차적으로 끊임없는 창조와 변이를 준비하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기관에 대한 파괴만이 그 목적이 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의 해체가 목표는 아니다. 이런 경우 생성의 순수한 잠재성마저 붕괴되고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이 사라져 우리의 몸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황폐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기관 없는 신체 만들기는 ‘텅빈 기관 없는 신체’만을 낳을 뿐이며, 죽음 혹은 파괴의 이미지로 바뀔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욕망 그 자체가 어떤 이유로 부정적인 것으로 변질되는가에 대한 것이며, 이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이들의 과제인 셈이다.

3. 유목민과 탈주

기관 없는 신체를 고민하다 보면 한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우리는 항상 기관 없는 신체와 탈영토화된 상태만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관화와 영토화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해법이 바로 유목민의 삶, 즉 ‘유목민적 주체’이다.

유목민에 관한 논의는 주로 『천의 고원』의 열두번째 고원인 『1227년: 유목론-전쟁기계』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으로 『안티-외디푸스』와 동일하듯, 『천의 고원』은 『안티-외디푸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24) 하지만 낯선 개념들(지층, 추상적 기계, 얼굴성, 리토르넬로, 매끈한 공간, 홈패인 공간, 지도, 디아그람)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하나의 고원을 이루며, 체계적인 경계선을 이루기보다는 열린 궤적들을 이루며 서로 공명하고 있다. 25)

그중 가장 대표적인 개념이 ‘탈주’이며, 탈주의 구체적인 모습을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예시가 유목론이다. 즉 탈주선을 그리는 유목적인 배치가 열두번째 고원의 주제이며, 몽고제국의 징기스칸이 그 주인공이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1227년을 제목에 포함시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부르주아 역사가이건 소련의 역사가이건 한결같이 징기스칸은 국가 혹은 도시라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한다”26)라는 징기스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맞서서 새로운 문제틀을 구성한다. 즉 저자들은 서구의 역사를 정착민의 승리의 역사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유목민은 항상 열등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금껏 무시되어 왔던 유목민의 삶을 역사, 정치, 과학, 사상 등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유목민은 단지 목초지를 떠다니며 방랑하는 것을 지칭하는가? 정착민은 이동하지 않는가? 들뢰즈 자신은 이동하며 살았는가? 이것은 유목민에 대해 가장 많이 제기되는 질문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민은 이주민 같은 것이 아니며, 유목민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정착민도 이동하지만 그들은 멈추기 위해서 이동한다. 즉 재영토화를 전제로만 탈영토화한다.

유목민은 어떤 영토로 영토화되거나 재영토화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탈영토화하며, 현재와는 다른 삶, 가치, 사유를 찾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착민의 산물인 국가는 그러한 유목민의 흐름을 가로막고 수로화하여 사회적 코드 아래에 위치시킨다.

유목민/정착민의 대립쌍은 전쟁기계27)/국가에 각각 대응된다. 이 책에서 전쟁기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찾을 수는 없지만, 국가가 정착민의 산물이라면,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는 국가장치 외부에 존재한다”28),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갖고 있지 않다”29)라고 말하며, 전쟁기계와 국가의 구분을 위해 신화, 민속학, 인식론, 사유학 등과 관련하여 네 개의 명제를 설정해 서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30)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기계가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새로운 생성과 변이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전쟁기계는 국가의 구성을 저지한다. 먼저 국가라는 체제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민속학자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가 제시하는 원시사회에 주목하는데, 인류학적으로 ‘원시인들이 국가와 같은 복잡하고 미분화된 것을 알지 못했다’라는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원시사회가 단순하고 초보적이고 국가는 세분화되고 문명적이기 때문에 원시사회가 열등한 사회체계라고 이해하는 사회진화론적 입장을 비판한다. 중요한 점은 원시사회가 조직화된 국가 형태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탄생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유연하게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출현한다는 것은 부와 권력이 어떤 초월적 권한을 갖는 한 명의 왕에게로 귀속되는 것을 암시한다. 원시사회는 오히려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았으며, 여러 개의 중심이 공존하여 개개인의 창조적 능력과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는 그런 사회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전쟁기계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간단히 점검해 보고자 한다. 첫째 긍정적인 전쟁기계의 목표가 어떤 계기로 전쟁만을 목표로 삼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전쟁기계로 변하게 되는가?

“전쟁기계는 본질상 매끄러운 공간의 구성요소이며, 이 공간에 점거, 이 공간에서의 이동, 또 이 공간에 대응하는 인간편성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전쟁기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적극적인 목표이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초래된다면 그것은 전쟁기계의 적극적인 목적에 대립하는 홈 파는 세력으로서의 국가나 도시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전쟁기계는 국가와 도시국가적 및 도시적 현상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절멸을 목표로 삼는다.”31)

전쟁은 국가장치라는 전쟁기계의 외부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전쟁은 전쟁기계의 조건도 목적도 아니지만, 전쟁기계를 따라다니며 이 기계를 보충대리(supplement)한다.

둘째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에 의해 포획될 수 있다. 유목민의 발명품인 전쟁기계를 국가가 소유하게 되면 그 본질과 기능이 전적으로 바뀐다. 즉 이때부터 전쟁기계는 군대와 같은 국가 부속기관으로 변질되어 전쟁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게되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국가에 대항하는 모든 전쟁기계에 맞서며, 더불어 한 국가가 배타적으로 다른 국가를 파괴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양상을 지니는데, “한 극에서 그것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며, 우주 끝까지 연장될 수 있는 파괴선을 형성하고 있다. 다른 한극에서는 전쟁기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극에 비하면 무한히 작은 양을 지니며, 전쟁이 아니라 창조적인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다. 32)

이제 탈주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탈주의 개념은 도피, 도망, 도주 등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며, 그런 현실로부터의 단절, 소외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러한 것을 파괴하는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탈주가 기관화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무한한 자유와 방종으로 보여져 무정부주의로 비춰질 수 있는 소지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탈주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탈주는 어떤 고정된 체계와 질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창조적 변이를 추구한다.33)

“우리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탈주의 선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들은 욕망, 욕망의 기계, 욕망의 사회적 조직화를 풀어헤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도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파이프나 종기를 터뜨리듯 무엇인가가 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들을 막고자 하는 사회적 코드 아래서 그것들을 풀어헤침으로써 흐르게 하자는 것입니다.”34)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의 우선성을 말하는데 기관 없는 신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즉 기관 없는 신체와 탈주가 선행되며, 그 다음에 그 속에서 기관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시 그런 기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탈주이자 탈영토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탈주는 언제나 파괴되고 메워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탈주선은 항상 고유의 위험성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국가권력과 관련된 것인데, 사회에서는 지배자들의 권력이 그 사회의 탈주를 차단하고 동여매고 있다. 즉 권력을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원하는 지배세력은 자신들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는 세력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적절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들을 길들이거나 효과적으로 붕괴시키고자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잘 정돈되고 질서화되고 코드화된 상태에서 권력은 자신의 얼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배권력의 특징은 오히려 권력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 모습이 더 자세히 드러내는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들이 생길 때마다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탈주를 봉쇄한다.35) 따라서 탈주를 추구하는 탈영토화는 그것을 상쇄하는 재영토화에 의해 파괴될 수 있으며, 실제 그러한 위협에 의해 탈주는 정지될 수 있고, 이것이 탈주선이 가지는 첫 번째 위험이다.

또한 탈주선이 기존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힘을 상실하고, 더불어 새로운 흐름을 창안할 능력마저 상실한다면, 그것은 돌변하여 현실세계를 증오하고 파괴시키는 어두운 죽음의 선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이 탈주선이 갖는 두 번째 위험이며,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파멸의 길을 걸었던 대표적인 죽음의 선이 파시즘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국가 혹은 한 명의 지도자가 위로부터 대중을 하나로 묶고 통합하여 형성된다. 하지만 파시즘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대중 개개인의 욕망이 상호 소통·작용하면서 만들어지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대중운동이라는 것이다. 비록 히틀러, 무솔리니 등 선동자가 존재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대중들은 국가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열렬하게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권력과는 다른 유형인 대중들의 열망은 민족주의로 왜곡되어 유태인 학살이라는 끔직한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미국의 KKK단도 탈주가 파괴의 파시즘으로 전도된 하나의 예로 꼽을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선을 전적으로 신봉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주선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보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선의 유형들을 규정할 수는 있지만,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탈주선들이 반드시 창조적이라거나 매끄러운 공간들이 분할된 혹은 홈 패인 공간 보다 나은 것이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36)

표면적으로 이들이 유목민, 전쟁기계, 탈주선, 매끄러운 공간 등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즉 홈 패인 공간은 매끈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리고 매끈한 공간은 그 한계를 보완하여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철학의 핵심인 것이다.

Ⅲ. 결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사상에는 기관 없는 신체/기관화, 탈영토화/(재)영토화, 탈코드화/(재)코드화, 탈지층화/지층화 등 크게 두 개의 축이 있다. 전자와 후자의 개념을 구분하는 요소는 바로 욕망이다. 여기서 욕망 개념은 결여로서의 욕망이 아닌 생산으로서의 욕망이며, 니체의 용어로는 ‘권력의지’이며, 스피노자의 용어로는 ‘코나투스’에 가까운 개념이다.

욕망에 의해 강렬도의 분포가 변화하고 그에 따라 어떤 기관(영토)이 형성되기도 하고 기관 없는 신체(탈영토화)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대략적인 들뢰즈와 가타리 사상의 얼개이다.

다음 단계로 이들은 위의 기본 틀을 실질적으로 예증하기 위해,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 및 사건을 유형적으로 분석한다. 『안티-외디푸스』에서는 원시사회/전제주의/자본주의 분석과 정신분열증/편집증 연구가 진행되었고, 『카프카』에서는 문학의 예를 빌어 설명했으며, 『천의 고원』에서는 정치학, 언어학, 음악, 미술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전쟁기계라는 생경한 개념까지 동원하여 여러 현상의 질적 차이를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가 보여주는 특징은 다음과 같이 대략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모든 것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욕망을 상정하고, 그것을 생성, 생산, 창조 등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힘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결핍, 결여, 부정을 모른다.

둘째, 기관화를 경계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의 고정적인 가치, 체계, 질서 등을 거부하는 것이며, 지배세력의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분자적 흐름을 중요시하며 사회의 다원화 경향을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이론이다. 셋째, 탈주가 중시된다. 탈주는 현실도피가 아닌 현실을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생성능력이다. 사회를 탈주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사고와 가치를 생산하여 차이와 복수성을 긍정하고 나아가 그 사회를 보다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넷째, 탈주선은 고유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탈주선은 지배권력에 의해 재영토화되어 차단되고 소멸될 수 있으며, 더불어 긍정적인 생성능력이 고갈될 경우 부정적인 죽음의 선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점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열린 체계로 그 안에는 풍부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본고는 결과적으로 이들 사상의 드넓은 바다를 단지 하나의 협소한 시점으로 재단하고 동결시켰다는 점에서 이들의 방향과는 반대로 진행되었다는 한계가 역설적으로 지적될 수 있다. 또한 우리 시대에 문화 현상 이해에 있어서 유목주의를 직접적으로 적용시키지 못한 점은 또 하나의 부족한 점이며 후일의 과제로 남겨두어야 할 부분이다.


 


1) ‘유목(nomad)’이란 용어에 대해 본고에서는, 좁은 의미에서 이들이 『천의 고원』 12장에서 다루는 유목민 연구는 ‘유목론(nomadology)’이라 지칭하였으며, 넓은 의미에서 이들 철학의 특징을 대변할 때는 ‘유목주의(nomadism)’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하였다.

2)들뢰즈의 초기 저술은 언제나 일면에서는 파괴, 일면에서는 건설이라는 비판의 형태를 띤다.(마이클 하트, 이성민·서창현 역, 『들뢰즈의 철학사상』, 갈무리, 1996, p.27.)

 

3)마이클 하트, 위의 책, p.26.

4)로널드 보그, 이정우 역, 『들뢰즈와 가타리』, 새길, 1995, p.30.

5)김필호,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이론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6, pp.6-7.

6)가타리는 1953년부터 자크 라캉(Jacques Lacan)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정신분석학을 연구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라캉주의자 쟝 우리(Jean Oury)가 설립한 보르드 진료소(Clinique de la Borde)에서 ‘제도적 정신요법(institutional psychiatry)’을 실험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영국의 로널드 랭(Ronald Laing), 데이빗 쿠퍼(David Cooper)와 함께 ‘반정신의학 운동(anti-psychiatry movement)’을 주도해 나갔다. 이를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하였으며, 특히 욕망이 상징계 속에서 언어처럼 구조화된다는 라캉의 이론을 거부한다.

7)로널드 보그, 앞의 책, p.150.

8)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와 욕망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기계는 정신분석학과 라캉의 용어로부터 벗어나 다른 길을 걷고자 하였던 가타리가 만든 용어로, 라캉의 구조 개념과 주체라는 혼란스런 개념을 기계로 대치한 것이다. 즉 구조는 정태적인 표상체계의 모델로서는 적절하지만, 역동적인 힘들의 관계로 구성된 무의식과 사회적 장에 적용시키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9) Gilles Deleuze(1990), Negotiations: 1972-1990, trans. Martin Joughi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pp.16-17. (앞으로 N으로 약칭)

10)Gilles Deleuze & Felix Guattari(1972),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77), p.299. (앞으로 AO로 약칭)

11) N, p.16.

12)질 들뢰즈, 이호영 역, 『욕망과 쾌락』,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적 사유』, 푸른숲, 1997. p.110.

13) AO, p.27.

14)AO, p.30.

15)가타리는 대표적으로 메어리 반스 분석을 통해 정신분석학의 가족주의를 비판하며, 욕망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펠릭스 가타리(1977), 윤수종 역, 『분자혁명』, 푸른숲, 1998, pp.143-157. 참조: 앞으로 RM으로 약칭)

16)김필호, 위의 책, p.2.

17)RM, p.278.

 

18)강렬도는 강도, 강밀도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발생학자인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물리적으로는 준안정적인 상태에서 안정적인 상태로 이행하게 하는 잠재된 에너지이다. 따라서 힘의 강도 또는 힘이 집약되거나 응축된 정도를 의미하며, 힘의 변환을 통해 생성과 변이를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즉 강렬도의 분포에 따라 하나의 기관이 다른 기관이 되는 것이 가능한 실재적 이유를 보여준다.(이진경, 『노마디즘1』, 휴머니스트, 2002, pp.460-461.)

19)이진경, 앞의 책, p.465.

20)질 들뢰즈(1981), 하태환 역,『감각의 논리』, 민음사, 1995, p.78.

21)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1980), 김재인 역,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304. (앞으로 MP로 약칭)

22)동물의 행동에서 나온 개념으로 동물이 영토(territoire)를 형성하고 그것을 버리고 혹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행태로부터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territorialisation)’와 ‘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의 개념을 추출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성질의 무언가 위에서 새로운 영토를 재확보하는 행동으로부터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의 개념을 만든다. 따라서 탈영토화는 어떤 영토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영토를 다른 것의 영토로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것을 재영토화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이 개념들을 다른 분야로 확장시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태어나는 행위에서부터 그의 앞다리를 탈영토화하며, 그것을 땅으로부터 거두어내어 손으로 삼고, 나뭇가지들이나 연장들 사용하기 위해 그것을 다시 재영토화한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1991), 이정임·윤정임 역,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p.100.)

23)MP, pp.308-309.

 

24) 『천의 고원』은 전작의 정교한 도식들을 보충하기보다는 더욱 복잡화시키고 있으며, 몰적/분자적이라는 대립 대신 몰적/분자적/노마드적이라는 삼원도식이 발견된다.(로널드 보그, 앞의 책, p.201.) 욕망하는 기계, 욕망하는 생산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그 대신 욕망과 배치, 기계라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사용되며 욕망에 비해 배치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더불어 기관 없는 신체가 죽음의 선을 그리는 텅빈 기관 없는 신체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절대적 탈영토화의 긍정성을 부여하는 일관성의 구도라는 개념이 새로이 등장한다.(이진경, 앞의 책, pp.153-154.)

25)로널드 보그, 앞의 책, pp.201-202.

26)MP, p.676.

27)전쟁은 단어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전쟁 개념은 니체가 그리스 정치를 논할 때 사용하는 아곤(agon: 선의의 경쟁)과 가깝다. 이는 안타곤(antagon: 적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새로운 가치와 정치를 창안하지만 그것이 적대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기술이다. 그리스인들은 불화와 경쟁이 사라지고 어느 하나에 포섭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매우 꺼렸다고 하는데, 그런 통합된 세계가 바로 단일한 중심을 갖는 국가라 볼 수 있다. 이들이 의미하는 전쟁은 적대를 만들지 않으면서 다른 종류의 삶이나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경쟁하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를 방해하거나 비난하는 부정적 방식으로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한다.(이진경, 『노마디즘2』, 휴머니스트, 2002, pp.297-299.)

28) MP, p.671.

29)MP, p.678.

30)이밖에 이들은 전쟁기계의 특징을 전쟁기계의 공간·지리적인 측면, 산술적 또는 대수적 측면, 감응적인 측면 등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여 정착민의 삶과 유목민의 삶을 대비한다.

31)MP, pp.799-800.

32)MP, p.810.

33)들뢰즈와 가타리는 사회가 선(線)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선이란 일종의 물질적, 정신적 욕망의 흐름을 의미하는데, 사회에는 다양한 선들이 존재하며 서로 관계·작용함으로써 다양한 욕망의 배치를 구성한다. 구조주의가 사물을 점으로 보며 일정한 체계와 구조 속에서 고정된 상태를 중시한다면, 선은 유동적인 상태, 운동, 흐름 등을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선의 질적인 차이와 양상에 따라 선의 유형을 경직된 선, 유연한 선, 탈주선으로 구분을 한다.

34)N, p.19.

35)MP, p.429.

36) N, p.33.

 

* 참고문헌

 

  • 김필호,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이론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6.
  • 로널드 보그, 이정우 역, 『들뢰즈와 가타리』, 새길, 1995.
  • 마이클 하트, 이성민·서창현 역, 『들뢰즈의 철학사상』, 갈무리, 1996.
  • 이진경, 『노마디즘1』, 휴머니스트, 2002.
  • 이진경, 『노마디즘2』, 휴머니스트, 2002.
  • 질 들뢰즈, 하태환 역, 『감각의 논리』, 민음사, 1995.
  • 질 들뢰즈, 이호영 역, 『욕망과 쾌락』,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적 사유』, 푸른숲, 1997.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역,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동문선, 2001.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역,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2』, 새물결, 2001.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이정임·윤정임 역,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 펠릭스 가타리, 윤수종 역, 『분자혁명』, 푸른숲, 1998.
  • Deleuze, Gilles. Negotiations: 1972-1990. Trans. Martin Joughi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 Deleuze, Gilles and Guattari, Felix.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7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