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누구를 위한 율려 운동인가?(조흡)

by 마리산인1324 2007. 1. 26.

 

 

누구를 위한 율려 운동인가?

 

조 흡(문화연구가)

 

율려라는 말 잔치


시인 김지하가 ‘율려’라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 ‘거대 담론’에 대한 계획만 무성할 뿐, 그 구체적인 내용이 스케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론의 문화면은 연일 김지하의 단군 할아버지 말 잔치로 풍성하다. 김지하라는 이름 값이 그만큼 비싸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언론이 한 시인의 문화 프로젝트에 대해 1년여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제 한국도 서구의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문화입국을 이룩했기 때문이리라. 문화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인식됐기 때문에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문화를 통해 한국과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와 우주를 풀어 보려는 김지하의 율려론은 그의 추종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시대를 앞서 가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외쳐만 놓고 두 손 들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문화정책보다는 훨씬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문화의 문제를 김지하에게 위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대중 정부는 문화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돈이 확보되지 않아서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당장 별로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기분좋은 지적 통찰을 시험하고 있는 율려론은 커다란 장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모든 한국인들이 경청할 만한 짜릿한 매력이 숨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김지하의 산문과 스피치에서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의 10분의 1만큼도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나는 그가 산문보다는 시를 훨씬 잘 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그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참고해야 한다 (마지막 세 문장은 원래 내 표현 스타일이 아니다. 내가 오랫동안 시인의 스피치를 읽다가 그의 표현이 저절로 입에 배어 나온 말임을 고백한다). 그 이유는 시와 산문의 각기 다른 장르에서 오는 글의 스타일이나 형식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그가 주장하는 얘기들이, 그 내용 자체가, 어느 평론가가 지적한대로, 너무 현실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름과자 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다리의 힘이 저절로 빠지고 머리가 갑자기 몽롱해 진다.


나는 그동안 율려론에 대한 나의 이해 부족을 수양이 덜 된 내 탓으로 돌려 내가 너무 속세적이었다고 반성하고 다시 읽어봤지만, 그의 글은 여전히 버스 꽁무니에서 뿜어대는 까만 매연처럼 어지럽기만 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탓 하는 일을 포기했다. 대신, 나의 이해 불능이 시인의 산문 자체에 내포된 몇 가지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살펴 보기로 결심했다. 또 내친 김에 이 작업을 아예 장기 프로젝트화 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이 글은 그 지속적인 작업의 서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올해 안으로 그의 얘기를 보다 학술적이고 건설적인 비판을 곁들인 본격적인 논문으로 발전시켜 발표할 생각이며, 내년 상반기까지 영어로 된 논문을 완성해 외국의 저널에 출판할 계획이다(시인의 말투를 또다시 흉내낸 것 같아 송구스럽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의 방대하고 심오한 이론을 모두 ‘해독’할 수는 없고 자연히 선택적인 주제에 한정된 토의가 이뤄질 것이다.

 

과장이 지나치면 말발이 서지 않는다

 

김지하의 산문에는 두 가지 커다란 특징이 있다. 우선 김지하는 과장법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그의 산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어법이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그가 논지를 펴나갈 때 단언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어법을 시(詩)에서 사용한다면 저자가 의도한 강세의 효과를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산문에서 극적인 표현과 과장된 주장을 남용하다 보면 독자들을 쉽게 피곤하게 만들게 되고, 결국, 그들의 글에 대한 거부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당연히 그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김지하의 산문은 독자들의 인내를 강요하는, 읽기에 벅찬 과장과 극단적 표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아이러니다. 그가 평소에 세상은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복잡계’의 원리를 이용해 복잡하게 설명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속사정을 감안해 보면 말이다.


‘원시반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김지하의 목소리가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는 ‘이제 우리도 우리의 담론을 말하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서구의 고조된 동양에 대한 관심을 예로 들고 있다. 서양이 그들 자신의 뿌리인 그리스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까지 그들 문제의 해법을 찾고 있는 실정인데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서양사상을 ‘카피’해와 적당히 사용하다 그 효용이 떨어지면 폐기처분하는 현실을 그는 질타한다. 계속해서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서양학자들이 ‘동양의 유불선과 같은 대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풍수, 사주 명리학까지 능통하다’는 사실을 증거삼아 ‘이제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담론식민지로 떨어졌는지도 모른다’고 통탄해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의 주장과 많이 다르다. 그가 이렇게 한마디로 명쾌하게 단언해 정리한 것 보다는 훨씬 ‘복잡’한 속사정이 있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이런 주장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 또한 한국 지식인들의 서양사상 ‘카피’행위를 문제삼고 한국 실정에 걸맞은 이론 개발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래야 할 이유 중 하나가 서양이 동양을 공부하고 있고 맑스, 푸코, 니체, 한나 아렌트 등과 같은 서양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벽에 부딪혔을 때 고대로 돌아가는 전통이 있으니 ‘우리’도 ‘우리’의 정신적 근원인 고조선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발언, 즉 이제는 고전만이 그들과 ‘우리’의 희망이요, 진리며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그의 훌륭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과장과 환언적 논리로 엮어진 무리한 어거지로 들릴 뿐이다.


서양학자들이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많은 경우, 김지하가 주장하는 대로 거기서 어떤 영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학자 자신들이 판단한 당대의 문제를 비교하기 위한 하나의 허수아비 관점(straw point)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반드시 그리스일 필요가 없이, 중국이든, 인도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이 철학자들이 경험한 당대의 현상과 비교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이론의 허구적 실체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주목하고 있듯이 서양문화의 원조라는 그리스 문화도 어쩌면 인도, 중국, 이집트문화를 범벅해 놓은 문화사(文化史)상 최초의 잡종문화라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는 이즈음, ‘문화의 뿌리’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을 간과한 채 원시반본의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가히 환언적 표현의 극치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가 ‘우리 문화’라고 말했을 때 정확하게 무엇이 ‘우리’ 것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물론 서양 나라에게도 똑같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분명 문화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함이 내재해 있다는 말이다. 문화를 단언하면 더 이상 문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구의 동양에 관한 관심조차도 김지하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서유럽과 미국에서 반짝하고 유행했던 흐름에 불과한 일인데, 여기서도 그는 너무 과장된 ‘해독’을 하고 있다. 물론 예외적으로 서양 철학자들이 동양사상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아 이론을 도출하는 경우도 드물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 서구, 특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양학에 관한 일종의 ‘붐’은 그들이 심오한 동양사상을 배워 서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전범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눈 먼 연구비가 가장 많이 책정돼 있는 분야가 동양학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밥그릇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필요에서 기인한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붐’마저도 아시아 경제위기가 몰아 닥쳐 동양학을 주로 지원하던 일본기업들이 대폭 예산을 삭감하자 그 거품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김지하가 주장하는 동양학은 허수아비다.

 

이 두 가지 어법, 즉 과장과 환언적 주장은 김지하가 서구 이론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그와 유사하거나 나은 개념이 한국과 동양의 전통이론에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할 때 더욱 심하게 이용된다. 예를 들어, 주어진 현상의 이중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주역과 정역, 황종과 협종, 원효의 환상과 현실, 율과 여 등의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항상 동양이론에서도 현대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가 널려 있다는 주장이다. 일리 있다. 설득력이 있는 얘기들이다. 틀렸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이런 개념들을 이용해 어렵게 도출한 결론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한 얘기라는 점이 문제다.


다시 말해, 김지하가 장황하고 복잡하게 내린 결론은 현재 서구나 제3세계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이론적 개념들을 빼닮은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의 주장이 더 이상 토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율려론의 한계인 셈이다. ‘역(易) 의 최종적 도달점은 우주의 질서를 인간이 바꿀 수 있다’는 말이나 ‘신체중심이면서 두뇌중심의 문화’를 추구하는 것이나, ‘구체적 생활성’(작은 정치)과 ‘큰 전체성’(큰 정치)의 연대, ‘세 기둥의 민족문화운동’ 등 그의 토종이론에서 도출해 정리한 개념들은 이미 맑스(또는 신맑스 이론), 부르디외, 들뢰즈, 길로이, 그리고 최근의 문화연구의 이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의 주장이 별로 새롭지 않다는 말이다. 더 이상 동양적이거나 한국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김지하는 물론 그가 제시한 율려론이 이들 서양이론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다르고 뛰어넘었는지 모호할 경우가 많다. 오히려 다르다기 보다는 그의 글 마무리는 항상 지극히 서양적이기까지 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도 그의 이론의 결말에서는 달밤에 모닥불 피워놓고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평화롭게 또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 고조선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대가 유토피아였다는 이 말 자체가 신화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더럽고 치사하게 속고 속이면서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로 돌아와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 세계자본체제에 편입된 한국의 현실을 고전이론만으로 설명하기 벅찰 때는 그도 서슴없이 서양이론과 타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하는 여전히 ‘원시반본’의 원리를 고집한다. 그가 벌이는 문화운동은 여전히 ‘부패’한 현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문화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와 ‘의식개혁’을 추구하며,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극히 환상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이렇게 문화에서 출발한 개혁운동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질서를 근본 치유하고 변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최종 지론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신인간’이라는 주체가 이 위기와 전환의 시대에 필요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내 생각에 그 ‘신’인간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원리주의자,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사, 그리고 산디니스트와 다른 점은 단 한 가지이다. 신인간은 이런 싸움질만 해대는 하수인이 아니라 ‘우주적 주체’인 것이다.


여기서 아주 자연스럽게 한 가지 커다란 의문이 제기된다. 김지하의 율려론에서는 결국 가장 서구적인 개념들을 정리하기 위해 한국학과 동양학이 들러리를 선 꼴이 아니냐는 의혹을 떨칠 길이 없다. 굳이 없어도 별 탈 없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 허수아비 관점이 아니냐는 말이다. 실제로 김지하의 논리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서구사상의 이해 하에서만 동양적 개념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다시 말해, 그가 아주 어렵게 에둘러 온갖 동양이론에서 도출한 동양적 개념들이 그 자체가 독립된 것으로 결론까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서구이론의 개념 이해를 바탕으로 애시당초 발굴되고 이용되고 있는 헛수고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신봉하는 토종이론이 저자의 ‘쇼’적 효용 이외에 어떤 이론적 기능을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심은 김지하가 그토록 심오하고 방대한 동양학의 개념들을 늘어놓기만 하고 정리하지 못하는 대목을 보면 더욱더 떨치기가 힘들다. 따라서, 한국의 토속적 문화 ‘혼’을 강조하는 김지하야 말로 가장 철저하게 최신의 서구이론으로 무장한 한국 지식인이며, 그의 이론은 서양이론을 철저하게 ‘카피’해 완성한 모자이크의 전형이라는 파라독스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의,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을 위한 율려운동

 

지금까지 지적한 흠은 다분히 사소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말을 하다 보면 말에 강세를 주어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전통가치를 창조적으로 재발견하자는 말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 속에는 말과 말이 충돌하는 모순이 담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주체가 시인일 경우는 더더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범인들이 도가 통한 시인의 모순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넘어간다 해도, 김지하의 율려론은 여전히 결정적인 결점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도대체 율려가 누구를 위한 운동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 이는 잘못된 질문이다. 율려는 소수 엘리트를 위한 이론이요, 문화운동이라고 김지하는 선언하고 있으니까. 그는 율려운동이 ‘아방가르드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고 ‘소수의 고급예술로 깊은 미학적 담론 생산 체계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율려론의 이와 같은 입장이 이론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김지하가 제시하는 문화운동은, 지난 경험에 비춰보면, 실패할 가능성이 성공할 가능성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아니, 실패하게 돼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문화운동관이라는 점과 궁극적으로는 비민주적이며 권위주의적 사고의 발로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런 조짐이 이미 보이고 있다. 율려운동을 문화엘리트 중심으로 펴 나가다 보니 거대담론만 무성할 뿐,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전파하고 실천에 접목할지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고 있지 않다. 율려운동을 수용할 평범한 사람들의 문제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문화행사만을 계획하면서 막연히 위에서 아래로 물 흘러가듯 저절로 이 운동이 수용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있는 율려운동가들의 모습에서 아마추어의 치기마저 느껴진다. 도대체 ‘신시’ 드라마가, 단군이 주인공이 된 컴퓨터 게임이 한낱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를 바꾸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이론정립의 미완성), 어떻게 수용자들이 ‘아방가르드적으로 진행’된 ‘소수의 고급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한단 말인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난해하고 재미없는 얘기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말로 궁금하다(문화정치에 관한 몰이해). 만약 수용자들이 율려 문화운동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심오한 사상들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지같은 문화 엘리트들 말고는 말이다.


김지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거대 담론증’이라는 중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김지하의 이런 권위적 태도를 경계한다. 자신이 추상적으로 정리한 생각은 항상 옳고 그 옳은 생각을 우매한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그런 비민주적 문화관을 거부한다. 문화적으로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의 현실적 환경을 무시한 채, 내 잣대로 판단한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여,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위한답시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계몽적 이론은 사절한다. 이론적으로는 가장 많이 ‘민중’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최종 수혜자는 문화 엘리트만인 토종 문화정치를 배척한다. 김지하는 ‘신시’문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던가? 율려문화운동은 ‘우주’를 말하고 있지만, 그 우주의 주인공인 구성원의 개념이 빠져 있는 절름발이 이론이다.


실제로 한국역사에서 지식인들의 이런 권위적 태도는 그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운동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에서 시작해서 해방 직후 남북의 통일 문제,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의 민주화 운동에서 보여줬던 교훈 중 가장 값진 것은 앞서가는 사람들의 지혜가 결국은 우매한 ‘민중’의 생각만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일 게다. 이것이 한국의 경우에서만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다. ‘정신혁명’을 강조한 수많은 문화운동들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어느 것도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율려운동이 이런 실패한 다른 나라의 문화운동과 사뭇 다르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아직까지 나는 그것이, 예를 들어, 알라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정신혁명을 전개했던 호메이니 치하의 문화운동과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김지하를 수출하자

 

나는 김지하가 ‘우주’를 바꾸려는 생각이나 ‘5만 년 후’의 세상을 걱정하는 일을 포기하고, 오늘 당장 헐벗고 굶주린 실존 인간들을 위한 이론으로 율려운동을 펴나가기를 바란다. 공허한 우주론이나 기(氣) 이론으로 혹세무민(?)하면서 소수의 문화 엘리트들에게나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중요한 얘기를 모두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으로 율려운동이 한국인의 자존심을 살리고 한국문화의 유산을 이용해 세계적 상품을 개발해 돈도 벌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는, 또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외국 상품의 수입을 견제하는 부가 급부도 얻는, 그런 소박한 유행문화적 대중운동으로 율려를 개발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이를 위해 어느 정도 전통문화의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하겠지만 이제까지 그의 레토릭은 너무 지나쳐 수용하기에 거부감이 앞선 것이 사실이다.


이런 판단은 율려문화 운동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이 ‘명성황후’나 ‘난타’, 그리고 ‘아름다운 시절’이 해외 공연에서 성공한 만큼의 의미를 초월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설령, 율려의 심오한 사상을 담은 ‘쇼’를 2002년 월드컵 축구 개막식 공연으로 발전시켜 전 세계의 인구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들이 이 쇼의 극적 효과에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과연 그 공연에 담겨진 ‘심오한’ 동양철학의 이치를 깨우치겠느냐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에 대중 문화운동으로의 전환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쇼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우주 질서’를 바꾸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김지하는 이제 그의 현학적 말장난을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다. 과장을 조금 다스릴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조선이라는 먼 역사에서 영감을 찾을 것이 아니라, 11년 전의 실제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거행된 매스 게임에서 보여준 상징적 제스처들이 김지하의 율려이론보다 덜 심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천재’적 착각이다. 그것도 나름대로 거창했다. 그러나 기억해 보라. 도대체 어느 누가 그 올림픽 개막식 때 보여줬던 천·지·인이 하나가 되고 동서양이 하나로 화합하는 유토피아적인 시나리오들을 아직까지 기억할지를. 그런 거창한 문화행사를 한국에서 한국 중심으로 치렀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생각해 보란 말이다. 감상적 국가주의를 빼놓고 과연 무엇이 생산됐는지를 돌이켜 보란 말이다. 기획자의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문화를 통해 정신을 개조하고, 또 더 나아가 우주의 질서를 바꾸겠다는 김지하의 발상은 추종자들의 협조가 있어도 어려운 얘기다. 그러나 그는 그 추종자들을 모으려는 노력조차 게을리 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거룩하고, 신비로우며, 환상적으로 들리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이론을 읽으면 허탈한 심정을 떨칠 길이 없다. 따라서 그는 어쩌면 영원히 이 땅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실망할 일이 못된다.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현인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하늘이 내려줬는데, 하물며 ‘5만년’을 내다보는 혜안을 지닌 김지하에게 그런 시련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 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예수와 석가도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는 배척받았다지 않는가? 김지하의 교리가 한국에서 유행한다면, 이는, 역설적으로, 그를 제대로 대접하는 게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은 김지하의 무대가 되기에는 너무 좁다.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는 그의 큰 그릇을 소인배들만이 득실대는 이 땅에서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모두 먹고살기에 허덕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게다. 해서, 그는 아주 심각하게 미국으로 건너가 이 작업을 계속하는 계획을 세워봄직 하다. 먹고사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얘기에 잘 빠져드는 미국인들이기에 김지하는 분명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보다 더 많은 추종자들을 거기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주를 논하는 사람이 고향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미국을 고향삼아 지구를 구하고 인류의 공존을 염려하면서 존경도 받고 막대한 수입까지 올린다면 이거야 말로 그가 주장하는 율려이론을 몸소 실천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김지하를 한국에만 가둬 둔다면, 이는  국가적으로 너무 큰 자원낭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