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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차베스의 그림자가 베네수엘라를 덮었다 /시사인20170726

by 마리산인1324 2017. 7. 30.

<시사인> 제514호(2017년 07월 26일 수요일)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9653




차베스의 그림자가 베네수엘라를 덮었다


차베스는 중남미의 오랜 포퓰리즘 전통에 속하면서도 이와 달랐다. 그는 독특한 ‘차베스식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는 그를 대체하지 못했다.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2013년 3월8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사관학교 강당에서 차베스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렸다. 그날 베네수엘라의 일상이 정지되었다. 학교는 수업을 멈추고 상가는 문을 닫았다. 거리는 텅 비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해수욕장도 개장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생전의 대통령이 선거 때가 되면 즐겨 입던 붉은 셔츠를 입고 장례식장 앞에 길게 늘어섰다. 오열하는 시민 사이로 주문처럼 구호가 흘러나왔다. “우리 모두가 차베스다.” “차베스는 살아 있다.” 시민들은 고인의 마지막 얼굴을 보기 위해 뙤약볕 아래서 장장 10시간 넘게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문하는 모두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전만 해도 차베스 대통령은 멀쩡해 보였다. 2012년 10월 대선에 출마할 때는 몸이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9시간 동안 마라톤 연설을 펼치기도 했다. 당선된 지 두 달 만에 대통령은 수술실로 들어갔고 다시는 걸어 나오지 못했다. 취임식도 치르지 못한 채 2013년 3월5일 사망했다.

 


2013년 3월6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시신이 든 관이 국기에 덮인 채 수도 카라카스의 카를로스 알바레스 군 병원을 떠나 사관학교로 운구되고 있다.


기나긴 대열에는 훈장을 달고 나온 장성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는 이렇게 회상했다. “장군들이 마치 아비 잃은 아이들처럼 울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광경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또한 무히카는 중남미 역사에서 차베스와 같은 정치가는 일찍이 없었다고 추모했다. 룰라 브라질 전 대통령은 “시몬 볼리바르의 사상처럼, 차베스의 아이디어들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라면서 중남미 통합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중남미 정상들은 차베스 대통령을 ‘조금 특이하지만 의리 있는 친구’로 기억했다.


차베스는 빈민의 벗이자 빈국의 벗이었다. 조문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피부색과 행색만 보아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카리브 해와 중남미의 작고 가난한 나라의 정상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날 무려 200만명이 직접 대통령을 조문했고, 30명이 넘는 국가 정상들이 직접 장례식장을 찾았다. 브라질과 칠레, 볼리비아 같은 이웃 국가들은 연대의 의미로 3일 혹은 7일씩 국가 애도 기간을 공표했다.


생전의 차베스는 수많은 사람과 비교되었다.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차베스가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베스는 차베스였다. 그는 역사에서 얻을 것은 챙기고 버릴 것은 내던졌다. 차베스는 좌파 군인 출신이었지만 독재자는 아니었다. 과거의 좌파 군인들은 예외 없이 군사정권을 수립해서 선거를 폐지하고, 야당을 탄압하고,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중지시켰다. 그들은 사회 개혁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독재자였다. 차베스는 선거로 집권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국민소환투표를 실험한 정치가다. 집권 기간에 그를 “무솔리니” 혹은 “히틀러”라고 비판하는 언론도 계속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야권은 시위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노사 공동 파업, 심지어는 쿠데타까지 벌이기도 했다.


차베스는 중남미의 오랜 포퓰리즘 전통에 속하면서도 이와 달랐다. 과거의 포퓰리스트는 이념적으로 모호했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위해 재분배 정책을 펼칠 때는 좌파였다가 국가정책에 도전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할 때는 우파였다. 차베스는 일관되게 좌파적 태도를 지켰고, 어떤 포퓰리스트보다 더 급진적으로 부와 토지를 재분배했다. 과거 포퓰리즘 정권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꼭 필요하면 선거로 집권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독재적인 수단으로 권력을 잡았다. 반면 차베스는 늘 선거를 중시했고, 대안적인 민주주의를 실험했다. 차베스는 혁명가를 자처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아니었다. 그는 쿠바가 이룬 급진적 사회 개혁에 영감을 받았다. 제헌의회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과 완전히 단절하는 개혁을 집권 초부터 주도했다. 하지만 쿠바 혁명처럼 일당체제와 시장경제 폐지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차베스는 좌파 군인 전통에서 비타협의 대결 정치를, 포퓰리즘 전통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전략을, 혁명적 좌파 전통에서 급진적 목표를 받아들였다. 세 전통에 존재하는 권위주의적 해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매우 독특한 차베스식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차베스는 선거민주주의와 직접민주제, 급진민주제가 공존하는 가운데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도 정치적 적들과는 지속적으로 대결하는 정치를 펼쳤다.


‘룰라형 좌파’와 다른 ‘차베스형 좌파’


차베스는 현대 중남미 정치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중남미 좌파 정부 가운데 차베스의 노선을 벤치마킹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정부와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전 정부는 제헌의회 전략으로 구체제를 무너뜨렸고, 주요 자원의 국유화 정책 등으로 차베스의 길을 따르기도 했다.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와 온두라스의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은 빈민을 위한 재분배 정책을 추진하고자 시도했다. 이들은 ‘차베스형 좌파’로 불렸는데, 자유민주주의와 세계화된 시장경제 내에서 여러 개혁을 시도한 ‘룰라형 좌파’와는 명백히 달랐다.


2015년 3월5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차베스 전 대통령 2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차베스의 거대한 실험에는 몇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먼저 차베스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위태로운 행보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신헌법을 다시 개정해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버렸다. 이로써 2021년, 2031년까지 집권하겠다던 차베스의 농담은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비상대권으로 주어진 대통령의 입법권을 세 차례나 행사해 입법부의 권한을 축소했다. 대법원, 검찰, 선관위, 감사원 등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임명해버렸다. 그 결과 권력은 행정부와 대통령에 집중되어갔다.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도입한 마을평의회 같은 제도도 정부 지지자들끼리 중앙정부 예산을 나눠먹는 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마을평의회는 정부의 하부 조직으로 변질되고, 선거 때에는 정부의 선거운동 조직으로 전락할 것이다.


차베스의 경제 실험도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국유화로 공공부문이 매우 커졌고, 그 과정에서 새로 생겨난 일자리들은 차베스 정부 지지자들에게 배타적으로 분배되었다. 사회적 경제 부문도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정부의 후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얼마든지 정부 예산만 축내는 부문으로 전락할 우려가 컸다. 빈민층을 수혜 대상으로 삼은 야심찬 복지정책도 보편적인 복지제도로 발전시켜야 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경제 실험의 가장 큰 약점은 재원을 전적으로 변덕스러운 국제 유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차베스 정부는 거시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에 도무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인플레이션과 잦은 물자 부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중남미에서 도시화가 가장 빨리 진행된 베네수엘라는 식량자립도가 매우 낮아서 식료품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해왔다. 유가가 치솟아 오일달러가 대거 유입되고, 중남미 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식료품 수입이 급증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유가가 급락하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 유통기업과 상인들은 더 비싼 가격에 팔려는 속셈에 식료품을 진열대에서 모두 치워버릴 것이다.


여기에 치안 문제가 화약고로 남아 있었다. 총기 살인이 급증해 남미 최악의 상태로 악화되었다. 무기 소유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총기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고, 정치적 갈등은 종종 총격전으로 비화되었다. 2002년 4월11일 차베스 대통령을 48시간 동안 쫓아낸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도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 모두에서 사망자가 나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 거대한 실험실의 지휘자인 차베스 자신이었다. 과연 누가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차베스 정부는 노동조합과 같은 튼튼한 사회운동에 기초한 것도, 이념과 강령으로 결속한 정당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내각의 장관들은 자율성과 전문성보다는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잣대로 임명되었다. 국가의 모든 기구를 작동시키는 것은 제도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차베스의 강력한 카리스마였다.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는 시작부터 삐걱


2012년 12월10일 차베스 대통령은 수술을 하러 쿠바로 떠나기 직전 텔레비전에 나왔다.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목했다. “내게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니콜라스 마두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주기 바란다.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요청한다.” 차베스가 엄숙하게 전달한 이 메시지는 그의 유언이 되었다.


마두로 대통령 퇴진과 조기 대선 등을 요구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날로 격해지고 있다.


당시 부통령직을 맡고 있던 마두로는 버스기사 노조 지도자 출신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베스타’였다. 1994년 3월26일 차베스가 감옥에서 석방되던 그날부터 사망하던 날까지 그의 곁을 지킨 최측근 인물이었다. 마두로의 역할은 영리한 ‘유산 관리자’일 것이다. 차베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마두로에게 아무도 카리스마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마두로는 시작부터 실수를 저질렀다. 차베스가 없는 베네수엘라에서 그가 내린 첫 번째 결정은 고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 영구 보존하겠다는 것이었다. 살아생전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고향인 열대초원에 묻어달라던 고인의 소망을 짓밟은 것은 물론이고, 추모 열기를 숭배로 바꾸어 통치전략으로 삼으려는 얄팍한 속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결정은 시신이 이미 부패가 시작되는 바람에 번복해야 했다. 차베스 사후 40일 만에 대선이 실시되었다. 이 대선에서 마두로 후보는 겨우 1.6%포인트 차이로 어렵게 승리를 거두었다. 차베스 대통령의 유언, 200만명의 조문객이 보여준 추모 열기를 고려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승리였다.


후계자 마두로 앞에는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차베스의 정치체제가 창안자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 즉 보편적인 정치체제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했다. 또한 차베스가 남긴 사회경제 모델이 유가 급락 시대에도 멀쩡하게 굴러간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즉 전임자 차베스 정부가 안고 있던 위험을 잘 관리하는 일이었다.


마두로는 관리는커녕 전임자의 유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취임 이전부터 리더십 위기를 자초하더니 경제위기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유가가 곤두박질치고 물가가 상승하고 물자 부족이 심해지고 있는데도, 마두로 정부는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부자들 탓만 하고 있었다. 위기가 더욱 깊어지면서 2015년 의회 선거에서는 야권이 의석의 67%를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설상가상으로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투표도 추진했다. 여기에 내부 위기마저 겹치면 정국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차베스 정부를 지지하던 빈민들이 등을 돌리고, 차베스주의자 사이에서 ‘비토’가 개시되는 그 순간 마두로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사라지고, 경제위기가 쓰나미처럼 밀어닥치고,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후임 정부가 위기를 눈덩이처럼 계속 키우는 상황. 가상 역사소설에나 나올 법한 위기가 베네수엘라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끝은 아니다. 최악의 사태는 마두로 정부는 물론이고 야당조차 확고한 대안 세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두 세력 모두 무능해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는 무정부 상태, 그것이야말로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재앙의 순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