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제177호 2010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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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의 삶과 사상
-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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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살던 때
역사는 성공한 혁명가보다는 실패한 혁명가를 더 많이 배출해 냈다. 레닌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스탈린에 축출되고 암살당한 트로츠키는 불운한 혁명가의 전형으로 꼽힌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그나마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이 되어 보기도 했다는 점에서 가장 불운한 혁명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볼리비아 밀림에서 생을 마감한 체 게바라도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그이의 삶이 불행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로 분류되는 혁명가들에 견주면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그래도 나은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번역되는 아나키스트들은 전 세계 도처에서 자신들을 혁명에 내던지지만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미국의 러시아 출신 유대계 아나키스트들인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 역시 ‘저주받은 아나키스트’라는 전형적인 삶을 보여 준다.
19세기부터 이어 온 혁명 분위기는 20세기 초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흔히 이 시기에 자본에 대항해 민중 혹은 노동 계급이 벌인 저항과 투쟁을 유럽 현대사로 국한해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당시 혁명의 열기는 전 세계에 걸친 것이었고, 자본의 횡포에 대항해 민중이 벌인 저항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서구 산업 국가들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국가의 민중들은 제국주의와 분투를 벌여야 했고, 산업 국가의 노동자들은 극심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고 자본의 횡포에 맞서야 했던 때다.
이 시기 독일과 함께 가장 빠르게 산업 국가로 성장하던 미국도 이런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남북 전쟁이 남부 토지 자본가들에 대한 북부 산업 자본가들의 승리로 끝난 뒤 미국은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지역의 산업화 과정이 그러하듯 그 성과는 소수 자본가들만의 몫이었을 뿐이다. 기간이 짧은 산업화는 노동 계급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와 억압을 일으켰다. 특히 미국은 계급 차별만이 아니라 흑인, 중국계 이주민, 아일랜드 이주민들에 대한 민족, 인종 차별까지 혼재한 사회였다. 이런 사회 모순에 대한 미국 노동 계급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벌어진 총파업이었다.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시카고 노동자들은 1886년 5월 1일을 기해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총파업에 돌입했다. 경찰은 파업 농성 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를 했고 어린 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을 죽였다.
이에 노동자·시민 약 3,000여 명은 5월 4일 ‘노동 기사단’이라는 노동운동 단체의 주도 아래 ‘헤이마켓 광장’에 모여 ‘경찰의 살인 만행을 규탄하는 평화 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평온하게 진행되었으나, 경찰이 해산 명령을 내린 직후 폭발물이 터져 경찰 66명이 부상을 당하고 나중에 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를 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로 무정부주의자 8명을 지목하고 체포한다.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는 기각된다. 결국 그이들 가운데 4명은 사형을 당하고 1명은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나중에 이 폭발은 자본가들과 경찰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노동절은 9월 첫째 월요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역시 노동 기사단이 1882년에 처음으로 뉴욕에서 행진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헤이마켓 사건은 경찰과 자본이 조작한 것인데도 당시에는 노동운동이 ‘미국노동총연맹’이 중심이 된 온건파가 주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저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892년 강철왕 카네기의 회사 홈스테드 제강소에서 일어난 파업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대규모로 발생한다. 당시 유럽에 머물고 있던 카네기를 대신해서 공장 관리를 맡고 있던 헨리 클레이 프릭은 공장 주변에 3마일에 이르는 가시 철조망을 치고, 탐조등을 설치하는 한편 핑커튼 흥신소를 통해 무장한 사설 경비대 300명을 고용해 공장을 요새로 만든다. 노동자의 공세로 경비원들이 포위되고 주지사가 군대를 파견하는 소동 끝에 시위는 진압됐지만 그 과정에서 10명이 죽고 60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두 사건은 미국으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되는 두 젊은이들이 아나키스트로서 살게 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당시 젊은 무정부주의자였던 알렉산더 버크만은 엠마 골드만을 비롯한 자신의 동료들과 계획하여 홈스테드 제강 사건의 핵심에 서 있던 프릭을 암살하려 했으나 부상만 입히는 데 그치고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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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의 삶과 사상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은 단순히 같은 시대에 같은 신념을 가진 동지라는 점 말고도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혁명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세한 성장 과정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혁명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삶의 행적을 보인다. 이런 그이들이 미국의 노동운동 과정에서 만났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엠마 골드만은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69년 리투아니아의 코브노에서 유대인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이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는데 아버지의 보수적인 성향은 성격이 자유분방한 엠마 골드만과 어울리지 않았다.
엠마 골드만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은 독일과 러시아의 국경 지대인 쿠를란트였는데 이 지역은 독일 쪽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어린 시절 독일 쪽 분위기에 대한 경험은 매우 지독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혐오와 대지주들이 저지른 횡포, 국가의 폭력성, 여성들을 성 노리개로 여기는 풍토 따위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들은 나중에 그이가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며 국가의 횡포로 일어난 전쟁 따위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로 살아가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7살 이후로는 13살까지 독일 철학자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살았다.
한편 알렉산더 버크만은 엠마 골드만이 태어난 이듬해인 1870년에 엠마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버크만이 태어난 곳은 빌리나라는 곳인데 그이의 아버지는 신발 도매상을 하는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었다.
어린 시절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낸 버크만은 그곳의 혁명 분위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혁명을 동경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버크만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버크만이 막심 삼촌이라고 부른 막내 외삼촌 마르크 나탄손이다. 마르크 나탄손은 아나키스트와 사이가 좋은 인민주의자였는데 나중에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반군국주의자로 활동하였고 러시아 혁명 기간 동안에는 볼셰비키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하다 스위스로 추방을 당한 인물이다. 나중에 버크만 역시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소련으로 건너갔다가 볼셰비키의 전제주의적 횡포를 비난하고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기는 엠마 골드만에게나 버크만에게는 모두 그이들의 평생을 결정하게 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2세를 암살해서 혁명의 순교자가 된 인민주의자들 다섯 명은 엠마와 버크만에게 혁명의 열정을 가슴 속에 자리잡게 했다.
보수적인 부모와 갈등을 겪고 있던 엠마 골드만은 1873년 시작된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란 뜻)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을 결심하고 속옷 공장 노동자가 된다. 이때 그이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러다 언니 헬레나와 함께 1886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엠마에게 미국은 러시아하고 다른, 희망을 걸게 하는 나라였다. 미국은 그야말로 자유를 상징하는 나라라고 여겼다. 하지만 미국의 실상은 러시아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상태였다. 억압의 주역만 차르(제정 러시아의 황제)나 관료에서 자본가로 바뀐 사회였을 뿐이다.
엠마 골드만에게 노동자로 사는 것은 러시아에서나 미국에서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가치와 사회 질서에 저항 의식이 있던 엠마 골드만은 헤이마켓 사건의 주동자로 몰린 아나키스트들의 순교를 보고 처음으로 아나키즘을 알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제정 러시아적 상황의 모순과 노동 현장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막연한 분노만을 가슴에 안고 있던 엠마는 비로소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사상의 갑옷을 입게 된 것이다.
엠마는 자기 삶을 새로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아나키즘 서적을 탐독하고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 같은 성향을 가진 노동자들과 친분도 쌓아 갔다. 이 시기의 학습은 엠마 골드만이 미국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게 되는, 이론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도한 중노동으로 허약해진 그이는 병을 얻어 로체스터에 머물다가 1889년에는 뉴욕으로 가게 된다. 뉴욕 시절은 엠마 골드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뉴욕 시절은 엠마 골드만이 실제로 아나키즘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활동을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가 의미 있었던 까닭 가운데 하나는 엠마 골드만의 평생 동지가 된 알렉산더 버크만을 만난 것이다.
엠마 골드만보다는 약간 늦은 1988년 2월에 알렉산더 버크만 역시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뒤이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이를 고아로 만들었다.
미국에 도착한 버크만에게 충격을 준 것은 역시 헤이마켓 사건의 아나키스트들을 처형한 사건이었다. 러시아에서 인민주의자들의 처형에 대한 기억이 있던 버크만에게 이 사건은 그이가 아나키스트로서 헌신하게 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그 뒤 버크만은 독일계 아나키스트 지도자인 존 모스트가 이끄는 ‘자유’모임에 투신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엠마 골드만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 좌파 진영에서 점차 고립이 깊어지는 때기도 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자들과 얽힌 갈등은 많은 아나키스트들을 미국으로 향하게 했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의 아나키즘 활동은 다른 나라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져 갔다.
알렉산더 버크만과 엠마 골드만의 우정은 두 사람에게 모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 우정은 버크만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미수로 체포되어 14년 형기를 사는 동안에도 단절됨이 없었다.
아나키스트 그룹에서 버크만은 곧 뛰어난 연설가이자 선동가로서 재능을 발하기 시작했다. 버크만의 연설은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냈다. 버크만은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아나키스트 모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선동 여행에 참여하여 클리브랜드까지 따라갔다. 버크만은 강력한 힘과 진지함으로 아나키스트 이념들을 선전했다. 버크만의 열정 넘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가게에서 땀 흘려 일하는 동시에 버크만은 선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다양한 노동 투쟁 현장에 참여했다. 특히 1889년 카사이드 교수와 조셉 바론데스가 주도한 대규모 섬유노동자 파업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1년 뒤 엠마 골드만은 뉴욕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회의의 대표가 되었다. 그이는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전술 문제에 의견 차이가 생겨 집행위원에서 물러났다. 당시만 해도 독일어를 말하는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몇몇은 의회주의 방법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고 다수는 강력한 중앙집권주의를 굳게 지켰다. 전술 문제에 관한 이런 차이점들 때문에 1891년 존 모스트와 결별하게 되었다.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 들은 그룹 ‘자치’에 참여했다. 이 그룹에서 주도적 구실을 한 사람들은 조셉 포이케르트, 오토 링케, 클라우스 팀머만이었다.
1892년 홈스테드 제강의 관리인이자 카네기의 동업자인 프릭을 버크만이 암살하려다 체포당하자 이 기회에 경찰은 버크만과 함께 엠마를 공범으로 잡아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엠마 골드만을 힘들게 한 것은 자본가나 경찰의 탄압이 아니었다. 문제는 같은 아나키스트 그룹에서 나오는 비난이었다. 한때는 동지이자 이들 젊은 아나키스트들의 지도자였던 존 모스트를 비롯한 반대파들은 프릭을 암살하려 한 버크만과, 그이와 뜻을 같이 한 엠마를 싸잡아서 비난했다.
이런 주변 환경은 경찰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다니던 엠마 골드만의 형편을 더욱 어렵게 했다. 심지어 그이는 안전한 도피처를 찾지 못해 공원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엠마 골드만은 자기 때문에 친구들이 해를 입는 것을 염려해 그런 선택을 했다.
그 뒤 아나키스트 진영 안에서 격렬하게 벌어진 논쟁은 1906년 모스트가 죽으면서 끝났다. 존 모스트가 죽은 뒤 감옥에서 석방된 알렉산더 버크만은 엠마 골드만과 함께 미국 아나키즘 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14년에 걸친 감옥 생활은 비참했지만 그이는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한 전사로 돌아온 것이다.
버크만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엠마 골드만은 폐병으로 어쩔 수 없이 요양을 해야 했던 짧은 시기를 빼고는 힘이 넘치는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엠마 골드만은 시위와 집회 현장에서 선동 연설을 했으며 경찰 당국의 감시망과도 싸워야 했다.
결국 1893년 그이는 선동죄로 체포되어 1년여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사건은 엠마 골드만에게 미국 최초 여성 정치범이라는 수식어를 붙게 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감옥 생활 역시 엠마 골드만에게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 시기 동안 그이는 영어와 영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석방된 뒤 엠마는 뉴욕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가 18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아나키스트 투쟁에 고무되어 1895년에는 유럽을 방문해 영국과 스코틀랜드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1896년 미국으로 돌아온 엠마 골드만은 곧바로 버크만 석방 운동에 동참한다. 그 뒤 미국에서 순회강연을 하다가 여러 차례 체포를 당하기도 했지만 투옥 되지는 않았다.
1899년에는 2차 유럽 순회 강연을 하고 유럽의 아나키스트들과 교류도 넓혀 간다. 이런 경력은 나중에 크로포트킨이나 존 터너 같은 영향력 있는 아나키스트들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아나키스트 집회나 연설을 주도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두 번째 유럽 방문에서 돌아 온 뒤 직업으로는 간호사 일을 하면서도 엠마는 아나키스트 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1년 미국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경찰은 즉각 엠마 골드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엠마 골드만은 미국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경찰의 공작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때 엠마 골드만은 다시 한번 동료들에게서 고립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받은 충격으로 엠마 골드만은 얼마 동안 공식 활동을 멈추고 은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영국의 아나키스트 존 터너가 미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1906년에는 새로운 아나키스트 잡지 〈어머니 대지〉를 창간한다. 1906년은 드디어 알렉산더 버크만이 14년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해다. 석방되자마자 곧 버크만은 이 잡지의 주필이 되어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1907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 아나키즘 회의에 엠마 골드만이 대표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이어진 순회 강연 세 번으로 미국의 아나키즘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버크만 역시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는데 문필이나 연설 활동 말고도 1910년과 1911년에는 리버테리안{libertarian, 이 말은 흔히 ‘자유 지상주의자’로 번역되는 말로 모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국가 기구를 거부하고 철저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지칭하는 다른 낱말 이기도 하다. 이는 보수적인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자유주의자(liberalist)와 구분해서 써야 한다} 이념을 퍼뜨리는 데 기여한 페레 학교를 뉴욕에 세우는 것을 돕고 교사로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더 이상 테러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버크만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엠마 골드만과 함께 가장 왕성하게 아나키스트 활동을 벌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에게는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부여하는 사건이었다.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자 두 사람은 뉴욕에서 징병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는다. 옥고를 마친 1919년 이들을 미국 정부는 러시아로 추방한다. 역설되게도 그이들이 처음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할 때 미국은 희망의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반대로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모국 러시아가 그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현실이 그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듯 이번에는 사회주의 러시아도 그이들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고 말았다. 비록 아나키즘과는 노선이 다르다고는 하나 사회주의 역시 노동계급의 당파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레닌과 볼셰비키는 아나키스트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인 마흐노의 게릴라 부대를 해산시키고 1921년에 크론슈타트에서 수병들이 볼셰비키에 반대해서 일으킨 크론슈타트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보고 버크만은 러시아 공산주의 정권이 새로운 전체주의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그 뒤 버크만은 스웨덴과 베를린에 머문 뒤 1927년에는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다. 프랑스 정부가 추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버크만은 굴하지 않고 말년을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집필하는 데 열중했다. 이때에 특히 버크만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러시아 혁명의 문제점을 꼬집고 아나키즘에 대한 일반인들의 왜곡된 이미지를 고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1929년에 나온 《현재와 미래》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전립선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1936년 권총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한편 엠마 골드만 역시 러시아에서 추방당한 뒤 영국, 캐나다, 스페인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4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숨을 거둔다. 엠마 골드만은 가장 저명한 미국의 아나키스트지만 그이는 또한 가장 진보적인 여성 운동가이자 문학 비평가기도 했다. 비록 정규 교육을 받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쉼 없는 열정으로 배워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
엠마 골드만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저주받은 아나키즘》은 아나키즘 문제를 노동운동이나 정치 차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여성 문제나 현대 연극, 결혼 제도, 교육 문제 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 엠마 골드만의 이런 다채로운 관심은 엠마 골드만의 삶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 속에서 머물러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개인으로는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또 그런 점에서 그이들 자신이 ‘저주받은 아나키스트’라 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의 생애는 어떤 권력도 좇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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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한 말, 말, 말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어떤 것이 아나키즘이 아님을 말해야겠다. 아나키즘은 모든 것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다. 미개 시절이나 야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아나키즘이란 모든 것들에 대한 정반대다.”
- 알렉산더 버크만
“자유로운 인류애라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미래상은 일상 생활의 기본 힘이 되는 아나키라는 살아 있는 진리로 명확해지고 구체화되었다.”
- 알렉산더 버크만, 감옥에서 엠마 골드만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1902년)
“한 인간이 되어라, 완전한 한 인간.”
- 알렉산더 버크만,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 회고록》(1912년)
“아이들은 개성과 독립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으며 공공연히 또는 비밀리에 반항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복종하는 본능을 나타내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나키다.”
-알렉산더 버크만, 《아나키즘의 ABC》(1977년)
“하루하루가 암울하다. 하나씩 희망의 깜부기불이 꺼져 가고 있다. 테러와 전체주의가 10월에 태어난 생명을 짓뭉갰다. 혁명의 구호는 부인되고 그 이상은 인민의 피 속에 사라졌다. 어제의 활력은 수백만 명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오늘의 그림자는 검은색 관을 덮는 휘장처럼 온 나라에 드리워졌다. 독재가 민중을 짓밟고 있다. 혁명은 죽었다. 그 정신이 황야에서 울부짖고 있다 …… 나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알렉산더 버크만, 《볼셰비키 신화》(1921년)
“사상은 물질이었다.”
-알렉산더 버크만, 《현재와 미래》(1929년)
“파괴와 폭력! 사회에서 가장 폭력적인 요소가 무지임을 어떻게 일반인이 알겠는가? 아나키즘은 바로 이 파괴적 세력에 대항해 싸우고 있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아나키즘의 뿌리가 자연스런 힘의 일부며 파괴를 일삼지 않고 사회의 본질적 생명을 부양하여 성장을 촉진하는 것임을 모른다. 잡초와 쑥이 자라는 토양을 제거해 결국 건강한 과실을 맺게 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 엠마 골드만, 《저주받은 아나키즘》(1910년)
“인간 욕망의 지배자인 소유욕은 더 근본적인 자기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도 포기하게 한다. 재산권은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규제하는 요인이 된다. 재산권은 마치 ‘희생하라. 쾌락을 포기하라. 복종하라’는 종교적 계율처럼 신성시 되고 있다. 아나키즘의 정신은 미천한 지위에서 인간을 부축해 세운다.”
- 엠마 골드만, 《저주받은 아나키즘》(1910년)
“비참한 형편일지라도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불행이 견디기 힘들어도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애쓰는데도 아무런 효과도 없고 비참함만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절망이다.”
- 엠마 골드만, 《저주받은 아나키즘》(1910년)
“우리 둘레의 거짓된 도덕론자들은 아이에 대한 더 깊은 책임감을 배워야 한다. 자유 안에서 사랑이 여성의 가슴 속에 깨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여성만이 찬란하고 영원한 모성을 꽃피워 파괴와 죽음만이 서성이는 환경을 생명력 있는 환경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여성이 어머니가 되면 아이들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상이자 가장 심오한 것을 아이에게 주게 마련이다. 오직 아이 양육에 최선을 다한다. 사랑으로 아이를 길러야만 진정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길러줄 수 있다.”
- 엠마 골드만, 《저주받은 아나키즘》(1910년)
“애국주의는 거짓말과, 허위란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이 만들고 유지하는 미신이다. 인간에게 자존심과 권위를 빼앗고 교만함과 독단을 증대시키는 미신이다.”
- 엠마 골드만, 《저주받은 아나키즘》(1910년)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다시 말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 적대하는 두 세계를 각각 대변한다는 식의 잘못된 관념도 없애야 한다. 여성들이여, 크고 넓어지자. 우리를 둘러싼 온갖 사소한 문제 때문에 정녕 중요한 문제를 놓치지 말자. 남자와 여성의 관계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가 아니다. 자신을 더 풍요롭고 심오하고 더욱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한히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이것만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고 여성 해방의 비극을 기쁨으로, 무한한 기쁨으로 바꿔줄 것이다.”
- 엠마 골드만, 《저주받은 아나키즘》(1910년)
“우리 시대의 특징을 한 낱말로 말하라면 나는 ‘양’(quantity)이라 하겠다. 대중의 힘이 도처에서 위력을 떨치고 질적인 것을 파괴한다. 우리의 전 삶이─생산, 정치, 교육이─양과 수에 달려 있다. 한때 철저한 장인 정신과 자기 일의 질적인 품격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머리도 쓰지 않고 유능하지도 않은 자동 부품 같은 노동자들로 바뀌었다. 이런 노동자들이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쏟아 낸다. 이 물건들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도 없고 보통 인류의 안식에 해로운 것들이다. 삶에 평안과 안락을 더해 주지 못하는 이런 양적인 것들은 인간의 부담만 가중시킬 뿐이다.”
- 엠마 골드만, 《저주받은 아나키즘》(1910년)
http://www.sbook.co.kr/view.html?serial=648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후세에 끼친 영향
테러와 전쟁의 차이는 무엇일까? 교과서 같은 구분은 재미없다. 모든 교과서 속 정의는 그것을 정의 내리려는 관계자들 가운데 주류가 내리는 판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테러와 전쟁은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 또 흔히 테러리즘은 민간인을 포함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공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정확한 구분이라 보기는 어렵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정의로운 전쟁, 혹은 중동 지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전쟁 역시 민간인을 희생시키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이라크 저항 세력들의 공격을 테러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 저항 세력들은 자신들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고 보면 테러는 소수자나 약자가 강자의 폭력에 맞서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 차이가 있다면 테러는 성공해도 비난을 받지만 전쟁은 승리한 자에게 영광을 부여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즘과 더불어 테러리즘을 연상한다. 우리나라 영화 〈아나키스트〉는 일반인이 그렇게 인식하는 데 확신을 부여해 준다. 물론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테러를 투쟁의 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보통 무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갈등에서 모든 강자들은 약자(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수며 힘이 약한)의 저항을 테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몇몇 아나키스트들이 테러를 선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에 견주어 아나키스트들에게 특히 더 테러리스트라는 혐의를 부여하는 경향은 그만큼 아나키스트들이 더 외로운 투쟁을 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홈스테드 제강 파업을 유혈 사태로 몰아간 장본인인 프릭을 암살하려 한 알렉산더 버크만의 선택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이를 두고 테러라고 규정하지만 알렉산더 버크만 자신과 엠마 골드만의 생각은 다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버크만을 면회하려 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했다. 대신 버크만에게 ‘정치범’이라는 편지를 전달했다. 하지만 교도소장은 미국에는 정치범이 없다며 편지를 찢었다. 이에 대해 버크만은 교도소장에게 ‘당신은 정치적 공무원’이라며 응수를 했다. 교도소장은 사과를 요구했으나 버크만은 거절을 하고 지하 감옥에 갇혀야 했다. 교도소장에게 버크만은 테러리스트자 살인미수 범죄자였으나 버크만 자신은 스스로 정치범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버크만은 존 모스트를 비롯한 독일계와 유태계 아나키스트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20세기 혁명사에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유달리 외롭고 힘든 싸움을 보여 준다.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이나 홈스테드 제강 파업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아나키스트들은 먼저 무장한 경찰들이나 군인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러시아 역시 아나키스트들을 탄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의 생애를 보면 아나키스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과 탄압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그이들이 그만큼 어디에서도 타협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며 진정한 리버테리안의 전형임을 보여 준다. 모든 형태의 권력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이들 자신은 어떠한 권력도 가지지 않았고 영원한 소수자 약자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이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결정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이들의 사상이나 그이들의 삶이 보여 준 치열함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렇게 쉽게 잊힌 것은 아닐까? 역사는 약자에 대한 기록이 아니니 말이다.
유럽에 견주어 마르크스레닌주의 세력이 약했던 미국의 노동운동은 초창기부터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했다. 그 가운데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은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미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단절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엠마 골드만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뇌졸중으로 죽은 뒤 시카고에 있는 헤이마켓 희생자들의 묘역 근처에 묻혔지만 미국에서 30년 동안 잊힌 이름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엠마 골드만을 다시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체 게바라가 유행하듯 엠마 골드만의 이름과 얼굴이 담긴 티셔츠나 엽서가 나오고 전기물들이 출판되었다. 왜 하필 이때인가?
이 시기는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때였다. 역사에서 한 번도 패전을 겪지 않던 미국이 아시아의 게릴라들에게 전쟁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는 형편이었고 전사자가 속출하던 시기였다. 이런 처지에서 미국 내에서는 전쟁에서 돌아온 참전 군인들이 겪는 후유증과 늘어나는 전비 부담으로 반전 여론이 들끓던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대들에게는 베트남전은 납득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대표적인 반전 운동가인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은 미국에서 징병 반대 운동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진영 안에서도 가장 원칙을 지킨 반전주의자였다. 당시 아나키스트들 거의가 스승으로 존경을 하던 크로포트킨마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들을 지지하는 주장을 폈을 때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은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의 도덕적인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1982년 〈뉴욕타임스〉는 “엠마 골드만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아나키스트요, 탁월한 반전 운동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문화로는 자유분방한 히피 문화가 유행을 하였고, 이 즈음을 대표하는 음악 갈래로 유행한 록큰롤의 정신은 저항이었다. 이 당시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자유분방함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서 누리는 소비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히피들에게는 자본주의적인 상품화에 길들여지는 것 역시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 역시 국가적 폭력에 동참하는 것이자 희생되는 것이다. 록큰롤은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그런 가치관을 무조건 주입하는 교육 따위에 대한 저항을 노래했다.
60년대 청년 문화가 보여 주는 정신, 추구하는 가치는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과 같은 아나키스트 리버테리안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표현하는 수단과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 정신에는 아나키즘의 이상이 깔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엠마 골드만의 영향은 반전 차원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연극이나 드라마에도 조예가 깊었을 만큼 다재다능한 그이였지만 무엇보다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여성운동가로서 끼친 면모와 영향이다. 엠마 골드만이 옥고를 치른 것은 여러 번이었지만 1916년에는 산아 제한 운동을 벌이다가 감옥에 가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여성 노동자 계급이 당하는 비참한 현실을 보아 왔으며,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던 도피 시절 자신을 보살펴 준 창녀들과 생활한 경험이 있는 엠마 골드만에게 여성운동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간호사로 활동할 당시에도 엠마 골드만에게 가장 큰 관심은 여성이었다.
이런 활동은 미국 여성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최초로 산아 제한 운동을 벌인, 간호사 출신인 마가렛 생어의 업적과 더불어 엠마 골드만의 운동은 여성들에게 피임을 선택할 권리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활동을 기려 아이오와 시는 그이의 이름을 딴 ‘엠마 골드만 여성 건강센타’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아나키즘은 여러 분야에서 계승되고 있다. 리버테리언으로 사는 것은 정치적 차원의 문제만은 아닐 터기에 그것은 삶의 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나키즘은 하나로 정의되기는 어려우며 사회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새로이 등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엠마 골드만이나 알렉산더 버크만과 같은 철저한 아나키스트 정신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더 버크만의 동지였던 루돌프 로커는 버크만이 죽자 다음과 같이 버크만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아주 드문 한 사람이 우리를 떠났다. 그이는 위대하고 고귀한 인물이었고 진정한 인간이었다. 그이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조용히 고개 숙이며 그 많은 세월 동안 그이가 성실하게 일해 온 이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맹세한다.”{《아나키스트의 초상》(폴 애브리치 씀, 하승우 옮김, 갈무리 펴냄)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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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 Goldman (1869–1940)
Alexander Berkman (1870–1936)
Goldman enjoyed a decades-long relationship with her lover Alexander Berkman. Photo circa 1917–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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