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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욱 중남미 변호사>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2012/04/16 23:49

 

 

라파엘 꼬레아 (Rafael Correa) 에콰도르 대통령


개요: 라파엘 꼬레아는 1963년 4월 6일 과야낄 생이며, 과야낄 카톨릭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벨기에에서 경제학 석사,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7년 1월 15일 제42대 에콰도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2012년 4월 현재까지 만 5년 동안 에콰도르를 통치하고 있으며, 2013년 2월 17일 차기 대선에서  승리가 거의 확실해 보이는 바, 2017년 5월 까지 계속 집권할 것으로 예상된다.

좌익 인본주의 카톨릭 신자

지난 4월 6일로 만 49세 생일을 맞은 라파엘 꼬레아는 본인 스스로를 “좌익 인본주의 카톨릭 신자” (Cristiano Humanista de Izquierda) 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과야낄의 카톨릭계 학교 (산호세 라살레 학교) 에서 수학하였고, 대학 (과야낄 카톨릭대학교) 및 대학원 (벨기에 루뱅 카톨릭 대학교)도 모두 카톨릭계 학교에서 공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와 함께 중남미의 5대 좌파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라파엘 꼬레아는 좌익게릴라 및 경제학자 출신인 호세프, 혁명가출신의 카스트로, 군인출신의 차베스, 코카농장 노조지도자출신의 모랄레스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산실인 미국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정통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적 색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꼬레아의 좌익성향은 80년대 중남미를 휩쓸었던 해방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불평등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태로부터 억압받는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인 교회의 사회참여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최근 들어 “인간의 가치는 무한의 탐욕을 추구하는 자본의 가치 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라는 본인의 인본주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꼬레아의 정치적 캐치프레이즈는 지난 20년 동안 에콰도르를 지배하였던 “긴 신자유주의의 밤” (Larga Noche Neoliberal)에서 깨어나, “21세기 사회주의” (Socialismo del Siglo XXI) 정신에 기초한 “시민혁명” (Revolucion Ciudadana) 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꼬레아의 정치철학은 해방신학, 막스주의, 사회주의에 근간을 두며, 궁극적으로는 안데스 방식의 이상적인 삶인 “수막 카와사이” (키추아어로 Sumak Kawsay, 스페인어로 Buen Vivir, “자연친화적인 좋은 삶”)를 추구하는 것이다.

학문적 배경

라파엘 꼬레아는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의 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이스카웃 활동을 열심히 한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이후 과야낄 카톨릭대학교에서의 경제학 학사학위, 벨기에 루뱅 카톨릭 대학교에서의 석사학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서의 박사학위를 모두 장학금을 받으며 마치게 된다. 또한 과야낄 카톨릭 대학교를 1987년 졸업한 후 꼬토팍시 주의 극빈층 지역인 쑴바우아 (Zumbahua)에서 1년간 자원봉사를 하며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꼬레아는 에콰도르
원주민어인 끼추아어를 배우게되어 향후 대통령 후보 시절 인디언 단체들의 호감을 얻게된다.

2001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의 논문 제목은 “현대 라틴아메리카 발전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였는데, 그 논문에서 꼬레아는 계량경제학 모델을 통해 80년대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적용된 구조조정은 실패작이었으며, 노동시장의 자유화로 인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생산성이 크게 저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가족사

먼저 라파엘 꼬레아 대통령의 족보를 살펴보면, 칠레 독립 영웅 중의 한사람이었던 라파엘 꼬레아 데 사아 (Rafael Correa de Saa, 1772-1843)의 5대 직계손으로 묘사되어 있다. 라파엘 꼬레아의 아버지는 라파엘 꼬레아 이까사 (Rafael Correa Icaza)는 1987년 9월 21일, 2 킬로그램의 코카인을 몸에 지닌 채 뉴욕 존 F. 캐네디 공항을 입국하려다 체포되었다. 이어서 루이지애나 교도소에서 5년 6개월을 복역하였고, 에콰도르에 귀국한지 2년 뒤인 1995년, 자살로 63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어머니는 노르마 델가도 씨로 1934년 생이며 생존해있다.

라파엘 꼬레아는 위로 형인 파브리씨오 꼬레아가 있으며,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 있다. 라파엘 꼬레아 자신은 벨기에 루뱅 카톨릭 대학교 수학시절에 지금의 부인인 벨기에인 앤 말허버 (Anne Malherbe)를 만났고, 현재 슬하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라파엘 꼬레아 대통령의 부인인 앤 말허버는 영부인으로서의 역할을 처음부터 거부하며, 오직 가정에만 충실하겠다고 선포하였다. 남편이 대통령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배우자가 꼭 영부인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오히려 남녀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꼬레아 대통령은 이런 부인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한다고 발표하였고, 그 결과 꼬레아 대통령 부인의 모습은 어떠한 에콰도르 정부의 국내외 공식행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정계입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한 꼬레아는 경제학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교 중의 하나인 “라틴아메리카 사회과학원”

(FLACSO)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이후 2005년 4월 20일, 당시 알프레도 빨라씨오 에콰도르 대통령에 의해 경제·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불과 4개월 뒤인 8월 8일 사임하게 된다. 장관재임 시절 꼬레아는 미국과의 FTA 체결 반대, IMF, 세계은행과의 관계단절 등을 주장하였다. 

 

장관으로서의 한계를 실감한 꼬레아는  2006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위해 “숭고하고 주권적인 조국동맹” (스페인어로 "Alianza PAIS", Alianza Patria Altiva y Soberana)이라는 정당을 설립하였다. 2006년 7월 31일 Alianza PAIS 는 에콰도르 공산당과 정치협정을 맺었고, 11월 26일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는 좌익성향의 민주인민당, 민주좌익당, 파차쿠틱(원주민좌익정당), 에콰도르 롤도스파 정당의 지지를 받아 우익후보인 바나나 재벌 알바로 노보아를 누르고 57%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2007년 1월 15일 에콰도르 대통령에 취임한 꼬레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주요 선거공약이었던 개헌절차에 돌입하면서, 첫 번째 그의 정치적인 능력을 시험받게 된다.

먼저 2007년 4월 15일 국민투표에서 81.7%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제헌국회 (Asamblea Constituyente) 설립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어 2007년 9월 30일 제헌의원 총선에서는 총 130 의석 (해외 선거구 국회의원 6의석 포함)을 두고 정부여당인 Alianza PAIS 후보와 야당후보들이 경쟁에 돌입했는데 개표 결과 130석 중 여당후보가 8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2007년 11월 30일 에콰도르 진보혁명 (Revolucion Liberal)의 아버지인 엘로이 알파로 (Eloy Alfaro)의 고향인 몬테크리스티 (Montecristi)에서 첫 제헌국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2008년 9월 28일에는 신헌법 통과를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는데 역시 63.93%의 국민적 지지를 받아 꼬레아가 승리하였다. 이로써 꼬레아가 원한 바대로 신자유주의 헌법으로 불리던 1998년도 헌법 (에콰도르 제19차 헌법) 은 폐지되었고, 2008년 10월 20일 신헌법이 발효되었다.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제였던 구헌법과 달리 4년 중임제를 채택한 신헌법에 따라 꼬레아는 2009년 4월 26일 또 한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 1차 투표에서 51.9% (에콰도르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를 얻어 다시 한번 승리하게 된다. 8월 10일 대통령 취임식에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등이 참석하였다.


2008년도 신헌법

현행 에콰도르 헌법은 총 444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5권분립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선거부, 감사부) 체제에 기초하고 있다. 보통 선거기능과 감사기능이 행정부 산하에 속해있는 3권분립제와 달리 에콰도르의 경우 이 두 가지 기능을 헌법적으로 독립시켰다. 선거부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선거재판소로 이루어져있고, 감사부는 호민관 (옴부즈만), 감사원, 은행보험감독원, 통신감독원, 기업감독원, 증권위원회 및 국민참여위원회 (Cpccs)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Cpccs 는 대법관 (21명), 헌법재판관 (9명), 선거재판관, 검찰총장, 감사원장, 국가송무처장 (Procurador), 중앙선관위원장, 호민관, 모든 감독원장의 선출을 관장하는데, 이 모든 요직의 선출을 공채형식으로 한다. 공개적으로 후보자들의 신청을 받아 경력 사항 50점, 전문지식 시험 50점, 총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최종 선정을 하게 된다. 나이가 지긋한 후보자들이 한국의 수능시험을 치는 것처럼 교실에 앉아 시험문제를 푸는 모습이 언론에 자주 공개된다. 따라서, 입법부와 행정부는 이러한 국가 요직 임명 절차에서 제외되어 있다. 외관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이지만, 언론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결국 경력 사항 50점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나고, 궁극적으로는 친정부 성향의 후보들이 최종 선정되므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꼬레아 정부

꼬레아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인사는 대통령실 산하 비니씨오 알바라도 공공행정수석, 알렉시스 메라 법무수석, 페르난도 알바라도 홍보수석, 리까르도 빠띠뇨 외교통상부장관, 레네 라미레스 고등교육원장, 판데르 팔코니 국가발전기획부(Senplades)장관, 산티아고 레온 생산조정부 (MCPEC)장관, 까를로스 까라스코 국세청(SRI)장관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공행정수석과 법무수석은 꼬레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자이다. 레닌 모레노 부통령이 있기는 하나, 사실상의 제 2인자인 알바라도 공공행정수석은 광고회사 사장 출신으로 전문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정확히 민심을 파악하여 그 동안 총 8회의 선거 및 국민 투표에서 꼬레아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고, 알렉시스 메라 법무수석은 꼬레아 정권에 모든 법적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성을 도모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지난 5년 꼬레아 정부 집권기간 동안 월 평균 2명의 장관이 교체되었다고 하나, 최측근 실세들은 여전히 견고하게 꼬레아 대통령의 가신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페루, 콜롬비아와의 관계

역사적으로 에콰도르는 인접국가인 페루, 콜롬비아와 여러 차례의 분쟁을 겪었다. 1995년 1~2월 약 5주 동안 에콰도르 남동부에 위치한 쎄네파 강 국경지역에서 페루와의 무력분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쎄네파 전쟁” (Guerra del Cenepa) 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으로 38명의 에콰도르 군인과 60명의 페루 군인이 전사하였다고 양 정부는 발표하였으나, 실제로는 양쪽 합쳐서 약 500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꼬레아 대통령 집권 중이던 2008년 3월 1일 콜롬비아 국경에서 불과 2KM 떨어진 에콰도르 북부 앙고스투라 (Angostura)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콜롬비아 반정부 게릴라인 콜롬비아 혁명군 (FARC)에 대한 콜롬비아 공군의 야간 미사일 공격으로 FARC 의 제2인자였던  라울 레제스를 비롯해 총 22명의 게릴라들이 사망하고 콜롬비아 헬리콥터가 에콰도르 영토로 들어와 라울 레제스의 시체를 수습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꼬레아 대통령은 명백한 무력 영토 침해라고 즉각 반발한 반면, 콜롬비아의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은 FARC 테러리스트에 대한 불가피한 국가적 정당방위였다고 에콰도르의 이해를 구했으나, 이로 인해 양국간의 국교가 단절된 바 있다.


꼬레아 대통령은 2011년 6월 페루 대통령으로 취임한 좌익성향의 오얀따 우말라 (Ollanta Humala) 및 2010년 8월 콜롬비아 대통령으로 취임한 우익성향의 환 마누엘 산토스 (Juan Manuel Santos) 현 대통령들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페루와 콜롬비아가 친미, 친유럽적인 경제통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가는 반면, 에콰도르는 여전히 반미, 친쿠바, 친베네수엘라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에콰도르가 EU 와의 무역협상을 재개하기로 한 정도가 에콰도르 정부의 부분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줄 뿐이다.

2010년 9월 30일 경찰폭동

“30-S" (뜨레인따 에세)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꼬레아 대통령에게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2010년 9월 29일 신 공무원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경찰들이 퇴직금 감소 등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알려지자 다음날인 9월 30일 에콰도르 전국적으로 경찰 파업이 일어났다. 끼또 공항 활주로 봉쇄, 고속도로 점거, 국회봉쇄 등 무력행위가 벌어지던 가운데 꼬레아 대통령은 직접 끼또 경찰이 시위하고 있는 경찰 부대를 찾아갔다.


다혈질인 대통령은 절대 경찰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법을 공포할 것이라는 연설을 한 뒤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풀어 제치며 “내게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고 외쳤다. 이에 흥분한 경찰들은 대통령의 얼굴에 최류탄을 쏘았고 상황은 삽시간에 혼돈의 상태로 변했다. 급기야 경찰들은 물리력을 행사해 대통령을 인근 경찰병원으로 끌고 갔고, 경찰들이 병원건물을 에워쌈으로써 사실상 대통령을 감금 상태에 두었다.


대통령은 병원 안에서 휴대폰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고 에콰도르군의 개입을 명령하였다. 본인은 현재 납치된 상태이며 지금 경찰들의 쿠데타 시도가 있다며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야당의 국가전복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밤 9시부터 군인들의 대통령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약 20분간 격렬한 총격전이 진행되었고 이 모든 상황은 TV 로 생중계되었다. 약 900명의 군인들이 작전에 참가하여 대통령을 구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8명이 사망하고 27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꼬레아 대통령은 이를 명백한 경찰 쿠데타로 정의하였으며, 경찰병원장 까리온 대령을 “국가원수살해”(Magnicidio) 미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2011년 10월 14일 에콰도르 대법원은 까리온 대령의 1,2심 무혐의 판결을 확정하였다. 조직적인 쿠데타 의도가 있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폭동이었으며, 까리온 대령은 안전을 위해 대통령을 경찰병원에 보호중이었다는 그의 주장을 사법부가 받아 들임으로써 꼬레아 대통령의 쿠데타 음모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언론과의 전쟁

90년의 역사를 가진 과야낄의 유력 일간지 엘 우니베르소 (El Universo)신문의 에밀리오 빨라씨오 (Emilio Palacio) 논설 주간은 2011년 2월 6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NO a las mentiras) 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 논설은 에콰도르 최대의 명예훼손 소송 (8천만불)을 야기 시켰으며,  2012년 2월 27일 꼬레아 대통령이 국내외의 압력, 차기 대통령 선거 등을 고려해 소 취하를 공식 발표할 때까지 꼬박 1년 동안 에콰도르를 정부와 언론 간의 전쟁터로 몰아갔다. 빨라씨오는 1심 판결에 의해 3년 실형과 4천만 불 손해배상의 의무를 지게되자 곧 바로 미국 마이아미로 출국하여 본인을 에콰도르 정권의 희생자로 선포하며 조만간 미국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문제가 된 빨라씨오의 논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독재자는 9월 30일의 사건이 쿠데타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흥분한 경찰 시위대에 뛰어 들어가 셔츠를 풀어헤치며 날 죽여라고 외쳐댄 그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독재자는 앞으로 무고한 시민으로 가득 찬 병원을 대상으로 내린 발포명령에 대하여 형사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절대 말소되지 않음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문사 측은 1심 판결문을 해당 판사가 직접 작성하지 않고, 꼬레아 대통령의 변호사팀이 작성하였다고 밝힘으로써 대대적인 진실공방이 시작되었다. 판결문의 작성자가 척키 세븐 (Chucky Seven) 이라는 가명을 쓴 자였으며, 그는 대통령의 변호사 알렘베르트 베라 (Alembert Vera)의 아버지인 구템베르그 베라 (Gutenberge Vera) 가 분명하다고 엘 우니베르소 측에서는 맹공을 퍼부었다. 꼬레아 대통령은 주간 대국민 보고회에서 척키 세븐은 윈도 세븐 프로그램의 해적판 사용 시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ID 이며 어떠한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며 역공으로 맞섰다. 어쨌든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사법부에서 해적판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큰 형님과 나쁜 형님

라파엘 꼬레아 대통령의 친형인 파브리씨오 꼬레아 (Fabricio Correa)는 동생에 못지 않은 캐릭터이다. “그의 히스테리에도 불구하고 단 10분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모든 사람들이 빠져들 만큼 친화력이 있다. 농담, 노래, 풍자, 목소리 흉내의 달인이며, 특히 대통령 주변의 측근인사들을 싸잡아 비꼴 때는 정말 가관이다” 라고 그를 인터뷰한 기자가 표현하고 있다.


파브리씨오는 현 라파엘 꼬레아 대통령의 최측근 가신그룹을 핑크빛 써클 (Circulo Rosa), 즉 “동성애자 집단”이라고 부르며, 거침없는 입담을 과시해 꼬레아 정부를 난감하게 하고 있다. 파브리씨오 꼬레아가 동생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아이반호 에너지 (Ivanhoe Energy) 라는 캐나다 토목회사와 결탁하여 약 1억6천7백만 달러의 정부 건설공사를 불법 수주하였다는 혐의에 기초해 깔데론 (Calderon) 과 쑤리타 (Zurita)라는 두 명의 기자가 이에 대한 취재를 하여 “큰 형님” (Gran Hermano)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얼마 전 스페인 TV와의 인터뷰에서 꼬레아는 그 책의 제목이 “큰 형님”이 아니라 “나쁜 형님” (Mal Hermano)이라고 불렸어야 한다며, 자신은 파브리씨오가 대통령궁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오래 전부터 명령을 내렸으며 형이 어떠한 일을 했건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꼬레아 대통령은 “큰 형님” 책의 저자 두명을 상대로도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고, 1심에서 승소하여 2백만불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으나,  Universo 4천만불 손해배상 건과 함께 소 취하 하였다.

라파엘 꼬레아와 엘로이 알파로 (Eloy Alfaro)

라파엘 꼬레아 대통령은 2012년 1월 28일 엘로이 알파로 사망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추모 행사를 하였다. 엘로이 알파로는 두 번이나 에콰도르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늙은 투사” (El Viejo Luchador)라고 불린 인물이다. 1912년 1월 28일 그는 성난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시체는 끼또 중심부의 거리를 끌려 다니다가 “엘 에히도“ (El Ejido) 광장에서 친동생 메다르도 알파로 및 조카 플라비오 알파로를 포함한 5명과 함께 화형을 당한다. 1910년 당시의 에콰도르에는 자유세력과 보수세력의 충돌이 절정에 달해 수년 간 내전이 계속되는 상태였다. 두 차례 (1897~1901, 1906~1911)에 걸쳐 대통령을 지낸 엘로이 알파로는 국민들의 존경과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지도자였다. 많은 사회개혁을 이루고 진정한 의미의 혁명가로 불리긴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반대자들에 대한 수많은 고문, 투옥, 살해를 자행하였다. 결국 그의 열정과 애국심에도 불구하고, 멈출수 없는 정치적 야망 때문에 이러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역사학자들은 분석한다. 당시 과야낄에서 전투 중 체포된 후 끼토로 압송되었던 엘로이 알파로는 끼토의 빠놉띠꼬 (Panoptico) 라는 건물에 수감되었으나, 사실상 정부의 지시로 경비가 해제된 상태에서 건물에 진입한 성난 군중들에 의해 살해되고, 그 시체는 지금 끼토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구 시가지 (Centro Historico)의 여러 거리를 끌려다니는 수모와 모욕을 당한 뒤 엘 에히도 공원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이 것을 일컬어 에콰도르에서는 “오게라 바르바라” (Hoguera Barbara), 즉, "야만의 화형식"이라 부른다.


라파엘 꼬레아 대통령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시민혁명” (Revolucion Ciudadana) 이 100년 전 엘로이 알파로가 주도했던 “진보혁명” (Revolucion Liberal)과 맥을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엘로이 알파로의 주요 개혁의 내용은 종교의 자유 선포, 이혼 허용, 언론자유 인정, 끼또-과야낄 간 철도 건설 등이다. 엘로이 알파로의 모계 성이 델가도
(Delgado)인데 라파엘 꼬레아의 모계성도 역시 델가도로, 외가 쪽으로 꼬레아 대통령이 엘로이 알파로의 후손이라는 이론도 있다. 과연 꼬레아의 시민혁명과 알파로의 진보혁명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찬반 입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계속되고 있다.

꼬레아 대통령의 향후 행보

2012년 2월 24일 에콰도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2013년 2월 17일 대통령, 부통령, 국회의원 (총 136의석)의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며, 1차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4월 7일 결선 투표를 실시한 뒤, 5월 13일 최종 개표결과를 공식발표 하며, 5월 24일 대통령, 부통령의 취임식이 예정되어 있다. 아직 40대의 젊은 나이일 뿐만 아니라, 현재 국민지지율 80%를 기록하고 있는 꼬레아 대통령과 경쟁할만한 야당후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2013년 대선에서 꼬레아의 승리는 기정사실화 되어있다. 물론 본인은 현실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나타내면서, Alianza PAIS 정부여당 내에서 자신의 “시민혁명”을 이어갈 능력있는 동지들도 많으므로, 당의 결정이 있을 경우 깨끗이 그만 둘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사실상 이를 믿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꼬레아 대통령의 특이한 정치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엔라쎄 씨우다다노 (Enlace Ciudadano)라고 불리는 “주간 대국민 보고 실황중계” 이다. 2007년 1월 15일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최근 2012년 4월 7일 까지 무려 266회가 실시되었는데, 주로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두 시간동안 에콰도르 전국을 돌아 다니며 타운 미팅 (Town Meeting) 형식의 대국민 보고회를 가지며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된다. 때로는 미국, 스페인 등 에콰도르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외국에서도 이런 이벤트를 가진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도 1999년부터 "알로 쁘레지덴테" (Alo Presidente) 라는 대국민 방송을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마다 하고 있는데, 2012년 4월 현재 그 횟수가 이미 378회에 달하고 있다. 


꼬레아 대통령은 두 시간의 대국민 보고 실황중계 동안 거의 모든 발언을 사전 원고없이 즉흥적으로 쏟아 낸다.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부의 치적을 자랑하고, 야당, 언론, 반정부 단체 등에 대한 공격을 퍼붓는 독무대이다. 야당 쪽에서는 “대통령의 욕 리스트”를 만들어서 국회에서 발표를 할 정도이다. 그 내용을 보면 “얼간이, 바보, 기회주의자, 거짓말쟁이, 비겁한 녀석, 도둑의 소굴, 미친개, 사기꾼, 이중인격자, 파시스트, 위선자, 탈세꾼, 도둑놈, 스머프, 매국노...” 등, 총 180개나 된다.

꼬레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2007년 1월 15일 이전 11년간 에콰도르에는 총 7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그 재직기간을 보면, 1996년 8월 10일 부터 1997년 2월 6일까지 압달라 부까람 (Abdala Bucaram), 2월 7일부터 11일까지 불과 5일 동안 로살리아 아르테아가 (Rosalia Arteaga), 2월 11일부터 다음해 1998년 8월 10일까지 파비안 알라르꼰 (Fabian Alarcon), 2000년 2월 21일까지 야밀 마우아드 (Jamil Mahuad), 2003년 1월 15일까지 구스타보 노보아 (Gustavo Noboa), 2005년 4월 20일까지 루씨오 구띠에레스 (Lucio Gutierrez), 2007년 1월 14일까지 알프레도 빨라씨오 (Alfredo Palacio) 대통령이었다. 이들 중 부까람, 마우아드, 구띠에레스는 모두 시민반란에 의해 축출되었고, 구띠에레스를 뺀 나머지 두 사람은 지금도 파나마 (부까람)와 미국 (마우아드)에 각각 망명 중이다.

이렇듯, 에콰도르는 꼬레아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11년 동안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었다. 이제 에콰도르는 안정된 국가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꼬레아라는 인물이 있다. 뼈 속까지 사회주의자인 그는 “신자유주의”의 “자유”, “자유무역협정”의 “자유”라는 말을 혐오하며, 이는 경제적 강대국들의 탐욕을 미화한 표현에 불과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 하에 희생되고, 강탈당하고, 죽기까지 했는지 모른다고 소리 높혀 외친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 옳다면 에콰도르는 계속 바나나만 수출해야한다. 이것은 강대국들의 배만 부르게 할 뿐이며,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저개발국에게는 약탈이론에 불가하다. 한국을 보라, 어떻게 이 작은 나라가 세계 최고의 조선국이 되었나. 아무런 천연자원도, 자본도 없는 나라지만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비교우위론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IMF, 월드뱅크 등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전위부대일 뿐이다. 상환능력이 없는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에게 무분별한 차관을 제공한 뒤, 나중에 외채를 볼모로 경제주권을 강탈해가는 기관들이다....” 등, 꼬레아 대통령의 독설과 달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미국의 창을 통해 중남미를 들여다 보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어서, 거침없이 미국 대사를 추방하고, 피델 카스트로와 우고 차베스를 큰 형님, 둘째 형님 정도로 생각하는 꼬레아 대통령 같은 사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꼬레아 대통령 같은 인물에도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좌익, 우익을 떠나서 중남미 국가의 가장 큰 문제는 국민들의 정체성 부족과 정치인들의 지도력 부족이라고 한다. 비록 꼬레아의 주장에 대하여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열정, 끈기, 소신과 철학에 기인한 강력한 리더쉽은 남미의 작은 나라 이곳 에콰도르의 정치, 경제, 사회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2년 4월 16일 끼또에서

하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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