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한종호 옮김
4세기 전에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중국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섬에서 죽었을 때, 그의 선임자인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기까지는 한두 해가 걸렸다. 오늘날 우리는 멀리서 비극이 발생한 당일에 그 소식을 들을 뿐만 아니라 TV 화면을 통해 그 광경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보기도 한다. 그래서 에티오피아의 기아, 인도의 비극, 중앙 아메리카의 테러, 북아일랜드의 갈등, 이 모든 것과 훨씬 더 많은 사실들이 연속해서 우리 의식 속에 파고들며, 매일 우리 사고와 감정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은 이 세상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후로 이 세상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가? 나는 세상과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왜 그처럼 어렵게 되는지 살펴보고, 기도를 모든 선교 활동의 견고한 기초로 삼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기도하려면 우리는 세상의 고통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하나님께 손을 대어 치유해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매일 그처럼 비참한 소식들을 너무 많이 듣다 보면, 우리는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 정책이나 니카라과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같은 비극들을 “너무 무거워서 질 수 없는 짐”으로 대하고 싶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제들은 너무 많고 너무 커서 마주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친숙하고 안전한 자기 울타리 안으로 물러난다. 이 문제들을 마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문제들은 그들의 삶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된다. 이 두 집단에게는 더 이상 기도가 가능하지 않다. 어두움에 대한 지식이 늘어가면서 이들은 힘을 일으키기보다는 마비되고 말았다. 죄책감이 희망을 대신하고, 수치가 결속을 해체하거나 격노가 희망을 불사르고 미움이 사랑을 대신할 때 신앙은 비틀거린다. 이렇게 되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야 하는 우리의 과업은 선교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는 감상적인 꿈으로 퇴락한다.
왜 세상이 그처럼 무거운 짐이 되었는가? 단순히 대중 매체를 비난할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세상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면서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의해서는 덜 변화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악의 세력의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이란 문제가 너무 많아 일일이 대응할 수 없고 너무 복잡해서 이해할 수도 없으며 너무 혼란스러워서 다룰 수도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들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더미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에 얽혀들면 들수록 우리는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문제가 제 3세계의 문제든, 기아의 문제든, 핵문제든 혹은 여성 문제든, 우리의 생활이 문제에 지배를 당하면 기도할 수가 없다. 기도는 문제에 드리는 것이 아니고, 복잡하게 얽힌 것을 풀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즉 기도는 마음이 마음에게, 영이 영에게 부르짖는 외침이다.
문제는 사람을 가두기 쉽지만 사람은 벗어날 수가 있다. 문제는 우리를 분열시키기 쉽지만 사람들은 결합할 수가 있다. 문제는 쉽게 지치게 만들지만 사람은 휴식을 줄 수 있다. 문제는 파괴하기 쉽지만 사람은 새 생명을 제공할 수 있다. 절망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 때문에 생기고, 희망은 우리가 마음과 지성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향할 때 일어난다. 그것이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기도의 의미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남기지 않으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시는 구주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 채 굶주림을 덜고 불의를 해결하며 폭력을 극복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며, 외로움을 없애는 것만을 바라볼 때 생명은 견딜 수 없는 짐이 된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들이고, 그래서 기독교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내리누르는 짐의 무게를 느낀다. 우리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밑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한다. “나는 내 가족을 부양하고 일이 차질 없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충분해. 제발 이 세상의 문제로 내게 짐 지우지 말아줘. 그런 문제들만 보면 나는 죄책감이 들고 내 자신이 무력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아.”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전체 현실에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우리가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한 구석에 따로 떨어져 있고자 한다. 우리는 여전히 두려움 때문에 기도할 수 있지만 참된 기도는 우리가 사는 작은 부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껴안는 것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렸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일어난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 답변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다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한다는 뜻이다. 바로 그것이 “영이 영에게 말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께서 우리 역사의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나타나실 때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명상할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 주신다. 그래서 예를 들면, 중앙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멈추고 정치로 뛰어들지 않고 기도하는 데서 기도하는 데로 나아간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배우려면 우리는 세상의 짐이 예수님으로 인해 가벼운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인간의 죄 때문에 어떻게 질 수 없는 짐이 되었는지, 즉 고통스런 출산과 고된 노동, 경쟁과 대적, 분노와 원한, 폭력과 전쟁, 병과 죽음의 짐이 되었는지를 아시고 우리의 짐을 치워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을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를 보내심으로 무한한 자비를 보이셨다.
예수님의 선교는 인간의 모든 슬픔을 깨끗이 없애버리거나 인간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세상에 온전히 들어오셔서 인간적인 어떤 것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을 모으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발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치명적인 세력을 파괴하셨다. 이같이 하여 예수께서는 질 수 없는 짐을 지게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는 인류의 고통을 역사상의 그 누구보다 깊고 완전하게 맛보신 친구가 계신다. 우리는 마음으로 깊은 어둠을 겪고 있는 순간에 친구가 방문해 준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을 때 이 신비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다. 친구들이 우리의 어둠을 치워버릴 수는 없을지라도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어둠에 짓눌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고통에 무조건적으로 무한히 참여하신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스런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거기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의도하셨던 바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그러면 우리는 알고 싶지는 않지만 현재 알고 있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지만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의 고난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는 고난을 직면하고도 여전히 살 수 있다.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망쳐 숨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교제로 이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여기에서 기도의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기도한다는 것은 스스로 예수님과 연합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들어 하나님께로 가져가 사죄와 화해와 치유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주치는 인간의 고통이나 투쟁이 어떤 것이든 혹은 어떤 형태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든지 그것을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에 묶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관한 “소식”은 어떤 것이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우리는 인간 역사의 전개는 또한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펼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기도는 모든 슬픔을 모든 치유의 근원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즉 기도는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원한의 차거운 분노를 녹이게 하고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자비가 신랄함을 대신하며, 사랑이 두려움을, 온유함과 관심이 미움과 무관심을 대신하는 공간을 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선교에 참여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은 이 세상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이 세상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 신비가 모든 선교와 기도의 기초이다. 일단 우리가 모든 짐을 가지고 예수께 와 새로운 힘을 얻으라는 초대를 분명히 들었다면 우리는 기도뿐 아니라 선교에도 가담하게 된다. 선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온 세계에 퍼져 있는 기도의 네트워크가 자신들의 활동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면 힘을 얻을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온 세계에 걸쳐 있는 선교의 네트워크 속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을 것이다.
토머스 머튼의 명상과 행동으로의 초대 베드로 후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8-14)
베드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기다리고 또 그 날이 속히 임하도록 애쓰라고 한다. 그것은 그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되 눈을 크게 뜨고서 방심하지 않고 깨어 주의를 기울여 지켜보고 있으라고 하는 요청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행동하고 싸우고 열심히 노력하며 포기하지 말고 힘껏 노력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드로의 요청은 여호와의 날이 임하도록 봉사하면서 명상과 행동을 하라는 부름이다.
오늘 우리가 그 생애와 죽음을 기념하고 있는 토머스 머튼은 이 요청을 자신에 대한 것으로 삼았고, 이 요청이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의 핵심에 속하는 일이라는 것을 수많은 저술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였다.
우리는 명상하는 사람 즉, 보는 사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하심을 보는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사실 여호와의 날은 항상 임하고 있다. 그것은 먼 미래의 어느 날엔가 일어날 일이 아니라 여기서 지금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임하심이다. 여호와의 임하심은 우리 주변과 우리 사이, 우리 안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명상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여호와의 임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눈 가리개를 던져버리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벗겨버리는 것을 뜻한다. 세례 요한처럼 머튼은 끊임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눈을 돌려 임하시는 자를 바라보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임하시는 자가 우리의 주님이심을 인식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미망’이라고 머튼은 말한다. 머튼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아주 좋아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미망이라는 단어이다. 우리는 머튼을 두고 미망의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그가 미망을 지지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망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머튼이 말하는 많은 미망을 가장 잘 요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다음 두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미망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미망이다.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미망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달성, 자기 실현, 자기 잠재 능력 발현을 통해 자아를 찾으려는 일에 미친 듯이 골몰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력으로 얻은 정체성에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에 관해 끊임없이 염려하고 자기만이 갖고 있는 개성에 마음을 빼앗기는 미망이다. 그것은 경쟁과 대항으로 치닫게 하고 마침내는 폭력을 휘두르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미망이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해서라도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려드는 정복자로 만드는 미망이다. 이 미망에 사로잡혀서 사람은 자신의 활동의 산물이라는 신념에 자극을 받은 적극적 행동주의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미망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그 자신의 가장 깊은 느낌과 정서가 곧 사람이라는 가정에서 생겨난 병적인 자기 반성에 빠지기도 한다. 명상에 관한 머튼의 저서들은 깊이 자리잡은 바로 이 미망의 정서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어떠하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하다고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우리는 우리가 획득하고 정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벌어들이는 돈이나 사귀는 친구, 달성하는 결과가 우리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만들어 놓으신 그 존재이다. 우리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스스로를 긍정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을 받으려고 노심초사하는 한, 우리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며 실로 우리의 참된 자아이신 그분을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미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어떤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자기 의와 압제로 접어들게 하는 큰 미망이다. 이것은 백인들이 자기는 흑인들에 비해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고,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자기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미망이다. 이것은 지배의 미망이다. 즉 우리가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며 따라서 무한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는 미망이다. 이것은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존스타운(Jonestown: 1978년 ‘인민 사원’ 신자의 집단 자살이 있었던 곳-역자주)에 이르는 미망이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언제나 더 깊게 의식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미망을 계속해서 벗겨내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언제나 새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주님을 보도록 한다. 머튼은 기도나 연구, 명상,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 되심”과 인간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 사이의 깊은 심연을 겸손히 인정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비로 이 깊은 심연을 넘어와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신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과 압제, 미움, 탐욕에 이르게 하는 우리 미망의 눈가리개들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명상하는 사람, 곧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주의 임하심을 보는 사람들이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임하도록 하라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커다란 역설 가운데 한 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우리의 조건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서 오신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이 속히 임하도록 대단한 열심을 품고 힘써 일하라고 권고한다. 이점에서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임하심을 이루는 한 부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이 신비하게 우리에게 달려 있고, 우리의 기다림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적극적인 기다림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위의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 깊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 시대에 이 사실을 토머스 머튼만큼 잘 알고 분명하게 밝힌 사람은 없다. 머튼에게 있어 명상과 행동은 결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보는 자는 행동한다. 머튼은 우리 시대의 큰 고통거리들, 즉 굶주림, 가난, 압제, 착취, 전쟁, 핵으로 인한 대량 살육의 위협에 대해 기독교적 대응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는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도록 하는 행동은 회개와 감사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머튼은 가르친다.
행동은 우선 첫째로 회개이다. 베드로는 이같이 말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면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굶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방문하며 압제당하는 자를 풀어주는 것이다. 사회적 행위에 대한 머튼의 모든 저술이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죄책감을 덜기 위해 행동하는 한, 당신은 이내 용기를 잃게 되고 선보다는 해를 더 끼치게 될 것이다. 더 깊은 마음의 정결로 이끌지 않는,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은 주변 환경에 강제로 자신을 짐지우는 것이나 다름없다고까지 머튼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민권 운동에 참여하여 행동해야 하는가? 그렇게 할 때 백인들이 흑인들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평화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폭력의 근원을 드러낼 수 있다. 왜 우리는 굶주린 자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는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의 탐욕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의 결속을 더욱 돈독히 하고, 모든 화해의 기초를 닦는 회개의 행동이 될 수 있다. 머튼은 한 친구에게 이같이 썼다. “참된 소망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에 있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일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선한 것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에게 있다.” 과연 하나님은 행동하는 분이시고 우리는 회개로 하나님의 행동을 촉진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막 1:15)
그러나 행동은 단지 회개만이 아니다. 그것은 감사이기도 하며, 어쩌면 감사 훨씬 이상의 것이다.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임재해 계심을 깨닫는데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반응이다. 예수님의 전 사역은 아버지께 감사를 표시하는 위대한 행위였다. 우리는 바로 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베드로와 바울은 왕성한 정력으로 이곳 저곳을 여행하였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지칠 줄 모르고 수녀원을 세워나갔다. 마틴 루터 킹 2세는 꺼질 줄 모르는 열심으로 설교하고 계획하고 조직하는 일을 하였다.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자 중의 가난한 자들을 돌봄으로써 여호와의 임하심을 두려워함이 없이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칭찬이나 상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들의 행동은 전혀 강요가 아니었고, 자기 삶에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임재하심을 경험한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행동은 감사가 될 수 있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성만찬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머튼의 생애와 활동의 핵심에 접하게 된다. 그 핵심은 성만찬, 곧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영원한 감사의 행동이며, 우리가 참여하는 감사 기도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이자, 수사요 사제였던 머튼의 생애는 성만찬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의 책이나 논문, 그의 이름과 명성이 아니라 오셔서 삶의 모든 부분을 성만찬으로 바꾸신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왜냐하면 성만찬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여호와의 임하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하늘이 큰 소리와 함께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머튼은 이 두려운 현실이 사실상 지금 벌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전쟁을 목격하였고, 과격한 폭력과 경제적 압박, 정치적 암살의 시대를 살았다. 베드로와 함께 그는 물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그리고 이 질문에 이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행실과 경건함에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명상하며 바라고 회개와 감사의 행동으로써 그 날이 속히 임하도록 해야 한다.”
헨리 나우웬 l 삶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그 경험으로 글을 썼으며, 자신의 영적 삶의 여정에서 만났던 내면의 갈등과 아픔과 상처, 기쁨과 우정과 환대를 글을 통해 정직하게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예일과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장애인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이 서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담임 사제로 섬겼다. 『상처 입은 치유자』, 『제네시 일기』, 『안식의 여정』, 『죽음, 가장 큰 선물』, 『예수, 우리의 복음』 등 40여 권의 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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