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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의 영웅, 보 응우옌 잡 장군
10월 4일, 103세로 눈을 감다.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武元甲) 장군!
‘부드러운 카리스마’ 호찌민을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끈 두 사람이 팜 반 동과 보 응우옌 잡이다. 팜 반 동 수상은 정치적 역량으로, 잡 장군은 군사력으로 호찌민의 심장을 감싼 뼈대다. 호찌민은 두 사람의 도움으로 극우 세력은 물론 극좌 세력을 물리치고, 적절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특히 잡 장군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호찌민 다음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이다....
잡은 베트남의 휴전선이던 17도선 바로 북쪽 광 빙 성에서 191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리 출신이며, 점령을 당해도 굴복하지 않는 애국심이 투철했고, 모든 가족이 저항적 기질을 지녔다. 1924년에 아버지는 모든 베트남 부모들이 그랬듯이, 자식 공부를 위해 빚을 내어 훼의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를 다닐 무렵에 프랑스에서 지하로 반입하던 호찌민이 쓴 소책자를 정독하면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에 탐닉했다.
150cm쯤 되는 작은 키에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애 같은 웃음을 띠는 동안(童顔)이었지만 성격은 활화산처럼 강렬했다. 중학생 때부터 급진 학생 활동에 뛰어들었다. 1927년에 항의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퇴학당하는 ‘전과 기록’을 남겼으니, 일찌감치 혁명가의 싹을 보였다. 퇴학을 당한 뒤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했다. 훼는 야망을 불태울, 넓은 활동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해 하노이로 가서 프랑스 사립 학교를 졸업하고 하노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때의 상황을 구수정 선생의 글에서 인용하겠다.
《1929년 18살 때, 잡은 난생 처음 하노이에 발을 디뎠다. 신월 혁명당의 동지였던 응우옌 반 따오가 잡을 데리고 처음 간 곳이 하노이성의 북문이었다. 하노이 성이 함락될 때 새겨진 프랑스군의 포탄 자국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던 당시 하노이 총독 호앙 지에우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왕묘 앞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나중에 하노이 탕 롱 숙사의 역사 교사가 된 잡은 아이들을 데리고 장보 둑에 올라 프랑시스 가르니에(1873년 하노이를 공격한 프랑스군인) 의 묘를 내려다보고, 저이 다리에서 앙리 리비에르(1882년 사이공 주둔 사령관으로서 하노이를 점령했다)의 묘를 응시했으며, 마지막으로 이곳 하노이 성에 들렀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치욕과 눈물을 먹으며 자라난 아이들에게 항불 저항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잡은 졸업한 뒤에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바로 혁명가가 되지 않고 생계 때문에 하노이 사립 학교 역사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당 기관지의 기자 노릇을 하며 프랑스어와 베트남어로 여러 민족주의 신문에 글을 썼고 베트남의 농촌 상황에 초점을 맞춘 팸플릿을 만들었다. 잡은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자 평소에 관심을 가지던 군사(軍史)를 공부하기 위해 하노이 시립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이때부터 군인의 길을 마음에 둔 잡은 교실에서 나폴레옹의 전쟁 역사를 강의할 때는 마치 자신이 나폴레옹이 되기라도 한 듯이 도취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잡은 2권짜리《농민 전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잡은 통킹 지역 위원회 서기에게서 하노이를 떠나 중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기는 앞으로 프랑스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벌일 가능성을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중국에 가면 ‘브응’이라는 신비한 남자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1940년, 신혼 중 잡은 아내와 갓 태어난 첫 딸을 남겨 두고 중국으로 갔다. 1939년부터 프랑스 식민 당국은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 하고 가혹하게 탄압했으니, 저항적 기질이 강한 잡의 가족은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잡이 중국으로 떠난 뒤 잡의 아버지와 아내, 처제 그리고 동서가 프랑스 식민 정부에게 체포당했다. 아버지는 프랑스 당국에 붙잡혀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뒤에 생사가 불명해졌다. 프랑스 병사들이 아버지를 지프차 뒤에 매달고 달리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내 역시 고문을 당해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응우옌 티 민 카이는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이었지만, 31세를 일기로 사이공 감옥의 총살대에서 산화했다. 처형의 남편인 레 홍 퐁 역시 태평양의 작은 섬의 뽈로 콘도르 감옥의 악명 높은 감방인호랑이 우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잡은 운명적인 혁명가로 살 수밖에 없었다. 숙명의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혁명의 궁극적 승리를 다짐하였다.
1940년 5월에 잡은 중국 쿤밍에서, 뽈로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옥한 팜 반 동과 함께 ‘브응’을 만났다. 이 때 ‘브응’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명랑한 모습으로 이런 말을 했다. ‘동은 나이를 안 먹었네.’ ‘잡은 항상 20세의 아가씨처럼 생기가 넘치네.’
‘브응’은 모든 젊은 베트남 혁명가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애국지사, 베르사유의 국제회의에 탄원서를 보내고, ‘르빠리아‘를 편집하고, 투르 당대회와 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여한 사람, 미래의 호찌민이었다. 잡은 오랫동안 한결같이 호찌민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브응’을 만났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유럽풍 옷을 입고, 부드러운 펠트 모자를 눌러 쓴 중년 남자가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그의 20세 무렵의 사진 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내가 생각하던 모습보다 훨씬 젊고 민첩해 보였다. 수염을 기르고 매우 검소하게 보였다. 내가 호찌민을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지만,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의좋게 살아온 듯한 친근함을 느꼈다. 중부 베트남의 사투리로 말하였는데 그처럼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 같지 않게 고향 사투리를 이처럼 정확하게 쓰는 모습을 보고는 자못 놀랐다.“
호찌민은 팜 반 동과 보 응우옌 잡에게 옌안의 중국 공산당 본부로 가서 군사 과학을 공부했으나, 이들이 출발하기 직전에 갑자기 옌안으로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전보를 보냈다. 여행 허가서가 나오는 동안에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 다가오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기회를 놓치기는 했지만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 투쟁의 지도자가 된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로 성장했다.
1944년 12월22일에 잡은 대원 34명으로베트남 해방 무장 선전대를 창설해 이틀 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해 승리해 뺏은 무기로 다음 공격에 나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 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했다. 그 부대가 1975년 100만 대군으로 성장해, 민족 통일 해방 전쟁이 성공할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잡은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프랑스를 격퇴하고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에 잡은 해방군 5,000명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를 축출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날렸다. 대미 항쟁에서도 승리한 보 응우옌 잡이란 이름이 이제 세계 전사에 가장 탁월한 군사 전략가라는 신화를 창출했다.
잡은 1945년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내무 장관이 되었다가, 46년에 국방 장관에, 47년에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8년 잡은 호찌민에게서 대장 칭호를 받았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 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대군을 맡긴 이유와 대장 칭호를 준 사연을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이렇게 대답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간판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일 뿐이다. 우리 베트남 인민 군대는 싸움에서 소장을 이기면 소장을 주고, 대장을 이기면 대장을 준다.
미국조차도 탁월한 군사 전략을 경외해 마지않는 잡 장군은 “나는 호 아저씨의 이념과 지도 노선, 전략을 신봉하고 실천해온 한 군인일 뿐이라고 지극히 겸손하게 말했다.
위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약점이 있기 마련이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존경심이나 신뢰감이 옅어지는 게 일반적인 모습인데 비해, 호찌민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호 아저씨에 대한 진심 어린 경외심이 추호도 변함이 없다.
베트남 전쟁은 삼국지에 보이는 유비와 조조 같은 사람들이 전개한 영토 쟁탈전이 아닌 민족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인민의 군대’가 인민 스스로를 위한 ‘인민의 전쟁’이었다. 베트남 군대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혁명의 대의에 충성하는 지식인 전사들이 인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인민의 군대’다. 정의의 전쟁이기에 전체 인민이 자진해 참여하고 승리를 위하여 모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잡의 말을 들어 보자.
“사실상 우리의 저항 전쟁은 ‘인민의 전쟁’이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진격하였으며, 후방의 농민들은 들에서, 노동자는 무기 공장에서, 병사들에게 식량과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 생산 증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든 인민이 병사였으며 모든 마을이 요새였고 모든 당지부와 항전 위원회는 참모진이었다. 해방구에서 그러하였고 적의 점령 지구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부르주아 전략가들은 아직 베트남 전쟁에서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인민이 어떻게 미국이 원조한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격파할 수 있었을까? 부르주아는 이와 같이 비상한 전과를 올바른 전략과 전술로 그리고 뛰어난 전술과 베트남 인민군의 영웅적인 정신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그러한 모든 요인은 저항 전쟁이 승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인민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전한 대답은 ‘베트남 인민은 자신들의 해방 전쟁이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전쟁이라고 인식하고 싸웠기 때문에 승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민의 전쟁(People's War)’, 그것은 깨우친 인민이 모두 참여하고 협력한 전쟁을 말한다. 베트남 인민의 목표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제국주의의 굴레를 타도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봉건 지주 계급을 타도함이었다.
우리가 치른 한국 전쟁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항미 전쟁 10년 동안 베트남 측 사망자가 약 3백만으로 추정되는데, 한국 전쟁 3년 동안 사망자도 비슷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30년을 끈 베트남 전쟁이 더 가혹한 전쟁이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3년을 치른 한국 전쟁이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파멸적인 비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경험에서 무언가 뚜렷이 내세울 만한 철학이나 교훈을 남긴 위인이 없다. 그래서 외국의 저명 인사들이 한국 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부른다. 보 응우옌 잡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전략가일 뿐 아니라, <인민의 전쟁, 인민의 군대>같은 현명한 철학을 담은 책을 많이 써서 전쟁의 교훈을 전 인류에게 남겼다.
호찌민을 호위하며 언제나 어린애 같은 웃음을 짓던 보 응우옌 잡, 20세기의 큰 별이 21세기에 떨어지다. 영면하시어 그토록 존경한 호 아저씨 곁에서 평안을 얻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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