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302호(2013.07.02 07:51)
https://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873
어느 레바논 여인의 삶과 죽음
레바논의 비극을 곳곳에 차용한 〈화염〉의 주인공은 실제 인물이었다. 그녀는 준비된 투사도,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저 팔레스타인의 인권과 생명이 존중되기를 바랐던 기독교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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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나왈은 고향으로 가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바로 그해, 남부에서 레바논의 기독교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난민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자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남부로 떠난다. 나왈은 탯줄을 끊자마자 헤어지게 된 갓난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영원히 사랑”할 것이며 “함께하는 행복”을 갖겠다고 맹세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를 찾을 단서는, 할머니가 아이의 오른발 뒤꿈치에 먹물로 새긴 점 세 개.
레바논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난민 사이의 비극
레바논 남부를 전전하는 중에, 나왈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가득 태운 버스가 기독교 민병대의 공격을 받아 통째 불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원래는 그녀도 휘발유를 흥건하게 뒤집어쓴 버스 속에서 타죽게 되었으나, 십자가를 내밀며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고함을 친 끝에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그 화염은 나왈이 믿던 신마저 불태우면서, 그녀를 팔레스타인 무슬림 저항 조직 가운데 하나인 샴세딘에 가담하게 만든다. 군사 훈련을 마친 그녀는 이름난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하고, 크파르 라야트 감옥에 10년 넘게 감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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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니하르 혹은 아부의 발뒤꿈치에 새겨진 먹물 문신은 그가 ‘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오이디푸스의 재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보다 중동 현대사와 더 밀착해 있다. 〈화염〉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레바논 내의 기독교 민병대 세력과 팔레스타인 난민 사이에 벌어진 유혈 비극은,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시작됐다.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고 있던 땅을 빼앗으면서 팔레스타인인은 인근 중동 국가로 흩어졌고, 아랍과 벌인 수차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이스라엘의 영토가 커질수록 더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겼다. 특히 1967년 제3차 아랍·이스라엘 분쟁(6일 전쟁)과 1973년 제4차 분쟁(10월 전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한 레바논 남부에는 50만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난민이 몰려들었다. 인구의 30%밖에 되지 않는 레바논 기독교 세력은 이런 사태가 마땅치 않았고, 이스라엘은 레바논 기독교 정당이자 민병 조직인 팔랑헤당(Falange Party)과 한편이 되어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을 도왔다. 나왈의 마음을 지옥불에 던져넣은 ‘버스 학살’ 사건은 1975년 4월13일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다.
〈화염〉은 레바논의 역사를 작품 곳곳에 차용하고 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나왈의 실제 모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1988년 소하 베차라는 나왈처럼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 앙투안 라하드의 암살을 시도하고 무려 10년 동안 지하 감옥에 투옥됐다. 그녀는 옆방의 포로가 고문을 받거나 자신이 고문을 받으러 갈 때 늘 노래를 불러 ‘노래하는 여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그녀를 파리에서 만났던 작가가 그때 어떤 노래를 불렀느냐고 묻자, ‘아바(ABBA)’라고 대답했다. 나는 울컥했다. 그녀에게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준비된 투사도 아니었고, 어떤 이념에 투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생명이 존중되기를 바랐던 평범한 기독교도였다. 영화에서 나왈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단 두 발의 총탄만 발사했다. 작가가 라하드를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면서 왜 탄창을 다 비우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어떠한 중요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라하드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아는 것이었다. 하나는 레바논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을 위한 거였다.”
워낙 충격적인 모티브가 이 작품을 〈오이디프스 왕〉과 관련시키지만, 진실은 같은 작가의 〈안티고네〉와 더 가깝다. 나지라(할머니)→나왈→잔느로 이어지는 묘비명 세우기가 그것을 입증한다. 무엇보다 안티고네나 나왈의 희생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로부터 비롯하며, 어떤 곤경을 무릅쓰고서라도 세계의 참상을 애도하고자 한다는 게 중요하다. 레바논의 비극에 관심이 있는 독자께는 아리 폴먼·데이비드 폴론스키의 만화 〈바시르와 왈츠를〉(도서출판 다른, 2009), 박노해의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 2007), 놈 촘스키 외 〈촘스키, 고뇌의 땅 레바논에 서다〉(시대의창, 2012)를 권한다.
* 참고
- https://blog.naver.com/booms_daydream/222687784416
어쩌면 드니 빌뇌브의 최고 걸작,<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
중동의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한 모녀의 미스터리한 퍼즐 찾기 수학자인 '잔느 마르완...
blog.naver.com
- https://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8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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