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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신영복

강의 (5/5): The others

by 마리산인1324 2007. 1. 16.
 
 
 
 
 
2007/01/12 19:30
 
책에서 나머지를 할애한 분야는 당대의 주류와 후대의 변화를 설명하는 대표적 학파입니다. 배울 점이 많아 제가 인상 깊었던 부분 위주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1. 묵자
이름 때문에 '우리 같이 묵자' 식의 유머 소재로만 알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_-
묵자는 그야말로 이름처럼 Dark School입니다. 먹의 색처럼 검은 옷을 입고 다녔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묵가는 당대의 좌파 사상가인 묵적의 기치아래 반전, 평화, 평등이라는 혁명적 가치하에 모인 집단입니다.

주나라의 귀족사회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 사회를 목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실천궁행하였습니다. 매우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겸애와 상호 존중과 이익이라는 교리를 실천했던겁니다. Christ의 탄생시 찾아온 동방박사가 묵가 제자였으리라는 근거 박약한 주장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사상과도 유사합니다. 그만큼 보편적이고 진보적 사상가들이었습니다.


묵가는 중세 mason처럼 성을 방어하는 기술자가 있어 기술적 영향력을 중심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탁월한 방어실력을 바탕으로 남을 공격하지 말라는 비공(비공)을 실천했지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묵가는 그 급진성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가 2000년이 지나 근세 중국에서야 다시 복원이 되었나 봅니다.


2. 순자
이 분도 이름이 좀.. ^^;
순자는 유가의 일문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상대적인 예보다는 절대적인 법을 주장한 객관파입니다. 실제로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 이사 등이 법가를 창업하였기에 법가의 시조쯤 되는 거지요. 후세에 주자가 유학의 정통을 바루는 작업 때, 이단으로 몰려 유가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이러니컬하게도 유가도 아닌, 법가도 아닌 애매한 사상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순자가 주희의 미움을 산 이유는 객관파답게 하늘을 물리적 하늘로 보고자 했음입니다. 유학을 되살리기 위해 天을 강조하는 주희에게 이단 유학자로 정리된거지요.

순자하면 떠오르는 브랜드는 단연 성악설입니다. 그렇다고 순자씨가 -_- 사람에 대해 혐오가 있었던건 아닌듯 합니다. 命을 제거하고 敎를 살리자는, 사회적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악한 면을 부각했을 뿐입니다. 근저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었다고 합니다. 하늘 탓하지 말고 사람이 제도와 교육을 갖춰 이성으로 해결가능하다는 주지주의였으니까요. 관념적인 하늘 타령하지 말고 사람의 가능성을 믿었던 인문주의자 순자의 말로는 애석한 부분도 있습니다.


3. 법가
법가의 모토는 '법대로 하자'겠지요. -_- 그래서 매우 냉혹하다고 배워왔을겁니다. 제가 읽고 있는 다른 책에서도 중국인 저자는 법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더군요.

팩트만 보자면, 법가의 이사가 진왕과 더불어 천하를 통일했고, 난세를 구한 학문이지만 치세에서의 부적합성으로 유가에게 밀려나 땅에 묻힌 후 재기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끔찍한 사실은, 법가의 이론가 한비자는 동문인 이사의 계교로 진왕의 감옥에서 굶어 죽고, 이사니 상앙이니 법가 고수들이 모두 모함이나 권력 투쟁에 휘말려 자신들의 법에 의해 숙청을 당했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렇게 단절된 학맥 자체도 후대의 폄하에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만 해봅니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은 일반 학자들과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수주대토로 상징하듯 다른 학파와 달리 미래를 준비하는 변화사관이었다는 점, 전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끝내서 민중의 고통을 덜고자 하는 실천적 목표를 수행했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시급한 과제가 왕권의 강화였습니다. 당시 귀족의 예, 서인의 형이라는 이분체계에서 유가는 모두를 예로 교화하자는 측이었다면, 법가는 모두 형으로 처리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법가의 사상은 지금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관점이네요. 성문법을 통해 귀족을 견제하여 강한 나라를 만들면 빨리 통일을 이뤄 전쟁이 끝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법가가 제일 먼저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이뤄 실제로 통일을 이뤘으니 현실에서 검증된 적합성은 있었던거지요. 다만, 지나치게 결과에 집착하다보니 술이라 표현되는 마키아벨리즘을 늘 구사했고, 그 결과 혼탁의 시대를 열어, 유가의 인과 의라는 개념이 피어날 토양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4. 화엄과 주희
앞에서 순자를 이단자로 몰아버린 주희 이야기를 했습니다.
송대에 들어, 화엄 사상이 중국을 몰아치면서 노자와 화엄의 개인주의가 팽배함에 따라 중국은 사상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를 바로 잡고자 주희는 고전속에서 정통을 다시 가려 유학의 본령을 세우는 거대 작업을 했습니다. 특히 4서중 대학과 중용을 장구했지요.

대학은 예기의 제42편을 다시 장구한 것입니다.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탁월한 프레임웍을 제시했습니다. 제 후배 한명은 이 프레임웍을 프랭클린 다이어리 프레임웍과 엮어서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이 부분은 따로 시간을 내어 다시 설명하지요. (이젠 비행기 탈 준비를 해야합니다. -_-)

중용에서는, 개인존재는 천명에 통일되어 사회화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이 이(理)이고 천의 이를 따르도록 합니다.

반면, 이러한 신유학에 대립각을 세우며 심학인 양명학이 대두되기도 합니다. 주체성을 강조하여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간결히 정리하여 대중화에 성공합니다. 양명이 갈파했다지요.
"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 공자, 육경도 존숭할 필요 없다."
그야말로 주관적 관념론입니다.


제가 이런 쪽에 문외한임을 전제하고 떠오르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결국 신유학은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색채를 띌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경직성이 2500년간 거대 중국을 지탱해온 사상적 다양성을 말살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청말에 서양사상의 유입과 함께 유학은 종언을 고합니다.

어찌보면 송대에 죽을 유학을 근대까지 연명했을지도 모르지만, 죽어가는 사유체계를 진화시키지 않고 orthodox text로 복원하려는 시도는 무모했겠습니다. 전국시대처럼 다양한 신흥 사상이 분출하여 서로 다투고 교접하고 융할 수 없는 시대라면 말입니다.



이상으로 긴 연재를 마칩니다.
한가지 밝혀야 할 점은, 중국 고전, 중국 사상을 동양 고전, 동양 사상으로 확대하여 사용하는 신영복 선생의 용어를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제 개인적 견해는 조금 다르지만 큰 무리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사항은, 이 모든 글은 99% 신영복 선생의 의견이고, 저는 짧은 시간 제자가 되어 제 언어로 옮겨만 적었음을 고합니다. 따라서 여기 글에 생기는 모든 오류는 제 개인적인 부족함 때문이며, 모든 배울 점은 신영복 선생께서 블로거 여러분께 드리는 신년 선물이라고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