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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제778호  2009.09.18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752.html

 

 

사코와 반제티 비극은 옛날 미국 일인가

[출판] 1920년대 미국에서 억울한 이민자를 사형시킨 ‘사법살인’의 전모 <사코와 반제티>

 

- 이순혁 -

 

 

1927년 8월 어느 월요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교도소에서 두 명의 죄수가 전기의자에 앉았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구두수선공 니콜라 사코와 생선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였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 소식은 세계 곳곳에서 여러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파리에서는 성난 군중 때문에 미국 대사관 앞에 탱크가 동원됐고, 요하네스버그에서는 미국 국기가 불탔다. 로마, 런던, 시드니, 베를린, 암스테르담, 리스본, 아테네 등지의 거리에도 시위대들이 쏟아져나왔다.

 

 

제3자가 범행 자백했으나 재심 불허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대우를 받던 수선공과 생선장수의 사형에 전세계가 들썩거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건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4월 어느 대낮에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제화공장의 회계담당 직원과 수위가 총에 맞아 숨지고 종업원들의 급료를 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사코와 반제티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이들은 가난한 이민자였고, 1차 세계대전 징병을 거부했고, 무정부주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재판이 시작됐고 이들은 줄곧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무정부주의 신념을 옹호했다. 문제는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판사는 공공연히 배심원들 앞에서 ‘애국주의’를 강조했고, 1925년에는 한 범죄자가 자신과 한 갱단이 그 사건의 범인이라고 고백했지만 주 대법원은 재심을 불허했다. 버트런드 러셀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 이사도라 덩컨 등이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사코와 반제티는 끝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 미국의 화가 벤 샨이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23회짜리 연작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 일부. 사건 당시 미국 사법·행정 당국을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앨번 풀러 매사추세츠주 지사는 사코와 반제티의 사면 여부를 로렌스 로웰 하버드대 총장, 새뮤얼 스트래튼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 로버트 그랜트 판사 등에게 물었는데 이들은 사형선고를 옹호했다. 그림 속 관에 누운 이는 사코와 반제티이고, 서 있는 이들은 사형을 지지한 세 사람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브루스 왓슨이 내놓은 <사코와 반제티>(이수영 옮김, 삼천리 펴냄)는 당시 재판 기록과 각종 언론 보도, 생존자 인터뷰에 바탕해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의 전모를 실증적으로 재현한 저작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사건의 배경이 된 시대적 상황을 폭넓게 다뤘다는 점이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온 듯했지만, 미국 본토에서는 또 다른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잇따른 폭탄테러 미수 사건까지 터지면서 국민 상당수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많은 60만 명 이상이 희생되면서 민심은 그 어느 때보다 흉흉했다. 법무장관 미셸 팔머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훗날 ‘팔머의 습격’이라고 불리는 급진주의자의 대량 체포를 주도했다. 1920년대 미국은 30년 뒤의 매카시즘 광풍을 예고라도 하듯 국가적 광란 상태에 빠져 있었고, 뭔가 희생양이 필요했던 셈이다(당시 급진주의자 대량 체포를 지휘한 팔머의 보좌관은 훗날 연방수사국 국장으로 매커시즘을 이끈 에드거 후버다).

 

이 사건은 국가주의 이념에 바탕한 ‘외부인 누명 씌우기’로 전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과, 공권력에 의한 사법 살인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비견할 만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사건을 상기해볼 이유는 따로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 사코와 반제티 같은 이민자는 50만 명을 훌쩍 넘었지만, 최근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에 대한 욕설 사건에서 보듯이 이들에 대한 경계심이나 반감은 여전하다. 또 극우 이념에 바탕해 국민 감정에 불을 붙이며 충동을 조장하는 주류 언론의 행태 또한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80여 년 전 미국에서 발생한 비극이 이 땅에서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신종 플루의 유행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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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irror.enha.kr/wiki/%EC%82%AC%EC%BD%94%EC%99%80%20%EB%B0%98%EC%A0%9C%ED%8B%B0%20%EC%82%AC%EA%B1%B4

사코와 반제티 사건

최종 확인 버전:

 

http://www.english.illinois.edu/maps/poets/m_r/millay/sacvan.jpg
 

Sacco And Vanzetti case

"Here's to you
Nicola and Bart
Rest forever here in our hearts
The last and final moment is yours
That agony is your triumph."

당신들을 위해서
니콜라와 바트(사코와 반제티)
우리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쉬소서
마지막 순간은 당신들의 것
그 고통은 당신들의 승리입니다

 

- 조안 바에즈, Here's to you(작곡 : 엔니오 모리코네)[1]조안 바에즈, Here's to you(작곡 : 엔니오 모리코네)[1]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사법살인 사건. 미국 재판사에 흑역사로 남은 마녀사냥.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프랑스와 달리 이 사건의 누명을 쓴 사람들은 결국 재판 후 전기의자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2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사우스브레인트리 구두공장에서 두명의 남자가 침입하여 경리직원과 경비를 살해하고 16.000달러를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용의자로 구두수선공 페르디난도 니콜라 사코와 생선장수인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를 체포한다. 이들은 가난한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참전을 거부했던 무정부주의자였다.

http://law2.umkc.edu/faculty/projects/ftrials/SaccoV/Katzmann.jpg 

검사 프레더릭 G. 캐츠먼은 이들을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하였다. 이들에게서 현금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발견되었고 여권을 소지한 점으로 보아 범행후 해외로 도주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벌어지는 내내 자신들은 그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현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갔을 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또한 검찰 측이 증거로 제시한 사코의 모자는 정작 사코에게 맞지 않는 크기였으며,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총기 역시 조작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증인들의 진술 역시 모호하거나 번복되기 일쑤였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사코와 반제티는 당연히 무죄 석방되었겠지만, 결코 아니었다. 왜냐면...

 

http://www.law.umkc.edu/faculty/projects/ftrials/SaccoV/THAYER.jpg 

판사 웹스터 세이어[2]는 노골적으로 배심원들에게 사건과 아무 관련없는 애국주의와 이념을 호소하였고 유도심문을 자행하였다.

 

http://www.newbedfordguide.com/wp-content/uploads/2013/09/Celestino.jpg?width=200
이런 와중에 1925년 11월 셀레스티노 마데이로스라는 죄수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의 진짜 범인이 로드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조 모렐리 갱단이라고 밝혔다. 사건 당시 주목인 조 모렐리와 또 다른 범인이 살인강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http://law2.umkc.edu/faculty/projects/ftrials/SaccoV/Moore.jpg 
이에 변호인 프레드 H. 무어는 마데이로스의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한편, 당시 주지사인 앨번 터프츠 풀러는 하버드대 총장 애벗 로런스 로웰,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학장[3] 새뮤얼 웨슬리 스트래턴, 전직판사 로버트 그랜트로 구성된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폴러 주지사는 사면권 행사를 거부했고, 독립조사위원회는 주지사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이것들이 대체... 1927년 4월 9일 대법원 사코와 반제티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1927년 8월 23일 사코와 반제티는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한다.


http://voiceofdetroit.net/wp-content/uploads/2010/10/Save_Sacco_and_Vanzetti2-300x197.jpg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 대해 1921년에 영국 런던에서 일어난 항의시위


 이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사형이 임박해지자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파리의 미국대사관에 몰려든 시위군중들 때문에 탱크가 동원되었으며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스위스 제노바에서는 미국 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공격받았았고 남아프리카(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성조기가 불타버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시드니, 도쿄, 부쿠레슈티, 로마,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의 거리에는 성난 군중들로 몰려들었다. 본격 세계적 반미운동


또한 아인슈타인은 쿨리지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으며, 아나톨 프랑스는 '유럽 노인의 호소'를 발표하였고, 작가 존 더스 패서스는 '두 개의 미국'을 선언하였다.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에 처해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무정부주의 조직인 '그루포 아우토노모(Gruppo Autonomo)' 소속이었으며 '크로나카 소베르시바(Cronaca Sovversiva)'라는 무정부 신문을 구독하고 글을 투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해당 위키백과 항목참조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로서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사코와 반제티가 걸려들었다. 사코는 감옥 안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반제티는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이라는 책을 쓰며 자신들의 무죄를 항변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사코는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울지 말거라, 단테야! 네 어머니가 일곱 해 동안 고생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아들아, 울지 말고 씩씩하게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소중한 이들을 사랑하고 곁에서 보살펴 드려라. 네 어머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피어 있는 들꽃을 꺾고 나무 그늘에서 쉬렴. 항상 기억해라.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 네 용감한 마음과 선량함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리라 믿는다. 인생에서 너는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거야." 

 

반제티는 '뉴욕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길거리에서 무시당하면서 내 삶을 살다 마쳤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고 이름 없는 실패자로 죽었을 것이다. 평생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어 가면서 하고 있는 일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 마지막 순간은 우리 것이다. 그 고통은 우리의 승리이다!" [4] 

 

그리고, 당당하게 죽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후 1970년대가 돼서야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는 사코와 반제티의 신원을 복권하였다 [5] 그리고 마이클 듀카키스는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도전하나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게 패배하였다. 여론조사에서 큰 차이로 줄곧 앞서가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생방송 TV토론에서 사형제도에 관한 답변이 치명타가 되어서 낙선하였다. [6]

 

함께 보기 : 인민혁명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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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곡은 이 사건이 영화화된 '사코와 반제티(Sacco e Vanzetti)'의 사운드트랙으로 만들어졌으며 메탈기어 솔리드 4의 엔딩곡으로 오마주되었다.
  • [2] 반제티는 사형판결이 나기 전 "나는 웹스터 세이어가 우리의 판결을 내리기 전에 그의 죽음을 볼 수 있도록 해볼 것이다."라며, 무정부주의자 친구들에게 "복수, 우리의 생사와 이름을 건 복수"라는 말을 남겼다. 웹스터 세이어는 은퇴한 후 복수가 두려워 경찰과 개인 경호원의 보호를 받았다. 곧 그를 노린 폭탄 테러가 있었으나 그는 다치지 않았고 애꿎게도 그의 아내와 하녀가 사망했다. 웹스터는 천수를 누린 후 75세로 사망했는데 이때 그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는 "그의 영혼이 변기에 떠내려갔군"이라고 논평했다.
  • [3] 당시는 단과대였다.
  • [4] 이 말은 위에 있는 Here`s to you의 가사에서 인용된다.
  • [5] 진범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듀카키스가 사코와 반제티를 무죄라고 선고하지도 않았다. 듀카키스는 이 재판에서 일어난 여러 인종차별적인 문제점을 들어 이 재판이 잘못 치루어졌고 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재심도 불가능한 만큼 둘을 복권한 것이다.
  • [6] 당시 한 탈옥범이 강간, 살인을 저지른 일이 있었다. 듀카키스에게 "당신 부인이 그렇게 당한 후 살해되어도 범인에게 사형을 내려선 안된다고 주장할거냐?" 라는 질문에 담담하게 그렇다고 답한 것. 이에 상대 토론자인 부시가 감정도 없는 냉혈한, 어떻게 그런 일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까, 가정도 모르는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 토론회 이후 듀카키스의 지지도는 7% 하락했다. "평소부터 저는 사형제를 반대했습니다." 라는 발언은 범죄자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사형제가 범죄 예방 효과가 없다는 그의 소신에서 나온 합리적인 답변이지만, 유권자들이 원하던 따뜻한 가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참고로 이 사건은 유가족의 분노, 사회적 인식, 범죄자의 교정 가능성, 오판 가능성 등 최대한 예측 가능한 변수 모두를 분석하여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형벌 집행 문제를 대중의 감정에 호소한 오류의 좋은 사례로도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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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e>

http://ask.nate.com/qna/view.html?n=11237534&sq=%BB%E7%C4%DA+%B9%DD%C3%BC%C6%BC

 

사코-반체티 사건 (미국 판례)  [Sacco-Vanzetti case]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있었던 유명한 살인사건 재판.

 

1920~27년의 7년 이상을 끌어오다가 피고인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체티의 사형으로 끝났다. 이 재판은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살해당한 자는 구두제조회사의 경리직원인 F. A. 파민터와, 종업원 급료를 지키기 위해 파민터와 함께 있던 경비원 알레산드로 베라르델리였다. 같은 해 5월 5일 사코와 반체티라는 두 이탈리아 청년이 이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1908년 미국에 이민온 구두제조공과 생선 행상인이었다. 그들은 1921년 5월 31일 매사추세츠 주대법원에서 웹스터 세이어 판사의 심리를 받게 되었고, 7월 14일에 배심원들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에 사회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항의를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심판이 공정성이 결여되었고, 피고인들은 살인범으로서가 아니라 급진주의자이고 무정부주의자로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증인이 사람을 잘못 알아보았음을 이유로 재심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25년 11월 18일 그당시 살인죄 판결을 받았던 첼레스티노 마데이로스라는 사람이 조 모렐리 갱단과 함께 위의 범죄사건에 관여했다고 자백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심리담당 판사가 추가적 증거를 들어 재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대법원은 판단의 번복을 거부했다. 사코와 반체티는 1927년 4월 9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전세계적으로 대중집회에서 이 사건에 대한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A.T. 풀러 주지사는 A.로렌스 로웰 하버드대학교 총장, 새뮤얼 W.스트래튼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총장, 로버트 그랜트 전직판사로 구성된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27년 8월 3일 풀러 주지사는 사면권 행사를 거부했으며, 자문위원회도 그 입장을 지지했다. 세계 주요도시에서 항의 데모가 계속되었고, 뉴욕 시와 필라델피아에서는 폭발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던 두 사람에게 1927년 8월 2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후에도 사코-반체티 사건에 관한 소요는 계속되었다. 1959년 4월 공화당의 알렉산더 J.첼라가 두 사람에 대한 소급적 사면을 지사에게 권고하도록 입법부에 제안했고, 그 제안을 청문하기 위한 특별입법위원회가 보스턴에 설치되었다. 특별입법위원회와 입법부는 그런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지만, 결국에는 모렐리와 그 갱단의 유죄가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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