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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타이 반정부 시위 -잉락 대 스텝, 신흥-전통 자본 대혈투 /한겨레

by 마리산인1324 2014. 1. 18.

<한겨레>  2013.12.06 19:2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14317.html

 

 

잉락 대 스텝, 신흥-전통 자본 대혈투

- 정문태 -

 

타이 반정부 시위대가 3일 경찰청을 점령한 뒤 이를 축하하며 깃발을 흔들고 있다. 시위대는 며칠 동안 경찰과 충돌해왔다. 로이터 뉴스1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⑫ 타이 반정부 시위

또 정부 기능이 마비되었다. 또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또 경찰청이 뚫렸다. 또 정부는 방콕에 보안법을 발동했다. 또 친정부와 반정부 시위대가 충돌했다. 또 누군가 총질로 3명을 살해했고 100여명 부상자가 생겼다.

 

10년 가까이 되풀이해 온 이 또, 또, 또는 현재 방콕 풍경이다. 이번에는 달포쯤 전부터 전 민주당(PD) 정부에서 부총리를 지낸 수텝 트악수반이 민중민주개혁위원회(PDRC)란 이름을 걸고 ‘탁신정권 축출’을 외치면서 벌어진 일이다. 지난 10월 잉락 친나왓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 프아타이(Pheu(Phuea) Thai)가 하원에서 사면 법안을 통과시키고부터다. 그 법안은 부패 혐의로 2년 형을 받고 외국을 떠도는 잉락의 오빠 탁신 친나왓 전 총리, 2006년 쿠데타 주도자들, 2010년 시위 진압 책임자인 민주당 아피싯 웨차치와 전 총리, 친탁신 레드셔츠(반독재민주연합)와 반탁신 옐로셔츠(민주민중동맹) 시위 지도부를 모두 포함하면서 강한 사회적 반발에 부딪쳤다. 민주당을 포함한 반정부 쪽은 ‘탁신 구제용’이라며 대들었고, 레드셔츠를 비롯한 친정부 쪽도 ‘2010년 학살자 사면 불가’를 내세워 그 법안을 반대했다.

 

진압카드마저 빼앗긴 잉락 정부

 

11월11일 상원이 그 법안 통과를 거부해 사면법 정국이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같은 날 수텝이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 8명과 함께 의원직을 내던지고 길바닥으로 뛰쳐나와 아예 탁신(잉락) 정부 타도를 내걸었다. 수텝은 민중평의회 설치를 요구하며 “개혁적인 사람을 골라 정부를 맡기자”고 소리쳤다. 타원 센니암 전 의원은 “선거는 민주주의를 온전히 대표할 수 없다. 한 개인(탁신)이 조종하는 노예의회의 핑계일 뿐”이라고 맞장구쳤다. 2001년 총선부터 탁신에게 늘 완패당했던 민주당이 차기 총선에서도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숨김없이 드러낸 꼴이다.

 

2006년을 빼다 박았다. 그 무렵 짬롱 시므앙 전 방콕 시장이 이끌었던 옐로셔츠는 헌법 제7조 ‘헌법으로 적용할 수 없는 모든 규정은 국가수반인 왕이 민주정부 합헌 관습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를 들이대며 국왕에게 “탁신을 쫓아내고 새 총리를 지명해 달라”고 외쳤다. 수텝은 자신이 주장한 민중평의회가 초헌법적 발상이라는 논란이 일자 헌법 제7조 발동을 요구하며 헌법 제3조 “주권은 타이 시민에게 있고, 국왕은 국가수반으로서 헌법 규정에 따라 의회와 내각 장관들을 통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를 내세웠다. 2013년 증보판이다.

 

지난 10월 잉락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의 탁신 사면법 통과 뒤
수텝의 ‘민중민주개혁위원회’가
잉락 정권 타도를 외쳤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친탁신·반탁신으로 갈린
극단적인 진영논리 속에
10년간 되풀이된 시위대 충돌
그러나 본질적 개혁은 쏙 빠진
자본 간의 대리전일 뿐이었다

 

잉락은 불법시위대를 향해 “대화로 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애원함으로써 한계를 드러냈다. 잉락 정부는 초동단계에서 진압카드도 이미 빼앗겼다. 군부가 시위 진압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11월30일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자마자 육군총장 쁘라윳 짠오차는 곧장 경찰청장에게 최루탄 사용 중지를 요구했다. 쁘라윳은 때마다 군의 중립을 강조했지만 시중에는 수텝이 불법시위를 벌이는 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2006년 쿠데타 군인들이 그동안 민주당의 뒷심이었던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12월4일 방콕경찰청과 정부청사를 접수한 수텝은 현 상황을 ‘민중혁명’이라 부르며 5일 국왕 생일잔치를 끝낸 뒤 완전한 승리를 선포하겠다고 밝혔다. 잉락은 “초헌법적 의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원론만 되튕겼다. 잉락이 쓸 만한 카드는 바닥났다. 협상이든 항복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남은 건 의회 해산과 총선뿐이다. 학계에서 헌법 개정용 국민투표를 해결책으로 내세우지만 쿠데타 군부가 주도한 2007년 헌법 개정을 반탁신 쪽이 받을 가능성도 없다.

 

진영을 초월하는 왕실 충성 경쟁

 

문제는 또 내일이다. 민중평의회든 총선이든 정부가 바뀌면 또 반대 세력이 빗장 걸 게 빤하기 때문이다. 친탁신과 반탁신으로 갈린 이 극단적인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내일은 지난 10년의 되풀이일 뿐이다. 문제는 이 진영논리가 치명적인 허구성을 지녔음에도 학계와 언론이 비판 없이 살포함으로써 혼란을 부채질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써먹었던 진영론 밑감들을 한 줄로 세워보면 그 허구적인 실체가 드러난다. ‘친탁신-레드셔츠-프아타이당-자유주의-진보-좌파-공화파-민주-반관료주의-지방분권-농촌-빈민-반엘리트주의-반부패세력’ 대 ‘반탁신-옐로셔츠-민주당-민족주의-보수-우파-왕당파-비민주-관료주의-중앙집권-도시-중산층-엘리트주의-부패세력’ 따위다. 20년 넘게 타이 정치판을 쫓아온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짜맞추기식 도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탁신용 도식은 1946년 보수 왕당파들이 만든 민주당이 본디 그런 당이라고 보면 되니까 별로 나무랄 구석이 없다. 그러나 반탁신 진영에 대한 대척점을 구하고자 친탁신 성격을 규정한 도식은 거의 소설 수준이다. 1932년 유럽 유학파 군인과 관료들을 이끌고 무혈쿠데타로 차끄리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뒤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쁘리디 파놈용이 세웠던 단기 정당 인민당(People’s Party)을 빼곤 지금껏 타이 현대 정치사에서 그런 도식에 어울리는 정당이 존재한 적 없다.

 

타이는 불교국가다. 전통적으로 왕실은 불교의 수호자이고 불교는 왕실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공생관계를 맺어왔다. 이건 불교도인 타이 시민이 왕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 운명적 구조였다. 정치도 그랬다. 공산당(불법)을 빼고 반왕정을 내건 정당이 없었다. 반왕정은 반동으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에서 공화파가 등장할 만한 토양이 없었다. 하여 개인 탁신이나 현 집권당 프아타이도 예외 없이 왕실을 향한 충성 경쟁에 온 정열을 바쳐왔다. 친탁신 쪽에서 가끔 반왕정 냄새를 풍긴 이들이 없진 않았지만 사적 영역일 뿐이다. 살벌한 불경죄 때문에 공적 장으로 끌고 갈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타이 사회에는 진영과 상관없이 반왕정주의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정치화시켜 내지 못한 개인의 속마음을 특정 진영 논리로 들이댄다는 건 과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움직이는 17개 정당을 비롯해 타이 정치사에서 이념적 차별성을 지닌 정당도 없었다. 진보와 보수나 좌파와 우파를 특정할 만한 재료가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도식이 바탕삼은 공화파-왕당파, 보수-진보, 좌파-우파 같은 구분선은 상상력일 뿐이다. 그러니 친탁신과 반탁신, 레드셔츠와 옐로셔츠의 정치 대결이 이념이나 정책 대신 ‘선’과 ‘악’을 앞세운 감정적인 싸움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친탁신 도식을 짚어보자. 광적 불교민족주의는 탁신 정부의 상표였다. 탁신은 집권 기간 내내 이웃 버마,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와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댄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 운동을 무력강공책으로 몰아붙여 2500여명 희생자를 냈다. 인권과 언론 탄압도 탁신 정부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던 대목이다. 마약과 전쟁을 선포한 탁신은 법적 심판 없이 10살짜리 아이와 젖먹이를 안은 여성을 포함해 2400여명을 현장 사살했고, 가혹한 언론 통제로 비판을 잠재웠다. 민주-비민주 구도가 성립할 수 없는 까닭들이다. 반관료주의-관료주의 도식도 신화일 뿐이다. 탁신은 2001년 집권 뒤 정부·의회·재계·군부·경찰·언론을 비롯한 사회 전 부문을 손아귀에 쥐고 모든 요직을 친족·친구·동업자·사관학교 동창들에게 맡겨 극단적인 친정 엘리트 관료체제를 구축했다. 차이왓 사타아난(탐마삿대학 정치학 교수)은 “타이에서 정치는 끝났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시민들은 자본대리전의 용병이었다

 

‘농민-도시민’ ‘빈민층-중산층’으로 나눈 도식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낙후한 농업지역인 동북부와 상대적 개발지역이자 탁신의 고향인 북부가 친탁신 요새라면 또 다른 농어업지대로 낙후한 남부와 방콕을 반탁신 거점으로 나눠왔다. 그런 가운데 중산층이 70~75%라는 방콕에서는 2011년 총선 결과 민주당과 프아타이당의 총득표 차이가 6만8천여표밖에 나지 않았다. 계층 구분이 상징을 동원한 지나친 과장이었음을 말해준다. 이건 타이 정당사에서 지도자 출신지에 따른 전통적인 지역 나눠먹기였다. 부패-반부패 같은 구분은 그야말로 무지일 뿐이다. 타이 정치의 근본 문제는 금권선거다. 정당이 선거에서 막대한 돈을 풀고 정권을 잡으면 부정부패를 통해 그 돈을 회수하고 다시 다음 선거를 대비하는 악순환이었다. 지금껏 가장 강력한 금권선거를 해온 탁신 당이 집권 뒤 가장 심각한 부정부패를 저지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과정에서 적잖은 학자들이 금권선거에 따른 부정부패를 경제순환의 일부로 봐왔고, 시민들도 정치인의 부정부패에 관대한 태도를 보여 왔다. 이게 탁신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차린 유령회사를 통해 2006년 2조원대 주식을 싱가포르 회사에 팔아넘기면서 단 한 푼 세금도 내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게 레드셔츠와 옐로셔츠가 거리로 진출할 때마다 일당으로 지급해 온 돈의 출처이기도 하다. 이렇듯 친탁신을 규정하는 도식은 타이 정치사에서 볼 수 없었던,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정치 혼란의 뿌리는 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대리전이다. 왕실을 비롯한 토호 기득권층을 낀 전통 자본과 베트남전쟁에서 싹튼 자유주의 바람 아래 경제개발을 통해 태어난 신흥 자본의 충돌이다. 왕실 보호로 막대한 이문을 챙겨온 군부와 보수 정당이 한 축이라면 신흥 자본의 대표 주자인 탁신과 엘리트들이 다른 한 축을 이뤄 자본을 쫓는 권력투쟁이다. 그 과정에서 자본으로부터 소외당해온 이들이 흘러드는 돈줄에 따라 진영 논리를 펴고 특정 자본을 지지하는 대가로 정치적 요구를 토해낼 수 있는 공간을 얻은 셈이다. 그렇게 해서 얼핏 보기엔 타이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시민의 소리가 정치판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속살을 뜯어보면 동원된 이들은 자본대리전의 용병이었을 뿐이다. 본질적 개혁이 없었다는 사실이 또렷한 증거다. 지난 10년 동안 누가 정권을 잡았든 정치·경제·사회·교육 어느 한구석도 개혁한 적이 없다. 특정 자본가를 위해 소리친 이들의 삶도 달라진 게 없다. 본디 자본과 개혁이 한 몸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 도드라졌을 뿐이다. 시민이 최대 자본가인 왕실과 탁신에 매달리는 한 타이 사회에서 진정한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난 10년 세월이 증명했다. 가면 쓴 자본과 조작된 진영을 뿌리친 시민들이 주인으로 나설 때 타이 정치의 혼란도 끝나게 될 것이다. 아직 그 길은 너무 멀기만 하고, 방콕은 오늘도 정치를 도적질해온 무리들 손아귀에 흔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