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73745.html 기사등록 : 2006-11-23 오후 06:42:29
[세설]배추밭 갈아엎기 전에 사유를 갈아엎어라
/김선우 | |
배추값 폭락으로 속출하는 산지 폐기 | |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옷들을 꺼내고 창문 단속을 했다. 강원도의 겨울은 길고 춥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실내에서 반팔을 입고 지내기 일쑤인 서울 도심의 아파트살이에 비하면 이렇게 추운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과밀한 자동차와 과도한 냉난방으로 오염된 공기층으로 인해 서울은 한여름에 쏘다녀도 시골에서보다 피부가 덜 타고 한겨울에도 같은 위도의 시골보다 덜 춥다. 이렇게 조금씩 계절을 잃어가고 있는 서울살이에 비해 혹독하리만치 추운 강원도의 겨울이 때로 ‘살아있음’의 청명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강원도의 겨울을 걱정하는 지인에게 편지를 쓴 후 고향의 어머니와 김장날을 잡으려고 통화를 했다.
배추값이 떨어져 우리야 좋지만 농사지은 이들이 걱정이라고 어머니가 한말씀 하신다. 그제야 며칠 전 ‘배추값 폭락’이라는 뉴스를 접한 것이 현실감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생명의 느낌에 깨어있을 것’이라고 늘 스스로에게 말하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이란 이렇다. 내가 직접 농사짓고 내 일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니 매일매일 내 입에 들어와 나를 살아있게 하는 먹거리에 대해서 이렇게 무심해진다.
뉴스검색을 해보니 배추값은 그야말로 ‘폭락’ 상태다. 대형할인점들의 김장행사에서 배추 한포기가 300원에서 500원 정도로 책정되었단다. 껌 한통, 아이스크림 하나 값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배추밭을 통째 갈아엎는 농가가 속출할 수밖에 없다. 가격대 안정을 위한 정부정책 중 하나인 산지 폐기가 이루어지면 밭을 갈아엎은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생산원가에 준하는 보조금을 받는다. 거기에는 물론 농부들의 땀의 대가는 포함되지 않는다. 한해 농사 공염불이 되느니 한푼이라도 건져보려는 고육지책을 택하는 농부들의 타들어가는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말이다. 멀쩡한 배추를 밭에서 갈아엎어야 하는 일, 농산물 가격 안정세를 위한 산지 폐기가 ‘상식적인’ 정책으로 통용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체증처럼 자꾸 가슴에 얹힌다. 이것은 단지 올해의 배추값 폭락이 문제라기보다 애써 기른 농작물을 밭에서 그대로 갈아엎어버리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 존재조건의 배후에 대한 불편함일 것이다.
음식 과잉으로 비만 인구가 넘쳐나는 지구의 한편에서 지금 이 순간도 매일 3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굶어죽어가는 치명적 부조리가 병존하는 것은 식량의 절대부족 때문이 아니라 식량을 이윤획득의 산업 가치로 치부하는 자본의 시장논리 때문이다. 자본주의 삶의 최악의 양태는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적나라해진다. 돈이 되는 일이면 먹거리를 가지고 무슨 짓이든 하는 파렴치한들을 비롯해, 동식물에 가해지는 온갖 유전자 조작들로 만들어지는 ‘프랑켄 푸드’들, 다국적기업들이 오로지 이윤추구 혹은 이윤독점을 탐하며 만들어내는 ‘먹어서는 안 되는’ 먹거리들은 이제 농작물에 농약과 살충제를 ‘뿌리는’ 방식에서 진화해 식물 디엔에이(DNA) 자체에 살충제 성분을 포함하도록 조작되는 데 이르렀다. 이런 ‘유전자조작식품’들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장논리 속에서 우리 밥상으로 몰려오고 있다. 비윤리적 다국적기업의 온상인 미국은 소위 선진국들 중 유일하게 유전자조작식품에 별도표기 규정을 두지 않는 나라다. 왜?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이런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려고 안달복달하며 설상가상 광우병 혐의가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고 나섰다.
갈아엎어진 배추밭의 참담한 광경이 농업에 대한 사유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암묵적 항의처럼 느껴진다. 농업-먹거리에 대한 정책은 자본의 논리를 쫓다가는 그야말로 망하게 되어있다. 농산물은 공산품과 다르다. 그대로 우리의 피와 살이 되고 숨이 되는 생명의 경작이 농업이다. 세련된 소비문화로 타락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웰빙’의 전제조건은 ‘잘 먹는 일’이다. 이때의 ‘잘’은 탐식이나 미식에의 욕망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먹는가가 삶의 질과 지속가능한 미래에의 첫 번째 관건임을 인식한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세계시장체제에서 벗어난 로컬푸드운동, 슬로푸드운동, 페어트레이드, 유전자조작식품의 금지, 유기농 먹거리의 정착을 위한 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우리의 농업과 먹거리를 지구상 가장 천박한 자본주의를 구현하는 미국 자본의 횡포에 고스란히 종속시키려고 드니 이게 웬 거꾸로 가는 세계화인지 모르겠다.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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