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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김지하의 율려운동에 대한 역사학적 비판(박광용)

by 마리산인1324 2007.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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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연세대학원신문ꡕ92, 1999년 10월 7일자.

 

김지하의 율려운동에 대한 역사학적 비판

                          -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국사학전공 교수   박광용(朴光用)-




  1.
최근 김지하 시인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고대로부터의 빛, 마고(麻故城-律呂-新市-檀君)를 찾는다는 ‘상고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표방하여 단군 논쟁에까지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행동을 증산교 등 단군숭배 교단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기도 한 ‘율려(홍익인간론, 삼수분화론, 후천개벽론…)’사상으로 제시하고, 이로써 민족정신을 통합․세계화한다는 이른바 ‘비젼 21세기 운동’, 신사상․신문화운동을 선언했다.


그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는 1만 4천년 전 중앙아시아의 낙원 ‘마고(麻姑)’에서 시작하여, 중국인과 ‘탁록’ 전쟁을 벌인 동이족 지도자 ‘치우’, 단군조선의 ‘신시(神市)’까지 면면히 이어진 인간 내면의 순환질서인 ‘율려’사상, 근원적이고도 오랜 ‘집단적 서원’인 동아시아적 문화, 신화적 문화를 오래 잃어버린 채 살아 왔다. 이를 되살려, 세계화․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에 진정한 동아시아 유산으로 재포장, 세계 유산으로 만드는 시민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말인즉 진정 크게 들린다. 하지만 그 실체를 숨겼기 때문에, 필자는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비젼 21세기’로 포장했지만, 김지하 시인과 그 주변의 현재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체는 바로 ‘초고대사 복원 운동’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플라톤이 1만년전에 ‘아틀란티스 대륙’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서양에 가라앉아 버려서 잃어버린 문명이 되었는데, 아테네의 근본과 통하는 집단적 서원의 문화라고 언급한 이래, 이 신화 같은 기록을 그대로 믿는 일부 서구인들은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문명을 되살리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해 왔다. 그 뜻과 열정은 좋지만, 사료가 신화적인 편린이어서, 현재의 과학적 합리성으로도 엄밀한 ‘실증’이 불가능하다. 곧 어떤 역사가도 감히 서양 상고사로 수록하지 못했다. 이런 초고대사 복원운동은 인도양 남쪽 ‘레무리아’ 문명, 태평양 동쪽 ‘무' 문명 등이 있다. 그런데 이제 동아시아 ’희망의 파랑새‘인 중앙아시아의 ’마고(율려)‘ 문명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지하 시인과 그 주변의 현재 모습이다. 비록 ‘지금은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앞으로는 분명하게 보일 것’이라는 ‘사랑’의 메시지를 덧붙여 호도하고 있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지하 시인은 선수를 쳐서 한국 역사학계를 음침한 이병도 아류의 ‘식민사학’ 내지 ‘실증사학’ 신봉자라고 몰아세우고 나섰다. 역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돌출 행동은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예단적 조치이자 예방적 술수일 뿐이다. 무례한 행동일지언정 결코 학문적 입장이 아니다. 그래도 일반인에게는 선량한 민주화투사였으므로, 역사학계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다.

  2.
오늘날 우리 현대인은 실험과학적 성과에 힘입어 삶을 영위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세계까지 열렸다 해도, 넓게 보면 아직 실험과학적 세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이와 대비되는 전근대인의 경우, 직관이나 통합 능력, 인간적 합리성 수준이 아무리 높다 해도, 결국 경험과학적 수준의 성과로써 삶을 영위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인에게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체험상 가장 잘맞는 역사학일 것이다.


오늘날 역사과학은, “역사는 사건을 말하는 동시에 사건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는 Hegel의 말로 설명하기 좋아한다.


‘사건’은 분명하게 재발견해 낸 과거 사실 그 자체이다. 곧 역사학은 우선 과거 사실을 재발견해내는 기술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실증’이다. 이 기초는 문자 사료의 ‘연원’에 대한 분석 능력, ‘내용’ 자체에 대한 고등문헌비판 능력이다.


‘사건을 쓰는 것’은 재발견된 사실을 현대인에 맞게 재설명해내는 것이다. 곧 역사학은 과거 사실을 재설명하는 기술이다. 현대인은 실험과학적 성과로써 삶을 풍요롭게 해가므로, 역사가는 재발견된 사실을 경험과학적이 아닌 실험과학적으로 재설명하려 노력한다. 이것이 과학적 ’법칙’이다. 그 기초는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인과적 서술이다. 이에서 출발하여 Marx 학파의 구성체적․유물론적 서술, Annal 학파의 구조적․사회사적 서술, 역사주의 학파의 실증적․발전단계적 서술 같은 학풍들이 나타났다.


오늘날, ‘실증’과 ‘법칙’이라는 역사과학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사료 그 자체로의 역사이자 거대담론(근대성, 전체사)으로서의 역사라기보다, 사료에서 얻는 ‘감’에서 얻는 구성적 역사이자 예단된 근대성․전체사로서의 지배적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지적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앞으로 ‘신문화사’ 같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성공한다 해도, 실험과학적 성과에 의지하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실험과학적 역사학 범주에 머물 것이다. 인간이 중심에 서는 역사, 창조적 욕구에 바탕한 반체계주의 역사라 해도 마찬가지다.

  3.
우리 역사학에서 식민사학의 극복은 1908년 신채호의 ꡔ독사신론(讀史新論)ꡕ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우리 선배 역사가들은 식민주의-제국주의 사학으로부터 ‘실증’ ‘법칙’ 같은 과학적 방법론을 배워 왔다. 그러나 그대로 우리 역사에 적용할 수 없었다. 당시 제국주의적 역사에 의하면, 한국인․한국사회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쓰레기’ 역사의 산물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음에 설명하려는 식민주의 역사학이다.


‘한국사는 없어도 좋다’는 역사가 타율성론(他律性)과 정체성론(停滯性)이다. 한국사는 남의 문화적 충격에 의해서만 변화할 수 있었다든지, 한국사는 원시사회 또는 고대사회에서 정체되었다는 주장이다. 제국주의 역사체험만이 세계를 근대자본제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근대화 담론이다. 여기에서 개발독재 예찬론이 나왔다. 식민지-미군정-유신으로 이어진 군사 통치는 이 언어적 상징에 의해서 합리화되었다.
‘한국사는 있어도 좋다’는 역사가 일선동조론(日鮮同祖)이다. 한국은 본디 일본과 한 핏줄, 한 문화로 연결된 집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분가했던 집안이 본가(本家)로 돌아오듯 일본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인 고유(國粹)의 종교적ㆍ사상적 힘으로 서구문화 침략에 대항하자는 국수주의자, 대동아공영론자의 담론이다. 이에 속은 한국인들이 남긴 저술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 최남선의 ꡔ불함문화론ꡕ이다. 1920년대 이후 연구된 ‘퉁구스어 문화권’ 등등의 언어학적 성과를 ‘ 사상’ 등으로 재해석한 수준이다.


그러나 신채호를 위시한 일제시대 우리 역사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제국주의 본국에서 역사과학 방법론을 배워왔지만, 한국사를 ‘쓰레기’ 역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실험과학적 삶의 수준에서도 쓰레기가 아니라는 내용을 ‘실증’하려고 동분서주했다.


우리 고유 정신을 되찾으려는 민족사학, 서구 사회과학 성과를 고유한 사유체계에 접목시키려는 문화사학, 전체사 입장에서 합법칙적 발전성을 찾아내려는 사회경제사학, 이 모두에 대한 종합과학을 내세운 신민족주의사학이 그것이다.


비록 해방공간 동안의 백화제방에도 불구하고, 6ㆍ25사변 이후 강화된 이데올로기 때문에 ‘문헌고증’ 만을 본질로 아는 역사학이 한 시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결코 지금 한국 역사학의 주류는 아니었다. 1960년 4ㆍ19혁명이후 역사학자들은 식민주의 사학의 잔재를 없애고, 전통 근대역사학의 장점을 한 단계 높이며, 서구의 신역사이론을 수용하기 위해서 정진했다. 비록 일부는 변절했지만, 대다수는 개발독재에 저항하면서 사회 민주화를 위한 역사학을 정립함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우리 역사를 말할 자격을 얻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40년이 지나 21세기를 앞두고 있다.

  4.
위와 같은 노력의 대가로 돌아온 소리가 ‘음침한’ 식민사학자들이라 한다면, 과연 옳을까?
필자는 김지하 시인이 식민사학이나 대동아시아주의 경향이 아직도 강고하게 남아있는 일본 지성계에 대고 식민사학 청산론을 말하지 않고, 거꾸로 식민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온 한국 역사학자에게 하는 이유에 특히 주목한다. 그럼에도 “(한․일) 두 나라가 연대해서 전 세계를 향해 동아시아로부터 새로운 문화적 메시지를 발신하…자는 적극적인 제안을 하려는 것“(ꡔ한겨레신문ꡕ99.1.3)이라는 말에 특히 주목한다.


이런 행동 방식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어쩌면 최남선 류의 일제투항적 지식인들의 사상적 근거였던 불함문화론, 그 영향으로 나타난 수많은 단군 관계 위서의 흐름 속에 김지하 시인이 자기 위치를 비정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걱정거리다. "만약 단군시대 역사를 우리의 역사공동체 의식인 민족의식을 넘어서서 일본 역사공동체도 포괄할 수 있는 세계주의 내지 보편주의적 요소를 지닌 ‘대단군(大檀君)’으로 파악한다면, 그 현재적 의미가 일본과 우리는 민족적 경쟁 상대가 아닌 공동운명체라는 주장이라면, 이는 곧 현대판 대동아공영론이다." 필자가 1992년 ꡔ역사비평ꡕ에 썼던 글이다.


김지하 시인은 이른바 「관념이 아니라 파시즘적 현실 속으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식민지 시대이래 개발독재 Image와 투쟁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현실이 아니라 율려 관념 속으로」라고 기치를 바꾸어 내걸었다. 정말 투쟁할 파시즘적 Image가 현실에서 몽땅 없어져 버려서 그랬을까? 30년전 김지하 시인을 서정주 류의 ‘순수’ 시인과 달리 선배로 받아들였던 필자는 정말로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과거 상고사 속에 옛 김지하 선배의 생명적 시원, 그 원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른바 ‘언어적 전환’만 하면 절로 포스트모던 체질로 바뀌고, 일본 제국주의적 문화까지 넘어서는 21세기 문화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