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비고차 강화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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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강화도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로 하점면 장정리에서 발견된 쌍날 집게(연세대 박물관 소장)가 있는 데 약 1만년 전 것으로 확인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화도면 동막리 유적외에 여러군데서 발견되었고 돌도끼.돌살촉.환석環石등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고인돌 무덤(支石墓)이 있는데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 일대 청동기 시대의 수장首長급들의 무덤으로 고대 국가 형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지표가 되는 유적중의 하나이다.
설치 방법에 따라, 굄돌에 의해 지상에 돌출되는 북방식과 지하에 설치되어 그 덮개석만 땅위에 노출되는 남방식이 있는데 강화도에는 이 두가지 양식이 골고루 섞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 하점면 부근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인돌 무덤이 하나 있는데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조선 시대
이 시대의 역사유물로는 참성단과 삼랑성이 남아 있으며 사적 제136호인 참성단은 단군이래 역대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제단으로 이러한 제천 전통은 근세조선까지 이어졌다.
1953년부터는 전국체육대회 성화 채화지로 지정되어 칠선녀에 의해 성스럽게 채화된 횃불이 전국으로 봉송되어 국조 단군의 거룩한 뜻을 오늘에 되새기고 있다.
다음은 참성단과 삼랑성의 축조 설화에 관한 관련문헌을 소개한다.
『국조國祖 단군께서 나라를 세운지 51년(BC 2283년)이 되던 해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고 정족산鼎足山에는 삼랑성三郞城을 쌓게 하였다.이때에 강남江南의 장정 8,000명이 동원되었으며 3년 후인 BC 2280년 3월에 단군께서는 친히 이곳에 오시어 천제를 올렸다.--마한세가』
壇君王儉五十一年天王命雲師倍達臣築三郞城于穴口設祭天壇于摩尼山發江南民八千人以助役辛酉三月天王幸摩尼山祭天--馬韓世家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은 세상에 전해지기를 단군의 제천단이라 하고 전등산은 일명 삼랑성이라 하는데 단군께서 세아들로 하여금 쌓게 했다고 한다.-고려사지리지』
江都摩尼山塹城壇世傳檀君祭天壇傳燈山一名三郞城檀君使三子築之--高麗史地理志
삼국시대
온조왕 22년(서기4년) 백제는 건국과 더불어 고목高木(강화 교동으로 추정)에 고목성을 축성하고 서해 해운의 요충지를 구축(교동 화개산성으로 추정)하였다.
백제는 강화를 서해대도西海大島라 칭하고 국가행사로서 수렵대회,무술수련,천신영도天神靈禱의 장으로 활용하였으며 한강.임진강.예성강 등 하천의 수리水利와 해운의 묘를 살려 영토확장에 크게 기여한 듯 하였으나
서기 392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여 백제의 군사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강화도)를 점령하여 혈구군穴口郡을 설치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파죽지세로 백제군을 몰아쳐 대동강 이남, 한강 이북의 58개성 700여 마을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였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5만의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을 죽이니 그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은 한성을 버리고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이로 말미암아 한강 이남의 백제령도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서기551년에 백제의 성왕聖王이 신라 진흥왕의 도움을 받아 한강유역의 영토를 수복하였으나 553년에 다시 신라의 세력에 눌리어 강탈 당하였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더욱이 서해안을 점유하게 되어 대륙(수.당)과 직접 통교할 수 있는 교두보가 구축되었으며 이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이 확보되었다 하겠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강화도의 고려산 기슭 함涵에서 출생하였으며 고구려의 막리지가 되어 서기 647년 당태종唐太宗의 30만 대군을 물리쳐 크게 이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인 서기884년(문성왕6년) 8월 강화도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고 아찬阿벼슬의 계홍啓弘을 사령관으로 삼아 지키게 했다.
혈구진은 청해진靑海鎭, 당성진唐城鎭과 더불어 신라 3대 진의 하나로 청해진은 남해의 제해制海를, 혈구진은 서해의 제해권을 도모하더니 청해진이 혁파革罷된 뒤에는 혈구진에 통합되어 신라의 전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서기898년(효공왕2년)에 태봉국 궁예弓裔의 대군에 의해 혈구진이 유린 당하고 진영의 모든 군비는 궁예의 예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병력은 수군 사령관인 왕건王建의 지휘하에 배속시켜 903년 후백제의 배후 요충지 진도 및 나주를 정벌하므로써 견훤의 후백제군을 남북에서 압박하여 무력화시키고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하였다.
고려시대
서기940년(태조23년)에 비로소 땅이름을 강화라 명명하고 강화江華 또는강주江州로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현읍縣邑으로 양도면 인산리 항주項州에 도읍하였는데 강화라는 뜻으로 강주江州라고도 표기하고 강적골이라고도 칭하였다.
이때의 현縣의 수령을 현령縣令이라 하고 현령 아래 속현을 셋을 두었으니 진강鎭江, 하음河陰, 교동橋桐이다. 고을마다에는 감무藍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심주고읍沁州古邑은 지금의 내가면 고천리 고비를 일컫는 지명인데 언제부터 강화의 현읍터縣邑墟로 되었는지 문헌자료가 부족하여 그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다만 현읍터가 혈구(삼성리)에서 강주(인산리 황골)로 옮기었다가 심주(고비)로 옮긴것 만은 확실하다.
1232년(고종19년)고려 조정이 몽고의 위압威壓을 피하여 도읍을 이곳 강화로 옮겨 강도江都라 칭하고 광주廣州,남경南京(서울)을 강도의 직할지로 합병合倂하였다.
고려 조정이 강화천도와 더불어 여러 궁궐과 백사百司를 영건營建하고 내외성內外城과 중성中城을 축조하였으며 마리산 남쪽에는 홍왕이궁興王離宮과 삼랑성과 신지동神智洞에 가궐假闕을 건조하고 선원사禪源寺및 혈구사穴口寺 등 많은 사찰을 창건하면서 파란만장한 임시수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39년간이나 끈질기게 항쟁을 계속하다가 몽고와 협상하여 고려 조정의 존속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1270년(원종11년)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고려 조정이 강도에 도읍하였을 당시는 비록 몽고와 항쟁의 와중渦中이었으나 고려문화의 정수精粹라 일컫는 고려활자의 주조와 팔만대장경의 판각, 상감청자의 신비, 그 중에도 강화도에 있는 최충헌의 묘에서 출토되었다는 국보 제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주자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 가 있다.
고려 조정의 개경환도開京還都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던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 중앙정부와 몽고에 항쟁하다가 여러 가지로 여건이 불리해지자 진도로 남하하였다. 이때 삼별초는 1천여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보화와 함께 인질로 잡은 고관의 가족들을 싣고 진도로 들어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가 자주 침범하여 피해가 극심하였으며 충렬왕때에는 강화가 잠시 인주(인천)에 병합된 때도 있었다. 1377년(우왕3년)에는 강화부江華府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13년)에 강화가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618년(광해군10년)에는 부로 승격되어 부윤(府尹:정2품직)을 두었다가 1627년(인조5년)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인조는 일시 강화로 몽진蒙塵하였다가 100일만에 환도 하였는데 이 때 부윤을 다시 유수(留守:정2품 내관직)로 승격 시켰다.
1636년(인조14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김상용金尙容 등으로 하여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받들고 세자빈,봉렴대군,인평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난케 하고 스스로는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여 싸우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열어 청나라와 강화講和하였다.
병자호란 후 봉렴대군(뒤의 효종)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북벌계획을 추진할 때 그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鎭.보堡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국방계획은 숙종 때까지 계속되어 강화에는 내성,외성의 수축修築과 5진7보五鎭七堡의 구축構築, 53돈대의 설치로 2중 3중의 요새화가 이루워졌다.
또 1678년(숙종4년)에는 강화유수가 진무사鎭無使를 겸직하도록 하고 강화연안 일대를 방어하는 오영五營을 통솔하도록 하였다.(※오영청五營廳-훈련도감訓練都監,총융청摠戎廳,군기사軍器寺,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
근세
1866년(고종3년), 프랑스는 우리 정부가 천주교를 금하고 교인을 학대하였다는 구실을 잡아,「리텔」신부의 안내를 받은 프랑스 동양함대(사령관「로저」제독)의 군함 7척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갑곶진에 상륙하여 서구 신무기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강화성을 함락시킨 후 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우리 양헌수 장군梁憲洙 將軍에게 대파 당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이 때 그들은 강화부중江華府中의 관아官衛와 행궁에 있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은 보화와 주단,필목 등을 약탈하였으며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하고 있던 우리 역사에 필수적인 국보급 전적典籍 1,216종 6,400여 책 중 340여책을 군함에 옮겨 싣고 나머지 서책과 보화는 행궁,관아, 규장각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
뿐만 아니라 양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차별 학살하고 부중府中에 있던 모든 건물을 싹쓸이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66년(고종3년)에 대동강에서「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후 미국정부는 이를 탐지하고 이 사건을 기화로 조선조정을 문책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는 공사「로오」에게 훈령하여 아시아함대를 출동케 하였다.
「로오」는 아시아함대 사령관「로저스」와 상의한 끝에 군함 5척에 군사 1,200명을 태우고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 조선 정부에 우선 통상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즉시 거절 당하였다. 우리 조정의 거절에 분개한 미국함대의 일대는 강화해협을 측량한다는 구실로 강화부의 관문인 광성보廣城堡 앞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 때 광성보를 방어하던 우리 수비군이 방자한 미국함대에 경고사격을 가하자 미국함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을 개시하여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律鎭을 맹공격하여 점령하고 다시 북진하여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피아간에 공방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어 우리 군은 중군 어재연魚在淵, 선비 어재순魚在淳, 군관 이현학李玄鶴, 천총千總 김현경金鉉暻 등이 전사하였고 미군측도「메기」해군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여명이 부상 당하였다. 다음 날에는 첨사僉使 이염李?이 초지진에 있던 미군 숙영지를 야습하여 미군과 그들의 선박에 타격을 가하였다.
한편 미군도 이 이상의 공격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평부사富平府使 이기조李基祖에게 외국사신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국제법에 위반되는 범죄(?)라 하고 전 함선을 이끌고 도망치듯 철수하였다.
1873년(고종10년) 국왕의 장성長成을 이유로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고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되자 종래의 쇄국 정책이 완화되어 일본의 접근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한편 병인,신미 두 양요의 쓰라린 경험을 맛 본 우리나라 조야 일각에서는 문호개방에 대하여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운현궁의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요로에서 당국의 대일 외교를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게 되자 정세는 급변하고 말았다.
일본은 대원군 일파가 세력을 회복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의 활동 교두보를 구축하려고「모리야마」森山茂의 건의를 채택하여 군함 3척을 우리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용의 주도한 계획아래 공공연한 위협침공이 시작 되었다.
8월21일 운양호는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수십명이 탑승한 보트를 내려 우리 해역 연안을 탐색하면서 초지진草芝鎭 포대砲臺에 까지 침범하게 되니 우리나라 포대의 수병은 그들에게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운양호는 그들의 보트를 철수시키면서 보복적인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월등한 화력으로 초지진을 파괴한 후 함수를 돌려 후퇴하는 듯 하더니 이번에는 영종진永宗鎭에 맹포격을 가하고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살인,방화,약탈을 마구 자행하였다.
일본은 예정된 이 운양호사건을 빌미로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적인 교섭을 펴, 마침내 1876년 2월13일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申櫶이 일본측 특명전권판리대신 흑전청융黑田淸隆에게 병자겁약丙子劫約이라는 겁탈문서에 도장을 찍어주게 된다.
그 겁탈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조선의 서울에 수시로 사신을 보낼 수 있다.(2) 부산 이외 항구 두개를 내어 놓아라(인천.원산)
(3) 일본은 조선에 있는 세 항구에 일본상민을 관리할 관원을 둘 수 있다.
(4) 6개월 안으로 두 나라가 다시 강화도에 모여서 의론한다. (5) 일후,조선이 다른나라와 통호하여 조약을 맺을 경우,이 조약 이외 것이 있으면 일본도 그 특전을 함께 입는다. (6) 일후,왕복문서에 있어서 일본은 일본말로 쓸 것이고 조선은 한문으로 써라. 등 이었다.
구한말
1907년(순종1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각료와 중신을 위협 공갈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가예산 절약을 구실로 1907년 군대해산을 명령하였다.
강화수비대인 진위대鎭衛隊도 1907년 8월9일 해산명령이 하달되었는 데 이를 거부하고 분연히 일본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의병에 합류하였다. 강화진위대에는 자강회自强會 회원의 병사가 많이 있었는데 이 해산소식을 듣고 해산 군인 800여명은 일본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순사를 격살하고 강화군수, 일진회 간부 정경수鄭璟洙를 찾아내어 즉결처분하였다.
때에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의거를 진압하기 위하여 고구라小倉대위를 보병 2개소대와 함께 갑곶진에 투입하였으나 일진 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면서 끈질긴 항전이 15년간 거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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