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경계> 2001년 여름호, 통권 1호.
고병권-스피노자의 코뮨주의(문학과 경계 2001년 여름호, 통권1호).pdf
스피노자의 코뮨주의; 자유를 향한 욕망의 아쌍블라주
- 고 병 권 -
1. 상상
꿈을 해석하는 프로이트도 꿈을 꾸듯이 ‘상상’(imagination)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유물론자도 상상을 한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유물론자들은 상상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상상이란 현실에 대한 적합한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라리 맑스가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듯이 ‘허위의식’에 가깝다. 사실 유물론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상상의 관념성이 아니라 물질성이다. 상상은 놀라운 힘을 지녔다. 실존하지 않는 ‘도깨비’도 상상의 힘을 통해서라면 어린아이를 이불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종종 허위의식은 과학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중들을 장악한 허위의식은 그 자체로 물질적 힘이 된다. 과학보다 강한 허위의식 앞에서 유물론자들은 골치 깨나 썩었다. 왜 대중들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예속을 원하는가? 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질서의 강력한 수호자로 나서고, 대중들은 파시즘의 열렬한 지지가가 되는가? 무지한 대중들을 탓하는 계몽주의로는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상상은 비난을 통해서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상을 이야기하며 스피노자라는 이름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 할 지도 모르겠다. 합리주의자나 이성주의자라면 몰라도 상상에 대한 분석가로서 스피노자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상상에 관한 그의 놀라운 언급들을 쉽게 놓치곤 한다. 그러나 상상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가장 자주 출현하는 낱말 중의 하나다. 그는 상상이 결코 사라질 수 없으며, 우리의 행동은 주로 ‘~라고 상상하는 한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상상은 인간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인식 형태다.
‘상상’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에티카'의 전반부와 '신학정치론'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에티카' 전반부에서 상상은 “외부 사물이나 자신의 신체에 대한 혼란스럽고 손상된 인식”(EI; 정리291))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서 그의 관심은 조금 다르다. 그는 상상을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주장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상상이 사람들에게 확신을 가져오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진전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칼뱅파와 공화파의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네덜란드의 대중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표방하고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칼뱅파를 지지한다. 이는 대중들 스스로의 배신이었다.2)
스피노자는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에티카' 저술을 중단하고 급히 '신학정치론'을 써나갔다. 당시 그에게는 예속을 자유나 되는 듯이 투쟁하는 대중들의 비합리성이 최대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의 문제 의식은 '신학정치론'의 서문과 제1장을 통해 확인된다. “대중들은 왜 스스로의 예속을 원하는가?”(TTP; 5) “우리는 확실한 이성적 원리들을 통해서보다는 상상을 통해서 인식했던 것의 확실성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탐구해야 한다.”(TTP; 26) 상상에 접근하는 그의 모습은 의사를 닮았다. 의사는 질병을 도덕적으로 비난함으로써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꿈을 마귀들의 장난이나 영혼의 혼동으로부터 구해낸 프로이트처럼 그는 상상을 하나의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무질서는 나를 웃거나 울게 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더 나은 고찰을 하게 만듭니다3).”(편지 30)
2. 전략
완성되지 못한, 혹은 완성될 수 없었던 저작 '지성개선론'에는 더 이상 미신에 현혹되지 않고 훌륭한 본성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TdIE; 11) 첫째는 본성[자연]을 이해할 것, 둘째는 그러한 본성을 얻는 데 바람직한 사회를 형성할 것, 셋째는 교육과 관련해서 도덕 철학에 관심을 가질 것, 넷째는 건강(의학)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 끝으로 기계론(역학, Mechanics)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 등이다. 여기에 제시된 내용들은 스피노자의 이후 저작들을 통해서 더욱 발전된다. 상상에 대한 관심은 그를 인간의 본성, 특히 정동(affectus)에 대한 연구로 이끌어 나갔으며, 의학과 역학은 도덕이 아니라 자연학의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그는 인간 본성을 공동체 속에서 이해하고 공동체의 원리를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에서 끌어냄으로써 독특한 유물론적 정치이론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지성개선론'에 제시된 계획들은 스피노자와 연구 결과를 주고받았던 서클의 구성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시의 학문은 오늘날과 달리 결코 교수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실험 과학의 경우가 특히 그랬는데, 반사법칙의 연구는 안경상과 렌즈 제조업자인 엘레스(Jelles)와 스피노자가 수행했고, 슐러(Schuller)와 마이어(Meyer), 바우메스터(Bouwmeester), 그리고 오스텐스(Ostens)는 신체의 바로 그 개선(emendatio)에 전념하는 의사들이었다. 드 브리스(De Vries)는 무역업에 종사했고, 브레서(Bresser)는 맥주 제조업자, 블라옌베르흐(Blijenbergh)는 곡물도매상, 후데(Hudde)는 이자세(利子稅)를 연구하는 수학자였다4). 이들은 지식이 신념이나 소망보다는 현실적 결과를 산출해내는 원인에 대해 말해주기를 갈망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연구는 이상한 역설을 가져왔다. 그는 누구보다도 신의 절대성을 강조했던 사람인데 그 절대성 때문에 신의 존재가 의심받게 되었다. 세네카의 말처럼, “어디에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Ubique et nusquam-Musquam enim est, qui ubique est).” 신은 절대성을 소유하기 위해서 별도의 자유 의지를 갖거나 이상한 기적을 행해서도 안 된다. 또 신의 절대적(!) 질서는 어떤 무례한 행동도 신의 뜻을 어기는 게 아닌 것으로 만든다. 결국 절대적 신론이 절대적 무신론으로 읽혔고, 절대적 필연이 절대적 자유로 읽혔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사상이 지닌 의미를 알고 있었으므로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미신에 사로잡힌 대중들에게 참된 관념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독실한 신자들은 이성적으로는 스피노자를 반박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는 그것이 자신들의 신앙을 부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스피노자는 1665년 유태 공동체에서 파문되었을 뿐 아니라 한 광신도의 칼에 찔리기도 한다. 지배자들과 신도들이 스피노자 사상이 갖는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느꼈듯이, 스피노자 역시 잘못된 상상에 예속된 대중들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신학정치론'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저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물론 사람들은 저자가 누구인지 금새 알아차렸다). 그는 광신도의 칼에 찢긴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조심하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삼았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그의 열정은 확고했으며, 그것을 무척이나 대중들과 공유하고 싶어했다. 또한 그는 한 번도 외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지 않았고, 한 번도 사상의 자유를 포기했던 적이 없다. 언젠가 팔라틴(Palatine) 선제후로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직을 제안 받았을 때도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팔라틴은 공적으로 확립된 종교를 교란하지만 않는다면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말했지만, 스피노자는 그 제안 자체에 이미 자유에 대한 불확실한 제한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한다.(편지 47-48) 더구나 “공공 비용으로 건립된 대학들은 대중들의 능력을 계발시키기보다는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TP; 206-207)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다른 학자들의 수다에 비하면 거의 몇 마디 말밖에 하지 않았던 스피노자는 당대에 이미 지나치게 높은 악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몇 마디 말은 항상 지형을 뒤흔들만한 파괴력을 지녔다.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은 그의 침착함과 강력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후세의 그의 지지자들, 특히 유물론자들은 그의 전략에 대해 통쾌함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알튀세의 말처럼 마치 도시 한복판을 뒤흔드는 거대한 게릴라전이었다. “스피노자는 신에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였다. 최고의 전략가인 그는 견고한 적의 사령부를 포위하는 데서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마치 자기가 자신의 적인 양 적들 사이에 자리잡았고, 그들로부터 어떤 의심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점령군 대포를 점령군 자신을 향해 돌려놓는 것처럼 적의 이론적 요새를 완전히 돌려놓는 방식으로 재배치했다. ... 군사적으로 말하자면 이 혁명적인 철학적 전략에 필적할 만한 것은 오직 도시게릴라전 같은 것이다.”5)
3. 인간
자신의 계획대로 상상에 대한 연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로 발전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철학자의 이해를 조롱한다. “철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있어줬으면 하는 인간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TP; 11)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철학자보다 정치가들이 훨씬 낫다. “정치가들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경험’이라는 소중한 스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TP; 13)
스피노자는 인간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쟁이란 인간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물의 일반적 이미지에 관한 논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EII; 정리40의 주석1). 우리는 우리 신체를 자극하는 상상의 수가 너무 많은 경우 미소한 차이들을 다 상상해낼 수 없으므로 그것들을 인간, 말, 개 등의 일반 개념으로 묶어낸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관찰하는 습관과 자극받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여러 정의가 난무하게 된다. 가령 ‘웃을 수 있는 동물’이라거나 ‘두 발을 가진 날개 없는 동물’이라거나 ‘이성적 동물’이라거나 하는 따위의 여러 정의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들은 자신의 신체를 자극하는 특성들을 공통적으로 묶어낸 것에 불과해서 그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주지 못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것의 본질은 “그것이 제거되면 그 사물이 필연적으로 없어지는 것, 또 그 사물이 없으면 도저히 생각될 수도 없는 것”(EII; 정의2)이며, 우리가 그것을 적합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외적인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것에서 나와야 한다.(EII; 정의4) 어떤 사물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의 내적인 본질, 그 특이성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오해하므로 신과 세계도 오해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론이다. 사람들은 세계가 어떤 특정의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EI; 부록) 이 목적을 가장함으로써만 종교는 신도들을 늘렸고, 정치는 대중들을 통치했다. 가령 모든 자연물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만들었으며, 인간은 신을 숭배하도록 만들어졌다. “비추기 위한 태양, 물고기를 기르기 위한 바다, 보기 위한 눈, 씹기 위한 이, 먹이감으로서의 동물과 식물.”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들이 생각한 목적에 비추어 판단한다. 신에 대해서조차 인간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판단한다. 무언가를 베푼 신은 반드시 무언가를 돌려 받으려 한다. 그는 자애로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선과 악, 질서와 혼란, 미와 추의 개념이 이러한 인간학적 사고와 목적론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6).
스피노자에 의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며, 세계 의미의 숙달자라는 주체성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깨진다”.7) 차라리 인간은 ‘과오의 동물’(TP; 13)에 가깝다. 인간의 과오를 걱정했던지 신도 인간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신의 이미지를 본 적이 없으므로, 그들이 만든 어떤 이미지도 신과 닮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TTP; 17)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스스로를 예속시켜왔다. 신 자신은 물론이고 신을 대체해 온 많은 개념과 제도들(아마도 대표적인 우상은 국가나 화폐일 것이다)을 우상으로 받들고 스스로를 그것에 복종하게 만든 노예들, 그것이 솔직한 인간의 상이 아니겠는가.
4. 욕망
스피노자의 냉정한 인식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사물들과 다름없는 유한한 양태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세계가 인간만을 위해 준비된 것도 아니고 인간이 자연 바깥에 서 있는 사물도 아니다. 그 동안 인간에 대해 서술한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대단히 높이 평가해서 “자연 안의 인간을 국가 안의 국가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나타나면 인간 본성의 결함으로 돌리고 그것을 [도덕적으로] 비난해왔다.”(EIII; 머리말) 스피노자는 이들과 달리 철저한 자연주의 방식을 택한다. “나는 인간의 행동과 충동을 선, 면, 입체를 다루는 방식으로 고찰할 것이다.”(EIII; 머리말)
스피노자가 인간 본성에 접근하는 방식은 사물을 다루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물이 실존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존하게 하는 원인에 의해서다. 그 원인이 다른 원인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 한 그 사물은 계속해서 실존할 것이다. 마치 관성의 법칙을 주장한 갈릴레이처럼 스피노자는 실존하고 있는 사물에 외부 원인이 가해지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실존할 것이라고 말한다.(EIII; 정리4) 그리고 실존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고자 하는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그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한다.(EIII; 정리7) 우리가 본질을 “그것 없이는 사물이 없어지는 것이며, 또 사물 없이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EII; 정의2) 외적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실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야말로 그것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코나투스(conatus)다.
다른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코나투스를 자신의 본질로 가진다. 스피노자는 실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여될 경우 그것을 충동(appetite)이라 하고, 정신에만 관계할 때를 의지(will)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우리가 의식할 경우 그것이 바로 욕망(desire)이다.(EIII; 정리9의 주석) 스피노자는 충동과 욕망의 차이에 대해 “욕망은 자신이 충동을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 관계된다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로부터 비합리적 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 놀라운 결론을 도출해낸다. “사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해서 그것을 향하고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망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망하기 때문에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EIII; 정리9의 주석) 참다운 진리나 참다운 선보다도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할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문제를 “정동의 기원과 본성에 대한 연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동(affectus)’은 적당한 번역어를 고르기 참 힘든 개념이다. 사정은 서구 사회라고 덜하지 않아서 스피노자 전집의 편집자인 컬리(Curley)는 고전이나 중세 라틴어에서의 단어의 의미가 오늘날과 많이 다르며, 스피노자의 용법도 특정화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한다.8) 스피노자의 정의는 이렇다. “나는 정동을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affectio)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고 이해한다. 그 변용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때의 정동을 나는 능동이라고 이해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를 수동으로 이해한다.”(EIII; 정의3)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보자면 우리는 항상 자신의 능력을 확장해서 실존을 보존하고 강화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실존은 다른 사물들과 외적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속에서 우리 능력의 확장과 실존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외부적인 사물들을 만날 때마다 능력의 변동을 겪게 되는데, 그 때 나타나는 신체의 변용과 그것에 대한 관념이 정동이다. 그러나 정동에 대한 정의는 모호한 면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스피노자가 세 가지의 기본적인 정동이라고 언급한 욕망과 기쁨(Joy), 슬픔(Sadness)을 이해하는 편이 정동을 이해하는 더 쉬운 길인지도 모른다.
앞서 보았듯이 욕망은 우리 실존을 지키고 강화하려는 인간적 노력이다. 기쁨과 슬픔은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나쁜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했는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했는지” 그 변화에 대해 느끼는 정동이다.(EIII; 정의11의 주석)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서 놓는데(EIII; 정서의 정의, 1), 충동이나 의지, 욕망은 명칭만 다를 뿐 사실상 인간에게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확장될 때 기쁨을 얻고, 그것이 감소될 때 슬픔을 얻는다. 우리는 기쁨을 주는 것을 욕망하고 슬픔을 주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에티카'의 전반부가 실체와 속성, 양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후반부는 욕망과 기쁨, 슬픔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불행히도 사람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양태들은 스스로 정동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이 기쁨의 원인으로 되지 못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자신의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실존을 위협하는 원인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안에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그 사물을 파괴할 수 있는 더 강한 것이 존재한다.(EIV; 공리) 때문에 알튀세는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능력과 운을 함께 필요로 한다고 말했는데9), 능력이 약할수록 운명은 운에 종속되기 쉽다. 자신의 정동이 외적인 존재와의 마주침에 의존하면 할수록 그는 나약한 존재이며 수동적인 존재이다. 스피노자는 정동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예속이라는 말로 표현했다.(EIV; 머리말) 예속은 직접적으로는 외적인 이유(가령 공포) 때문에, 간접적으로는 둔감함이나 무능력 때문에 자신에게 슬픔을 주는 것을 택하도록 강제된 상태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원인이 되었을 때만이 우리 신체에 가장 적합한 만남을 찾을 수 있고 능력의 증대도 보장받을 수 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수동적인 부분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능동적인 부분을 최대로 확장해야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개된 '에티카'가 정동의 기원과 본성(제3부)에서부터 인간의 예속과 정동의 힘(제4부), 인간의 능동과 자유(제5부)로 나아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5. 신체
우리가 인간의 예속과 예속에 대한 열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인간의 자유로 변환시키기 위해서 잘 이해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정동은 기본적으로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구별하는 것 모두 신체 상태와 밀접히 관련된다. 가령 배가 고프거나 혹은 예전에 먹었던 어떤 맛있는 음식물이 생각날 경우, 우리는 이로써 새로운 신체 상태로 되며 그 음식물을 먹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음식물이 위를 꽉 채운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욕망하지 않게 된다. 스피노자는 한 욕망이 두 가지 다른 원인(먹게 하고, 또 먹지 말게 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며, 두 욕망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EIII; 정리 59의 주석). 그리고 새로운 욕망이 생긴 것은 신체가 새로운 상태로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욕망은 신체 상태에 따라 항상 새로워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쁨과 슬픔의 기준도 신체에 따라서 달라진다. 배고픈 신체에게 빵은 기쁨을 주겠지만 배부른 신체에게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고 그 슬픔이 더 강해진다면 그의 신체는 파괴된다.
욕망은 코나투스에 대한 인식이며 신체와 정신 모두에 관계된 것이지만 특히 신체와 긴밀하다. 그 동안 서구 철학은 정신에 비해 신체를 낮게 평가해왔다. 신체는 정신의 노리개에 불과하거나 정신의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신체는 불멸하는 정신과 달리 죽음과 동시에 해체된다는 믿음이 서구 사유를 지배해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스피노자와 동시대인이었던 데카르트가 그랬다. 데카르트는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분명히 했고, 잘 훈련된다면 인간의 정신은 신체의 정동에 대해 절대적인 지배권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정신은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겨냥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굳게 확신한다.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의해서만 운동하고 정지하며, 오직 정신의 의지나 사고력에 의존하여 여러 가지를 행한다.”(EIII; 정리2 주석) 그러나 스피노자가 보기에 정신이나 신체는 모두 동일한 존재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속성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 존재를 사유의 속성에서 보느냐 연장의 속성에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며 각 속성들은 존재론적으로는 일치한다. 따라서 그가 능동적인 존재라면 신체와 정신 모두가 능동적일 것이고, 그가 수동적인 존재라면 신체와 정신 모두가 수동적일 것이다.(EIII; 정리2 주석) 즉 신체가 능동적인 사람은 정신도 능동적일 것이며, 신체가 수동적인 사람은 정신도 수동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이 정신의 결단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 경험은 반대로 신체가 활발하지 못할 경우 정신이 사유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가?”(EIII; 정리 2의 주석) 스피노자는 “신체의 활동이 신체의 지배자인 정신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신체의 본성에 관한 단순한 고찰에서 무엇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건 합리적인 정신이 아니라 강한 정동이다. 정신 예찬론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정동에 대한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젖먹이가 자유 의지로 젖을 욕구한다고 믿으며, 성난 소년은 자유 의지로 복수를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는다.”(EIII; 정리2 주석)
참된 인식에서 생기는 욕망도 우리를 사로잡는 다른 정동에서 생기는 욕망에 의해 붕괴되거나 억압되는 일이 가능하다.(EIV; 정리 15) 참된 것이든 아니든 그것이 정동인 한에서는 다른 정동에 의해 억압될 수 있다. 정동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참된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동과 신체적 능력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낫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과 스피노자의 '지성개선론'의 차이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6. 만남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불행히도 우리의 실존을 지속시키는 힘은 제한되어 있으며,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해 무한히 압도당한다.(EIV; 정리3) 우리 신체의 정동은 외적 요인들에 의해 훨씬 크게 좌우된다. 알지 못하는 외적 원인이 개입한 수동의 상태에서는 변용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지는 게 불가능하다. 상상이 지배적이라는 것은 외적 요인에 대한 우리의 예속을 인식의 형태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즉 신체의 능력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이 좋은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세계라는 거대한 상상의 바다 속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10)
그렇다고 우리 자신의 외적 원인을 추적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뿐 아니라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가령 지붕 위에서 돌이 떨어져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왜 바람은 그 때 불었는가? 바다가 거칠어졌으므로? 왜 바다는 그 때 거칠어졌는가? 스피노자는 이런 식의 무한 계열을 “무지의 피난처로의 도피”라고 불렀으며, 초자연적인 원인이나 신을 불러오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보았다(EI; 부록).
이와 반대로 스피노자는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 자신이 원인일 수 있는 능력에서 시작하자고 말한다.(TdIE; 17)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긍정함으로써만 그것의 확장을 모색할 수 있다. 외적 원인을 찾는 사람과 자기 능력을 원인으로서 긍정하는 사람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스피노자는 이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철을 단조하는 일을 예로 들었다. 먼저 외적 원인을 찾는 사람의 경우. 철을 단조하기 위해서는 큰 망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망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과 그것을 녹일 용광로, 모양을 담을 거푸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철과 용광로, 거푸집을 만들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철을 단조해서 무언가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능력을 긍정하는 사람의 경우. 우리에겐 철이 있고, 용광로와 거푸집을 가진 친구가 있으므로 망치를 만들 수 있다. 또 망치가 있으므로 철을 단조해서 낫을 만들 수도 있다. 낫이 있으므로 벼를 벨 수 있고, 그것을 팔아서 무언가를 살 수도 있다. 이는 언어 배우기와도 같다. 한편으로 우리는 모든 단어를 알지 못하는 한 단 한 단어도 배울 수 없다. 어떤 단어에 대해 사전을 펼치면 다른 단어가 나오고 그 단어를 찾으면 다시 또 다른 단어들이 나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사과라는 단어를 알면 배와 복숭아를 쉽게 배울 수 있다. 아무리 작더라도 능력에서 시작하자는 스피노자 말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능력이 얼마나 크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능력과 결합해 있느냐, 혹은 거기서 시작할 수 있느냐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고, 이성적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주어진 환경 속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본성에 맞는 것을 천천히 가르쳐주고 우리를 대신해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차분한 노력을 수행해 줄 수 없다.11) 어떤 면에서 모든 인간은 어린아이다. 아주 높은 정도로 외적인 원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무능력하고 노예적인 상태이기도 하다. 스피노자가 자주 드는 예는 최초의 인간 아담이다(EIV; 정리 68, TTP; 35, 63 등등). 아담은 인간의 어린 시절이다. 아담을 자유롭고 완전한 인간으로 그리는 기독교의 전통에 반대해서 스피노자는 아담을 슬프고 약하고 예속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신은 무지한 아담, 도와줄 친구가 없었던 아담에게 어떤 과일이 그의 신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독이라는 점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다른 짐승에게는 약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아담의 신체에는 맞지 않는 과일을 그저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아이처럼 그것을 어떤 도덕적 금지로 해석해서 불복종했고, 결국 풋과일에 배탈이 나듯이 능력의 감퇴를 겪게 되었다.
언제든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외적 사물들에 노출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전략이란 신체를 강화하는 일 이상이 될 수 없다. 다양한 자극에 반응할 수 있도록 신체의 조성(composition)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강하게 배양하는 것이 필요하다(EIV; 부록 제27항). 다양한 사물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좀 더 나은 인식이 가능하다. 그리고는 기쁨을 주는 신체를 찾고 슬픔을 주는 신체를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인간은 서로 도와야 한다. “인간이 서로 돕지 않는다면 개개인의 힘으로는 결코 충분치 못하다.”(EIV; 부록 제28항) 개인이란 아담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나약한 존재의 이름이다.
우선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신체를 찾아내고 그것과 결합하는 일이다. “우리들 외부에는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 우리들이 추구할 만한 것이 많이 주어졌다. 그 중에서 우리들의 본성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생각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본성이 같은 똑같은 두 개체가 서로 결합한다면 단독의 개체보다 두 배의 능력을 가진 개체가 되기 때문이다.”(EIV; 정리18의 주석)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친구이다. 친구는 서로 생김새가 다르고 잘하는 일이 다르다고 해도 서로 통하며 어떤 점에서 가장 닮은 존재다. 오히려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정을 맺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일이다. 그들이 하나의 신체를 구성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맞는 또 다른 신체와의 만남에 쓰일 더듬이를 두 배로 확보할 수 있으며, 위기에 대처할 능력도 두 배로 신장된다. 스피노자는 어떤 편지에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모든 것이 공통적이며, 현명한 자들은 신들의 친구들”이라고 말했다.(편지 44) 진정으로 신과 통하고 신을 이해하는 자들은 신과 친구 관계를 맺지 결코 예속 관계를 맺지 않는다. 뛰어난 철학자들은 항상 진리와 친구가 되고자 했고, 자신의 선후배 철학자들과도 친구관계를 맺고자 했다.
7. 윤리
우리는 어떻게 친구를 알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합체에 실패한 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다. 사랑하던 두 연인은 결혼을 통해 능력을 확장하기는커녕 서로를 제약하고, 친구인 줄 알았던 인간은 결국 적으로 밝혀진다. 모든 문제는 두 신체가 만날 때 일어난다. 기쁨을 주는 만남이 될 것인가, 슬픔을 주는 만남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독이 될 것인가. 신체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적 원인에 대해 한없이 무능력한 우리 자신은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
만남에 있어 ‘좋음’과 ‘나쁨’의 구별 기술, 스피노자는 그것을 ‘에티카’ 즉 윤리라고 부른다. 윤리란 ‘좋음’과 ‘나쁨’을 구별해내는 신체적 기술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비율을 가진 수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부분들의 관계를 깨지 않고 신체적 조성을 늘린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만남이다. 예를 들면 좋은 음식물과 우리 신체의 만남이 그렇다. 우리는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그것과 합체를 하는데 그 합체는 우리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체의 여러 부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하는 만남도 있다. 독극물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 신체는 그 신체와 합체하자마자 각 부분들의 해체를 경험한다.(EIV; 정리 39) 우리 신체가 아주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었다는 점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기쁨을 주지만 전체적으로는 슬픔이 되는 만남도 존재한다(EIV; 부록 30항). 불량식품이 좋은 예이다. 우리 혀끝에서는 커다란 기쁨을 제공하지만 흡수되고 나서는 슬픔으로 돌변한다. 스피노자의 충고처럼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좋음과 나쁨의 의미를 선과 악의 문제로 보는 도덕은 신체의 건강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도덕의 계보학'에서의 니체처럼 '에티카'의 스피노자도 도덕과 윤리를 혼동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자연에 대한 잘못된 편견, 특히 인간 중심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EI; 부록).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잡아먹는다고 해서”(TTP; 200) 큰 고기가 악한 것도 아니고 작은 고기가 선한 것도 아니다. 큰 고기에게는 ‘좋은’ 만남이, 작은 고기에게는 ‘나쁜’ 만남이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좋음과 나쁨은 개별적인 신체들의 만남에서만 의미가 있다. 자연 전체에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혹은 어떤 놀랄만한 일도 없다. 혹 작은 고기가 큰 고기를 먹었다면 좀 놀라운 일이겠지만...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EIV; 머리말) 불가피하게 선과 악이라는 말을 쓴다해도 그것은 도덕에서 말하는 ‘만인에게 해당하는 보편 규범’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선과 악이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말들은 남겨두자고 제안한다. 그는 선을 좋음에, 악을 나쁨에 대응시킨다.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말의 쓰임을 신체적 능력의 증감과 관련시켜 이해한다. 신체적 능력을 증대시키는 경우 그것을 선한 만남이라고 말하고, 감소시키는 경우 악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보편적 규범으로서 도덕을 거부했다고 해도 선과 악, 좋음/나쁨의 구별은 여전히 중요하다.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고 좋음을 추구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의 신체는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덕을 능력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EIV; 정의8) 덕이란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고, ‘좋음’으로 인식된 것을 행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예속을 열망하는 대중과 그것을 수치스러워하는 대중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유덕한 존재와 부덕한 존재의 구분은 사실상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에 일치한다. “어떤 사람이 약하고 예속되고 무능하지 않다면 할 수 없고 말할 수조차 없고 믿거나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며, 반대로 어떤 사람이 자유롭거나 강하지 않다면 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12)
누구나 자신의 실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코나투스에서는 유덕한 자와 부덕한 자, 자유인과 노예가 구별되지 않는다. 자유인도 노예도, 현자도 바보도, 정상인도 광인도 자신의 실존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욕망한다.(TTP; 201) 그러한 노력과 욕망은 자연[본성]에서 나오는 정당한 권리이다.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왜 자유인과 노예는 똑같은 행동을 욕망하기도 하고 수치스러워하기도 하는가?
만약 덕이 능력과 같은 것이라면 유덕한 자들은 자신의 능력과 결합되어 있는 자이고, 부덕한 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들이다. 자유인들, 유덕한 자들은 그 절대적 능력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 자신의 능력에서 시작하므로,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이 원인이 되는 행동에서 시작하므로 자신에게 선이 되는 것과 악이 되는 것을 구별할 줄 안다. 자유인은 어떤 작품의 제작자와도 같다.(EIV; 머리말) 어떤 사람이 집 모양의 작품을 짓다가 멈추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집을 짓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제작자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집이니 건물이니, 탑이니 하는 유형들에 대해 이미 보편 관념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이미 완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불완전이니 미완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선악도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주장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하니 악하니 하는 것은 그저 보편 관념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제작자 자신의 판단이다. 자신들이 제작의 원인인 자유인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안다. 노예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자기 행동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외부적 존재이므로 그것이 선이 될 지 악이 될 지를 전혀 모르는 존재다.(EIV; 정리66 보충의 주석, TTP; 206) 단지 그것이 선이 된다는 상상을 실재화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분리해서 부덕한 존재, 무능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을 미신이라고 칭했다. 미신은 공포를 이용해서 대중들을 예속적 존재로 몰고간다. 내세에 닥칠 끔찍한 심판은 물론이고, 현세에서도 규칙 위반에 대한 처벌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게 미신이다. 미신가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만들기보다는 무언가를 못하게 만든다. 미신(사실상 도덕과 법도)의 가장 큰 특징은 금지와 비난이다. “덕을 가르치기보다는 결점을 비난하는 것을 훨씬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이성으로 인도하기보다는 공포로 짓눌러서 덕을 사랑하기보다 악을 피하게 끔하는 것”이 미신이다(EIV; 정리 63 증명).
전제적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비밀도 여기에 있다. 왜 대중들은 자신들의 예속을 구원이나 되는 것처럼 맹렬히 열망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자유를 확장하는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항상 능력과 분리되고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의 권리를 빼앗아 버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를 배우기보다는 복종만을 배워왔고, 복종을 수치스럽게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대중에게 미신보다 강력한 통치자는 없다. ... 전제적 정치의 버팀목, 그것의 최고의 비밀은 대중들 눈가리개로 가리고 그들을 억누르게 만들어주는 공포를 종교라는 그럴듯한 옷으로 가려서 마치 그들이 구원을 위해 싸우는 것이나 되듯이 예속을 위해서도 용감하게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TTP; 5). 그러나 자유인에게 공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자유인은 죽음같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숙고”이기 때문이다.(EIV; 정리 67)
8. 코뮨
자유인은 미신이 아니라 더 큰 신체의 구성에 관심을 돌린다.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돌파하고 외적 원인과의 돌발적인 만남에 대처하기 위해 자유인들은 더 큰 신체를 구성한다. 그들은 사회적 신체(social body)를 만든다. “이성과 경험은 ... 구성원들의 힘을 하나의 신체, 말하자면 사회적 신체에 집중시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수단을 가르쳐주지 않았다.”(TTP; 46) 더 큰 신체는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신체를 갖춘 인간, 즉 집합인(collective person)처럼 움직인다. 사회체는 여러 개체[개인, individual]들이 모인 새로운 개체(individual)다. 새로운 개체는 자신의 실존을 위해 새로운 욕망을 갖는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이론이다.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보다 복잡한 개체, 보다 조성이 큰 개체를 향해 나아가며,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EII; 정리13의 보조정리7)
어떤 이들은 스피노자의 이러한 생각이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하며 국가나 공동체를 하나의 개체로 보지 말고 그저 은유적 표현으로 읽자고 제안한다.13)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합체 후 새로운 신체의 형성은 결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물론 모든 부분들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조화를 이루고 그 신체는 그러한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조화 때문에 각 부분들이 전체에 예속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조화는 부분들이 스스로 전체를 구성하고 그것에 계속 머무를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각 부분들 상호 간의 관계가 이전과 같은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할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부분이 다른 비율을 가지게 된다면, 즉 전체와 다른 정동을 가지게 된다면 부분은 더 이상 전체에 속해 있지 않다. 우리 몸 안에 생겨날 수 있는 암 세포나 유해한 바이러스는 우리 몸 안에 있다고 해도 더 이상 우리의 부분이 아니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자연의 보편적 능력은 개별적 사물들의 능력의 합에 다름 아니다”는 놀라운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TTP; 200) 사실 전체는 ‘전체(Whole)’라기보다는 ‘합(Sum, Aggregate)’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전체는 부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는 부분이 그 구성에 참여하는 내재적 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정치공동체에 대한 이론이 나온다. 비록 스피노자가 국가의 질서를 지켜야 함을 강조하고 국가 안에서만 사람들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의 국가론은 ‘국가’론이기보다는 ‘비국가’론에 가깝다. 그는 자연 상태와 국가 상태를 질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홉스와 구분된다. 인간이 사회체를 구성하는 이유는 자연 상태에서와 동일한 이유, 즉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고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권리가 자신의 능력만큼이었듯이 국가 상태에서도 인간의 권리는 그 능력만큼이다. 국가의 출현과 사회 상태로의 이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은 권리의 양도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생각이 다르다.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자신을 실존하게 하는 능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물론 자신의 실존을 위해서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한 척 할 수는 있다.(TTP; 203) 그러나 자신의 실존을 지키고 능력을 확장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 없어진다면 언제든 합의는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TTP; 204) 그렇게 되면 부분은 더 이상 전체의 부분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새로운 전체를 구성한다.
심지어 노예나 바보, 광인의 경우에도 양도는 없다. 있는 것은 양도에 대한 상상뿐이다. 그러나 도깨비를 믿는 아이에게 도깨비가 힘을 발휘하듯이 양도에 대한 상상을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상상은 현실이 되고 만다. 마키아벨리는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선구자다.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자유로운 대중이 자기의 안녕을 그저 한 사람의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위임하는 데 있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려고 했다. ... 그는 자유의 편이었으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여러 유익한 조언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현명한 인간의 견해에 더욱 이끌리는 것이다.”(TP; 75-76)
우리는 자유인들의 결사체와 국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개인들의 자연권의 포기를 통해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하고, 법을 준수하는지 여부에 따라 정의를 판단한다면, 자유인들의 결사체는 자신의 능력(=권리)에 기초해서 다른 인간과의 우정을 맺고 그것을 자유의 확장 계기로 삼으며 오직 자신들의 신체와 관련된 윤리적 판단을 통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한다. 사실 양도란 자기 능력을 원인으로 갖는 자유인들에게는 미신가들의 장난에 불과하며, 법이란 아담처럼 가장 무능력한 인간에게나 적합한 규칙에 불과하다. 굳이 양도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양도는 “자신이 그 일부인 공동체 전체에 양도하는 것”이다.(TTP; 207)
우리가 초월적인 국가를 비난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유주의와 혼동해서도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개인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정하는 합리적인 판단의 주체이기는커녕 가장 무능력한 존재의 이름이다. “자연권이 개인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공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TP; 31) 자유인들은 아무리 소수라 할 지라도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려고 한다. 양도도 아니고 개인적 존재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집합적 참여와 구성! 그것이 자유로운 결사체가 자신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마지막 저작은 '정치론'이다. 스피노자는 그 저작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하필 그가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부분이 자유인들의 결사체를 지시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장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형태 혹은 국가 형태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통치 형태보다는 자유 형태이며, 국가라기보다는 비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미완의 이유가 단순히 시간의 탓만은 아니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가 그의 민주주의나 자유인들의 결사체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아마도 ‘코뮨(commune)’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에피쿠로스14)의 정원에서부터 맑스의 코뮨주의에 이르기까지 유물론자들이 제시했던 이름이다. 코뮨은 ‘함께’ ‘더불어’라는 뜻을 지닌 ‘쿰(cum)’과 ‘선물’을 뜻하는 ‘뮤누스(munus)’를 조합한 말이다.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관계, 서로에게 능력을 확장시키는 관계,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관계야말로 스피노자가 꿈꾸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현자는 받기보다 나누어주기를 잘한다”는 말에15) 스피노자 역시 동의했으리라.
9. 자유
스피노자의 생각을 더듬다보면 우리는 ‘아쌍블라주’라는 예술적 기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16). 욕망하는 각 존재자들은 자신과 결합할 신체를 찾아 나선다. 우정은 그 첫 번째 만남의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나서 우정은 점차 전체로 확대되어 간다. 아마도 사랑이 다음의 이름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코 ‘지적이지만은 않은’ 사랑이다17). 우리들도 아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에는 약간의 잔혹함이 들어 있다. 더구나 자유를 생산하는 사랑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아마도 스피노자는 평화를 전쟁 없는 상태라고 규정한 홉스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TP; 73) “대중들이 공포에 얽매여 무기를 들지 않는 국가는 전쟁 속에 있지는 않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쟁을 포기하고 국가에 예속되는 게 평화라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든 권력을 한 사람의 인간에 위탁하는 것은 예속 생활을 위해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평화를 위해서는 아무런 필요도 없다.”(TP; 80)
스피노자가 보기에 평화란 “전쟁을 하지 않은 곳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일치, 즉 화합에 있다.”(TP; 80)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을 통해서만 평화는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억압과 예속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전쟁이 없을 지라도 평화란 없다. 스피노자가 전쟁의 권리와 평화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흥미로운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두 나라는 자연 상태의 두 사람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에서 일 뿐이다. 그런데 두 국가에서 평화의 권리는 둘 모두에게 속하지만 전쟁의 권리는 각 국가에 속한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둘이 일치해야 하지만 전쟁은 협정을 체결했던 원인이 무효가 되자마자 각 국가의 권리가 된다. 시민과 국가 사이에 그것을 적용해본다면 우리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시민들은 자신의 능력과 자유를 위해 전체를 구성했다. 하지만 그 구성의 유익함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국가가 자유보다는 예속을 요구하고 있다면 시민들에게는 시민권이 아니라 전쟁권이 주어진다. 시민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언제든 싸울 수 있다. 스피노자가 국가의 목적이 자유에 있음을 주장한 것은 당연하다.(TTP; 259) 진정으로 평화를 해치는 세력은 “억압될 수 없는 자유를 자유로운 국가 내에서 폐지하려고 애쓰는 자들”이다. 자유를 억압하려는 자들이 시민의 전쟁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예속 상태에 있던 대중이 자유를 향하게 되면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된다.(TP; 139) 스피노자에게서 대중을 뜻하는 여러 말들이 대부분 부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18). 대중들은 미신에 사로잡힌 자들이며 스스로 예속을 열망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정치론'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사회의 구성에 있어서 대중들의 능력은 아무리 작더라도 소중한 출발점이 된다. 대중들이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깨닫는 순간 자유는 현실적 힘으로 전화된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모든 논의와 실천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욕망)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능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자유는 정부 형태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네그리의 지적처럼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정부 형태가 아니라 해방 형태이며, 통치 방식이 아니라 자유의 형식이다19).
다행히도 자연은 무한히 선한 자연이다. “자연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혹은 욕망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금지하지 않았다.”(TP; 35, TTP; 202) 자연은 자유를 향한 모든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20) 자연은 우리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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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스피노자 저서의 출전과 인용 방식은 다음과 같다. '에티카'의 경우에는 “E”라고 쓰고 그 옆에 로마자로 부를 표기하고 정의나 정리 등을 표기했다. 가령 제3부의 정의 4라면 "(EIII; 정의4)"의 형식으로 표기했다. 참고한 원전은 영역본(tr. E.M. Curley,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Vol1.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그리고 국역본(강영계 옮김, '에티카', 서광사, 1990)이다.'지성개선론'은 약호를 “TdIE”로 했고 위의 컬리(Curley)가 펴낸 전집 1권의 쪽수를 표시했다. '신학정치론'은 약호를 “TTP”로 했고 쪽수는 영역본(R.H.M. Elwes, The Chief Works of Benedict De Spinoza, Vol. I., Dover Publications, 1951)을 기준으로 했다. 그리고 '정치론'은 약호를 “TP”로 했고 쪽수는 국역본(김성근 옮김, '국가론', 서문당, 1978)을 기준으로 했다. 마지막으로 편지는 “(편지)”로 표시했으며, 참고한 원전은 영역본(tr. S. Shirlley, Spinoza- The Letters,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95)이다.
2) G. Deleuze, Spinoza-philosophie pratique,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1999, 19-20쪽.
3) 물론 스피노자가 대중들의 야만적 행동에 분노를 삭히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1672년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대중들은 그 책임을 얀 데 비트에게 돌려 그를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는데, 그 때 스피노자는 소식을 듣자마자 <극단적 야만>이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가지고 현장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다행히 화가였던 반 데 스피크(Van der Spyck)가 그 답지 않은(!) 격분을 겨우 가라앉혔다. R. Scruton, Spinoza, 정창호 옮김, '스피노자', 시공사, 2000, 28쪽.
4) A. Negri, L'anomalia selvaggia, 윤수종 옮김, '야만적 별종', 푸른숲, 1997, 69쪽.
5) L. Althusser, L'unique tradition matérialiste, 서관모∙백승욱 옮김, '철학과 맑스주의', 새길 , 1996, 161-162쪽.
6) 아마도 스피노자는 신의 진정한 죽음이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니체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다.
7) Althusser, 앞의 책, 155쪽.
8) E.M. Curley,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Vol1.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p. 625. 용어 색인.
9) 알튀세가 든 체자레 보르지아의 예를 참고하라. Althusser, 앞의 책, 169쪽.
10) Negri, 앞의 책, 212쪽. 알튀세는 스피노자의 상상을 생활 세계(Lebenswelt)로 이해하기도 한다. Althusser, 앞의 책, 154쪽.
11) G.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8, p. 241.
12) G.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8, p. 248.
13) L. C. Rice, “Individual and Community in Spinoza's Social Psychology”, Spinoza―Issues and Directions, E.J.Brill, 1990.
14) 스피노자는 확실히 고대 원자론자 에피쿠로스를 닮았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헛된 꿈 때문에 지금의 삶을 망쳐서는 안 되며”, “스스로를 일상의 예속과 정치의 예속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했는데(Epicuros, Kyriai doxai, 오유석 옮김, '쾌락', 문학과 지성사, 1998, 29쪽, 32쪽), 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목표하는 바와 같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에피쿠로스의 등의 원자론자들을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서구의 정통 철학보다 훨씬 높이 평가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소크라테스 등의 권위는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에피쿠로스, 데모크리토스, 루크레티우스, 또는 그밖의 원자론자들과 그 지지자들을 언급했다면 놀랐을 것입니다.”(편지 56)
15) Epicuros, 앞의 책, 30쪽.
16) 네그리와 하트 역시 “존재의 아쌍블라주”로서 스피노자의 사상을 포착한 사람들이다. A. Negri & M. Hardt, Labor of Dionysus, 이원영 옮김, '디오니소스의 노동', 제2권, 177쪽.
17) Althusser, 앞의 책, 177쪽.
18) 스피노자에게서 집합적 개체를 가리키는 말은 최소한 다음의 다섯 가지 술어로 표현되고 있다. populus, plebs, vulgus, turba, multitudo. 그러나 용법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populus”는 인구나 민족 등을 가리키고 있으며, “plebs”는 도시와 농촌에 있는 광범위한 노동계층(노예포함)을 나타내며, 나머지 셋인 “vulgus, turba, multitudo”등은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대체로 군중을 나타낸다. 하지만 “multitudo”의 경우에는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조직화된 “plebs”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Warren Montag, Bodies, Masses, Power -Spinoza and His Contemporaries, Verso, 1999. p. 76
19) A. Negri, 앞의 책, 438쪽.
20)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우리의 모든 욕망을 긍정한다. A. Negri, Spinoza subversif, E´ditions Kimé, 1994,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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