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이야기/시·글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by 마리산인1324 2013. 11. 19.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高靜熙)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1979년 첫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이후,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 등 시집을 간행함.
1984년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19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역임.
1990년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아시아 종교음악연구소 초청으로 아시아의 시인 및 작곡가들이 모여 1년간 벌인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샵’에 참여함.
1991년 6월 9일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타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