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80734.html 기사등록 : 2006-12-27 오후 05:18:58
[박노자칼럼] 신자유주의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 | |
한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사기꾼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서인가? 국내에 있는 지인들과 이야기하다가 ‘황우석’ 이름 석 자가 나오면 상대방은 불편하다 싶은 표정이 되어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런데 지난 두 해 동안 전개되었던 ‘황우석 드라마’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슷한 일이 언젠가 재발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황우석 사기극’의 진행 과정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구조적인 결함들이 고쳐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우석 스캔들’에서 필자를 놀라게 한 부분은 ‘대한민국 최고 과학자’에 대한 여·야의 포괄적 정치적 지원이었다. 한쪽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문화방송> ‘피디수첩’의 취재를 두고 “짜증스럽다”, “이쯤에서 덮자”는 등등의 불편한 심기를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조선일보>가 아예 담당 프로듀서의 학생운동 경력을 문제삼아 황우석을 ‘빨갱이들의 희생자’로 그리려는 기색을 보였다. 이라크 파병 문제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등이 아니면 과연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이렇게 ‘대동단결’하는 경우를 봤는가?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청와대의 중도보수든 <조선일보>의 극우든 보수적 정계 전반에서는 이라크 파병으로 미국으로부터 ‘점수’를 따는 일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를 공고화하는 일 못지않게 황우석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황우석이야말로 한국적 신자유주의 모델에 안성맞춤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줄기세포 사업을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맞는 ‘최소의 비용으로 따는 대박’으로 선전했다. 재계로서는, 그 연구의 실효성과 무관하게 그가 일으키는 미디어 광풍 자체가 이미 수익을 올리는 효과를 냈다. ‘황우석 바람’이 거세게 불던 2005년 봄에, 일부 바이오 벤처의 일일 주식 거래량이 웬만한 재벌을 압도하다시피 했다. 또 관료집단이나 재벌로서는 병원들을 정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 장기적인 숙원이기도 했는데, ‘황우석 광풍’ 덕분에 이는 내국인 손님 수탈 차원이 아닌, ‘새로운 바이오 수출 상품 추진’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황우석이 일으켰던 애국주의의 ‘파도’도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한국의 지배계급이 취할 수 있는 최적의 대민 ‘마취 전략’이었을 것이다. 양극화로 시민 다수가 변변한 정규 직장과 주택을 얻을 확률이 계속 낮아지는 판에, 월드컵과 같은 행사를 상시화해 모든 뉴스의 절반 정도를 축구에 할애하든지 황우석의 ‘세계 최초, 최고 기록’들에 대한 지속적인 보도로 서민들의 머리를 채우는 것이 ‘민심 이반’을 막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보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계급의식이 취약한 국내 민중에게 온갖 애국주의적 사기극에 대한 면역성이 생기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게 돼 있다.
황우석의 ‘모래성’이 무너졌다 해도, 이 사건을 완료형으로 언급하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황우석을 키우는 데 앞을 다투었던 노무현 대통령도, <조선일보>도 이 일을 두고 도덕적 책임을 지고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황우석이 ‘벌거벗은 임금’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알려준 제보자 ㄱ아무개씨 부부는, ‘위’로부터 강요된 것으로 알려진 사직을 당해 벌써 1년 넘게 실직 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2, 3의 황우석이 만들어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는 것이, 새해를 앞둔 필자의 우울한 생각이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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