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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지은이) | 포이에마 | 2014-02-12
책소개
끝없이 추락하는 한국 교회, 그 타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교회의 윤리적 실패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요인과 얽혀 있다. 왜곡된 이신칭의와 예정론이 만들어낸 지독한 편의주의의 산물, 아르뱅주의.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 돌연변이 괴물 신학이 저지른 행태를 정밀하게 진단한다.
그 옛날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일어난 종교개혁 시대부터 시작하여, 칼뱅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개관하고, 결코 섞일 수 없는 이 두 신학을 제멋대로 결합시켜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괴물 신학 ‘아르뱅주의’를 낱낱이 파헤친다. 사실 저자가 정말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4부, 아르뱅주의를 분석하는 일부터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론신학이 아니라 대중신학에 초첨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급적 쉬운 용어와 표현으로 두 신학을 앞서 설명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신자들이 신학의 개혁을 통해 교회 개혁에 동참할 수 있는 데 목표를 두었다. 또한 신학자와 교회지도자가 아닌 성도가 함께 제3의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여러 대안을 제시했다. 조국 교회가 진정으로 변화되고,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교회로 돌아가며, 종교개혁이 다시 한 번 개혁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돋보이는 책이다.
*아르뱅주의 :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와 칼뱅주의(Calvinism)의 최악의 조합을 뜻하는 저자의 신조어. 아르미니우스주의식 ‘구원의 확신’과 칼뱅주의식 ‘성도의 견인’을 제멋대로 결합한 편의주의 신학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발행하고 있는 21세기형 면죄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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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종교개혁의 폭풍 전야
1) 면죄부, 종교개혁의 발화점
2) <밀양>이 고발하는 현대판 면죄부
3) 한국 교회가 남발하는 면죄부
2부: 칼뱅주의 개요
1) 구원론의 뇌관, 칼뱅주의 예정론
2) 칼뱅주의 5대 교리, 튤립
3) 칼뱅주의의 윤리적 추진력
3부: 아르미니우스주의 개요
1)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
2) 아르미니우스주의 5대 교리
3) 칼뱅주의의 문제를 해결했는가
4)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윤리적 추진력
4부: 한국 교회의 면죄부, 아르뱅주의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괴물 신학, 아르뱅주의!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값싼 구원론’으로부터 벗어날 대안과 성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중 어느 교회가 더 개혁이 필요한가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2012년 <시사in>의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회의 신뢰도(26.4퍼센트)는 가톨릭교회(57.6퍼센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신의 이유로는 ‘불투명한 재정 사용’, ‘교회지도자들의 타락’, ‘성서와 반대되는 성도들의 삶’(2013년 기윤실 여론조사) 등이 높은 순위에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부패로 일어난 개신교회의 종교개혁 전통을 무색케 하는 결과다.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헌금횡령, 성추행, 논문표절 등 갖가지 범죄행위를 저지르고도 진심어린 회개와 사과도 없이 여전히 대형교회 담임으로 있거나, 버젓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몇몇 교회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생겨난 우발적인 도덕적 스캔들이 아니라, 고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신학적 기반 위에서 저지르는 체계적이고도 구조적인 그리고 매우 악질적인 죄악상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패는 신학적 요인과 얽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왜곡되어온 구원론에 관한 신학이 지금의 한국 교회의 도덕적 실패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책은 그 옛날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일어난 종교개혁 시대부터 시작하여(1부), 칼뱅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개관하고(2-3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 두 신학을 제멋대로 결합시켜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괴물 신학 ‘아르뱅주의’를 낱낱이 파헤친다(4부). 사실 저자가 정말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4부, 아르뱅주의를 분석하는 일부터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론신학이 아니라 대중신학에 초첨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급적 쉬운 용어와 표현으로 두 신학을 앞서 설명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신자들이 신학의 개혁을 통해 교회 개혁에 동참할 수 있는 데 목표를 두었다. 또한 신학자와 교회지도자가 아닌 성도가 함께 제3의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여러 대안을 제시했다(5-6부). 조국 교회가 진정으로 변화되고,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교회로 돌아가며, 종교개혁이 다시 한 번 개혁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돋보이는 책이다.
# 한국 교회를 타락케 한 정체불명의 신학, 아르뱅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와 칼뱅주의(Calvinism)의 최악의 조합을 뜻하는 ‘아르뱅주의’는 저자가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주창자도 없고 따로 정리된 글도 없으며, 체계적인 형태로 조직된 적도 없는 신학이나 지금 한국 교회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는 대중적 구원론이다.
(1) 내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 받을 수 있다.(아르미니우스주의식 구원의 확신)
(2)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절대 취소시키지 않는다.(칼뱅주의식 성도의 견인)
로 정리될 수 있는 이 신학은 구원을 받기로 결정하는 선택권은 ‘인간’에게 있으나, 취소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오류투성이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이 논리는 어떠한 죄를 저질러도 천국 갈 수 있다는 치명적이고도 위험한 신앙을 갖게 만들었다. 이것은 지금의 한국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한국 교회가 발행하고 있는 21세기형 면죄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왜곡된 이신칭의과 예정론이 만들어낸 아르뱅주의가 초래한 한국 개신교회의 현상황을 쉽고도 깊이 있게 분석한다.
# 신학자와 교회지도자를 넘어 평신도가 읽어야 할 책
이 책은 신학자와 교회지도자들이 신학적 논쟁을 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신도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진지한 사유가 결여된 아르뱅주의를 버젓이 가르치며 신자를 유린하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에게 더 이상 놀아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죄 있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셨다” “교회 권위에 반박해서는 안 된다” 등의 논리로 성도들을 방패삼아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교회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신학자들을 위한 이론신학이라기보다는 교회 개혁을 위한 실제적이고도 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대중신학서이다.
# 함께 만들어가는 제3의 길, 실천과 대안
저자는 교회에 만연해 있는 아르뱅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500년 개신교회 역사를 통해, 순수했던 교리들이 어떤 식으로 오류에 빠지고 타락했는지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며,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신학적 실패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그리고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시한다. “성서는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신학은 변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더 올바르고 좋은 신학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 바른 신학이 바른 실천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새롭고도 바른 신학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방향도 함께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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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2014-02-15 03:00:00
[책의 향기]‘폭탄주 神學’에 빠진 한국 개신교
/신광은 지음/512쪽·1만8000원·포이에마
TV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면서 정도전 관련 책이 앞다퉈 쏟아지고 있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을 디자인한 혁명아로서 그를 조명하는 책들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도전 붐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운위되는 시대에도 역설적으로 새 시대의 비전을 제시할 ‘신념의 인간’에 대한 무의식적 갈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시대에는 늘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고려의 건국이 선종 불교의 전파와 결부돼 있고 조선의 건국이 성리학의 전파와 연관돼 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기독교 전파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중국과 일본에서 주자학이 양명학과 고증학, 천주학으로 대체되는 동안 무풍지대였던 한국사회의 수백 년에 걸친 이념적 갈증과 허기를 채워준 것이 기독교(특히 개신교)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랬던 한국 개신교의 총체적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일부 목사들의 일탈과 비행, 교계 내부의 반목과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19.4%로 가톨릭(29.2%)이나 불교(28.0%)보다 낮게 조사됐다.
양식 있는 기독교도들은 이런 현상을 일부 목회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한다. 하지만 침례교 신학자인 신광은 목사(46)의 진단은 다르다. 개개인의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전체의 신학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핵심은 한국 개신교가 양립하기 힘든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멋대로 짬뽕한 ‘아르뱅주의’에 있다.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1509∼1564)이 창시한 칼뱅주의와 그 손제자격인 네덜란드 출신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가 창시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400년 넘게 대립하고 있다. 한때 패배하는 듯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18세기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신학자 존 웨슬리(1703∼1791)를 만나면서 부흥했다.
핵심은 구원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장로교와 뿌리가 닿는 칼뱅주의는 내가 구원을 받을지 말지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미리 정해놨다는 예정론을 토대로 신학을 전개한다. 내가 기독교도가 되느냐 마느냐도 예정된 것이다.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 수 없다. 다만 신실한 신앙생활(내적 증거)과 도덕적 실천(외적 증거)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칼뱅주의자들이 도덕적 삶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이유다.
반면 감리교의 뿌리격인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정설을 부인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미리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부인하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구원받을지 아닐지를 예지로 알고는 있지만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접만 하면 구원이 가능한가? 아니다. 언제든 타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회개와 보속이 필요하다.
불교로 치면 칼뱅주의는 돈오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점수론이다. 성리학으로 보면 칼뱅주의는 주리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주기론이다. 조선의 당색으로 치면 칼뱅주의는 벽파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시파다.
문제는 한국 개신교가 편의에 따라 이 둘을 뒤섞은 ‘폭탄주 신학’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영접했으니 구원받았다는 주장을 할 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내세우다가 자신들의 윤리문제가 불거지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뱅주의로 내뺀다. 남의 신앙엔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신의 신앙엔 칼뱅주의를 적용하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정체불명의 팔자주문만 외워댄다는 것이다.
“목사라고 하는 자들이 간통을 하고, 논문을 위조하고, 여신도들을 성추행하고, 불법으로 세습하고, 교회의 재정을 제멋대로 유용하고, 배임하더라도, 그러한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택받았으니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기꺼이 가져다 쓴다.”
“아르뱅주의는 구원의 길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으면 이를 가차 없이 제거하여 가급적 쉬운 길로 만들어버린다. 즉, 아르뱅주의자들은 선택자들에게만 구원의 문이 제한적으로 열려 있다는 칼뱅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기꺼이 선택한다.”
저자는 이런 아르뱅주의가 개신교가 그토록 증오했던 ‘면죄부’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개신교의 정신을 배반하고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을 ‘값싼 구원’으로 팔아넘긴다는 것이다. 어떤가. 드라마 속 정도전이 고려 권문귀족을 향해 토해내는 사자후를 조선후기 사대부들에게 고스란히 적용해도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는 것과 너무도 닮지 않았는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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