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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신영복

신영복 선생님 퇴임기념 마지막 강의(060608)

by 마리산인1324 2007. 1. 16.

 

http://blog.skhu.ac.kr/hermes/15

신영복 선생님 퇴임기념 마지막 강의

오전 10시부터 300여명의 학생,교수,취재진,일반인이 함께한 강의


내 뿌리는 무엇인가?
숲은 어떻게 만들어가야하는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과제를 내주신 강의였습니다.

'cool head와 warm heart를 가져야한다.' 'head to heart라는 가장 긴 여행'이라는 강의를 듣고 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碩果不食 '씨 과실은 먹지 않고 남겨둔다'-희망에 대한 이야기


2006/06/0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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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에 성공회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맡는 신영복 선생님의 고별강연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 강의의 주제는 절망의 시대 속 희망이었습니다. 불필요한 얘기들보다는 강연 원고 두 편을 함께 읽어보는 일이 좋을 것 같아 아래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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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의 시작]


대나무는 사람이 심어주어서 자라는 나무가 아니다. 오직 뿌리에서만 그 죽순이 나오기 때문이다. 땅 속의 시절을 끝내고 나무를 시작하는 죽순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가 무척 짧다는 점이다. 이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함이 곧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훗날 횃불을 에워싸는 죽창이 되고, 온 몸을 휘어 강풍을 막는 청천 높은 장대 숲이 될지언정 대나무는 마디마디 옹이진 죽순으로 시작한다.

대나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무들은 마디나 옹이로 먼저 밑둥을 튼튼하게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상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새 학교를 시작하든, 새 직장을 시작하든, 어제의 일터에 오늘 다시 불을 지피든, 모든 시작하는 사람들이 맨 먼저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짧고 많은 마디이다. 나무가 아닌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마디는 과연 무엇이며 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내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새봄과 함께 세차게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여러 부문 운동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뜻을 심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절실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세상사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의 완강한 저항과 억압 속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그래도 덜한 경우이고,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을 부단히 배우고 수용함으로써 자기 개선을 해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탄력성마처 상실해버린 단계가 되면 이는 아예 초전박살의 살벌한 위기구조가 되고 만다. 이 때 죽순은 다만 좋은 먹이가 될 뿐이다.

죽순의 마디는 분명히 뿌리에서 배운 것이다. 캄캄한 땅 속을 뻗어가던 어렵던 시절의 몸짓이다. 역경의 산물이며 저항의 흔적이다. 그것은 차라리 패배의 상처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좌절과 패배를 딛고 일어선 의지의 인생을 우리는 물론 알고 있으며,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린 민중투쟁마저도 유구한 민족사의 밑바닥에 묻혀 있다가 이윽고 찬란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승패의 변증법을 우리는 역사의 도처에서 읽어서 안다.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에 맞는 목표와 단계를 설정하는 일이 곧 마디의 과학이라 생각하며, 달성할 수 있는 목표,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조직하는 일이 바로 짧은 마디의 교훈이라 생각된다. 손자병법이 가르치는 바도 다르지 않은데, 이를테면 전쟁을 잘 한다는 것은 쉽게 이길 수 있는상대를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약한 상대를 고르라는 비열함이 아님은 물론이다.

용두사미란 경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정당이든 단체든 개인이든 거대하고 요란한 출발은 대체로 속에 허약함을 숨기고 있는 허세인 경우가 허다하다. 민들레의 뿌리를 캐어 본 사람은 안다. 하찮은 봄풀 한 포기라도 뽑아본 사람은 땅 속에 얼마나 깊은 뿌리를 뻗고 있는가를 안다. 모든 나무는 자기 키만큼의 긴 뿌리를 땅 속에 묻어두고 있는 법이다. 대숲은 그 숲의 모든 대나무의 키를 합친 것만큼이나 광범한 뿌리를 땅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대나무가 그 뿌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나무가 반드시 숲을 이루고야 마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의 공유에 있는 것이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나면 이제는 나무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마디와 뿌리의 연대가 이루어 내는 숲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홍수의 유역에서도 흙을 지키고 강물을 돌려놓기도 하며, 뱀을 범접치 못하게 하고, 그늘을 드리워 호랑이를 기른다. 그 때쯤이면 사시청청 바람을 상대하되 잎사귀로 사귀어 잠재울 것과 온몸으로 버틸 것을 적절히 가릴 줄 안다. 설령 잘리어 토막 지더라도 은은한 피리소리로 남고, 칼날 아래 갈갈이 찢어지더라도 수고하는 이마의 소금 땀을 들이는 바람으로 남는다. 식목의 계절에 저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보자. 나는 어느 뿌리 위에 나 자신을 심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만큼의 마디로 밑둥을 가꾸어 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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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언어가 바로 '희망(希望)'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그 다음이 '인내(忍耐)'일 것이다. 인내가 현재의 상황을 무작정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은 견디기는 견디되 곤경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작정 인내하기보다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경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수시로 확인된다. 절망(絶望)이란 의미가 희망이 없다는 뜻이고 보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희망도 희망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불과한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는 시구를 비롯하여 희망의 언어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이 말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기도 한다.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효사(爻辭)에 있는 구절이다. 씨 과실은 결코 먹히지 않는 법이며 씨 과실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이 말에서 나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읽게 된다. 수많은 세월을 면면히 겪어오면서 터득한 옛사람들의 유장함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 괘를 읽을 때마다 고향의 감나무를 생각한다. 장독대와 우물 옆에 서 있는 큰 감나무다. 무성한 낙엽을 죄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 있는 초겨울의 감나무는 들판의 전신주와 함께 겨울바람이 가장 먼저 달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겨울의 입구에서 그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이다. 그것은 먹는 것이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씨를 남기는 것이다.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서 빚나는 가장 크고 탐스런 씨 과실은 그것이 단 한 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희망이다. 그 속에 박혀 있는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석과불식이 표상하는 이러한 정경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의 언어를 이처럼 낭만적 그림으로 갖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낭만은 흔히 또 하나의 환상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곤경에서 갖는 우리들의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의미로 이 정경을 읽어야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은 우리들 스스로가 키워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밭을 일구고 씨를 심는 경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WTO, IMF, FTA 라는 일련의 힘겨운 상황에서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는 박(剝) 괘를 연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한 희망을 갖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환상이나 소망이 아닌 진정한 희망을 키워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성한 잎이 떨어지고 한파 속에 팔 벌리고 서 있는 나목(裸木)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품이 걷히고 난 후의 우리 경제의 모습을 직시하는 일이다. 비단 경제구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틀어 돌이켜보는 일이다. 엄청난 외세에 떠밀리고 볼의의 폭력에 가위눌리며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일이다. 그러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들 스스로의 자화상을 대면하는 일이다. 남의 돈을 빌려 살림을 꾸리고 자녀들을 내몰아 오로지 돈 벌어 오기만을 호령해 온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니었던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든 이 겨울을 넘기고 나면 다시 봄이 오겠지" 이것은 안이한 답습의 낡은 언어이며 결코 희망의 언어가 아니다. 희망은 새로운 땅에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희망은 새로운 땅을 일구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동토(凍土)에 쟁기를 박어 넣는 견고한 의지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패배할 수 없는 천근의 땅에 씨앗을 심는 각오여야 하기 때문이다.

산지박괘의 다음 괘는 '지뢰복(地雷復)' 괘다. 다섯 개의 음효가 위로 쌓여 있고 제일 밑바닥에 한 개의 양효가 싹트고 있는 모양이 복(復) 괘의 형상이다. 글자 그대로 광복(光復)이다. 씨 과실 속에 있던 씨앗이 땅 속에서 싹 트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키워내는 것, 이것이 절망의 괘에서 희망을 읽는 진정한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곤경을 견뎌야 할지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희망의 언어다. 희망을 키워내는 실천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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