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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본회퍼와 반유대주의

by 마리산인1324 2007. 1. 26.

 

http://blog.theple.com/krjohn316/folder/63.html?uid=773

 

 

 

디트리히 본회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본회퍼와 반유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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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의 인종말살에서 그 절정에 다다랐지만, 그 역사적 뿌리는 성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목할 것은 독일에서의 유대인 학살이 미치광이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끔찍한 범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히틀러가 처음 의도한 것은 강제 이주였지 몰살까지는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유대인 정책을 종족 말살로 돌변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어느 나라도 유대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나치는 서방 강대국들이 유대인 이주에 협조적이지 않으며 그 누구도 유대인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방조했다는 최소한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서방국가들의 방조는 그리스도교의 반 유다주의가 서구 문명의 주변부가 아니라, 그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 나아가 그 뿌리가 훨씬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2)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적대적인 관계는 성서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의 약속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왕국에서 그 약속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실패와 배신의 연속으로 보았고, 또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데서 배신의 역사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리스도론이 두 종교의 반목과 갈등의 근거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는데, 까닭은 유다교가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난 받는 예언자에 대한 개념은 있었지만, 그가 메시아와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야말로 예언의 진정한 의미였다고 해석한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넘어 갈등을 더 심화시킨 것은 그리스도인이 성전과 율법을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할례문제도 중요한 갈등의 요인이었다. 이 두 집단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유다 전쟁(66-77년) 이후였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70년) 이후, 바리사이파 유대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3) 얌니야에서 85년 경 바리사이파 유다교는 ‘나사렛 사람들과 이교들을 곧 소멸하소서… 저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시고 의인과 함께 기록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문을 작성하였다.4)
이로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교회는 유다교의 반그리스도교적 입장에 반유대교적 자세로 대응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유대인들이 ‘사탄의 무리’로 서술된다(2:9; 3:9). 바나바의 편지(약 113년)와 저스틴의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약 150년 경)는 유대인들을 가장 악하고, 가장 불경건하고, 하나님의 저주받은 지상의 백성, 처음부터 사악한 천사에 의해 미혹 받은 자들로서 구약성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탄의 백성으로 불렀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시작된 두 종교 간의 갈등은 콘스탄티누스 대제(272-337)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국교화에서 제도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 노예들에게 할례 주는 것을 엄격한 처벌규정을 두어 금지했다. 유다교로의 개종은 처벌대상이었으나, 유대교인이 그리스도교에로 개종하는 것은 훨씬 관용되었다.5)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반유대주의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절기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살해함으로써 신을 모독하고 손을 더럽혔기 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부활절 축제는 적합하지 않다고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뿌리 깊은 반유다주의가 정착되었던 것이다.6)


박해받던 카타콤의 관용적인 종교가 배타적인 종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378-395)가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이교도들과 이단의 신앙 및 관습은 불법적인 것이 되었고, 그들의 사원과 교회는 파괴되거나 몰수당했다.7) 테오도시우스가 만든 법전은 유대인의 법적 신분을 강하게 억압했고, 뒤이어 중세까지 발전한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관점의 기초를 놓았다.8) 유대인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 신화는 마침내 사회적으로 결합되어 독일 나치에 의한 인종말살적 반유다주의에 이르렀던 것이다.

2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나치의 반유다주의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은 1933년의 일이다. 1933년 1월 30일 제3제국의 수상으로 히틀러가 임명되었다. 이틀 후인 2월 1일, 본회퍼는 ‘젊은 세대의 영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강연을 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나치의 새로운 지도자 개념의 유혹의 위험성, 곧 우상숭배로 전락할 수 있는 영도자 개념을 비판했다. 방송은 본회퍼의 강연이 끝나기도 전에 중단되었고, 나치는 27살의 젊은 목사인 본회퍼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유대인 가게 보이콧 운동이 전개되면서, 유대인을 모든 공직에서 추방하기 위한 반유대적 공무원법이 통과된다. 같은 해 7월 23일, 독일에서 실시된 교회 선거에서 히틀러에 의해 조직된 ‘독일 그리스도인’이 약 75%의 지지를 얻게 되자 젊은 개혁자들이 교회정치에서 대거 물러난다. 9월 5일, 부라우네에서 열린 총회에서 ‘아리안 조항’(Der Arier-Paragraph)이 통과되고, 9월 7일 이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마틴 니묄러 목사와 함께 ‘목사 위기동맹’(Pfarrernotbund)을 결성한다. 9월 27일에는 뮐러(L. Mueller) 주교가 비텐베르크 총회에서 제국교회의 총주교로 선출되고, 2천 여 명의 목사들은 항의시위를 한다.


이른바 교회 안에서의 ‘아리안 조항’은 ‘아리아 족이 아닌 사람은 독일 제국교회에 속할 수 없으며, 독자적인 유다-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여 독일 교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국가공무원법은 교회 공무원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며, 유다-그리스도인 목사들의 활동과 신규채용은 거부되어야 한다’, ‘제국교회법은 아리안 조항을 비록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유다-그리스도인 신학생들의 학생권 제한이 교회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즉 미래의 교회사역으로부터 유다-그리스도인의 배제를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9)


본회퍼는 유다-그리스도인을 교회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아리안 조항’이 단순히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신학적 문제임을 지적한다. 즉 교회적 교제로부터 유다-그리스도인을 배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까닭은 이것이 사도 바울의 행동,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는 것(에베소서 2장)을 무효화하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유다-그리스도인을 배제한다면 교회는 새로운 율법, 곧 인종법을 제정하는 꼴이 된다. 이것은 마치 교회 문 앞에 ‘그대는 아리안 족인가?’라는 질문을 세워놓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유다-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 이전에 바울에 반대하여 했던 행위, 곧 교회공동체에 속하기 전에 유대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과 같다. 오늘 유다-그리스도인을 배제하는 교회는 스스로 유다-그리스도교가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을 율법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10)


‘독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질서, 곧 인종에 대한 질서를 해소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며, 그런 의미에서 교회도 인종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본회퍼는 ‘교회 안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남자는 남자이고, 자본가는 자본가로 남아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하나님의 한 백성, 곧 교회로 부르셨고, 이들은 모두 한 교회에 똑같이 속하게 되었다. 교회는 같은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서로 낯선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인종이나 혈통은 결코 교회 공동체 소속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일 뿐이다.’고 말한다.11)
‘독일 그리스도인’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조직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며, 이것은 교회의 외적 형태에 대한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의 소속성은 외적인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교회가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의 소속성은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문제에 속한다는 것이다. 유대-그리스도인의 조직적 배제는 또한 성례전의 능력을 침해하는 것인데, 까닭은 세례를 통해 유대-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와 또 교회는 유대-그리스도인과 서로 뗄 수 없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유대-그리스도인에게 세례를 베푼 교회가 이들을 다시 배제하는 행위는 성례전을 단순히 하나의 의식으로 만드는 행위라는 것이다.12)


‘독일 그리스도인’은 독일인의 민족적 정서를 근거로 유대-그리스도인 목사들의 추방도 주장했는데, 본회퍼는 이런 주장이 목사직의 본질에 대한 루터의 입장에 배치된다고 반박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해 사제가 되었으며, 모두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 루터의 주장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독일 그리스도인’이 유대-그리스도인들을 목사직과 교회지도층에서 배제하는 근거를 국가가 제정한 ‘아리안 조항’에서 찾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독일 그리스도인이 정치적인지를 폭로하는 것이라고 본회퍼는 지적한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행위를 교회적으로 승인하고 있지만, 국가와의 관계에서 교회가 해야 할 참된 봉사는 국가를 맹목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선포의 자유와 교회적 삶의 고유한 성취에 있다는 것이 본회퍼의 입장이다.13)


본회퍼는 ‘독일 그리스도인’이 국가권력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신학적 문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데, 본회퍼의 이런 태도는 그가 1933년 6월에 발표한 ‘유대인 문제에 직면한 교회’(Die Kirche vor der Judenfrage)에서 다시 구체화된다.14)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소속성과 관계없이 그들의 인종적 소속성 때문에 국가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 역사상 처음 있는 현실에 직면하여 교회는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교회가 어떻게 국가의 행위를 판단해야 하며, 그런 판단으로부터 어떤 과제가 제기되는가라는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례 받은 유대-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본회퍼는 이 두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 질문은 오직 올바른 교회개념에 의해서만 대답되어질 수 있다고 전제한다. 본회퍼와 ‘독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국가권력에 대한 태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교회는 국가를 하나님 없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으로서 긍정한다. 다시 말해 인간적 시각에서 볼 때, 좋은 혹은 나쁜 질서를 만드는 국가의 기능을 인정하며, 하나님 없는 세계의 무질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질서유지의 뜻에 그 기능이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국가의 행동에 대한 교회의 판단은 도덕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인본주의와도 구별된다. 이것은 복음의 공간과 율법의 공간을 과격하게 분리시킨 종교개혁자의 입장에 상응한다. 국가의 행동은 교회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 오직 복음으로부터만 살고 국가의 행동의 본질을 아는 교회는 결코 국가권력의 도구가 되지 않으며, 인도주의의 이상에 따라 국가권력을 비판한다.15)


물론 교회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유대인 문제에 있어서도 교회는 국가를 직접적으로 말씀에 예속시킬 수 없으며, 국가에게 특정한 행동양식을 요청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가 국가의 정치적 행동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국가의 행동이 정당한 국가적 행동인지, 다시 말해서 국가가 질서와 권리를 보장하는지 아니면 무질서와 권리박탈을 조장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특히 국가가 권력으로 질서와 권리를 보호하는 기능이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는 더욱 그런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국가가 질서와 권리를 보장하는 행동을 할 때에만 교회는 정치적으로 직접적인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기준은 국가가 질서와 권리를 보장하는지, 않는지에 있다. 다시 말해 교회는 국가가 질서와 권리를 ‘너무 적게’(Zuwenig) 보장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Zuviel) 질서와 권리를 주장할 때 발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무 적게’는 특정한 인간집단이 권한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하며, ‘지나치게’는 국가가 교회의 선포와 신앙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경우 교회는 국가에 대하여 세 가지 행동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국가의 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 즉 국가의 책임성에 대하여 질문하기. 둘째, 국가행동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교회는 희생자들이 교회공동체에 속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을 돌볼 의무가 있다. 세 번째 가능성은 자동차 바퀴에 깔린 희생자들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자동차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교회의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이며, 국가가 질서와 권리를 보장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볼 때 가능한 일이다.16)


‘너무 적게’는 특정 집단의 권리를 박탈하는데서, ‘지나치게’는 교회의 본질과 선포가 국가에 의해 침해받는데서, 다시 말해 세례 받은 유다-그리스도인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강제적으로 축출하는 데서 구체화되었고, 그래서 본회퍼는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신앙고백 상황’(statu confessionis)의 문제로 규정했던 것이다.17)


유대교는 그리스도의 교회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인종적 개념이 아니라 종교적 개념이다. 생물학적으로도 의심스러운 유대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사람이 유대교인이 되는 것은 율법을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그리스도인도 종교적 개념이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다. 유대-그리스도교에 속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세례를 받은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그리스도인은 교회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늘 독일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을 교회 공동체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과 독일인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함께 서 있는 곳이 교회라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과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교회가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18)


본회퍼에게 유대인 문제는 교회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 곧 신학적 문제이며 신앙고백의 문제였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에 적응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에 대해 본회퍼는 ‘국가사회주의는 이단이며, 국가를 신격화하는 것이고, 인종적 교만’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악마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은 마침내 그를 폭력적 저항에로 이끌었고, 이러한 비타협적 급진성이야말로 본회퍼 신학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하겠다.19)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반유대주의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충격을 주었다. 신학자들은 과연 ‘아우슈비츠 이후에 신학 한다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다.20)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인이었다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조차 애써 무시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구조화해온 역사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반성은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대가를 치룬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모순된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억압받고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억압하고 추방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희생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된 것이다. 서구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비극적 역사에 책임을 함께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는 신학적, 종교적 원인에 의해서만 유발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 원인 등 오래되고 다양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갈등구조를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선교적 전망을 얻기 위해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갈등과 억압과 저항의 역사에 의해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는 것이 대화와 증언의 전제이다. 우월감이나 피해의식 없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평화와 공생을 지향하는 종교들이 지켜야 할 태도이다. 본회퍼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신학의 문제, 신앙고백의 문제로 보았듯이, 인권 역시 신앙고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종교적인 이유에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침해받는다는 것은 바로 신앙고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본회퍼 탄생 100주년을 기리면서 그에게서 다시 배울 수 있는 것은, ‘급진적 제자직’은 언제나 신앙고백에서 가능하다는 것, 특히 인간이 종교적 소속성 때문에 차별받고 억압받는 현실에서 그들 편에 서는 것이야말로 급진적 제자직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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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일 l 교수는 한신대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뷔르템베르크 주교회 선교사와 함부르크 선교 아카데미 연구실장, 한국신학연구소장,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한신대에서 선교학과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양심의 역사, 역사의 양심』, 『21세기의 도전과 선교』,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등의 저서와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실패한 관계의 역사』 등 10여권의 번역서가 있다.

1) 하워드 진, 『오만한 제국: 미국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독립』, 이아정 역, 당대 2001, 152-153.
2) 로즈메리 류터, 『신앙과 형제살인: 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 장춘식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1, 19.
3)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고 있는 선교』, 김병길, 장훈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95.
4)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고 있는 선교』, 104.
5)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이승식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8, 144-145.
6) Manfred Jacob, Das Christentum in der antiken Welt, Vandenhoeck & Ruprecht, Goettingen 1987, 184.
7) 로즈메리 류터, 같은 책, 259.
8) 데이비드 보쉬, 같은 책, 98.
9) Eberhard Bethge u.a(Hg.), Dietrich Bonhoeffer Werke, 12, Berlin 1932-1933, Guetersloh 1997, 408.
10) Eberhard Bethge u.a(Hg.), Dietrich Bonhoeffer Werke, 12, Berlin 1932-1933, Guetersloh 1997, 409.
11) Eberhard Bethge, 같은 책, 410.
12) Eberhard Bethge, 같은 책, 411.
13) Eberhard Bethge, 같은 책, 414.
14) Der Vormarsch 3(1933), Heft 6(Juni), 171-176에 게재. 초고는 1933년 4월 15일에 완성되었다.
15) Eberhard Bethge, 같은 책, 350-351.
16) Eberhard Bethge, 같은 책, 353.
17) Eberhard Bethge, 같은 책, 354.
18) Eberhard Bethge, 같은 책, 358.
19) 호르스트 게오르그 펠만, 급진적 제자직: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신학사상>, 1995년 겨울, 22.
20) 전후 대부분의 독일 신학자들의 신학적, 실존적 질문이었다. 특히 도로테 죌레와 요한 밥티스트 멧츠의 신학은 세계 고난 안에서 하나님을 질문하는 것을 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위르겐 몰트만(편),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이신건 역, 한들 1998 참조.

글쓴이 / 채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