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종교

헨리 나우웬에게서 듣는 평화와 정의(1)

by 마리산인1324 2007. 1. 26.

 

http://blog.theple.com/krjohn316/folder/65.html?uid=1224

 

 

 

헨리 나우웬에게서 듣는 평화와 정의(1)

 

라르슈가 세상에 주는 선물

라르슈에 온 후로 종종 들은 말이 있습니다. 라르슈는 세상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 말을 들으면 너무 우쭐하는 듯한 인상이 풍겨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라르슈가 어떤 곳입니까? 정신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팔복의 정신대로 살려고 하는 78개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조직망입니다. 3천 명이 채 안되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이 작은 조직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떤 곳입니까? 전 인류가 자신의 운명을 찾으려고 싸우는 현장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깊은 분열과 엄청난 고통, 지구의 완전 파멸에 대한 위협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라르슈가 세상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립니다. 라르슈는 어두운 우주 속에서 잠깐 번쩍이는 섬광과 같고, 인류라는 대양에 떠있는 바닥이 새는 보트 같으며, 뉴욕시의 초고층 빌딩 사이에 서있는 한 신문사 같고, 배달 안된 편지를 가득 실은 채 나폴리 교외의 어느 철길에 서 있는 열차 속의 편지 한 통과 같기 때문입니다. “라르슈는 세상을 위해 주어졌다”는 말이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하는 딱 한 가지 방법은 라르슈의 주요 관심사가 정신을 온전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하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고독은 세상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베네딕트의 침묵은 세상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프란시스의 가난은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의 사도적 열심은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르테 로빈의 고통은 세상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니라 성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목격한 증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안토니오 뒤에는 아다나시우가 서있고, 베네딕트 뒤에는 그레고리우스 1세가 있으며, 프란시스 뒤에는 이노켄티우스 3세가 서있으며, 이그나티우스 뒤에는 보르지아가 잇습니다. 마르테 로빈 뒤에는 단순한 사제 페레 피네와 난해한 철학자 장 귀통이 서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찮은 사람들이 세상에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 곧 작은 사람과 큰 사람, 존경 받지 못하는 사람과 존경 받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과 유용한 사람, 무명한 사람과 유명한 사람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는 성령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라고 증언합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것이며, 위로부터 오는 것은 모두 세상의 낮은 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사실 라르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휴게실에서 겨우 8개월 지냈을 뿐입니다. 내가 그 곳에 나타나기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내게 끊임없이 기억나게 하는 장애인들 가운데서 겨우 8개월을 지내고 난 내가 라르슈에 관해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함께 지내는 장애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몬드가 저녁 식사 때마다 “요리하는 사람들은 접시 닦지 마세요”라고 말할 때 오래된 이 숭엄한 전통을 깨뜨리려고 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네덜란드의 풍차와 뉴욕과 보스턴의 초고층 빌딩들, 리치몬드 힐의 웬디와 맥도널드, 피자 가게들 사이에서 45년을 지내고 난 다음 내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라르슈에서 보내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산고를 겪으면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광대한 세계와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4복음서에서 보는 부활의 이야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4복음서에서 우리는 라르슈와 이 세상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내적 관계를 얼핏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계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이 내 믿음의 핵심입니다. 세상이 인류가 죽음의 권세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현장이라면, 진정 예수님의 부활이 이 권세들에게서 무장을 해제시키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면 모든 복음은 빈 무덤과 부활 후 예수님의 출현을 기록하고 있는 몇 페이지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라르슈가 세상의 이 큰 싸움들과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명백한 기독교적 시각을 선택한다고 해서 비기독교적 시각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 자신의 특정한 종교적 경험의 깊이에 근거해 말함으로써 나는 보편적인 공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예수께서 어떻게 낯선 사람으로 나타나는지 봅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을 친한 친구로 계시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우리의 고통스런 삶을 사는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예수께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낯선 분


부활의 기사에 관해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숨겨진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숨겨진 생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나사렛에서의 예수님의 생활을 훨씬 뛰어 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큰 신비는 그의 생애 모든 것이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수태와 출산, 부모에게 순종하여 산 기간, 치료하고 고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치유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계속 요구한 공생애 기간,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두 범죄자들 사이에서 죽으심, 끝으로 그의 부활, 이 모든 사건에는 숨겨진 면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적에 대한 예수님의 영광스런 승리가 아닙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 권세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닙니다. 부활은 결코 자기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들에 대한 반증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안나스와 가야바, 헤롯 혹은 빌라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고 의심많은 추종자인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의 기사에는 “어쨌든 잘 되었다”고 말하는 어떤 몸짓도 없습니다. “내가 항시 네게 말한 대로가 아니냐고”고 다그치는 표시도 없습니다. 만족한 미소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창조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아주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낯선 사람으로 나타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한 낯선 사람과 함께 엠마오로 갑니다. 제자들은 낯선 한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유령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 요한, 야고보와 그 밖의 두 제자들은 한 낯선 사람이 호숫가에 서서 자기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숯불에 둘러앉아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주시는 그 신비스러운 순간에 예수께서 처음에는 참으로 낯선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아주 간결하게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 21:12)


이 진술만큼 예수 부활의 숨겨진 특성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는 알았으나 감히 그가 누구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임재와 부재, 계시와 숨김 사이의 차이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는 깨끗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라르슈의 핵심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숨겨져 있는 계시를 만난 것입니다. 나는 데이브레이크에서 중증 장애인인 25살 난 아담이라는 친구와 살고 있습니다. 아담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혼자서는 옷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습니다. 기어 다닐 수도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습니다. 아담은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매일 몇 차례씩 발작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러나 여덟 달 동안 아담과 함께 살면서 그를 목욕시키고 씻기고 양치질시키며, 면도해주고 머리를 빗겨주며, 아담이 아침을 먹을 때 그냥 그 곁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그가 자신의 크나큰 선물을 내게 비밀히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더 분명하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렇게 묻습니다. “아담이 당신을 알아 볼 수 있습니까? 아담이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별할 줄 압니까?” 이런 것은 아담을 처음 만났을 때 내 자신이 물었던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담이 얼마나 정상적이냐, 아담이 얼마나 나를 좋아하느냐, 아담을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느냐, 아담과 얼마나 친하느냐를 묻는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들일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담이 숨겨진 가운데서 낯선 사람으로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고, 알지 못하고 익숙하지 않으며 무의미한 곳에서 그가 나를 위해 생명의 신비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담이 주는 희망은 그가 나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곳에 있지 않고 거룩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빈 무덤이야말로 정말로 새로운 것이 이 세상에 발생하였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표지입니다. 아담과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언젠가는 그가 웃고 걷고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그만큼 더 희박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담의 숨겨져 있는 면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가난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거하십니다. 그가 가장 침묵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가장 텅 비어 있을 때, 그 곳에서 나는 부활의 표지를 발견합니다. 아담은 해방신학에서 가장 잘 쓰는 표현인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택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점점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내게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함께 계시는데,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남아 있는 어떤 것에 내 재능을 보탤 수 있을 때는 함께 계시지 않으며 가난한 자들이 철저히 비어버려서 내가 그들에게 아무 것도 더해 줄 것이 없고 전적으로 내 자신의 신앙에 의존하며 지내게 될 때 비로소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실로 부활하셨다.” 이것은 결국 어떤 주장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내뱉는 진술이 아닙니다. 요한은 빈 무덤에 들어가 세마포 천이 개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보고 믿었습니다”(요 20:8). 아담과 같은 가난한 자들을 보고 믿는 것, 이것이 라르슈가 세상에 주는 선물입니다.


아담의 이야기가 세상의 큰 고통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아담의 이야기는 모든 고난에는 숨겨진 특성, 곧 낯선 특성이 있다는 신비를 얼핏 보여줍니다. 우리는 고난을 볼 때 크고 극적이며, 소란스럽고 매우 인상적으로 보아 “고난에 대해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어냐?”고 성급하게 소리치기가 쉽습니다. 모든 굶주림과 집 없음, 폭력, 고문, 전쟁, 핵전쟁의 위협 가운데는 숨겨진 고뇌와 숨겨진 고통, 보이지 않는 외로움이 있는데, 아무도 이것을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숨겨진 것들을 만지시고 나타냈으며 무덤 속으로 가져가 그것을 새 생명으로 바꾸어 들어올리셨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숨겨진 특성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굉장하게 열심히 돕는다고 하면서 폭력에 폭력을 더하는 문제 해결자의 자세를 취하기가 쉽습니다. 세상의 큰 고난에는 강하게 유혹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세상의 큰 고난들이 우리에게 아주 매력있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너그러운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지만 자기들이 정복하려고 했던 바로 그 세력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피스 피플(peace-people, 가톨릭, 개신교로 이루어진 북아일랜드 평화운동의 하나)들 가운데 보였던 분노, 원한, 경재, 심지어 보복의 사실들이 그 점을 뼈아프게 생각나게 만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아담과 같은 사람들, 곧 우리가 도우려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느낄 수 없고 다만 우리 자신의 내적 가난을 인식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소리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모든 고난을 초월하는 계시를 해 줍니다. 그것은 어떤 그룹이나 어떤 인종, 어떤 민족성이나 문화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상처 받은 인류의 소리없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과 압제받는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업가, 성공한 변호사, 유명한 영화 스타의 마음속에도 숨겨져 있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페루의 리마 교외에 새로 생긴 마을의 영양실조 걸린 아이들의 마음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예일과 하버드대학의 외롭고 지친 학생들의 마음속에도 숨겨져 있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캄보디아 국경에 있는 난민 수용소와 세계 도처에 깔려있는 죄수들의 마음에 뿐만 아니라 대수도원과 대저택, 탁트인 도심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숨겨져 있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난폭하게 납치 당하고 고문 당하며 처형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애정을 갈망하는 젊은이들과 새로운 시작을 찾는 이혼녀, 오랜 시간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마음에도 숨겨져 있는 고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깊이 숨겨진 소리없는 고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른 모든 사람의 마음과 묶어주는 이 숨겨진 고난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폭력에 폭력을 더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상처받고 상한 몸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로 정한 곳인 신성한 빈 공간 앞에서 존경심을 가지고 머리를 숙이는 진정으로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라르슈는 모든 고난의 숨겨진 특성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주어졌고, 또 모든 인류, 곧 새로운 피조물로 세움을 받게 되어있는 인류에 동정적인 유대의식을 갖고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살라고 외치기 위해 세상에 주어졌습니다.


나는 모든 고난을 초월하는 그 고난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기쁨의 원천도 만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고난의 반대가 아니라 바로 고난의 중심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쁨은 우리가 인류의 빈무덤이라는 바로 그 핵심에 들어갈 때 언제나 발견하게 됩니다.

친밀한 친구


그 낯선 분은 자신을 가장 친한 친구로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낯선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을 때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그 낯선 사람이 떡을 가지고 축사하고 떼어 주실 때 그분이 바로 자기들이 사랑하는 선생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낯선 사람의 손과 발에 난 못자국을 보고서 자기들의 친구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자기들이 졸지에 잡은 그 많은 물고기를 보고서 바닷가에 계신 그 낯선 사람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고 말합니다.

낯선 분이 친밀한 친구로


이러한 앎은 단순히 친숙한 어떤 인물을 인식하는 것 훨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듣고, 말하고, 먹고, 매일의 생활에서 기쁨과 고통을 함께 했던 오랜 시간을 통해 형성되었던 친숙한 관계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그 깨달음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친밀한 그 사랑을 느끼고 그로 인해 삶이 철저히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을 다시 안다는 것은 자기의 전존재에 스며든 사랑을 가지고 다시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낯선 분이 자신을 친한 친구로 계시하신 것은 그분은 언제나 친한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기사는 한 가지 사실을 아주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주께서 땀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사람들만이 주님이 새로운 몸을 입으신 것을 압니다. 주께서 힘들고 오랜 여정을 지나는 것을 본 사람들만이 그분을 평화의 주님으로 알게 됩니다. 상처받은 그분을 사랑한 사람들만이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을 사랑합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분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추는 것은 이같이 오랜 기간 신실하게 함께 지내는 데서 쌓인 깊은 개인적인 유대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중대한 사안들에 직면해서도 마음을 잃지 않고 패배주의나 숙명론, 풍자나 회의론, 냉소주의에 휩쓸리지 않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같이 친밀한 개인적 관계라는 사실을 세상이 계속해서 잊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사실을 이처럼 강조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우리 집에 있는 여러 장애인 가운데 한 사람과 우정을 키워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빌입니다. 처음에 빌은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하찮은 여러 가지 것들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잘 써먹었습니다. 직관적으로 그는 죄책감에서 남을 도우려고 하는 나의 욕구를 알고서 할 수 있는 대로 내가 자기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자기에게 음료수를 사주도록 하고 자기 접시를 닦도록 해주었고 자기 방을 청소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자신이 하찮은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확실히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기쁜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함께 많이 겪으면서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빌이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는 빌이 으스대며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 새로 산 셔츠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루는 나를 데리고 나가 음료수를 사 주었고 내 생일에는 내게 멋진 선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내 곁에 앉고 싶어했으며, 미사 중에는 내 설교에 대해 농담을 던짐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과 관심의 말을 대신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친해져갔습니다.


나에게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으로 지지 받는 안전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계획하고 가르치거나 어떤 것에 대해 강연하러 여행을 가는 일이 가벼운 짐이 되고 쉬운 멍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빌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내가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점차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의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표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그 표시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을 때 사랑과 함께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고, 내가 그 표시들을 마음에 담고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미 시작된 그 사랑을 더 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라르슈가 세상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르슈가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해 신실하게 지낸 몇 달과 몇 년간에 걸쳐 형성된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있을 때 우리가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절박한 문제와 비상사태들에 직면해서도 파멸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문제들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력이 우리 시대의 중대한 사안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데 철저히 소모되는 한, 그 문제들이 사회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인종적이거나 정치적인 혹은 성적인 것이든 결국 우리는 정의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서로 싸우며 보복하는 파당이나 정당으로 전락하는 위험에 항시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라르슈로 간 내 여행은 이처럼 문제 중심의 삶에서 사람 중심의 삶으로 이동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교회가 권위와 성, 여성 해방론에 대한 문제로 분열이 심화되면서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문제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언하고 함께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입지는 더욱 더 좁아졌습니다. 미국에 있는 각기 다른 신학교에서 나는 불행하게도 믿음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빨리 봉사하기를 바라고 온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는 자신들이 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아주 복잡한 문제들에 얽혀서 하나로 결합시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가 점점 더 어려워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려고 했던 마음이 분개를 표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기도하려고 했던 마음이 바른 단어를 찾기 위한 끝없는 전투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알려고 했던 마음은 더 이상 마음놓고 하나님을 부를 만한 이름이 없다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사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제들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들이 주의를 요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인격적인 결속 가운데서 닻을 내리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새로운 어떤 것을 탄생시키고 생명을 줄 수가 있습니다.


나는 라르슈에 와서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다시 세우고 더욱 깊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관계가 없으면 많은 사람들의 지성은 얻을 수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잃게 됩니다. 라르슈가 세상에 주어진 것은 항상 우리에게 우정과 사랑이 있는 그 장소로 되돌아가라고 외치기 위해서입니다. 그 장소에 있을 때 우리는 주께서 부활하셨음을, 진실로 부활하셨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세 번째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 낯선 사람으로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그 낯선 사람이 자기들의 가장 친한 친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들의 선생으로 나타나 그들에게 고난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사실, 낯선 사람에서 친구가 되는 신비한 변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가르침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과 죽음은 더 이상 죄와 형벌과 관계가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언급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을 보고서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실패로 생각하는 글로바와 그의 친구를 만나 낯선 사람으로 동행하면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충만한 복음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 가르침의 혁명적인 성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내내 고난은 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도 계속해서 고난을 죄와 연관시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우리 집이 불타버렸나? 왜 고문과 폭력과 전쟁이 있는가? 왜 이런 엄청난 인류의 고난이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엄청난 인간 고난은 신체적 정서적 고통 때문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 그 고통에 따라 다니는 깊은 죄의식 때문에 더 일어나기도 합니다. 인간 고난의 파괴성은 고난 밑에 깔려 있는 이같은 죄책감과 깊은 자기 거부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죄와 죄책감에서 철저하고 분명하게 단절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 분이 가장 큰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고난과 죄의 운명적 관계를 깨트리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큰 소식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 선언으로써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재해석해 주십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글로바와 그의 친구에게 나타난 직후에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는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쓰고 있습니다.(눅 24:46)


우리 세계의 어둠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은 계속해서 고난과 죽음을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패해야 할 파멸에 이르는 길로 보고,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영광에 이르는 길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 영광에 이르는 길


집에서 장애인들과 일상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영광에 이르는 길로 보고 살려고 하지만 직접적인 저항에 부딪치곤 합니다. 내게는 이것이 매일의 현실입니다. 우리 장애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몬드는 시설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자기 속에 어떤 선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그래서 감사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침에 “레이몬드, 안녕” 하고 말하면 “난 아직 잠이 안깼어요” 하고 대답합니다. “주말에 네가 없으면 보고 싶을 거야”라고 말하면 “나는 당신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하고 말합니다. 내가 먼 곳에 가서 전화를 하여 “잘 있었어? 레이몬드” 하고 말하면 “귀찮게 하지 말아요. 밥 먹는 중이에요” 하고 대꾸합니다. 좋은 선물을 가져다주면 “내 방은 새 것들로 꽉 찼어요” 하고 말합니다. 가까이서 그런 소리를 듣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상처받은 세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목소리입니다. “당신은 당신 고난에 대해 책임져야 해. 당신은 받아 마땅한 일을 겪고 있는 거야. 당신이 몸이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면 당신은 죄가 있는 사람이야.” 레이몬드가 끊임없이 표현하는 자기 거부, 자기 비난, 수치, 죄책감은 우리로 하여금 생활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도전을 받도록 합니다.


한번은 긴 시간 동안 갖가지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레이몬드에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레이몬드,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그러자 강한 목소리로 그는 되받아 쳤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때 갑자기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엄청난 고난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깊은 죄의식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 세상을 갈갈이 찢는 모든 목소리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부르짖는 내 형제의 목소리에서 갑자기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레이몬드는 우리 가족에게서 그와 같이 중요한 식구입니다. 나는 고뇌하는 그의 얼굴에서 내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와 자기 거부를 봅니다. 나는 그의 비명 속에서 내 자신의 자기 불평과 자기 고발, 자기 정죄를 들으면서도 도망가지 못합니다. 내 영적 성장에 가장 큰 도전거리는 아담의 숨겨진 특성이나 빌의 친밀한 우정이 아니라 죽음에서 그 쏘는 것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아직 믿지 못하고 또 나도 여전히 그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레이몬드의 무자비한 자기 징벌입니다.


언젠가 한 친구가 공동체는 여러분이 가장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언제나 사는 곳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맞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사실은 가장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가장 치유가 절실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고 여러분이 고백과 용서라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라르슈가 이처럼 세상에 선물이 되는 것은 라르슈가 고난은 더 이상 영광을 방해하지 않고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라르슈는 이 사실을 무엇보다 말로써가 아니라 고난과 죄책감을 분리시키기가 그처럼 힘든 사람들에게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선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에 있는 장애인들일 뿐만 아니라 돕는 사람들, 사제들, 지도자들, 이사회 위원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과 나, 인류 가족 속에 있는 우리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얼마나 이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지요! “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죄책감이라는 마귀의 권세에서 풀어놓았고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되게 하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 거부와 의기 소침에 빠지곤 합니다. 우리는 그 성경 구절의 참된 의미를 거듭 거듭 배워서 우리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고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우리에게 전해진 지극히 위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뉴욕 시와 보스턴, 토론토, 파리, 암스테르담, 혹은 로마의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으로 충만한 빛나는 얼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쳐 보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거나 땅바닥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패와 공갈, 범죄, 폭력, 전쟁, 다가오고 있는 대재난을 이야기하는 신문을 들고 다닙니다. 사람들의 짐은 무겁고 사람들의 멍에는 아주 힘들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온 몸으로 부르짖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고, 왜 우리는 계속해서 살고 있는가?”

라르슈가 이같이 죄책감을 지고 가는 세상에 선물이 되는 것은 단지 라르슈가 조용히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여러분들은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가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이 가난한 자를 발견하면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쉼을 줄 것입니다. …그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벼울 것입니다”(마 11:23-30 참조). 우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춤을 추면서, 포옹하면서 혹은 부드럽게 만지면서 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책감을 놓아버리고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라르슈에서 지낸 이후로 나는 내 자신의 고난을 억제하려고 하며 내게 죄 있다고 선포하는 내 자신 속에 있는 어둠의 세력에 매달리려고 하는 경향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레이몬드나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매일같이 병적인 그 욕망을 내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라르슈는 자기 식구들을 꼭 붙들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힘든 해방의 진리, 곧 고난은 이제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나는 라르슈에서의 매일의 생활과 세상의 큰 투쟁들을 살펴본 이 반성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예수께서 낯선 사람과 친구, 선생으로 나타나시는 부활의 기사는 라르슈가 세상에 주어진 세 가지 방식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라르슈는 모든 인간의 고난이 안고 있는 숨겨진 특성을 계시합니다. 라르슈는 우리가 개인적인 관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한 큰 문제들은 우리를 분열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세상에게 상기시킵니다. 마지막으로 라르슈는 죄책감과 죄의 쏘는 것이 고난과 죽음에서 제하여졌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아담과 빌, 레이몬드는 라르슈가 이 세 가지 면에서 세상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라르슈의 사람들, 곧 부활의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의 하찮은 일상적인 삶을 우리 현 세계의 크나큰 투쟁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연결이 없으면 라르슈는 그 소명을 잃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힘든 선택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숨겨짐을 선택하는 것이요, 우정을 선택하는 것이며, 힘들게 배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선택을 해나간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마음속에 안전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그런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라르슈의 마음과 세상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점점 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이 글은 헨리 나우웬의 The Road to Peace에서 옮긴 글이며, 본문의 사진은 홍성사가 출판한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에서 홍성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였습니다.

헨리 나우웬 l 삶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그 경험으로 글을 썼으며, 자신의 영적 삶의 여정에서 만났던 내면의 갈등과 아픔과 상처, 기쁨과 우정과 환대를 글을 통해 정직하게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예일과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장애인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이 서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담임 사제로 섬겼다. 『상처 입은 치유자』, 『제네시 일기』, 『안식의 여정』, 『죽음, 가장 큰 선물』, 『예수, 우리의 복음』 등 40여 권의 책을 남겼다.

글쓴이 / 헨리 나우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