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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펌] 마르셀 모스 <증여론>

마리산인1324 2014. 3. 13. 11:51

<조광현의 생명세계>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lumenjo.com/xe/m4/31907

 

 

마르셀 모스 <증여론>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마르셀 모스 <증여론>

 

  선물 교환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비교 연구서이며, 교환의 유형과 사회적 구조 사이의 관계를 최초로 정립한 연구서.
  원시적 교환형태인 아메리카의 포틀래치와 멜라네시아의 쿨라, 뉴질랜드의 하우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는 증여(선물)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기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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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의 성격을 띠는 음식물의 대분배인 사갈리.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 도민들의 생활이 선물체계에

 ‘물들어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들의 생활은 끊임없는 ‘주고받기’다. / 사진 한길사
 

 

A는 B에게 B는 C에게 C는 A에게 주는 선물의 선순환
 근대 산물 ‘교환’개념 틀에 끼워맞추면 의미 잃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미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까? 아마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원시사회(promitive society)’라는 단어로 그들이 사는 세계를 표현하는 현재의 관습이 남아 있는 한, 그 단어를 통해 작동
하는 ‘문법의 환상’은, 다시 말해 그 사회는 ‘원시적’이고, 따라서 뒤처진 사회며 미개한 사회라는 식의 환상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
이다.  그러나 그 원시사회를 연구하러 그 속으로 들어갔던 인류학자들은, 그 세계가 '본원적(primitive)'일지언정 결코 미개하거나
뒤처진 사회가 아님을 발견한다.
  가령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아직도’ 돌도끼를 사용하는 남미 원주민들에게 그보다 10배는 효율이 좋은 쇠도끼를 주었을 때, 그것
으로 동일한 시간 일해서 10배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10분의 1시간만 일해서 동일한 물량만을 생산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뒤처진 생산력, 뒤처진 문화를 발견하겠지만, 그들은 거꾸로 반문할 것이다.
 “왜 10배나 더 생산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데 필요한 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물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다. “쓰고 남은 건 팔아서 돈을 벌면 되잖아. 그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저축해서 재산을 모
아도 되고.”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험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은 틀림없이 남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데 사
용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를 초과하는 생산은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었다.
즉 필요 이상의 생산을 저지하는 것, 그것은 이런 점에서 미개함의 증거가 아니라 자연이나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지혜’의 증거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생산력이 형편없이 뒤처진 그들의 경우, 가령 아프리카 부시맨의 경우 하루나 이틀 일하면 하루나 이틀 쉰다.
  하루에 대략 3~4시간 일하는 꼴이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발전된 생산력을 가진 자본주의 세계의 우리는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인 걸까?

 

  이러한 사실은 한 두 사람이 지적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원시부족’들이 이런 식으로 산다. 그래서 그걸 조사하던 인류
학자들 중 일부는 그 ‘본원적’ 세계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해체된 사실에 거대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기도 했고, 다른 일부는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은 그들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삭막한 삶을 대신할 ‘미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을 쓴 마르셀 모스 역시 ‘선물’로 특징지어지는 그 원시적 문화에서 자본주의를 대신할 미래적 세계를 발견하고자했다. 그리
고 이후 이 책은 바타이유처럼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실망한 좌파 지식인들이 새로운 종류의 미래를 구상 내지 상상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했다.
  이 책에서 모스는 수많은 현지조사 보고서(‘민족지’)를 뒤져서 이른바 원시부족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선물’의 문화, 혹은 ‘증여’
의 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포틀래취’와 ‘쿨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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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브리안드 도민들이 쿨라 교역에서 사용하는 카누. 사진 한길사 제공

 

 


주고 받고 답례…사회적 기능 ‘선물’
 
  치누크 ‘인디언’의 말로 ‘식사를 제공하다’ 내지 ‘소비하다’를 뜻하는 포틀래취는 일종의 ‘선물게임’이다. 결혼식이나 성인식, 조상신
에 대한 제사 등의 축제 때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을 실컷 먹이고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에 초대된 사람들은 초대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게임’에서 진 것이 된다.
  이는 대개 경쟁이나 전쟁처럼 격렬하게 진행되며, 종종 대대적인 물자의 파괴를, 특히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동판의 파괴를
수반한다. ‘이런 것쯤 얼마든지 내다버려도 돼’라는 듯이.
  이러한 선물과 파괴는 명예 내지 권위로 되돌아온다. 다른 누구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쎄게’ 나간 사람이 최고의 명예와 권위를 얻
어 추장이 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을 소모하여 별로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권위를 경제적 재산의
소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위가 하나로 겹쳐져 필경 남들을 지배하게 되는 국가적 권력이 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었을까?

 

  쿨라는 트로브리얀드 군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선물이 증여자와 답례자 두 항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과 달리 섬 전체를 돌며 여러
항 사이에서 행해진다. 그것은 두 개의 정해진 물건을 선물하는데 하나는 음왈리라는 팔찌고, 다른 하나는 술라바라는 목걸이다.
  가령 A가 음왈리를 B에게 선물하면, B는 그것의 답례를 A가 아니라 C에게 하는 것이다. C는 그것을 D에게 주고···. 이런 식으로 전해
지는 음왈리는 아마도 하나의 순환을 그리며 A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술라바의 경우는 음왈리와 반대 방향으로 순환한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하는 것. 이것이 반복된다면 한 번의 선물은 대대적인 선물의 연쇄를 만들어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선물의 체제는 이들 원시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대 이전 우리가 살던 세계에도, 모스가 살던 서구에도 있는 것이다.
포틀래취까지는 안 가더라도, 잔치를 벌이면 음식이 남도록 만들어 싫컷 먹이고 가는 손님에겐 음식을 싸주는 것은 이미 근대화된 우리
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만 가도 떡을 해 이웃에 돌리지 않던가! 모스는 이를 좀더 강하게 말하기 위해 로마 시대의 채권-채무관계
조차 선물을 주고받는 의무체계로 해석한다.

  이러한 선물의 체계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분리된 가구나 가족들 사이에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쿨라에서 선물은 섬들로 분리된 마을이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증여되는 재화
의 순환이 사람들을, 혹은 삶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마나’ 내지 ‘하우’라고 불리는‘靈’이 선물의 순환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며, 공
동체에 하나의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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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동물’ 삶에서 벗어나는 탈출구

 

  이처럼 공동체의 삶은 어디든 증여의 양상을 취한다. 역으로 선물의 순환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물을 개념을 좀더 확장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아주 간단하게 도식
화해서, 식물이 동물에게 산소를 선물하고, 동물이 식물에게 유기물을 선물하는 관계 역시 선물의 순환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서로 기대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싶다면, 어떻게 선물의 순환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의 부제를 '태고사회에서의 교환의 형태와 이유'라고 하였다. 태고 사회에서 교환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
이며, 교환하는 것은 재화와 부 뿐 아니라 예의, 향연, 의식, 군사적 봉사, 여자, 어린이, 춤, 축제, 장(場)이 다 포함된다. 이 사회에서 주
고받음은 자발적 형식을 띄고 있지만 실제로는 의무였다는 것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우선, 교환된 증여에는 반드시 답례의 의무가 있는데 이는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데서 비롯된다. 다른 이에게 물건을 주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이고 수여자는 증여자의 일부인 물건을 돌려줘야 한다. 물건 또한 출신처로 돌아가거나 자신을 낳은 씨족과 토지
를 위해 등가물을 만들려 한다.

 

  멜라네시아(뉴질랜드 북부 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는 '쿨라'라는 제도가 있다. 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 조개껍데기 팔찌(음
왈리)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목걸이(술라바)의 전달과 답례를 통해 교환이 이루어진다.
  쿨라는 증여와 답례를 통해 경제적, 제공, 수령, 답례라는 법적, 도덕적, 소유한 동안 '기분이 좋아지고 용기가 생기고 마음이 가라앉는'
종교적 기능을 수행한다.

  북서부 아메리카에서는 겨울에 공동생활을 하면서 축제가 이루어진다. 이때 음식과 모포 등을 제공하고 동판을 파괴하는 '포틀래치'가
베풀어진다. 포틀래치를 성대하게 베풀고 소중한 것을 마구 파괴할 정도로 부유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재
산 전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쿨라와 포틀래치처럼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보거나 담보를 해결하지 못하면 더 낮은 지위로 떨어진다는 인식은 고대 로마나 힌두, 게르
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성찰 끝에 모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1. 도덕적 결론
자유와 의무, 후한 인심 그리고 주는 것이 이롭다는 주제가 마치 오랫동안 잊어버린 주요동기의 부활처럼 우리 사회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공공연하게 주는 즐거움, 후하고 풍류가 있는 지출의 즐거움, 환대와 사적 공적인 축제의 즐거움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

 

2. 경제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 결론
재산모으기는 지출하기 위해서,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 '충복'을 얻기 위해서다. 고대 도덕에서 추구되는 것은 행복과 쾌락이지 물질적
인 효용이 아니다.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이 계산기라는 복잡한 기계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3. 일반 사회학적, 도덕적 결론
선과 행복이 무엇인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부과된 평화 속에, 공공을 위한 노동과 개인을 위한 노동이 교대로 일어나는 리
듬 속에, 또한 축적된 다음 재분배되는 부 속에 그리고 교육이 가르치는 서로간의 존경과 서로 주고받는 후함 속에 있다.

 


  어떤 곳에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같이 먹을 이를 청하는 소리를 세번 외치고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음식 자체의 양이야 요즘이 훨씬 많겠
지만 굶어 죽는 이가 훨씬 더 많은 이유는 이런 도덕을 잃어버려서 아닐까.

힌두의 법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나온 말 ;
"나누어지는 것이 음식물의 본질이며,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음식물의 본질을 죽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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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푸아뉴기니 / 트로브리안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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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브리안드 전통축제

 

 

 

마르셀 모스/증여론(이상률 역) 

 1925/2011.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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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ss, Marcel, 1872~1950   프랑스의 사회학자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사회학을 확립한 에밀 뒤르케임의 조카로서 뒤르케임이 추구했었던 사회학주의라는 방법론을 받아들여 '총체적 사회적
사실'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즉 사회구조가 실재하고 있음을 강조(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사회다라고 주장하는 바와 달리 사람들의
밖에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사회다))하면서 경제제도, 정치제도, 도덕제도, 종교제도, 법제도와 같은 사회구조를 총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했다. 이러한 연구를 하기 위해 모스는 다양한 사회 간의 '비교방법'을 도입했다.

 

  특히 이 책에서 마르셀 모스가 던진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미개 또는 태고유형의 사회에서 선물을 받았을 경우, 의무적으로 답례를 하게 하는 방법이나 이해관계의 규칙은 무엇인가? 받은 물건에

어떤 힘이 있기에 수증자는 답례를 하는 것인가?"

 

  즉 사회 속의 사람들의 교환관계를 '선물관계'로 분석하고 있는데, 질문에서도 도출해낼 수 있듯이 겉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자유
롭게 보이지만 실제로 그 관계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관계라고 모스는 보고 있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현대의 선물교환과 같이 두 명의
개인이 주고 받는 행위가 아닌 '집단'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이 관계에서 교환하는 대상 역시 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의식이나 축제 등과 같은 행사, 부의 유통 등 그 형태와 성격이 다양하다.

  모스는 폴리네시아의 포틀래치에서 이러한 선물교환의 예를 밝혀내고 있는데 포틀래치는 두 가지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눠줌으로써 명예, 위세, 마나(비인격적인 초자연력을 뜻함)를 얻고, 둘째, 받기만 하고 답례하지 않을 경우 명예, 위세, 마나,
부 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하는 절대적인 의무의 요소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준(혹은 받은) 물건에는 영(하우,
hau)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물건을 주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는 것
은 그의 영혼의 일부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물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선물경제에는 '선물을 주어야 하는 의무', '선물을 받아야 하는 의무', '답례해야 하는 의무'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쓴 선물경제는 흔히 경제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합리적 인간', '이기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즉 경제학에서의 교환관계는
 'give and take', 즉 개인 간의 화폐가 매개된 상업적인 거래행위를 뜻한다. 그에 반해 선물경제는 집단 혹은 사회 체계 속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고, 이는 합리적 교환를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을 저술할 때 실제로 참여관찰을 했었던 적이 없다. 그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결과나 (성문화된) 법이나 제도 등에
관해 적혀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증여론'을 완성했다. 다양한 사회의 예시를 통해 선물교환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여러 사회에서 존재했
음을 비교 연구를 통해 증명해내었다.

 

  마르셀 모스가 이 책을 저술한 시점은 1925년으로 그 당시의 사회와 현재 사회 혹은 우리나라의 현 사회와 다른 나라의 사회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통해 선물교환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단지 그 당시에만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몇몇 사회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
니라는 점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 혹은 시대의 사회(제도)를 연구할 때 흔히 닥치는 어려움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너무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나머지 그 당시의 사회를 머리 속에 그려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상상을 하고 머리 속에 그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보아야 비로소 그 당시 그 주어진 사회와 현 사회를 연결할 수 있고, 그를 바탕으로 현 사회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사회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를 진행할 때 조차도 전체 사회를 이해하거나 전모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양한 선물관계의 양상이 모스의 증여론에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증여와 교환의 제도로써 '포틀래치'를 떠올려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정된 한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모습이 존재한다. 그래서 '포틀래치'와 비슷한 형태를 지닌 사회를 이해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모델인 이상형(ideal type)으로 구성하여 현 사회(제도)와 비교해볼 수 있다.


증여론에 따르면 포틀래치와 같은 증여와 교환의 제도가 지닌 속성은 다음과 같다.
1. 집단적 의례
2. 경제적 현상이지만 예의가 있는 의례
3. 엄격하고 의무적
4. 추장이 매개
5. 투기적
6. 낭비적

 

또한 포틀래치에는 세 가지 의무가 존재한다.
1. 주어야 하는 의무
2. 받아야 하는 의무
3. 답례해야 하는 의무


* 주어야 하는 의무
추장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나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혹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럴 때야 말로 비로

소 추장은 자기 부족, 마을, 가족에 대한 권위를 획득하고 지위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체면 관념이 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를 나누어주지 않을 경우 자신의 위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쟁적으로 투기적으로 낭비적으로 자신의 부를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 받아야 하는 의무
이 의무 역시 강제적이다. 즉 증여를 거부하거나 포틀래치를 거부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거부를 한다는 것은 답례를 하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이고, 그 자신의 권위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거부를 했을 경우에는 당연히 포틀래치를 행해야 하는 의무가 보태지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이러한 의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 답례해야 하는 의무
대개 포틀래치의 경우 받은 것보다 더 많이 포틀래치로 답례해야 하는 의무는 절대적이다. 답례하지 않으면 이는 체면을 영원히 잃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답례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노예가 되는 것과 같은 마찬가지로 그의 지위 뿐 아니라 자유인으로서의 신분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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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틀래치 초대장

 

 

포틀래치

 

  * 미국 태평양 북서안과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州)에 사는 몇몇 미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의 특별한 문화적인 관습.
  * 인디언들 사이의 족장이나 우두머리와 같이 부유한 자가 베푸는 축제를 일컫는 말
 
   포틀래치를 베푸는 시기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정의 출산, 성인식, 결혼, 장례식 그리고 죽은 자를 기리는 것과 같은 기념할 만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열렸으며 행사의 주최자는 같은 부족민뿐만 아니라 이웃 부족까지도 초청한다.
  원래 캐나다 인디언 치누크(Chinook) 부족 말로써 '건네주다'나 '베풀다'를 의미한다.
  이를 행하는 대표적인 인디언 부족으로는 치누크, 하이다, 누트카, 콰키우틀 인디언을 들 수 있다.
  주최자들은 이 행사를 위해 모은 카누, 사발과 숟가락, 조각품, 도구, 담요 같은 물건들을 손님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자신의 부와 명성을
과시한다.


  * 미국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는 ‘포틀래치’라는 의례가 있다. ‘포틀래치’란 ‘식사를 제공한다’, ‘소비한다’는 뜻이다.
  출생, 성년식, 결혼식, 장례식 같은 통과의례나 추장 취임식, 집들이 같은 의식을 통해 손님들에게 온갖 음식과 선물을 잔뜩 안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건 기분에 따라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게 아니다. ‘포틀래치’를 통해 누군가에게 자기의 재물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의무이다.

‘주어야 하는 의무!’ 그런데 받는 것은? 그건 마음대로 할 수 있나? 역시 아니다. 주는 것처럼 받는 것도 의무다. 만일 받지 않는다면? 그건
바로 목숨을 건 결투의 신청, 혹은 전쟁의 선포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모든 선물은 항상 받아들여지고 칭찬된다.

  나아가 ‘포틀래치’엔 하나의 규칙이 더 있다.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것! 선물을 받은 자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런데 받은 것 이상으

로, 더 성대한 ‘포틀래치’를 열어 갚아야 한다.

  그러니 그 사회에서 자기 것을 ‘꼬불치거나’ ‘쟁여 놓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째째한 자들이여, 갖은 애를 쓰는 째째한 자들이여…주어진 재물을 받은 째째한 자들이여…재물을 위해서만 일하는 째째한 자들이여…”(‘증여론’ 114쪽)라는 점잖은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

  누구나 무엇이든 요구하면 다 내줘야 하는 추장. 그래서 가장 가진 것이 없고 누추한 곳에서 사는 추장. 축적이 아니라 나눔을 경쟁하는 사회! 

그곳은 그런 윤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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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추장 시애틀 

 

 

 

중요한 건 ‘이익’이 아니라 ‘순환’

 

  그 사회에선 때로는 자기 위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생선 기름이나 고래 기름처럼 값진 것을 완전히 태워버리기도 하고, 집과 수천장의 담
요를 바닷속에 빠뜨리기도 한다. 또 제일 비싼 동판을 파괴하기도 한다.
  심지어 주는 자에게 되갚는 게 아니라 받은 것을 제3자에게 주어야 하는 사회도 있다. 태평양 섬들(트로브리얀드 군도)에 사는 부족들 간에는 ‘쿨라’(‘원’이라는 뜻)라는 일종의 ‘포틀래치’가 있는데 이들 사회에서는 ‘음왈리’라는 조개껍질 팔찌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술라바’라는 자개에 가공한 목걸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린다. 부족 간의 교류에서 반드시 엄숙하게 행해지는 ‘쿨라’ 교역. 역시 얼핏 보면 이해하기 힘든 비(非)쌍방향의 교류다.

  이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그건 이들 사회에서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에는 ‘마나’ 혹은 ‘하우’라는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 그 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의 힘이기도 하고, 오늘 나를 있게 한 먼 조상의 힘이기도 하다. 따라서 값진 담요를 바다에 빠뜨리는 것은 신에게 예물을 바치는 의례, 그것도 가난한 사람과 아이들의 몫까지 자신이 바치는 의례이다 (그래서 이 행위는 자기 몫으로 남겨둔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겠다는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쿨라’ 역시 마찬가지다. 물건과 물건의 교환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교환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물건에 깃든 그 사람의 영혼, 그 부족의
삶이다. 그러니 재화가 더 많이 순환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일부가 될 수밖에. 그렇게 물건과 사람이 뒤섞여 교환되고 얽히는 세상, 내가 너의 일부이고 네가 나의 일부인 세상에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이루어지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중요한 건 이익이 아니라 순환! 평화를 만드는 탁월한 지혜!

 

존재하는 것 모두가 선물

 

  혹시 이 모든 것이 미개사회의 신화적 사고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그 사회는 야만의 사회가 아니다. 지금 우
리와 다른 사유, 다른 윤리를 갖고 있는 또 다른 사회일 뿐이다. 그리고 그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완강한 자본주의 교환체제 속에서도 의연히 남아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세상에 원래부터 내 것이란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땅이, 하늘이, 바람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나아가 이웃의 정성과 노동이 깃든 선물이다. 본디 내 것이 아니니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돌려줘야 하는 법. 채우지 않고 비우기! 남기지 않고 순환시키기!

                                                                                                                                  -- 이희경 / 문탁네트워크 연구원

 

 

 

콰키우틀 족의 포틀래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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